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네가 아웃되면 나도 더 이 짓을 할 이유가 없는데.”
- A루트 ‘가’팀 1번 OUT, ‘가’팀 1번 OUT
- ‘가’팀 람보 OUT, ‘나’팀 승리, ‘나’팀 승리
- 게임 종료, 게임 종료. 선수들은 모두 출발지로 집합해 주시길 바랍니다.
뭐라고? 확성기에서는 얼빠진 이현을 놀리듯 연이어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현이 그토록 기다리던 게임 종료는 예기치 않은 시점에 고지되었다.
“야…. 네가 람보였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람보인데 왜 소총을 들고 다녀?”
“그럼 반칙패로 해.”
처음부터 이딴 건 안중에도 없었어. 시답잖은 놀이를 끝낸 지완은 장갑을 벗어 이현의 볼에 남아있는 파란 잉크를 훔쳐내었다. 장갑 속에서 열감을 잃지 않았던 미지근한 체온이 얼어붙은 볼에 닿자마자 이현은 지완의 손을 쳐냈다. 지완은 내쳐진 손으로 소총의 탄창을 덤덤히 쥘 뿐이었다.
“어쨌든 축하해. 이겼네.”
으, 미친 새끼. 이현은 미약한 신음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들뜬 목소리로 저를 찾는 재민이 때마침 등장한 건, 일진이 나빠도 너무 나쁜 이현에게 수여된 조막만 한 자비였다.
*
채이현 선수는 얼마 전 권지완 선수가 출전한 선발전에 응원을 하러 가셨었죠? 그때 찍힌 사진들이 큰 이슈가 됐는데요. 따위의 곤란한 인터뷰 질문들에 진땀을 빼며 겨우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야, 이현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말이 스폰십 인터뷰지, 기자는 이현을 상대할 때부터 돈독이 잔뜩 오른 눈빛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현은 두 다리를 쭉 펴내며 재민의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호텔 복도는 뒤풀이에 대한 사격부원들의 달콤한 기대감으로 시끌시끌했다. 이현은 지치고 퍽퍽한 눈동자를 창밖으로 향했다. 이미 어두워진 창밖은 공기 좋아 보이는 산이 전부였다. 더 좋은 방이 배정되어 있음에도 이현은 바로 재민의 방으로 향했다. 간단한 소화제와 감기약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메디컬 팀으로 갔다가는 작은 일도 큰일이 되어 버리곤 해, 꼭 유난을 떨게 만들었다.
이현은 제 방을 놔두고 엉뚱한 방에 쳐들어와 제일 먼저 샤워를 한 뒤, 재민에게 받은 알약 세 개를 몽땅 털어 넣고 재민의 침대를 차지했다.
“형, 진짜 괜찮겠어요?”
“어. 꾀병이니까 걱정 마. 너나 걱정해라.”
재민은 상의를 벗으며 이현이 누워있는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굵직하고 진한 선들이 재민의 몸 위로 가시적인 획을 긋고 있었고, 점토를 붙여 치댄 것 같은 근육들이 움찔거렸다. 누가 봐도 대단한 몸인데, 이젠 이현에게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분명 이런 몸을 부러워했었는데… 나도 욕심이 좀 줄었나. 이현이 심심하게 자문하는 사이, 재민은 큼지막한 후드에 얼굴을 집어넣으며 반문했다.
“저요? 제가 걱정할 게 뭐 있어요.”
“술. 감독님 노망났다니까. 누가 첫날에 뒤풀이를 해. 그러다 탈 나면 전지 내내 큰일 난다.”
“하하. 다른 선수들 다 탈 나고 저만 멀쩡하면 그건 그거대로 이득이네요. 선발전에서.”
“재민아, 너 점점 정연이를 닮아 가?”
보통은 마지막 날에 마련되는 친목전, 그리고 그 뒤풀이가 전지훈련 첫날로 앞당겨진 상황에서 이곳에 남아있을 이들은 없었다. 마지막 날 주어지는 여유가 첫날에 주어진 것이다. 조삼모사 같은 상황임에도, 친목전에서 이긴 사격부는 연습도 없는 저녁 시간을 행복한 승리감에 도취된 채 만끽하고만 있었다.
이현은 이대로 재민의 방을 차지할까 고민 중이었다. 한번 벌어진 술자리는 보통 아침이 되도록 끝나질 않으니, 재민이나 다른 선수가 들어와 이현의 숙면을 방해할 일은 거의 없었다. 15층에서 21층까지 멀면 얼마나 멀다고. 그러나 이현은 그 정도도 귀찮을 만큼 피로했다.
“지금 몇 시지?”
“7시 반 좀 넘었어요. 왜요, 형?”
“뒤풀이 8시 시작 아니야? 너 안 나가냐? 뒤풀이 장소 여기서 꽤 걸어가야 하잖아.”
“저도 그냥 여기 있을까요? 형 아픈데 혼자 두고 가려니까 맘이 좀 그러네.”
“정연이나 챙겨. 몸도 안 좋은데 오늘 고생했잖아.”
“맞다. 헛개수 같은 거라도 챙겨 갈까요?”
“그냥 술을 먹이지 마, 걔.”
이현은 손을 휘저으며 몸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다시 창밖이 눈에 들어왔다. 볼 것도 없는 경치에 이현은 눈을 감았다. 눈이라도 펑펑 내렸으면 좋겠네.
재민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이현의 안색을 살피더니, 형, 그럼 저 진짜 갑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귀여운 걱정을 남기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재민이 나가고 나니 이제야 좀 쉬는 것 같다.
