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51)

#95

이현은 제 앞의 잔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소주만 콸콸 부어두었던 잔은 쓰다 못해 아팠다. 혀 안쪽부터 구역감이 순간 몰려들었으나 주먹을 꽉 쥐어가며 참아내었다.

“그래, 네 목적 대단하다, 대단해.”

이현은 더운 호흡을 자각하지 못하고 입술을 축였다.

“근데 어쩌냐. 네가 지금 생각하는 건 죽었다 깨나도 못 이룰 텐데.”

“그건 아직 모르지.”

술이 만들어낸 싱겁고 더럽고 맥없는 비아냥들 사이로 정연이 끼어들었다. 정연에게선 이현보다 더 더운 숨이 씩씩거리며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제야 생각 정리를 마친 정연은 지완을 향해 팔을 뻗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잠시만. 유진 언니랑은 예전에 사귀었다가 헤어지고, 이제는 파트너 관계다, 뭐 그런 거예요? 말이 돼?”

어느새 반말로 짧아진 정연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무엇에 대한 흥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연은 엇나가는 손길로 소주의 라벨을 뜯더니, 그대로 지완의 바로 앞을 내리쳤다. 아직 끈적함이 남아있는 소주 라벨지가 바닥에 헐겁게 달라붙어 달랑거렸다.

“뭐가 아쉬워서… 어떻게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오지?”

정연은 남은 소주병의 술을 그대로 들이켰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물론 정연은 그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한 듯했지만.

제 앞의 라벨지를 빤히 바라보는 지완이나, 왜 본인이 충격을 받고 병나발을 부는지 정말 알 수 없는 정연이나. 그 우스운 모습에 짧은 비소를 터트린 건 정말 이현의 자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현은 웃음을 빠르게 갈무리했다. 다 비어버린 소주병을 붙잡고, 정연의 입을 틀어막았다. 유진이 그리 호감 가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에 유진을 끌어들여 언급한 것은 확실히 제 실수였다.

“야, 권지완, 이건 내 실수야.”

“…아. 그런 말이었어?”

지완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느릿하게 주억거렸다. 침대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길게 뻗은 손끝으로 축축한 라벨지를 떼어냈다. 그 얼굴에 일었던 불쾌함 역시 지워졌다. 오히려 꽤나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띠웠다. 라벨지 속 정유진의 맑은 웃음과는 전혀 달랐다.

“사귄 적도 없고, 그런 관계도 아닌데….”

“….”

“눈에 들어온 게 여자도 아니고.”

지완의 마지막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현은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난 뒤에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혹 정연이 이 음흉한 새끼의 말을 알아들었을까 싶어 다급히 그녀를 내려다보았으나, 정연은 시원한 이현의 손에 볼을 내준 채로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고작 몇 모금 더 마신 거 가지고 잠든 건 아닌 거 같은데….

정연을 껴안듯 감싸고 있는 이현의 얼굴을, 지완이 라이터로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볼로, 볼에서 코로, 코에서 턱으로, 턱에서 목젖으로. 가벼웠던 터치는 짐짓 무거운 압박을 실어 이현의 호흡을 방해했다. 거세진 않았지만 부드럽지도 않았다. 지완에 의해 방해받는 호흡 사이로 이현은 어떤 순간을 떠올렸다. 때맞춰 술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건 운 나쁜 술기운 때문이었다.

지완은 정연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이현의 손을 잡아챘다. 작은 라이터는 지완의 손에서 이현의 손으로 옮겨갔다. 지완의 큼지막한 손이 빠르게 이현의 손을 감쌌고, 이현의 엄지손톱을 적당한 압력으로 내리눌렀다. 칙, 칙, 뿌리칠 생각도 하지 못할 찰나에 이현의 손에 의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현의 손을 감싼 지완의 손에 의해 라이터에 불이 붙었다. 열감을 감지했는지, 이현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정연은 눈가를 찌푸렸다.

형, 선배. 지금 정연 누나 앞머리 태워요? 뭐 해요? 나란히 붙어 있는 정연과 이현, 지완을 향해 전화를 마친 재민이 의아한 듯 물었다. 불장난. 지완은 짤막하게 대답하며 눈을 접었다. 휘는 눈꼬리 아래로는 긴 속눈썹이 라이터 불빛으로 인해 그림자를 만들었다. 정유진 덕분에 생각났어. 이현이는 미인계에 약했잖아.

난 지금 뭘 보고 있지. 이현이 저도 모르게 떠올린 자문을 깨닫기도 전에, 잠깐의 휴식을 가졌던 정연이 벌떡 눈을 떴다. 미쳤어. 다들? 지금 내 앞머리를 태운다고? 웃는 건 지완뿐이었다. 당연히 정연의 앞머리는 타지 않았고, 정연은 그대로 지완의 다리 위에 술을 엎었다. 거의 다 비어있는 술잔이었음에도 지완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이현은 여전히 웃지 못했다. 또 한 번의 짧은 감상은 이현이 입에 술잔을 털어 넣음으로써 겨우 흐려졌다.

*

“이현아, 눈이나 좀 뜨지 그래.”

“내가 알아서 해.”

