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
지루한 듯 턱을 괴고 있던 지완은, 긴 팔을 뻗어 이현이 입에 문 담배를 뺏어 들었다. 짤막한 사이에 지완의 손끝이 이현의 입술을 스쳤다. 의도였든, 의도치 않았든 그 접촉에 이현의 입가가 경련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막 불을 켠 재민은 떨떠름하게 지완의 앞으로 손을 옮겼다.
“…뭐 하냐? 내놔. 돗대야. 넌 네 거 펴.”
“난 네 입으로 들어가는 게 제일 맛있어 보인다니까.”
“씨발, 진짜.”
이제 지완은 이현을 이런 식으로 놀려 먹기로 맘먹은 듯했다. 그 알 수 없고 묘한 대화 속 꺼림칙한 긴장감을 둔하디둔한 재민이나, 술기운이 오른 정연은 눈치챌 수 없었다. 지완은 제 라이터를 꺼내 말단을 태웠다. 재민은 객쩍게 손을 거둬야 했다.
“그러고 보면 이현아, 넌 꼭 권 선수한테만 입이 험하더라. 사이는 좋아져도 그 버릇은 어디 안 가나 보네.”
정연은 제가 하려던 말을 까먹은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라벨 속 유진의 미소에 화답하듯 홀로 씩 웃더니 그새 빈 자신의 잔에 꼴꼴 소주를 따랐다.
“그러게요. 이현이 형은 지완 선배 앞에서만 화가 많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평소랑 다르긴 해요.”
“…어쩌면 둘 사이가 너무 좋아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지.”
“네?”
“난 권 선수가 이렇게 다정한 타입일 줄은 몰랐다?”
정연은 이현의 앞으로 제 담뱃갑을 내어주는 지완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턱짓했다. 아까부터 계속 제 말은 무시하며 없는 취급을 하는 지완이 영 못마땅한 듯했다.
“재민아, 나 담배 하나만.”
그러나 이현은 지완이 건넨 담뱃갑을 술잔으로 쳐내고 재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현이 쳐낸 담뱃갑은 지완의 손에서 벗어나 카펫 위로 나뒹굴었다. 지완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진한 연기가 흘러나왔고, 재수 없는 미소를 담고 있던 입꼬리는 서서히 내려갔다. 찰나의 분위기를 읽지 못한 정연이 아니었다면 사이에 있던 재민만 곤란해졌을 터였다.
“야, 술부터 마셔. 금연하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하하. 그래요. 저희 술 마시는 속도도 느린데 뭐… 게임이라도 할까요?”
“재민아, 이 조합으로 게임은 무슨 게임. 누나 화낸다.”
*
재민은 기지개를 켜며 점점 상체를 젖히더니 쿵 하고 뒤로 넘어가 버렸다. 정신이 아예 나간 것은 아니었으나 그 큰 몸을 제대로 가누지는 못하고 있었다. 으으, 형, 저 좀 일으켜 주세요. 말끝을 늘이며 이현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꼴을 보면 확실하다.
“그냥 여기까지 해. 더 마셔봤자 좋을 거 없어.”
재민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술에 취해 버린 이유를 굳이 대자면 그건 이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뚫어져라 이현을 응시하는 지완과, 대놓고 무시하는 이현, 그리고 그 가운데서 눈치를 보던 재민은 재롱이라도 부리듯 연거푸 술잔을 비우며 어색한 분위기를 책임져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이 만든 술자리 아닌가. 술기운과 함께 흥이 오른 정연이 내뱉는 아무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현도 그런 재민의 노력을 모르지 않았다.
이쯤이면 됐겠다, 싶어 이현은 재민의 입에 제가 피우던 담배를 물려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닷없이 들어온 담배 연기에 재민은 몇 번 콜록대다가, 기분 좋게 눈을 감으며 필터를 마저 빨았다.
“뭘 여기까지야. 난 이제 시작인데. 앉아라, 채이현. 확 네 방으로 올라가기 전에.”
그러나 정연은 아니었다. 이현의 팔을 잡아 내리는 건 정연이었다. 다른 이들이 담배를 물 때마다 정연은 허벅지를 찌르며 술잔을 들이켰다. 어마어마한 비율로 탄 소맥은 어마어마한 스피드로 정연을 취하게 만들었다. 그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현은 엉거주춤하게 다시 자리에 앉으며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냥 술이나 존나 마실 걸 그랬나. 그래도 프로라고 제 몸 상태를 봐가며 조금씩 홀짝이기만 했던 이현은, 그냥 취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며 후회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밤은 길고 시간은 많다.
“정연아, 너 몸도 안 좋잖아. 그만 마셔.”
“아, 맞다. 아까 물어보려고 했던 게 뭐냐면…. 권 선수, 그때, 선발전 때.”
“….”
“이현이가 그 귀여운 플래카드 들고 권 선수 응원 갔을 때요.”
정연은 기어이 이전 말을 기억해내고는 이현의 저지를 깡그리 무시한 채 제 할 말을 이어갔다. 무슨 이유로 어울리지도 않는 술자리에 끼기 위해 이 방까지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명백히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던 지완은 그제야 정연에게 시선 한 줌을 내주었다. 정연은 제 술잔을 깔끔히 비우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설마 이현이 때렸어요?”
“….”
“아니, 입술이 퉁퉁 부어서 왔던데…. 다 큰 남자들끼리 화해한답시고 치고받고 싸우기라도 한 건 아니죠?”