이현은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더듬거렸다. 원래 잘 확인도 하지 않는 핸드폰을 요즘 들어 손에 쥐고 살았더니 불필요한 습관이 들었다. 이현은 핸드폰을 침대 구석으로 던져버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끌벅적했던 15층은 선수들이 다 빠져나간 것인지 그새 잠잠해져 있었다.
아무도 없을 15층에서 이현은 홀로 맥주를 꺼내 들었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맥주캔을 따는 소리가 경쾌했다. 약까지 먹은 상태에 술이라니, 어느 코치 귀에 들어갔다간 불호령이 내려질 일이었지만 한 캔쯤은 보약이라 생각하며 이현은 첫 모금을 들이켰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쳐 앉아 심드렁하게 TV를 켰다. 막상 조용해지니 시답잖은 소음들을 찾고 있다. 그러나 켜지 않는 게 현명했다. 이현도 선수촌 홍보 프로그램이 재방송 되고 있을 줄은 몰랐을 테니까.
이현은 다급히 채널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큰 화면 가득 지완의 유도 모습이 비치고 난 후였다. 이어지는 연상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연애해, 나랑. 그럼 돼?’
너무 뚱딴지같은 소리를 듣다 보면 도리어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지금 이현이 그랬다. 이현은 허탈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허.
‘너랑 섹스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진짜 걔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이제는 걱정이 되는 수준이었다. 어디가 단단히 잘못된 건가. 못 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가. 그러나 거기까지 나서서 걱정을 해줄 만큼 이현이 아량 넓은 위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밥 먹었니? 잘 지내니? 정도의 평범한 인사말처럼 태연히 내뱉는 그 말도 안 되는 말들이 이현을 섬찟하게 만들었다.
21층에 가기 싫은 이유, 말해 무엇 하겠는가. 당연히 권지완 때문이었다. 15층의 사격부, 14층의 유도부, 그리고 21층의 감독진. 자신이 받은 특혜를 권지완이 안 받았을 리 없다. 모두가 뒤풀이하러 떠난 이곳에서 지완과 단둘이 21층에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2108호는 지금쯤 외로이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형!”
이현이 가운을 여미며 다시 한 모금을 들이켜려는 찰나, 나갔던 재민이 벌컥 문을 열며 이현의 여유를 가로챘다.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들이민 재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맥주캔을 손에 쥔 이현을 짓궂게 흘겨보았다. 이현은 슬금슬금 맥주캔을 등 뒤로 숨겼으나 이미 늦은 일이다.
“왜. 뭐 놓고 갔어?”
“아뇨. 흐.”
재민은 문틈으로 손을 내밀어 이현에게 빵빵한 비닐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쨍그랑거리는 소리는, 든 게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법했다. 재민이 문을 활짝 열자 재민의 등 뒤에 가려졌던 정연이 제 입으로 짜잔 소리를 내며 모습을 보였다.
“이럴 줄 알았어, 채이현. 술 마실 거면 그냥 가서 먹지, 왜 혼자 청승 떨어?”
“아프다니까.”
“들고 있는 건 뭔데?”
“….”
“이럴 줄 알고 왔지. 우리끼리 마셔, 그냥.”
“친목전 이기고 뒤풀이하는 것만 기다려왔잖아. 안 가봐도 되겠어?”
“재민이가 너 없인 뒤풀이 못 가겠대. 우리끼리 안 마신 지도 오래됐고.”
“형, 그건 아니구요. 정연 누나가 요즘 형 무슨 일 있는 것 같아서 걱정된대요.”
어린놈이 말이 많다? 정연은 재민을 제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가운 하나만 걸치고 있던 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연을 맞이하자, 야 이럴 거면 다 벗고 마셔, 하며 정연은 손뼉을 쳐댔다. 씩 웃는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 맞다. 이현은 주섬주섬 옆에 놓인 트레이닝 바지에 발을 욱여넣었다. 재민의 것이 분명했다. 허리가 너무 커 줄줄 흘러내리는 바지를 겨우 고정하고는 가운 끈을 질끈 동여맸다.
“위에는 안 입어?”
“재민아, 옷 좀.”
“잠시만요. 찾아줄게요.”
테이블 위로 술병 가득한 비닐봉지를 올려두고, 재민은 쭈그려 앉아 제 캐리어를 뒤집기 시작했다. 술잔을 가져오던 정연은 그 꼴을 보며 기가 찬 헛웃음을 내뱉었다.
“방 갔다 와. 감기기운 있다며. 더 심해지고 싶어?”
“귀찮아.”
“병신, 왜 사냐?”
정연이 온더락 잔 세 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이현이 주섬주섬 봉투에서 술병들을 꺼내 들었다. 많이도 사 왔다. 이현이 미간을 얕게 찌푸렸다. 이 와중에 각자 좋아하는 술이 다 달라, 소주도 맥주도 종류가 제각각이다. 정연은 기분 좋게 소주병을 하나 집어 흔들어 보였다. 소주병에 붙은 라벨 속 정유진과 눈이 마주친 이현은 어색히 고개를 돌렸다. 이유는 이현도 모른다.
“…근데 정연아, 너랑 재민이까지 뒤풀이 빠진 거 알면 감독님이 뭐라고 하실 텐데. 나야 아프다고 해도, 개별 행동했다가 또 무슨 기합을 받으려고.”
“괜찮아. 내가 아까 봤는데 감독님들 이미 한참 전부터 술 드시고 계셨어. 벌써 개판 됐을걸?”
“그보다 너 몸은. 술 마셔도 돼?”
“난 이상하게 생리하면 꼭 술이 고파. 야, 약까지 먹은 네 몸을 걱정해. 오늘은 봐줄 테니까 살살 마셔. 기분만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