#102
태우는 진정으로 호흡 곤란이 찾아온 것인지 밭은 숨을 불규칙적으로 내쉬었다. 있는 힘껏 발버둥 치며 이현을 향해 주먹질을 해댔으나 조준이 좋지 못했다. 붉은 반점이 열병처럼 태우의 얼굴에 가득 올라와 있었다. 절박하면서도 고통에 찬 시선이 이현을 향했다.
고작 그 몇 걸음 달린 걸로 이래? 이따위로 어떻게 지금까지 이 바닥에 남아 있었어?
태우의 상태는 일전에 연습실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했다. 아니, 그때보다 심했다. 핏기가 증발한 아랫입술이 덜덜 떨렸고, 흉할 정도로 목에 핏대가 서 있었다.
이현의 두 눈에는 역한 멸시가 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팍을 내리누르는 손에 힘을 약간 풀었다. 태우가 컥컥거리며 기침하자 침이 튀었다. 이현은 낮은 욕지거리와 함께 얼굴을 구겼다.
태우는 여전히 부릅뜬 눈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이현은 태우의 턱을 치켜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태우의 입가엔 거품 같은 침이 고였다. 이 약쟁이 새끼는 뭘 처먹은 거야? 태우를 차례차례 살피던 이현은 그의 볼록한 주머니를 발견했다. 주머니에서 빼지 않는 한쪽 손은 무언가를 꽉 쥐고 있는 듯했다.
“줘 봐요.”
진태우가 지닌 물건, 권지완의 방, 그리고 사격 선수들만 머무르는 15층에서 내리던 하세민. 이현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대로 태우의 손목을 잡아 들었다.
“줘 보라고.”
태우는 필사적으로 움켜쥐었으나 이현의 악력을 이길 수 없었다. 이현은 태우의 주머니에서 끝끝내 무언가를 빼앗아 들었고, 동시에 태우의 손톱이 이현의 손등을 길고 날카롭게 쓸었다. 그 선을 따라 순식간에 피가 방울방울 맺혔다. 빨간 방울들과 함께 이현의 머릿속에도 적색등이 점등되었다.
“전화해요. 하세민한테.”
“윽….”
“이 좆같은 새끼를 어떡하지.”
이현은 모자로 거슬리는 태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덜덜 떨어대는 태우의 손끝이 이현의 눈에 들어왔다. 팔은 수축된 채 손톱만 바들바들 계단에 부딪혔다. 굳어가는 몸은 역할만큼 부자연스러웠다.
그제야 이현은 태우의 핸드폰을 꺼내 들고 곧장 메디컬 팀에 연락을 취했다. 짜증이 만들어낸 얕은 한숨은 덤이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에 더한 짜증이 치밀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팀닥 선에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현은 눈앞에 시체를 둔 것 같은 메슥거림에 사로잡혔다.
일어나지 못한 태우를 뒤로한 채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송골송골한 피를 손바닥으로 훔쳐낸 뒤 태우의 번호부를 다시 뒤적였다. 달갑지 않은 번호는 예상대로 저장되어 있었다.
그대로 전화를 걸려던 이현은, 한층 누그러진 숨을 들이쉬고 핸드폰을 태우 위로 던졌다. 검지로 제 입술을 톡톡 건드리다, 방으로 향했다. 제 핸드폰이 필요하다. 연락을 걸 곳은 따로 있었다.
*
“이현 씨가 저를 먼저 찾으니까 기분이 색다르네요. 오해 때문이라는 건 안타까워도.”
벽에 틈 없이 붙어있는 사진들은 이번 화보 촬영의 시안인 듯했다. 간이로 설치된 야외 촬영 대기실, 그 안은 밝은 조명들로 눈이 부셨다. 메이크업 박스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고, 탈의실로 보이는 행거 앞에는 조심스럽게 포장된 옷들이 벽 한쪽을 채우고 있었다.
세민의 이미지와는 영 맞지 않는 것들이었다. 묘하게 경망스러운 하세민이 입기에, 준비된 슈트들은 고전적일 만큼 정석적이었으며, 무게감이 있었다.
호텔의 뒤쪽, 서바이벌장 옆에 마련된 촬영지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으나 산의 초입은 인위적인 조명들로 인해 지나치게 밝았다. 네- 컷, 네- 좋아요-! 네, 좀 더- 따위의 현장 소리가 드문드문 이곳, 세민의 대기실까지 뻗쳐 들었다.
촬영팀의 구령이 들릴 때마다 이현은 지완을 떠올렸다. 카메라 앞에서 그가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거 뭡니까?”
“이미 전화로 다 말했잖아요. 아닌 거까지 맞다고 해주길 원해요?”
서늘한 시선으로 돌아온 이현은 들고 온 물건을 툭 던졌다. 투박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는 알약 몇 개가 남아 있는 유리병과 주사약 병이 나뒹굴었다. 알약은 파랬고, 약물은 누르스름했다.
라벨지에 붙어있는 영문이 이현에겐 낯설었다. 의약품부터 도핑 약물까지, 일평생 질릴 만큼 봐왔는데도 이건 처음이다.
