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거슬리던 TV의 소음은 자연스레 아득해졌다. 이현은 취기가 많이 올라 귀가 먹먹해지는 것이라 생각했건만, 지완의 손목 위에서 째깍째깍 초침이 흘러가는 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왜 이러지. 초침 소리에 맞춰 눈이 흩날렸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식어가는 담뱃재만이 시간의 경과를 말해주고 있었다.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창밖을 응시하다, 지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후회해.”
“…뭐?”
“처음부터 눈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지.”
그제야 다시 모든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지완의 손가락 사이에서 열기를 모두 잃은 담뱃재는 검은 흔적을 남기고 파스스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완은 피곤한 듯 눈을 내리감고,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고개를 가볍게 까딱이자 지완의 옆선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이현은 다시 되묻지 못했고, 붕 뜬 정적 가운데 지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네 뒤를 좇는 게 전부가 된 거 같아서.”
“….”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널 앞지르면 나한테 뭐가 남을까.”
“….”
“아무것도 없겠지. 그게 최악이야, 이현아.”
그런데도 이 병신 같은 짓을 그만두지 못해. 지완은 제 눈썹을 천천히 매만졌다. 좆같아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유치한 권지완은 자조했다. 설핏 보이는 미소는 언제나처럼 곱상했고, 지완의 말들은 혼잣말처럼 느릿하게 새어 나왔다. 지극히 평온했다. 아까 뭐랬더라…. 지완의 말이 늘어졌다.
“섹스가 목적이냐고? 아니, 이현아. 네가 목적이야.”
넌 이해 못 하겠지. 나도 이해가 안 되니까. 함박눈과 함께 느닷없이 쏟아진 지완의 말들은, 쌓이는 눈처럼 이현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무지한 지완은 진실로 제가 뱉는 말들의 무게를 실감치 못하는 듯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냐?”
“글쎄. 난 네 뒤만 보고 살아와서 아는 게 많지 않아.”
“…주사가 심하다. 차라리 지금까지 하던 대로 발정난 개새끼처럼 굴어. 그게 나아.”
“난 인정하고 있잖아? 왜 네가 부인을 해.”
“내가 아는 권지완은 그런 말 할 새끼가 아니니까. 네가 하는 말은 마치 내가… 아니, 네가….”
“알아. 굴욕적이지. 비웃어도 돼.”
막힌 말문을 힘겹게 연 이현과 달리 지완은 태연했다. 이미 정리를 마친 남의 글을 그저 읽어내려 가는 것처럼, 무겁지 않은 지완의 음성이 오히려 이현에겐 위험했다. 허황된 소리로 치부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거든. 처음엔 그냥 손이었는데 말이야. 그 땐 한 번 잡아채고 싶었던 건지, 똑같이 물어뜯어주고 싶었던 건지.”
“….”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언젠가부터….”
갖고 싶고, 얻고 싶고, 뺏고 싶고, 움켜쥐고 싶어. 이미 말했잖아, 이현아. 난 거짓말 안 한다니까. 지완의 담백한 시인이 툭툭 이현에게 부닥쳤다.
“그러니까 가져봐야겠어. 그럼 그다음을 알게 되겠지.”
“….”
“이현아, 너도 책임을 져. 남의 인생에 끼어들어서 주인 노릇을 했으면.”
‘내가 뺏고 싶은 건 너라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아는 방식은 이거뿐이야. 이게 내 최선이거든.”
머리는 멈춰있고, 살갗이 말해준다. 몇 마디의 말 속에서 이현은 깨달았다.
“씨발, 이제 와서 왜 갑자기….”
“그러게. 끝까지 이기적이지, 내가.”
당연하게도, 지완이 보인 것은 결코 아가페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그런 건 애초부터 지완이 지니고 태어난 영역이 아니었다. 그러나 권지완은 그보다 더한 것을 내어놓았다. 권지완에게 있어서 가장 최악의 것. 권지완은 굴복을 자백했다. 퀴퀴하고 고약하다.
“경계하라고 했잖아.”
이현은 깨달았다. 권지완은 여전히 무지했지만, 이현은 깨달았다. 믿기 힘든 사실은 짙은 농도로 이현을 덮쳤다. 현실에서 도피하듯 이현의 이성은 자발적으로 패배코자 했다. 순식간에 진탕한 알코올이 온몸을 지배했다.
불쌍한 새끼.
이현은 알코올로 도피했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 이현에게 상기된 첫 번째 감정은 연민이었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오만하고 방자한 권지완, 그런 권지완이기에 불쌍하다. 조롱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연민. 무심한 채이현, 그에게서.
*
이현은 절로 오므라지는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마비가 되어 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이 상황에 쓰일 말은 결단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멍청한 생각이 잠시 이현의 머릿속을 들렀다 지나갔다.
지완은 거짓말처럼 능숙하게 이현을 무너뜨렸다. 여전히 붉은 손끝만이 그의 취색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했다.
