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풀어 헤쳐진 가운 사이로, 과장을 좀 더 보태 흉할 정도로 깊이 파인 파자마가 떡하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분명 흉한 건 그 괴상한 고양이 캐릭터들인데, 그것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선이었다. 제대로 눈여겨보지 않으면 선은 실체로부터 지워지곤 한다. 선으로 둘러싸인 양감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질감 따위에 먼저 시선이 빼앗기곤 하지만…. 결국 가장 본능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선이다. 그걸 인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주 공교로운 순간을, 기회를 노리던 지완만이 직시하고 있었다. 그리 과분하게 여기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럼 뭐.”
머리카락이 함께 젖혀져 이현의 곱게 깎인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느즈러지는 음성이 울렁이는 목울대로부터 흘러나왔다. 낮지만 부드럽다. 이마에서부터 콧날로, 다시 입술로 이어지는 굴곡에 방의 조명이 빼곡하게 내려앉았고, 조명은 다시 이현의 목을 따라 깊이 파인 가슴까지 끊김 없이 이어졌다.
가냘프지도, 그렇다고 과히 굵지도 않은 몸은 얼마 남아있지 않았던 살마저 빠져나가 몸 위에 새겨진 선들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유달리 깊은 쇄골이나 타고난 넓은 어깨의 선이 그랬고, 제 몸에 딱 맞게 조각된 가슴의 근육과 선명한 목젖은 그 어떤 불호도 허용치 않을 결과물이었다. 이현은 거울 속 자신의 몸을 보며 아쉬워하는 날들이 더 많았으나, 그건 이현의 입장일 뿐이었다. 타인으로부터 낯뜨거운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한 남자의 몸이었다.
지완은 그 사실을 기어이 이현에게 일깨워주고자 했을까.
“네 좆이 안 설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말라고. 네가 못 박겠다고 하는 것도… 걱정할 일이 전혀 아닌데 말이야.”
그리고 동시에 이현은 새로운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 또한 술이 가져다준 깨달음이다. 씨발, 이럴 수가. 이현은 눈을 번쩍 떴다. 앞머리가 타고 있다고 오해 했던 정연보다 더한 놀라움이 이현의 두 눈에 어렸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이해했으려나…. 상스러운 말을 쓰고 싶지는 않은데.”
지완은 웃었고, 가운의 끈은 어느새 지완이 쥐고 있었다.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지완이 상스러운 말을 뱉지 않자, 역으로 그 어느 때보다 상스러웠다. 권지완은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저런 역설을 하는 것이다.
*
“다행히 정연 누나 가방 안에 키가 있더라고요! 하마터면 뒤풀이 몰래 빠져서 따로 술 먹은 거 들킬 뻔했잖아요.”
재민은 어김없이 이현에게 가장 소중한 동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등장하는 타이밍이 언제나 기가 막히다. 오늘로 벌써 두 번이나 빚을 진 이현은 황급히 가운을 여미며 벌떡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지완의 손에서 스르륵 떨어지는 끈을, 둔한 재민이 눈치채지 못한 것이 정말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근데 형, 어쩌죠. 방금 연락 받았는데요. 룸메 형이 너무 많이 취해서 곧 들어온 대요. 카드키 잃어버렸다고 자지 말고 있으라는데….”
“아니야. 어차피 더 못 마시니까 정리하자.”
“어쩔 수 없긴 해도 아쉽네요. 저 오늘 좀 덜 취하는 거 같은데. 술도 깼고….”
“헛소리 말고 봉투나 가져와.”
이현의 말끝에서 삑사리가 났지만 유별난 정도는 아니었다. 이현은 목을 가다듬으며 술병을 집어 들었다. 멍청하게도 제가 깔리는 쪽이 될 거라는 생각은 단 한 순간도 해보질 못했다. 이건 이현이 이런 쪽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도 아니었고, 지완을 얕봤기 때문도 아니었으며, 평생을 함께해온 이성애적 사고회로가 과하게 발동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권지완이 더 예뻤기 때문이다.
이현은 다시 제 머리를 내리쳤다. 왜 그러냐는 재민의 걱정에 대강 손사래를 쳤다. 약 먹고 술 먹어서 그래. 그러나 진짜 이유는 이제 위아래가 전복되어 펼쳐지는 이미지들 때문이었다. 연상이 왜 이렇게 쉽나 했더니…. 이현은 이미 지완이 깔리는 상상도, 제가 지완에게 깔리는 경험도 모두 진작 해봤기 때문이었다.
“근데 형, 저 좀 봐요.”
술병을 집어 들던 이현이 어지러움에 휘청거리자, 재민이 이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축축한 카펫에 미끄러지듯 몸이 뒤로 기운 이현은, 등을 안정적으로 받치는 재민의 팔뚝에 적당히 안도했다. 이 새끼, 확실히 다 컸네.
재민은 이현의 소탈한 웃음을 묘하게 바라보다, 짐짓 진지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형, 지금 표정이 뭔가… 야한데요.”
“이게 미쳤나.”
“그렇죠? 하하. 근데 볼까지 붉으니까.”
재민은 앳된 소성으로 이현의 질책을 무마했다. 이현이 다리에 힘을 주고 똑바로 서자, 재민의 손이 이현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헤치고 이마를 덮었다.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제 이마 한 번, 이현의 이마 한 번, 번갈아 짚던 재민은 조심스레 이현의 안색을 살폈다.
