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51)

#89

이현은 방탄조끼의 끈을 바싹 조였다. 정석적인 방탄조끼는 아니었고, 당연히 레저를 위한 가벼운 버전이었으나 에어소프트건 총알쯤은 막기에 충분해 보였다. 탁탁 방탄조끼를 쳐보며 강도를 확인했다. 전문적인 레저 스포츠를 유치한다더니, 장비 하나는 꽤 봐줄 만했다. 이현은 오랜만에 들어보는 에어소프트건을 가볍게 쥐었다. 평생 입을 일 없던 군복을 이런 곳에서 입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른 팀원들은 주어진 부품들을 이리저리 견주어가며 옵션을 채워나가고 있었으나, 이현은 순정 그대로를 유지했다. 열심히 임하고 싶은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한숨만 입술 사이로 피식피식 새어 나왔다. 그냥 빨리 죽고 끝내자.

체격 좋고 체력 좋은 재민도 고민 없이 선발되었고, 정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놀랍게도 정연은 람보로 선정되었다. 허를 찌르자는 정연의 자기 어필은 설득력이 넘쳤다.

누나, 몸은 좀 괜찮겠어요? 재민이 뒤에서 조심스레 물었지만, 정연은 씩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재민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 말린다고 들을 정연도 아니었고.

이번 게임은 람보가 존재하는 깃발 뺏기 게임이었다. 모든 팀원이 총에 맞으면 게임이 끝나는 단순 서바이벌이 아니었다. 각 팀에서 람보 한 명을 지정하고, 그 람보가 상대 팀 진영의 깃발을 뽑아 들면 이기는 식이었다. 사격부와 유도부, 그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적당히 합의를 본 것이다.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성인들끼리 친목전 따위에 열을 올리는 모습이 남들 눈에는 이해되지 않겠으나, 선수들은 진심이었다. 연패의 오명을 씻겠다며 사격부가 유도부보다 조금 더 진심으로 임하고 있긴 했다.

정연은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주어진 글록에 탄창을 집어넣었다. 철컥 하는 소리가 경쾌하다 못해 경망스러웠다. 람보는 글록을 소지한다. 그게 힌트라면 힌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채이현한테 스나이퍼를 맡기는 게 나아. 진영 고지가 높으니까 아래에서 올라오는 새끼들 다 쏴 죽이면서 깃발 지키면 되잖아. 적중률 제일 높은 애가 맡아야지.”

게임이 시작되기 10분 전, 보호 고글을 쓴 정연이 팀원들을 불러 모아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지금 정연은 신이 나 대장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잘 어울렸다. 군대까지 갔다 온 선배 한 명도 그저 끄덕끄덕 고개만 조아렸다. 그렇지, 그게 맞지. 하면서.

“아녜요. 이현이 형은 설렁설렁 굴다가 죽는 걸 목표로 하고 있을걸요? 그냥 버리는 카드로 쓰는 게 나아요.”

군복은 끔찍하다며 찡찡거리던 재민도 안전모의 줄을 꽉 조이며 정연의 말에 의견을 덧붙였다.

너까지 이런 거에 지금…. 이현은 기가 찬 얼굴로 재민을 돌아보았다. 재민의 두 눈은 결연한 의지로 반짝였다. 둘러본 모든 선수들의 눈빛이 그랬다. 심드렁한 건 딱 하나, 이현 혼자였고, 그 외에 내키지 않아 하는 것은 어딘가 불쾌한 낯짝의 태우 정도였다. 그 지랄을 했으면서 구태여 참여하는 진태우의 속내가 영 의심쩍었다. 참 피곤하게 산다. 이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래. 난 수색이나 할게.”

이현이 손에 들고 있던 소총을 어깨 위로 걸쳤다. 하품을 참지 못한 이현은 얼굴을 돌리며 입을 가렸다. 군복에선 좋지 못한 냄새가 스며 나왔다. 으, 새 옷 냄새. 이현은 황급히 탈취제를 찾았다. 그 와중에도 전략회의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들뜬 정연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금연이 정연의 흥분을 이상한 방향으로 돋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

‘누나, 이현이 형은 혼자 가요?’

‘쟤도 위험 상황에 놓이면 총 들겠지. 어차피 팀 짜줘 봤자 소용없을 걸. 원래 솔플이잖아, 쟨.’

‘누나 진짜 무서운 사람이구나.’

왜 13대 13일까, 그 의문은 정연의 지략에서 풀렸다. 서로의 진영 사이에는 세 가지 루트가 있었다. 남아서 진영을 지키는 넷, 그리고 B와 C루트 각각 4명씩. 그리고 한 명 남는 이현 혼자 A루트를 도맡았다.

“유도부 돼지 새끼들 상대로 너무 외로운 몸빵이네.”

이현은 소총으로 주변 풀을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겨울바람에 바싹 마른 흙길이 군화 아래에서 퍼석거렸다. 안에 입은 목티를 턱까지 끌어 올렸으나 그놈의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면제라 다행이야, 혹한기 훈련은 죽었다 깨나도 못 하지.