“어쩌다 일정이 겹쳐서 물건을 전달해 준 게 전부인데. 비즈니스로 뭐라 할 건 아니죠? 왜 진 선수가 권지완 방에서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
“퇴출 결정되고 빙글 돌아버린 거 아닐까요? 원래 약하는 사람이 그래요. 오락가락. 이게 일반 의약품이 아니니까….”
단도직입적인 이현의 물음에, 세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터무니없는 시인에 이현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말을 마친 세민은 그런 이현을 빤히 뜯어보았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근데 언제부터 이현 씨가 이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아졌지…, 하고 테이블에 반쯤 걸터앉았다. 세민은 적갈색에 가까운 버건디 더블 스리피스를 갖춰 입고 있었는데, 그가 앉은 테이블의 색과 정확히 일치했다.
“퇴출 결정을 그쪽이 어떻게 압니까?”
꽁꽁 싸맸던 패딩의 지퍼를 조금 내리며, 이현이 차분하게 물었다. 어조에는 고조가 없었지만 투는 비아냥이었다.
그 의미를 모르지 않는 세민은,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리곤 다시 씩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물장사를 하면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이런저런 말들도 꽤 많이 주워들어요. 내가 진 선수를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 비즈니스를 또 어떻게 시작했겠고?”
세민은 즐거움과 지겨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역시 잠시였고, 이내 다시 눈꼬리를 접는다. 세민의 능청스러운 웃음에도 이현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다.
물장사? 혼잣말하듯 되묻는 이현에게 세민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몰랐어요? 정유진이 하는 프라이빗 바, 그거 이제 나랑 공동 운영이거든.”
초대권도 받았으면서, 그건 몰랐나 봐요? 세민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안쪽 주머니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내가 요새 꼭 가지고 다녀요. 괜히 기분이 좋거든. 일할 맛이 나. 맞춘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금빛의 명함 케이스와, 셔츠 소매에 달려 있는 커프스 링크가 함께 빛났다. 값은 꽤나 나가 보이는데 도리어 어딘가 천박했다. 정말 뻔하다 못해 고루하다. 이현은 조명을 받아 조금 더 붉은빛을 띠는 제 갈색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딸깍, 세민은 명함 한 장을 꺼내 들어 이현의 앞으로 내밀었다가, 이내 손을 거두었다. 대신 테이블 위에 명함을 올려두고 툭툭 제 이름을 가리켰다. 이현이 받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을 터였다.
“괜한 오해를 하고 있으니까 내가 솔직하게 말한 거예요. 게다가… 이현 씨가 이런 일을 떠들어댈 일은 없으니까. 그렇죠? 이현 씨는 본인이랑 관련 없는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잖아.”
“….”
“본인이랑 관련 있다고 관심을 갖는 것도 아니지만요. 하하. 근데 왜… 그런 이현 씨가 왜 이렇게 짜증이 잔뜩 났을까? 이건 후자도 아니고 전자 같은….”
“입 좀 다물어.”
…이런 걸 보면 변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에요. 이현 씨는 말 참 좆같이 해. 세민은 테이블 위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틀에 박힌 미소를 띠고 있으면서도, 읊조리는 말은 너저분하다. 손목에 둘린 시계가 테이블에 부딪혀 듣기 싫은 소음을 만들어냈다.
“어쨌든, 그 정도 약이야 알음알음 하니까. 너무 날 안 좋게 생각하지 말아줘요.”
“하세민 씨가 몸을 팔든 약을 팔든 관심 없어요.”
세민의 개좆같은 소리로 인해 이현에게 흡연 욕구가 밀려들었고, 목 근육이 결려왔다. 볼을 살짝 부여잡고 비트니 뚜둑거리는 근육 소리가 이현의 심경을 대신했다. 운동 판에 진짜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것인지. 지긋지긋한 세민의 노골적인 의도에 거북함이 들었지만 이현은 더한 말을 하지 않았다.
순간 세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잠시였으나, 세민은 굳은 입꼬리를 다시 들어 올렸다. 속내를 감추려는 듯 급하게 말을 돌렸다.
“근데 이현 씨, 진 선수가 정말 권지완한테 무슨 짓을 저지를 생각으로 그 방에 간 거라고 생각해요?”
“….”
“이걸로 약물 소지 논란을 일으키려 했으면 멍청한 거죠. 이건 WADA 목록에도 등록 안 된 변형에다가, 도방위가 떠도 방 수색 같은 건 안 하잖아요? 미치지 않고서야. 인권 침해가 얼마나 민감한 사안인데. 하하.”
직접 투약이라도 하려 했던 거면 그냥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거고. 진 선수도 그렇게까지 무리수는 안 둘 거예요. 세민은 비식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세민의 말에는 틀린 게 없다. 그러나 의심쩍은 정황을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권지완한테 이딴 게 문제 될 리 없잖아. 적어도 그쪽 바닥은 권지완을 꽁꽁 싸고돌고…. 그 정도는 지나가던 개새끼도 알 텐데.”
“여전히 관심이 많네요, 이쪽 바닥이든 권지완이든.”
“난 둘 다 싫어요. 근데 이제 내 비즈니스가 발 걸쳐 있으니까.”
이현은 다시 물건들을 살폈다. 분명 진태우가 나온 곳은 권지완의 방이었으나, 직후 진태우의 꼴은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일을 당한 사람 같았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현이 습관적으로 미간을 찌푸리자, 세민은 테이블을 다시 한번 툭툭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