“어…, 형, 열이 더 나는 거 같아요. 술 괜히 마신 거 같은데, 어떡하죠? 형을 말렸어야 했나 봐.”
“괜찮아. 가서 자면 돼. 딱 좋아.”
“생각이 짧았어요. 지금이라도 팀닥한테 연락할까요?”
열이 오른 것은 단순히 감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현은 자신에게 꽂혀있는 지완의 시선을 회피하는 것으로 확실히 시인했다. 상스러운 새끼….
이현이 재민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재민아, 됐다고.
“그래도… 안 되겠다. 일단 옷부터 좀 갈아입어요, 형. 그냥 제 옷 벗어줄게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뒤쪽에 서 있는 지완의 존재감은 이현의 등을 콕콕 찔러댔다. 의도라고는 없는 재민의 손이 반쯤 풀려있는 이현의 가운 끈으로 향했다. 옷까지 갈아입혀 주려는 재민의 행동은 이현과 재민 사이에서 그다지 이례적인 짓이 아니었다. 물론 남들 눈에는 당연히 이상해 보이겠지만.
“이재민.”
“네?”
지완의 낮은 음성이 재민의 손을 저지했다. 재민은 화들짝 놀라 본능적으로 반걸음 물러섰다. 눈치 없는 재민은 언제나 제 반사 신경의 덕을 톡톡히 보곤 했다.
“야! 이 새끼가 또 지랄이지…!”
그러나 이현의 반사 신경은 술 때문인지, 열 때문인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걸음 물러선 재민에게 대강 턱짓한 지완은 곧장 이현을 짐짝처럼 둘러업었다. 비키라는 지완의 무언의 신호를 제대로 파악한 재민은 하하, 하, 어색한 웃음과 함께 뒷머리를 긁었다.
조심히 가세요, 선배님. 즐거웠습니다! 앞으로 훈련도 파이팅하시고요…! 재민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나한텐 끝까지 눈길 한 번 안 주시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선배 애새끼들이 방을 나가자, 재민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서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사이가 좋아지기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점이 있나?”
…안 싸우기만 하면 됐지. 근데 이건 언제 다 치워? 재민의 거적눈은 연신 아래로 처졌다.
*
지완의 어깨 위에 짐 더미처럼 얹힌 이현은, 잠시 발버둥을 치다가 관두었다. 더한 힘을 써봤자 자괴감만 들 뿐이다.
“열나네, 조금. 그래도 디데이가 코앞인데 몸에 신경 좀 쓰지 그래?”
“야, 넌 곧 죽게 생겼어. 엄청 창백해. 몸은 새빨갛고.”
“그래, 취했으니까.”
“….”
“넌 알고 있잖아.”
지완은 제 어깨 위에 폴더처럼 접혀있는 이현을 끌어내려 앞으로 들었다. 군더더기 없는 일련의 움직임은 이현의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었다.
엘리베이터를 누른 지완의 손이, 재민이 짚었던 이마로 향했다. 손까지 붉게 물들었으나 지완의 손은 냉랭했다. 이마에 닿는 서늘함에 이현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굳이 이현의 상태를 다시 확인한 지완은 이현의 앞머리를 무심히 쓸어 올렸다. 행동뿐만 아니라 점점 말끝도 늘어진다. 그럼 그렇지. 이현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언제부터?”
“아까부터.”
“고작 한 잔…. 하긴. 웬일로 안 취하나 했네.”
“꽤 많이 애쓰고 있잖아. 여러모로, 처음부터.”
몇 시간의 인내를 생색내는 것처럼 공연히 색을 먹은 지완의 음성에 이현은 혀를 찼다. 한 마디 더 보태려다, 이 와중에도 지완이 자신을 한 팔로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믿기 힘든 지완의 근력에 낯설지 않은 위기감이 이현을 덮쳤다. 어느새 익숙한 자세다. 이현은 입을 다물었다.
소리 없이 열린 엘리베이터를 탄 뒤에도 지완은 이현을 내려놓지 않았다. 여전히 자유로운 한 손으로 카드키를 패드에 대고, 2와 1을 누르고, 거울에 비친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완은 게슴츠레하게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그 눈만은 스스럼없이 그의 취기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야, 방 들어갈 때까지 정신 똑바로 차려. 나도 지금 진짜 딱 죽을 거 같아서 너 업고 못 가니까. 이현의 경고에 지완은 고개를 떨궜다. 이현의 어깨 위에 이마를 기댄 지완에게서 작은 소성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뭐가 웃겨? 이현의 말에 지완은 답하지 않았다.
지완의 뒷목은 군데군데 새빨갈 정도로 붉은 열꽃을 피웠다. 얼핏 보면 화상 자국 같기도 했고, 또 다르게 보면 문란한 밤의 증거 같기도 했다. 이현은 시선을 돌리며 지완을 밀쳐냈다. 창백한 얼굴 위로는, 인정하기 싫을 만큼 잘 어울리는 예쁜 웃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현을 잠시 응시하던 지완은 웬일인지 순순히 이현을 내려주었다. 술기운과 갑작스러운 중력으로 인해 이현은 중심을 잡지 못했고, 모퉁이에 몸을 기대고 나서야 자신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