“정연아.”
“제발 아니라고 해주라. 내가 다 쪽팔리니까.”
“…김정연.”
“내가 권 선수 맞닥뜨리자마자 입술 찢긴 거 보고 아차, 싶었다니까? 그래도 다행이야. 우리 이현이가 당하고만 끝난 것 같진 않아서. 물어뜯기라도 했냐?”
제 딴에 농지거리를 던지고 정연은 끌끌 웃어댔다. 정연의 소성은 그보다 훨씬 낮은 다른 누군가의 웃음소리로 이어졌다. 웃음의 주인은 따로 찾을 필요도 없이 지완이었다.
…권 선수, 웃으니까 훨씬 더 잘생겼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인데 진짜 욕이 나오려 그래요. 정연의 의미 없는 찬사에 이현은 제 이마를 짚었다. 웃음을 그칠 생각이 없는 지완은 정연의 말을 듣지도 못한 것 같았지만.
아, 모르겠다. 이현은 매만지고 있던 잔을 입으로 털어 넣었다. 이미 얼음이 녹을 대로 녹아 맹맹한 맛이 났지만, 단숨에 들어오는 높은 알코올은 이현의 머리에 빠르게 꽂혔다. 약 때문인가. 인상을 찌푸리는 이현의 옆에서 끙차, 하고 재민이 다시 몸을 세웠다.
“어? 진짜네요. 진짜 싸운 거였구나. 난 형이 우리 몰래 여친이라도 만든 줄 알았어요.”
“….”
“농담인데요, 형….”
재민이 헤실거리며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이현의 이마에 푸른 정맥이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단숨에 꼬리를 내리는 재민이다.
“재민아, 채이현 당분간 여자 없대.”
“예? 누가요?”
“저번에 사주 보러 가서 채이현 것도 봐봤는데, 얘 옆에 여자가 안 보인대. 아무래도 한 눈 안 팔고 제 길만 파는 독한 놈 같다고. 존나 독특한 사주라던데, 천재는 천재 사주가 따로 있긴 한가 봐.”
“…크리스마스이브에 전해 듣기에는 너무 끔찍한 결관데요. 어차피 그냥 아무 말이나 던지는 거, 좋은 말이나 좀 해주지.”
“거기 신통한 걸로 유명한 곳이야. 그리고 채이현은 좆도 신경 안 쓸 걸.”
몇 달 전에 예약해서 겨우 보러 간 거라고. 네네. 누나, 제 사주는 안 넣어 봤어요? 재민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정연의 잔에 술을 따랐다. 사주의 주인은 인상을 구길 대로 구기고 있는데, 맞은편에선 얄궂은 소성이 다시 새어 나왔다.
지완은 한쪽 눈을 찌푸리면서까지 웃고 있었다. 왼쪽 볼에 팬 보조개에 시선이 빼앗긴 건 바로 옆에서 지완을 감상하던 정연이었다. 거기가 어딘지 꽤 궁금하네. 혼잣말 같은 지완의 중얼거림에 정연이 덥석 말꼬리를 물었다.
하필 소주병의 라벨이 다시 정연의 눈에 든 것이 문제였다.
“그나저나…. 권 선수는 어떤데요. 유진 언니랑 진짜 만나요?”
바닥을 보이는 아이스 버킷을 흘깃대고는 정연이 호텔 키폰을 가리켰다. 마지막 얼음을 입에 문 정연의 볼이 귀엽게 부풀었으나 내뱉은 말은 전혀 귀엽지 않았다. 재민은 이현에게 술병을 넘기곤 그 큰 몸을 일으켰다. 곤란한 질문을 스스럼없이 해대는 정연의 맹랑함에, 마침 잘 됐다 싶어 빠르게 자리를 피한 것이다. 조금 전까지 취했던 술이 다 깬 듯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많이 취했다며 이현이 정연의 질문을 제지하자 정연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을 부릅뜰 뿐이었다.
“만나긴 하지.”
지완의 대답에 재민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아, 네, 그러니까… 여기 얼음 좀…. 더듬대며 제 말을 이어가긴 했으나 알딸딸한 탓인지 재민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한쪽 귀는 열어두고 있던 것이다. 지완의 답변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정연에게 반응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것인지. 어찌 됐든 놀란 건 재민만이 아니었다.
“…너 좆 함부로 굴리는 거 그쪽은 아냐? 아니면 파트너 사이에서는 그런 거 보통 신경 안 써?”
이현은 삐딱하게 지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정유진을 만나면서 나한테 그 지랄을 떨었던 거지? 아니, 호모고 뭐고 더러운 걸 떠나서 하반신이 가벼워도 너무 가볍다. 이현의 비아냥은 지금껏 흔했던 조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완의 두 눈이 매서운 빛을 띠었다. 습관적으로 치켜 올라간 눈썹에 일전과는 다른 불쾌함이 서렸다.
“이현아, 아직 내가 좆을 굴린 적은 없는 거 같은데.”
“인생의 목적이 섹스가 아니고서야….”
뻔히 본인이 궁지에 몰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완은 눈으로 이현의 가운을 풀어 헤치고, 그 안의 상의마저 벗기듯 노골적으로 이현을 훑어 내렸다. 목적? 하하. 이현아, 그럼 섹스를 수단으로 여겨왔어? 안타깝네. 지완의 말에는 분명한 빈정이 서려 있었다. 속에 담긴 의미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채이현이랑 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