이현의 숨은 계속 엇나가고 있었다. 씨발! 이현을 더욱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호흡이 이전과 달리… 조금도 폭력적이지 않다는 것. 끊임없이 지완의 열감은 이현을 달래듯 감쌌다. 이현은 전혀 다른 종류의 불안으로 몸을 떨었다.
“숨 쉬어.”
“…윽.”
우습게도 이현은 지완의 말을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숨이 막혀 죽고 말 테니까. 이현은 빠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은 이미 푹신한 침대에 사로잡히고 말았는지, 지완의 몸 아래서 허덕일 뿐이었다.
이현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지완은 가볍게 입술을 부딪치고, 물었다가, 이현의 숨을 내리눌렀다. 입술에서 시작해서 온몸으로 전이되는 압박감은 이현이 잔기침을 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완은 그마저도 훔쳐 갔다.
지완의 입술에는 아직 선명한 흉터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 까슬함은 이현의 턱과 입가에 닿을 때마다 제 존재감을 톡톡히 드러냈다. 거칠고 따끔한 그 얇은 표피가 이현의 오감을 긁어댔다.
“정말 싫기만 한 건지 잘 생각해 봐.”
“하, 으….”
“싫을 리 없을 텐데.”
지완은 느릿하게 이현의 치열을 훑었다. 지완의 몸 아래에 갇힌 이현은, 지완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까지 그대로 흡수했다. 벗어날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전에는 차마 지각하지 못했던 지완의 흥분이 이현의 살갗으로 꽂혀 들었다. 그럼에도 지완은 여유로웠다. 조금의 조급함도 없이 이현의 입천장과 혀 아래, 입 안쪽의 깊은 곳을 찔렀고, 숨이 막힐 듯하면 한 발짝 물러나 다시 이현의 입술을 쓸었다.
이현은 천천히 잡아먹히는 느낌에 사로잡혀 손끝에도 힘을 줄 수 없었다. 이전처럼 지완의 입술을 짓이기는 것조차도 불가했다. 진득한 움직임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런 건 경험해 본 적 없다. 그건 이현의 경험이 적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부 권지완 때문이다.
몸이 녹아내리는 감각들 속에서 지완의 손이 이현의 옷을 벗겼고, 그걸 이현이 알아차리지 못한 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지완의 입술이 이현의 목으로 향했다. 이현의 목은 뜨거웠고, 지완의 숨은 더 뜨거웠다. 짧고 가벼운 접촉이 이현의 목젖과 쇄골 위, 귀 아래를 차례차례 지나갔다.
“난 이게 아주 마음에 들어.”
드러난 이현의 목덜미 뒤쪽을 지완이 세게 물었다. 야릇하고 갑작스러운 고통에 이현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지완의 손이 이현의 턱을 부여잡았다. 지완의 혀와 입술은 집요하게 한 곳만을 빨았다.
이현은 알 수 있었다. 끝내 옅은 흉으로 남은 지난 상처가 분명했다.
미친 새끼. 욕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삼켜졌다. 이현은 연신 신경질적이고 더운 숨을 토했다. 지완의 혀는 끈질겼고, 손은 이현의 몸을 끊임없이 간질였다. 지완은 끝끝내 흉 위에 더한 흉을 만들어냈다.
“이현아, 난 거짓말 안 한다니까.”
“윽….”
지완의 입에서는 낮고 갈라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손이 그의 말을 증명하고 나서야, 이현은 퍼뜩 숨을 멈췄다.
“놔…!”
이현의 얄팍한 반항이 쇄골을 물어뜯는 지완에게 유효할 리 없다. 이현은 모든 힘을 끌어모아 지완의 뒷머리를 잡아챘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힘겹게 움켜쥐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들이 이현의 손가락 사이에서 흐트러졌다.
쇄골과 가슴 사이, 그 탄력적이고 단단한 살을 깨물듯 짓이기고 있던 지완은, 흥분이 어린 얼굴로 마지못해 이현을 바라보았다.
“야… 야, 잠깐만. 이거… 이거 아닌 거 같아.”
횡설수설하는 이현의 입과 달리, 손은 정확히 지완의 다른 팔을 붙들고 있었다. 난 거짓말 안 한다니까. 습관처럼 지완이 내뱉은 말은 공포였다. 이현은 제 눈으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야 정말 그간의 희롱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정말로 이현은 발기했다. 아니, 발기하고 있었다.
“윽… 제발, 좀….”
지완은 당황과 당혹으로 흔들리는 이현의 시선에,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지완의 긴 손가락은 이현의 옆구리를 찬찬히 타고 올라와 두툼한 가슴 근육을 쓸고, 쇄골, 목덜미, 귓불, 귀 뒤의 여린 살을 차례로 매만졌다. 다른 손은 탄탄한 허리와 배를 쓸어내리다가 형편없이 걸쳐 있던 트레이닝 팬츠 아래로 향했다. 반쯤 서 있는 그곳을 지완의 큼지막한 손바닥이 감쌌다. 이현은 제 입술을 아득 물었다.
“…놓으라고!”
이현은 스스로를 부정했다. 고작 키스로 발기라니. 이건 다른 걸 다 떠나서 자존심의 문제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와중에도 자존심은 자존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