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아?
몸을 풀던 이현이 살짝 뒤를 돌았다. 길쭉한 팔을 뒤로 뻗어대다가, 그만 누군가의 머리를 치고 만 것이다. 머리인지, 어깨인지. 세게 부딪힌 건 아니었지만 이현은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아까는 잠에 취해 제대로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이현이 잠들고 나서야 탑승한 건지 모르겠으나… 공교롭게도 이현의 뒷자리를 차지한 건 태우였다.
“아.”
이현은 못 본 사이 더욱 초췌해진 태우의 꼴에, 의도치 않은 탄사를 내뱉었다. 반가움은 당연히 아니었고, 동정이나 연민도 아니었다. 이현은 심드렁하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약을 올리기 위한 짓은 아니었으나, 태우는 말없이 이를 바득 물었다.
“내리면 로비 가서 배정된 룸 키 받고, 짐 푼 뒤에 2층 다이닝에서 밥 먹으면 된다. 우리는 이번 전지 내내 1층 아니고 2층 다이닝 사용하니까 헷갈리지 말고 애먼 곳에서 밥 찾지 마라. 알겠냐?”
선수용 버스에 탄 코치 한 명이 그만저만하게 안내를 전했다. 아직도 몸이 찌뿌드드한지 이곳저곳 몸을 두드리던 이현은, 룸 소식에 재민을 돌아봤다. 우리 룸 배정됐어?
“형, 진짜 형은….”
“내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그래. 나 몇 호야?”
“형은 독실이죠. 2108호요. 웬만해선 슈페리어룸 2인 1실로 지정받은 것 같은데, 형만 감독님들이랑 같은 층이더라구요.”
그래? 이현은 감흥 없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같은 종류의 버스들은 이미 옆에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감독님들이랑 유도부 먼저 내리고 우리가 마지막이니까 천천히 짐 챙겨.”
버스 안에 들뜬 호흡이 금세 차올랐다. 호텔 리조트는 겨울 산에 둘러싸여 있었다. 눈으로만 봐도 맑고 찬 주변 공기는 진천의 공기와 또 달랐다. 포항 전지가 이번 처음은 아니었으나, 오랜만에 선수촌을 나선 선수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현은 그 사이에서 조용히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창에 슬쩍 비친 제 모습을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아, 머리가 좀 길었네. 호텔에 머리 자를 곳이 있던가…. 정도의 상념을 시작으로, 정 안 되면 직접 가위로 머리를 자를 생각까지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현이 손날로 창의 서리를 닦아내자, 옆 버스의 문이 열렸다. 유도부 선수들은 하나둘 버스에서 내렸다. 선수 한 명이 버스에 내릴 때마다 좁은 버스 문이 꽉 찰 정도였다. 재민이 다시 이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이현이 무심히 대꾸했다.
“형, 오늘 오후에 친목전 있는 건 알고 있죠?”
“친목전? 그게 왜 오늘이야? 원래 마지막 날 아니었어?”
“그럴 줄 알았어요. 스폰십 때문에 이번 전지는 첫날 하는 걸로 바뀌었잖아요. 그럴 리 없겠지만 밥 너무 많이 먹지 마요, 형. 크로스컨트리 하다가 토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 재민아. 그 열정으로 꼭 이겨라. 유도부를 아주 작살내 버려.”
열을 올리는 재민을 뒤로한 채, 이현은 창밖의 유도부를 찬찬히 살폈다. 여전히 이현의 눈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친목전이 오늘이라니. 이현은 눈을 끔뻑였다. 참여할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이번엔 전지에 참여한 사격부 인원이 훨씬 많으니 이현이 굳이 참여하지 않아도 충분할 터였다. 그리고 예전 같았다면 모를까… 이젠 그럴 이유도 없었다.
한 스무 명 나왔을까, 멀끔한 얼굴의 지완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버스 문을 천천히 빠져나왔다. 검은 롱패딩은 지완의 종아리 언저리쯤에 닿아있었고, 손에는 가벼워 보이는 더플백이 들려있었다. 백팩조차 없었다.
쟨 나보다 더하네…. 이현은 무심코 심심한 감상을 되뇌었다. 이현이 그런 무방비한 눈길을 내준 것은, 이게 다 잠에서 덜 깨어났기 때문이다.