정연이 브리핑을 마무리하자 게임은 지체 없이 시작되었다. 이현은 정연의 브리핑을 한 귀로 흘려듣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의 흥까지 굳이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스폰십 안 들어왔으면 어쩔 뻔했냐, 너희들.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현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대강 살폈다. 주변 곳곳에는 CCTV와 확성기가 달려 있었다. 아마 이 영상들도 프로모션에 사용이 될 것이다. 돈 퍼부은 서바이벌장 아니랄까 봐, 나무 사이사이에 설치된 CCTV와 확성기까지 군청색으로 위장이 되어있었다. 뭐가 됐든 FPS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환장할 만큼 매력적인 곳이겠으나….

“저쪽 람보는 누구려나…. 권지완은 아니겠지. 그건 너무 뻔하니까.”

이현에겐 아니었다. 이현에겐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마주칠지 모르는 초조함이 입을 바싹 마르게 했다. 아니, 그런 미지의 초조함 때문은 아니었고, 언제 어디서 ‘권지완’과 마주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컸다.

권지완과 마주치기 전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아웃당하고 싶었다. 그 새끼를 마주한다면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대가리를 후려칠지도 모른다. 그보다 수치스러움과 당황스러움으로 이현이 먼저 뒤질지도 모르고.

탕!

- B루트 ‘나’팀 3번 OUT, ‘나’팀 3번 OUT

입술을 축이던 이현에게 멀리서 총성이 들려왔다. 터벅터벅 힘없이 걸음을 옮기던 이현은 덤덤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이어 확성기에서는 B루트에서 ‘나’팀의 2번이 아웃당했다는 방송이 반복되었다. ‘가’팀은 유도부, ‘나’팀은 사격부였다. 벌써 사격부 두 명이 아웃당한 것이다.

“이쪽으로 와서 나나 죽이라니까.”

이현에게 팀원 하나하나의 번호까지 기억하는 의지는 당연히 없었고, 정연이 향한 C루트가 전멸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람보가 죽었다는 건 게임이 끝났다는 소리니까.

총성을 들어보면 일반 소총 같은데…. 이 정도면 사격부의 수치다. 일반 소총에 선점을 내주었다니. 이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 B루트 ‘나’팀 4번 OUT, ‘나’팀 4번 OUT

이게 뭔 일이야. 2번의 아웃 방송이 끝나자마자 4번의 아웃 소식이 잇따랐다. 총성도 없는 걸 보면 이번에는 스나이퍼 건 같은데.

이현은 괜스레 들고 있는 소총을 살펴보았다. 이현이 늘 사용하는 경기용 소총과는 확실히 달랐다. 프론트 사이드에 박혀있는 가늠쇠가 델타형으로 박혀있어 시야를 방해했다. 도트 사이드도 이현에겐 낯설었다.

이거 익숙해지려면 몇 발 좀 쏴봐야겠는데. 다른 선수들이 연신 연습 격발을 할 때도 심드렁했던 이현이다. 멀리 있는 나무를 조준해보려 했으나, 이내 관두었다. 누군가에게 쏠 생각도 없는데 익숙해져 봤자 무엇하겠는가.

한시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무엇보다 ‘안전하게 죽기’가 최우선이었다. 다치는 건 사양이다. 게임에 들어가기 전, 총감독이 넌지시 건넨 경고 아닌 경고도 이현의 발목을 붙잡았다.

‘채이현이, 너 이번에도 몸 제대로 간수 안 하면 큰일 난다. 알지? 올림픽이 6개월도 안 남았어. 이 썩을 놈의 지자체들이 뭐 이딴 걸 유치해서는….’

‘그럼 감독님 재량으로 절 좀 빼주시지 그러셨어요. 아니면 스폰십을 거절하셨어야죠.’

‘날이 갈수록 채이현, 이놈 버르장머리가 없어져. 썩을 놈.’

이현은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총 끝으로 주변 풀숲을 훑어댔다. 발걸음은 미적거릴 뿐, 앞으로 나갈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이현을 채근하듯 멀리서부터 희미한 비명이 들려왔다. 확성기에선 다시 한번 사격부원의 탈락을 고하는 방송이 울렸고, 순간 이현의 입에서 터져 나온 기침 소리가 확성기의 소리를 잡아먹었다. 반사적으로 제 입을 가려 기침을 막고 난 후에야 이현은 자신에게 열 기운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B루트 ‘나’팀 5번 OUT, ‘나’팀 5번 OUT

“B루트 전멸이네.”

발을 동동거릴 정연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짓궂은 웃음이 이현의 입가에 서리는 것도 잠시, 이현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B루트를 전멸시킨 유도부가 다음으로 향할 곳이 C루트일지, 이현이 있는 A루트일지, 이제 반반의 확률이었다.

꽤나 평이했던 지금까지의 길과 다르게 이제 이현의 눈앞에는 펼쳐진 길은 경사가 꽤 높아 보이는 오르막길뿐이었다. 정말 빌어먹을 산. 이현은 이제야 발뒤꿈치에 힘을 주었다.

“….”

‘가’팀과 ‘나’팀의 탈락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며 이현이 더 깊은 숲으로 들어설 때쯤, 기다리기라도 한 듯 전방 풀숲에서 흙길을 지르밟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은 조심히 정석 자세로 소총을 견착했다. 이 정도 거리라면 근접전이다. 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나서도 보이지 않는 상대와의 묘한 대치는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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