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이현은 여전히 누워있는 태우 위로 소프트건을 대강 던졌다. 더러운 거라도 만진 듯 손을 털었다. 이보다 더 귀찮은 일에는 얽히고 싶지 않아 넘어가는 것이다. 정연이라면 살인 미수 새끼를 미쳤다고 그냥 보내냐며 야단법석을 떨 테지만, 이현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태우의 등에 가려져 총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를 바라며 CCTV만 힐끔댈 뿐이었다.
어차피 쏘지 못했을 것이다. 이현은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어중간한 새끼는 결코 하지 못할 일이니까.
내렸던 눈이 녹기라도 한 것인지, 추적한 흙은 이미 이현의 군복을 온통 더럽힌 뒤였다. 이현이 제 옷에 묻은 흙을 설렁설렁 털어내자, 태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이 잔뜩 어린 고글 때문에 그 얼굴은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창피함인지 분함인지 당황인지 모를 것으로 인해 태우는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
태우의 발끝을 총구로 툭툭 건드리던 지완은 다급히 떠나가는 태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싱겁게 어깨를 으쓱였다.
“죽을 뻔했는데 저걸 그냥 보내?”
“….”
“그렇게 가까이서 맞으면 너 정말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난 운이 좋았던 거야, 이현아. 내 완쾌를 보편적인 케이스로 여기면 안 되지. 그러면 내가 억울하거든.”
“닥쳐.”
이현은 재빨리 떨어트린 소프트건을 챙겨 들고, 지체 없이 그대로 지완을 겨냥했다. 이젠 권지완의 입에서 억울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죽여도 시원찮을 분노에 사로잡힐 지경이었고, 더구나 창피함은 태우의 몫만이 아니었다. 유치한 짓을 벌인 것만으로도 스스로 창피해 죽겠는데, 그걸 기어코 또 권지완에게 발각되었다.
이 와중에 그 가슴팍은 조준하지 못하고 발끝을 향했다. 어딜 맞더라도 아웃만 시키면 그만이다. 철컥, 재빨리 장전한 총의 방아쇠를 단숨에 당겼다. 그러나 들리는 소리는 유쾌한 총성이 아니었다.
“난 도와주러 왔는데, 바로 죽이려고 하네.”
“….”
“마음을 못되게 쓰니까 하늘이 도와주질 않잖아, 이현아.”
값비싸 보이는 소프트건은 제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 한 번의 충격에 어디가 고장이 난 듯했다. 철컥, 철컥, 철컥. 이현이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도 총구에서 탄환은 나오지 않았다. 턱, 턱 하고 어딘가 막힌 소리만 들릴 뿐이다. 지완과 이현 사이에서 운은 늘 지완의 재수 없는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씨발.
이현은 곧장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가파른 오르막길도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현을 곱게 보내줄 지완이 아니다. 지완은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는 이현을 뒤따랐고, 계속해서 울리고 있는 확성기의 방송은 진작 백색소음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수시로 이현의 팔을 잡아채던 지완이 이번에는 완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 한번 연 그 입을 다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현아, 남자한테 그렇게 쉽게 위를 내주면 내가 서운하지.”
“….”
“무섭지도 않았나 봐. 난 총구가 눈앞에 들이밀어졌을 때… 꽤 무섭던데.”
“그래, 어. 안 무서웠어.”
묵묵히 걸음만 내딛던 이현이 빠르게 뒤를 돌았다. 이 길의 끝이 어딘지도 모르겠고, 이미 꽤나 많이 죽어 나간 것 같은데 이 망할 게임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는 지완의 약 올림이 이현을 멈춰 세웠다. 이현은 좁은 간격으로 따라오던 지완의 명치에 곧장 총구를 들이밀었다. 아슬아슬할 정도의 압박감을 쑤시듯 꽂아 넣었다. 그러나 찌르르한 복통은 이현에게도 일고 있었다.
“그 새끼는 못 쏠 게 뻔해.”
“겁이 너무 없네. 진짜 총 쥔 상대로 그러는 건 허센데. 내가 당해봐서 알아.”
“나도 쏴봐서 알거든. 그러니까 적당히 까불어.”
“또 쏘려고? 하하. 이건 그냥 물감이야.”
“이걸로 쥐어팰 수는 있으니까.”
총으로 맞으면 존나 아프다는 건 모르냐? 이현은 지완의 얼굴을 가격하듯 재빠르게 총구를 들어 올렸다. 지완의 턱 끝에 총구를 들이민 채 완강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흙길을 굽으로 밀어내며 뒤로 물러선 지완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총구가 지완의 턱을 툭툭 쳐올렸다.
“이 게임에 꽤 몰입이 되나 보네. 이번엔 내 위를 올라타 보려나.”
“씨발, 왜 따라와.”
이현은 지완을 향한 총구를 치우지 않았다. 턱 밑, 그 여린 살을 점한 이 운 좋은 때에, 때맞춰 고장 난 제 총이 야속할 뿐이다. 거봐. 내가 여기서 만나면 권지완한테 탄환 박아 넣게 될 거라고 했잖아.
“난 위를 내어줄 의향이 없진 않아.”
“…야, 하나만 묻자. 왜 나냐?”
“채이현이랑 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니까 왜 갑자기 나….”
탕!
이현의 짜증은 느닷없이 지완이 터트린 총성에 의해 가려졌다. 바로 옆에서 울리는 갑작스러운 총성에 이현은 바짝 언 채로 떨떠름하게 시선을 낮추었다.
