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51)

#100

“꿈이야. 내가 미쳤다고….”

놀랍게도 이현의 필름은 끊겨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는 건 정연이 술에 취해 쓰러지는 것까지고…. 그 이후의 기억들이 사라진 건 아니었으나 확실치 않았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 꿈인지, 아님 섞이거나 지워진 건지. 말도 안 되게 각색된 기억은 눈을 뜬 이현의 숨을 졸랐다.

술에 취한다고 해서 이현의 필름이 끊긴 적은 없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재민이 방에 있다가 권지완 방에…. 내 방 카드키…?”

이현은 꿈인지 기억인지 모를 그 애매하고 곤혹스럽고 경악스러운 경계에서, 서둘러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전화 12건.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

이현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부재중 전화는 온통 감독과 코치에게서 온 전화들이었고,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카톡은 호통으로 가득해 보였다. 이현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미리보기를 빠르게 아래로 내렸다. 대강 훑어도 끝이 없다.

- 총감독님

{야 이놈아 몸상태 숨기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오전 7:22

{어쩌자고 그래? 감기약 하나도 이 시기엔 조심해야 하는 거 모르냐? 이재민이한테 맞게 처방된걸 네가 왜 먹어? 왜 먹길? 그러다 문제 생기면 네가 책임질래?} 오전 7:24

{전지 때마다 도방위에서 불시점검 나오는 거 몰라? 이게 머리에 피 좀 말랐다고 이제 그런건 신경 안쓰지? 그 상태로 술? 너 정신 안 차릴래?} 오전 7:25

{메디컬 잡아놨으니까 일어나면 쓸데없는 짓 말고 바로 팀닥한테 연락해라 이 썩을 놈아} 오전 8:29

- 이재민

{형 많이 아파요? 훈련 못 나와요?}

{아픈거 제가 감독님께 말씀드릴게요ㅠㅠ}

{미안해요ㅜㅜ 형 푹 쉬세요}

{이모티콘}

{일어나면 전화줘요!} 오전 7:09

{글고 형! 메리메리 화이트 크리스마스!} 오전 7:10

{글고 형!!!!!!!!! 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요 알았다니까요}

{ㅋㅋㅋㅋㅋㅋ미운정이 가장 지독하다잖아요} 오전 7:12

{이모티콘}

{형이랑 선배가 원래 제일 가까운…} 오전 7:15

- 김정연

{채이현 너 진짜 골병 났냐????} 오전 7:12

{넌 거의 안마셨잖아 나 가고 더 마심?} 오전 7:15

{근데 씨바 나 대가리 깨질 거 같은데}

{어제 나 뭐 실수 한 거 있어? 왤케 기분이 쎄하지} 오전 7:16

{아... 술 좀 깨니까 다 생각나네 ㅆㅂ 나 술 끊게 걍} 오전 9:10

{이현아 근데 왜 익숙한 밴이 보이냐? 내 착각이지?} 오전 9:38

이현은 다른 카톡을 모두 제쳐놓고 재민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미리보기로 대강 살핀 카톡 이후로도 대화창엔 말 많은 재민의 넘치는 걱정과 궁금치 않은 훈련 내용들로 가득했다. 이현은 빠르게 손가락을 놀렸다.

{재민아 내가 어제 분명 방키를 네 방에}

아니, 이게 아니라.

{재민아 어제 정연이 가고 나 언제 갔}

이것도 아니고.

{재민아 권지완이 나 업고 갔냐?}

삐리리-

이현의 손이 제대로 된 질문을 끝마치기도 전에 철컥, 이현의 방문이 열렸다. 하얀 침구에 여전히 혼란으로 파묻힌 이현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치 자신의 방인 양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꽤 푹 잤나 봐.”

“….”

“안색이 좋아 보이네.”

지완이 들고 있는 옷, 그 파자마 속 괴상한 고양이가 이현을 놀리듯 히죽거렸다.

07. START : 사격 개시

Editor K SCANDAL #7

▶ 만인의 디데이, 올림픽? 우리들의 디데이, A군과 'B'사의 콜라보! 선공개한 B컷들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스리피스의 A군이 무려 총을 든 게 아닌가. 그것도 홀스터를 두른 채로! ‘B’사의 혜안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이슈는 이뿐만이 아니다. 드디어 공개된 A군의 파트너! 현대판 ‘왕의 간택’을 불방케 했던 이번 이벤트에서, A군의 선택을 받은 건 B군도, E양도 아닌 배우 F군…?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F군, 인맥 한번 대단하다. 줄이라도 잘 선 것일까? 가십계의 이목이 단숨에 F군에게 쏠리고 있는 와중에, F군이 E양의 사업에 끼어들었다는 소문까지 스멀스멀 일고 있다. 파면 팔수록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4인의 스타들. 이보다 더 매력적인 토픽이 또 있을까? 조만간 큰 한 방을 몰고 오기를. 부디, 뭐든 좋으니!

*

‘글쎄… 무슨 꿈을 꿨을까.’

지완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이현이 떠듬떠듬 애매하게 묻는 말에, 묘한 표정으로 이현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 설핏 즐거움이 스친 건 이현의 착각일까. 어디까지가 실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에서, 이현은 차마.

