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드실래요?”
세민은 클러치에서 음료수를 꺼내 이현에게 건넸다. 라벨지에는 느끼하게 웃고 있는 세민의 얼굴이 박혀 있었다. 자의식이 과하다. 이현은 시선을 거두었다. 냉랭한 이현의 음성이 세민의 손을 멋쩍게 했다.
“뭘 믿고 먹습니까.”
“하하. 현명하네요. 원래 이런 거에 좀 무신경한 타입 아니었나?”
“….”
“아, 맞다. 전지 때 도방위에서 불시점검 있죠? 선수들한테 민감한 시기겠네요.”
“….”
“그렇다고 내가 약을 탔다는 건 아니고요.”
세민은 팔을 뻗어 15층을 눌렀다. 필요 이상으로 이현에게 몸을 기울이는 세민에게서는 고급스러운 베티버 향이 물씬 풍겼다. 그러나 이현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아무리 고급스러워도 이현에게는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과한 향수 냄새에 불과했다. 한 걸음 내디뎌 간격을 더 벌렸다.
15층은 사격부 전용인데. 이현은 꺼림칙하게 세민을 돌아보았다. 세민은 뻔뻔하게 웃을 뿐이었다.
“근데… 이현 씨 이런 거 달고 다닐 타입도 아니지 않았어요?”
팔짱을 낀 채 일정한 박자로 툭툭 손가락을 튕겨가던 세민이, 퍽 난감한 투로 물었다. 이현은 패딩 모자를 뒤집어썼다. 간결한 무시였다.
그럼에도 세민은, 흐음, 하는 바람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리베이터가 16층을 지날 때쯤, 세민은 홀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눈썹은 잔뜩 찌푸린 채로, 입만 웃고 있었다.
“설마.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죠?”
“….”
“하하.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이현은 생각 없이 거울을 바라보았다가, 세민의 시선이 여전히 제게 꽂혀있음을 알아차렸다. 정확히 말하면, 이현의 뒷목. 이현은 덮어쓴 모자 위로 뒷목을 매만졌다. 동시에 15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맑은 알림음을 내었다.
“재밌긴 하네. 먼저 내릴게요. 심심하면 촬영 구경하러 와요. 내가 또 카메라 앞에서는 좀 하거든.”
의중을 알 수 없는 세민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이현은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모자를 벗었다. 패딩을 내려 잘 보이지 않는 뒷목을 확인했다.
“…하하.”
꿈이 아니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증이 이현의 뒷목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사실을 파악하자마자 이현의 기억이 번쩍였다. 기억을 가렸던 술의 연막이 단숨에 사라졌다.
꿈이 아니었다. 그리고….
귀를 붉히는 열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
탕.
‘난 후회해.’
‘네 뒤를 좇는 게 전부가 된 거 같아서.’
서서히 차오르는 파도보다 느닷없이 덮치는 파도가 친절하다. 적어도 괜한 발버둥으로 힘을 빼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러니저러니 죽는 건 마찬가지긴 한데.
지금 이현은 후자의 친절한 파도에 익몰된 상태였다. 발버둥은 투투탄을 박아 넣는 것으로 대신했다.
탕!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널 앞지르면 나한테 뭐가 남을까.’
‘아무것도 없겠지. 그게 최악이야, 이현아.’
‘그런데도 이 병신 같은 짓을 그만두지 못해.’
권지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자조적이다. 그 권지완, 내가 아는 그 권지완의 입에서? 정말 꿈이 아닐 리 없는데.
탕!
‘이현아. 난 네가 목적이야.’
‘넌 이해 못 하겠지. 나도 이해가 안 되니까.’
너만 아니었으면. 그건 이현의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이었다. 이현의 인생에 난데없이 끼어들어, 지긋지긋한 관계를 만들어 낸 지완을 향한 원망이었다.
같은 말을 지완도 품고 있었다. 좀 더 지독하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현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탕!
‘난 네 뒤만 보고 살아와서 아는 게 많지 않아.’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이현은 의도치 않게 지완보다 조금 더 죄질이 나쁜 가해자가 되어 버렸다. 적어도 이현은 자신의 트랙을 달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게 이현의 잘못은 아니다.
탕, 탕, 탕, 탕, 탕…!
과녁에 탄환을 수십 차례 박아 넣은 이현은 투투탄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무제한 시사를 멈추었다. 쉼 없는 무제한 시사, 격한 반동이 연속적으로 오른쪽 어깨를 강타했다. 저릿하게 아려오는 어깨를 개머리판으로 쳐댔다. 탁, 탁, 탁.
이현은 다급한 손놀림으로 탄창을 갈아 끼우며 숨을 골랐다.
타탁, 탄창을 갈아 끼우는 손이 계속 엇나간다. 끝끝내 탄창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례적인 헛손질에, 뒤에서 눈치를 살피던 감독이 이현을 불러 세웠다.