지완의 가스 소총은 이현의 어깨 위에 걸쳐 있었고, 그 총구가 향한 곳은 이현의 등 뒤였다. 그제야 이현은 제 어깨 위로 올라탄 묵직함을 알아차렸다. 소총 거치대가 된 이현의 뒤로 억울함이 잔뜩 묻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완이 무엇을 겨냥했는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될 법했다.
“선배님…! 같은 팀을 쏘시면…!”
- A루트 ‘가’팀 5번 OUT, ‘가’팀 5번 OUT
이현이 천천히 뒤를 돌자 파란 잉크가 잔뜩 묻은 유도부원이 울상을 지은 채로 주춤거리고 있었다. 지완에게 무언가 해명을 바라듯 저격당한 후배는 지완을 바라보았으나, 지완은 이현의 어깨만 툭툭 두드릴 뿐이었다.
“내가 그래 봐야 될 거 같아.”
“선배님…?”
후배는 얼떨떨한 눈으로 지완을 바라보다가, 차마 구시렁대지도 못하고 터벅터벅 게임 구역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대답을 기대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이 바닥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야, 너 지금 뭐 하냐?”
“대화가 끊기면 좀 그렇잖아. 어때, 이 정도면 처음치고 잘하지 않았어? 보고 배운 값은 한 거 같은데.”
제 편에 의해 아웃당한 상대 팀원의 미련 가득한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이게 무슨…. 아니, 그보다 뭐라고?”
보이는 족족 아웃시킬 모양인지, 지완은 느릿하게 주변을 살폈다. 대화가 끊기는 게 싫다던 지완은 모순되게도 입을 다물었다. 이현의 어깨 위에서 개머리판을 싱겁게 내릴 뿐이다.
이제야 다시 들리는 확성기의 방송 소리가 끊긴 대화를 대신했다. 몇 번의 탈락 방송이 나오긴 했는데, 몇 명이 아웃되었는지는 이현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른 곳에서 대치는 끝난 것인지, 이 게임이 대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파악되지 않는 이현은 골똘히 확성기를 노려보다 미간을 구겼다.
다시 한번 이현에게 복통이 찌르르 일었다. 달아난 줄 알았던 열 기운도 슬금슬금 올랐고, 답답함에 마스크를 턱밑으로 내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권지완, 네가 착각을 하는 거 같아서 내가 똑똑히 말하는데, 난 싫었어. 아주 싫었어. 당연하잖아. 이걸 말로 해야 하냐?”
“….”
“그때 뭐가 어쨌든… 그건 실수야. 어쩌다 그렇게 됐겠지. 연애를 너무 안 해서… 그건 씨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나 정신 차려. 여자가 질린다고 남자를… 토 나온다, 권지완. 정말로. 차라리 연애를 해.”
꽤나 가까이에 닿아있는 지완의 몸을 밀쳤다. 아무 곳에나 손을 옮겼을 뿐인데 군복 위로도 감겨 부딪히는 근육에 괜히 소스라쳤다.
“연애? 아, 섹스는 연애하는 사이에…. 그건 잘 알지, 네가 그런 거. 내가 보기엔 그냥 병신 같긴 한데.”
지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통상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건 이현이 아닌 지완임에도 불구하고 지완은 오히려 그런 이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지완과 이현은 놀라울 만큼 비슷한 얼굴로 서로를 훑어 내렸다.
“연애해, 나랑. 그럼 돼?”
잠깐의 고민을 마친 지완은 한 걸음 앞서가 더한 경악을 이현에게 선사했다. 이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저절로 벌어지는 입에서는 차마 터져 나오지 못한 비명이 고였다.
지완은 탐탁지 못한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했다. 내가 양보해주겠다는 듯, 마지못한 곤란함이 물씬 밴 피곤이.
“…와. 하하. 널 따라가지를 못하겠다. 도저히 따라가질 못하겠어.”
끝끝내 이현은 탄식하며 팔을 뻗었다. 한 손은 지완의 총열을, 다른 한 손은 지완이 손가락을 걸고 있는 방아쇠로 향했다. 곧장 총구를 들어 올려 자신의 가슴팍을 조준한다. 지완의 검지 위로 포개진 이현의 손가락은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권지완, 미쳐도 곱게 미쳐.”
탕!
- A루트 ‘나’팀 1번 OUT, ‘나’팀 1번 OUT
이현의 가슴팍에서 터진 지완의 탄환은 그대로 파란 잉크를 이현의 볼과 턱까지 뿜어냈다. 달갑지 않은 잉크의 화학 냄새가 곧바로 이현의 코를 마비시켰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입술까지 튀자 이현이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을 쓸었다. 혀끝부터 퍼지는 불쾌한 맛에 서둘러 입술을 다시 숨겼지만.
“너랑 계속 이러고 있느니 그냥 내가 아웃이 되는 게 낫지.”
이러다간 총도 싫어지겠어. 이현은 서둘러 지완을 지나쳤다. 소매로 벅벅 제 목과 턱을 닦아 내었다. 푸념 같은 이현의 말은 지완이 가로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완의 총성이 가로챘다. 탕! 다시 한번 시끄러운 총성이 이현의 뒤에서 울렸고, 제 팀을 아웃시킨 것도 모자라 스스로를 아웃시킨 지완은, 이현과 같은 곳에 파란 잉크를 터트린 채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