‘네가 나 대딸해 주는 꿈을 꾼 거 같은데 이거 꿈 맞냐?’

라고 물을 수 없었다. 이현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을 직면하고야 말았다.

‘이현아, 그게 주사라면… 고치는 편이 좋을 거야.’

지완은 더 모호한 말을 던져, 이현을 더 큰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지완은 이현의 머리 위로 툭 하니 파자마를 던지고는, 본인의 핸드폰을 챙겨 방을 나섰다.

왜 권지완 핸드폰은 내 방에 있는 거지? 그 난처한 질문은 던지지도 못했다. 트레이닝복 대신 사복을 입은 지완을 보며, 오늘이 화보 촬영 날이라는 무의미한 사실만 깨달았을 뿐이다.

“….”

이현은 찬물로 몸을 식히려 했다. 몸이 차가워질수록, 안에선 열이 올랐다. 눈을 감을 때마다 몇몇 감각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연상되는 이미지들은 이현이 결코 단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것들이었고, 때문에 이현은 절망했다. 꿈이 아닌 걸까.

“이게 꿈이면….”

이게 꿈이라면 자신이 권지완에게 욕정하는 꼴이었다. 25살 처먹고 섹스하는 꿈이야 쪽팔리긴 해도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상대가 남자다. 그것도 권지완이다. 권지완을 상대로 몽정이라니. 사정은 안 했으니 욕정에서 그친다고 말해야 할까. 이딴 꿈을 꾸었다는 것만으로도 이현은 착잡해졌다.

그러나 이게 꿈이 아니라면.

“권지완이 내 좆을 만지면서 흥분을 한다고?”

아, 씨발!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에 이현은 황급히 도리질을 쳤다.

“아니… 그보다 중요한 게….”

중요한 걸 잊은 기분이다. 이현은 제 아래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

타타타타탁, 많이 누른다고 빨리 올라오는 것도 아닌데, 이현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방정맞게 눌러댔다. 이현은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생각을 돌려야 한다. 성가신 상황에 놓일 때마다 이현이 도피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번에는 성가신 게 아니라 소름끼치는 쪽이었지만 이현의 발걸음은 서둘러 팀닥에게 향했다. 몸은 이제 가벼워졌는데, 느닷없이 호전된 몸 상태가 더 공포스러웠다. 정말, 정말 내가…. 근데 그딴 걸로 몸이 괜찮아진다고?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계기판만 초점 없이 바라보던 이현은 제 어깨를 두드리는 낯선 손길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자꾸만 반복되는 장면의 조각들이 이현의 귀를 붉혔기에 정신을 반쯤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현 씨, 오랜만이에요.”

“….”

“첫눈 온 날에 다시 보다니. 이거 꽤 로맨틱하지 않아요?”

올해의 첫눈은 이현에게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정말로.

*

“못 본 새 얼굴이 더 좋아졌네요.”

“….”

“모르는 번호는 그냥 차단한 거예요? 내가 미친놈처럼 이현 씨한테 얼마나 연락을 했는지…. 영화 촬영 때문에 바쁘지만 않았어도 이현 씨를 직접 찾아갔을 텐데 말이에요. 배우 생활이 정말 개 같다니까.”

“….”

“하하, 뭐, 이젠 됐어요. 꼴사나운 짓은 그만하려고요. 기회를 찬 건 제가 아니라 이현 씨니까 나중에 후회해도 어쩔 수 없어요.”

이 새끼가 갑자기 여기서 왜 나타나? 21층에 우리 말고 빈방이 있었나? 뜬금없는 등장이 황당하긴 했으나 이현은 내색하지 않았다.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세민은 여전했다. 이현의 일관된 무시를 조금도 괘념치 않아 하며 구린 미소를 유지했다.

“제가 왜 여기 와 있는지….”

“….”

“모르는구나? 하하. 역시나. 그럼 그렇지. 이현 씨가 알 리가 없지.”

“….”

“촬영하러 왔어요. 이거 비밀인데, 이현 씨한테만 미리 말해주는 거예요.”

단정한 셋업 차림의 세민은 이현을 빤히 훑어 내렸다. 그 변치 않는, 노골적이고 불쾌한 시선에 이현은 허, 짧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대꾸는 하지 않았다.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실었다.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지만.

“권 선수가 파트너로 나를 추천했거든. 브리X니 앰버서더 파트너십 말이에요.”

“….”

“어때요. 이 셋업도 협찬인데. 잘 어울려요?”

공교롭게도 다시금 세민의 입에서 지완의 이름이 등장했다. 세민은 재킷의 단추를 잠그며 허리를 곧추세우더니, 값이 꽤 나가 보이는 구두의 뒤축을 찬찬히 바닥에 비볐다.

이현은 그제야 세민에게 시선 한 줌을 내어주었다. 촬영이고 뭐고 알 바는 아니었으나, 권지완이 하세민을 추천했다는 말은 이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때문은 아니었다.

세민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정돈했다. 거울을 통해 두 시선이 교차하자 세민은 싱긋 웃어 보였다. 찬찬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은 불쾌한 둘만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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