정연은 늘 그랬다. 술을 마시다가 한계치를 넘어가면 갑자기 정신을 잃곤 했다. 앞머리를 태워 먹을 뻔했던 정연은 이후로 지완에게 격 없는 반말을 퍼붓더니, 모두 무시당하고, 다시 술을 들이켜다 그대로 한계치를 넘어섰다. 생리로 몸이 평소와 같지 않은 것도 한몫을 했으리라.

적당한 선에서 이현이 말려보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재민이 그다지 취하지 않았다는 것, 우스운 점이 있다면 끝끝내 정연은 지완에게 술 먹이기를 성공했다는 것이다. 고작 한 잔이긴 했지만. 지완은 원래 그 정도에 쉽게 취하는 애새끼니까. 지완은 삐딱한 얼굴로 정연을 향한 성가신 기색을 지우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정연을 봐주긴 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떽떽거리면서 지랄한 것 치고는 너무 경계를 안 하네.”

“권지완, 여기 술병 많다. 경계는 네가 해야지.”

“그래, 힘내 봐.”

재민은 정연을 데려다주고 오겠다며 그녀를 어깨 위에 얹고 방을 빠져나갔다. 둘만 남겨진 방 안에서, 이현은 자신이 어느 정도 취했다는 사실을 서서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각은 자각일 뿐. 무엇 하나 도움 되지 않는다.

“그냥 상식 따져가며 생각하는 걸 관둔 거야. 난 널 못 따라가겠다니까?”

“난 미인계가 통한 거라고 보는데.”

지완은 어깨를 으쓱이며 오만한 얼굴을 했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그의 콧잔등에 이현은 헛웃음을 토했다.

“그건 네 맘대로 생각하고….”

지난 일을 빠르게 잊어버리는 이현의 단순함, 혹은 무심함이 도운 것은 아니었다. 알코올이 머리를 핑핑 돌리며 거북했던 사고를 몇 토막으로 잘라내니… 대체 이 새끼는 무슨 생각일까? 따위의 의미 없는 질문도 모습을 감췄다. 그런 추상적인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현실적인 문제만이 남았다.

“그보다 난 너한테 박아 줄 생각이 없어. 정말. 하나도. 진짜 좆도 없어.”

“하하. 뭐?”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제가 좆을 박지 않으면 그만이다. 당황과 방심으로 입술은 어쩔 수 없이 한 번 내주었다고 해도, 아래 사정은 다르지 않은가. 아무리 갑작스러운 자극으로 좆을 세운다 한들, 남자와의 섹스를 맞닥뜨렸을 때…

정말 한순간에, 단숨에 식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이현은 진심이었다.

“이현아, 세상에 불가능한 게 그렇게 많지 않아.”

“….”

“그리고 불가능하지 않다는 거 이미 잘 알잖아. 또 말해줘?”

“야, 그 잠깐의 순간이랑 실전은 다른 거 아니냐? 네가 좀만 상식적으로 생각을… 아니다, 됐다. 네가 상식은 뭔 상식.”

너랑 무슨 말을 하고 있냐, 지금. 확실히 술은 언제나 힘이 세다. 술은 언제나 제 몫을 해낸다. 이현은 침대 위로 올린 제 팔에 고개를 기댄 채로 가만가만 말을 이었다. 술이 없다면 남자를 상대로 입에 올릴 리 없는 말들이 꽤나 담백한 어조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에서 술보다는 한참 전에 털어 넣었던 알약의 떫은맛이 맴돌았다. 아마 이 또한 취했기 때문이리라.

이 짓도 지겹다. 나 이제 간다. 이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목으로 몇 번 세게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처음부터 이렇게 말할걸. 그딴 키스 한 번이 뭐라고 그렇게 당황을 했지? 이 새낀 그냥 미친놈인데.

단호한 말과 달리 이현은 조금 비틀거리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곧바로 나가려 했으나 어느새 풀어 헤쳐진 가운 끈이 눈에 들었다. 안에 입은 괴상한 캐릭터가 영 꼴같잖았다.

“글세, 그런 말을 하면서 가운을 풀어 헤치는 건 무슨 의민지 모르겠네.”

“야, 의미는 무슨…. 다시 묶으려고 푸는 거야. 근데 너 왜 안 취해?”

이현은 지완을 놀리듯 지완의 턱 아래를 툭툭 건드렸다. 마치 길가에서 만난 남의 애완견 턱을 쓰다듬듯이. 사람의 자존심이 턱 밑에 달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현은 명백히 지완의 자존심을 건드리고자 했다. 이현의 눈빛에도 거만한 불쾌함이 선명했다.

그 의도를 잘 알고 있음에도 지완은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도리어 허리를 살짝 굽혀가며 이현에게 제 턱을 얌전히 내어주었다. 분명 자존심을 건들고 있는 건 이현인데, 지완의 얼굴은 그리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는 것처럼 한쪽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하하. 어쨌든 그런 거면 걱정 안 해도 돼, 이현아.”

“뭔 걱정이야. 놀라워서 하는 소리지. 한 잔 먹었으니까 뒤질 때 다 됐잖아.”

“아니, 그거 말고.”

이쯤이면 됐겠지, 싶은 얼굴로 지완이 허리를 바로 세웠다. 삽시에 커진 존재감에 이현은 괜히 발꿈치로 카펫을 내리눌렀다. 불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술 냄새 나는 숨을 뱉었다. 앉아있음에도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어지러움에 이현은 두 눈을 더욱 꾹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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