“채이현, 왜 이리 흥분했어? 사좌에서 내려와. 당장.”
“….”
“네가 촬영하냐? 네가 유도부야? 왜 네가 들떴어? 이게 술을 얼마나 마셔댔으면…. 별 이상 없다는 소견만 아니었어도, 이놈아, 넌….”
어쩌면 이건 명백한 이현의 승리였다. 불과 얼마 전의 이현이었다면 통쾌해하며 코웃음을 치지 않았을까. 아니면 지완의 어긋난 비틀림에 오싹해 했겠지. 그대로 주먹을 갈기고 도망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현은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지난 20년을 되짚었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게 전부였다.
“쯧, 미친놈. 좀 마시고 숨이나 돌려라.”
“….”
“그러니까 오늘 연습은 쉬라고 했잖냐. 뭘 이 시간까지 투투탄을 처박고 있어, 처박길! 점수는 또 오라지게 좋네….”
“….”
“저녁 먹고 의료팀에 다시 가 봐라. 너 몸 상태 괜찮아졌다고 해도, 이번 전지 동안 하루에 두 번씩 팀닥한테 체크 받아.”
“…감독님, 이거 안전합니까?”
“그게 감독한테 할 말이냐? 그렇게 의심이 많은 놈이었으면 어제 이재민이 준 약부터 먹질 말았어야지.”
이현은 하루 종일 이어지고 있는 감독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렸다. 저릿한 손목을 털어내며 이현은 목을 축였다.
10.9, 10.9, 10.9, 10.9, 10.9, 10.9….
이현의 사좌 위에 떠 있는 계기판에는 10.9점만이 가득했다. 일정한 박자로 점등하는 붉은 점수를 차분히 주시하며, 이현은 그대로 병을 비웠다.
“…목이 많이 말랐냐?”
“감독님, 저 자리 좀 비울게요. 다시 돌아와서 연습할 거니까 사좌 정리하지 마세요.”
“이 미친놈이?”
*
이현은 다시 호텔로 향했다. 습관처럼 두고 나온 핸드폰을 찾기 위해서였다. 길 양옆으로 치워진 눈더미들은 아직 더러워지지 않고 새하얗게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이현은 패딩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촬영 중이려나.”
이현을 실은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21층으로 향했다. 이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목구비의 굵은 선은 누가 봐도 남자의 것이다. 이현은 두 눈을 깜빡였다. 남자. 그래, 나도 남자고….
“하여간 병신.”
누구를 향한 말인지 알 수 없는 시시한 야유가 이현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말끔한 이현의 얼굴은 그 어떤 번민도 담고 있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이현은 무겁지 않은 발걸음을 옮겼다.
“….”
이현은 복도의 코너를 돌다 멈춰 섰다. 21층, 감독진과 촬영 관계자, 그리고 지완과 이현에게만 배정된 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얼핏 들려 이현은 길게 뻗은 복도를 살폈다. 조용한 복도에서 때마침 방을 나온 것인지, 낯선 인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비상계단을 향했다.
평범했다면 눈에 띄지도 않았을 텐데, 몸을 한껏 움츠린 채 주변을 과하게 경계하는 모습이 여간 수상한 게 아니었다. 거기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마저 온전치 못했다.
패딩과 모자로 몸을 가렸으나 체구를 보니 남자인 듯했다. 이현은 그 뒷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불필요한 의아함은 이현에게 오래 머물지 못했다. 이현은 관심을 거두었다.
그러나 2108호로 향하던 이현은, 남자가 비상계단 입구에 가까워질 때쯤에서야 그가 어느 방에서 나왔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남자가 주춤하던 문 앞은…,
“뭐야.”
이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제 방을 지나쳐 속도를 높였다.
뒤따라오는 기척을 감지한 것인지, 앞선 이는 이제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뛰듯이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흔들리는 발걸음은 위태로웠으나, 남자는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복도에 내달리는 발소리가 웅웅 울려댔다. 그러나 추격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남자는 제 발에 스스로 걸려 제대로 나아가지도 못했다.
“…!”
이렇게 쉽게 잡힐 거면 도망을 왜 쳤어? 이현의 손이 우왕좌왕 달려가던 남자의 어깨를 거세게 붙잡았다. 추격전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고작 몇 걸음이었으나, 이현 아래에 깔린 남자는 흥분 때문인지, 불안 때문인지 모를 지저분한 호흡을 뱉어댔다.
“하하. 아, 이거.”
이현은 남자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겨, 그대로 얼굴에 내리쳤다. 남자가 나온 호실은 2107호. 지완의 방이었고, 그 익숙하고 수상한 남자는 이현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씨발, 또 너냐?”
“후으…. 흐….”
“…선배님 지금 어디서 나오셨어요.”
“….”
“대답하세요.”
지겨움, 그 이상의 반감으로 이현의 얼굴은 흐려졌다. 급작스러운 현기증이 일어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했다. 그 어떤 순간보다 경직된 짜증이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