지완은 가볍게 제 턱을 쥐고 고개를 꺾었다. 지르감은 눈 위로 겨울 햇빛이 내려앉았다. 눈이 부신지 지완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불투명한 창문 너머에서도 지완의 긴 속눈썹은 아주 쉽게 이현의 눈에 들었다. 햇빛을 받아 얼굴을 찡그리는 지완의 모습은 유별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질릴 만큼 숱하게 봐온 장면이 종종 낯설게 느껴진다는 점이 의문이었고, 그건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지완은 이현의 속내에 답을 하듯, 보기 좋게 입술을 축였다. 아직도 그 입술 위에는 상처가 선명했다. 개가 물어뜯은 것 같기도 했고, 고양이가 할퀸 것 같기도 했다. 사정 모를 남들이 본다면, 실로 그리 생각할 것이다.
별안간 다시 떠오른 불면증의 원인에, 이현은 급하게 고개를 털어내었다. 씨발. 맞다. 이거 개같은 상황이었지.
이번 전지훈련만 잘 버티자. 최대한, 어떻게든, 저 새끼와 마주치지 않으리라. 전지훈련만 잘 버텨내면 올림픽이고, 한동안 가까이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현은 질끈 감은 두 눈 아래로 다짐했다.
“다들 미적거리지 말고. 지금부터는 정신 똑바로 차려라!”
코치가 때맞춰 사격부를 채근했다. 이현은 창가에 머리를 얕게 박았다.
*
“저 안 해요. 안 합니다.”
“네가 선택할 사항이 아니라니까. 왜 별것도 아닌 일에 열을 내?”
다이닝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건 확실히 나빴다.
이현은 8층에 마련된 세미나실에서 매섭게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전지훈련 기간 사격부 회의실로 사용될 장소였고, 점심을 마친 사격부가 소집되어 있었다.
“따질 거면 진작 따졌어야지. 확인 안 한 게 네 잘못이지, 내 잘못이냐? 그러니까 똑바로 확인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냐.”
“감독님, 사격부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진 찍을 때만 합류할게요. 그럼 되잖아요.”
그 망할 놈의 스폰십이 문제였다. 사람도 많겠다, 이번 친목전은 이현과 상관없을 줄 알았더니 스폰서에서 내건 계약사항에는 이현이 명백히 기재되어 있었다. 친목전은 명목뿐인 허울이고, 마운틴 레저 스폰십 탓이다.
감독이 이현을 불러다가 미리 고지를 하긴 했었다. 다만 그 말이 애매모호했고, 이현의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스폰십에 채이현이 빠질 수는 없지 않은가. 사진 한 장, 영상 한 편에 실릴 채이현의 얼굴이 가장 중요했다. 그 당연한 현실이 이현에게는 아직도 먼 얘기였다. 이현은 여전히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자신을 과소평가한다기보다, 자신의 위치를 때때로 잊곤 했다.
“흐음…. 그래라 그럼. 대신 인터뷰는 못 빠져. 말 바꾸는 게 나도 민망스럽긴 한데, 상황이 달라졌으니 어쩌겠냐.”
“그건 상관없어요.”
“참나, 인터뷰를 성가셔했지, 몸 쓰는 경기는 군말 없이 따르던 놈이…. 이제 우리 채 선수도 비싼 값 좀 떠나 보다. 어이고. 세상 살다 별일 다 보네.”
“저 아니어도 할 사람 많잖아요.”
이현이 하기 싫은 이유는 뻔했다. 권지완과 관련된 스폰십이니까. 자칫하다간 정말 권지완의 몸뚱어리에 새로운 탄환을 박아 넣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의 이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이런 이현의 속을 알 리 없는 총감독은 이현의 거절을 난데없는 갑질 정도로 여겼다. 그동안 값비싼 몸값에도 유난을 떤 적 없는 이현이, 이런 간단한 친목전 따위에 열을 올리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이놈이 이제 머리에 피 좀 말랐구만, 하며 혀를 찰 뿐.
“감독님, 그건 너무 불공평한데요.”
그러나 반박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왔다.
“누군 안 귀찮습니까? 채 선수 방만 특실이던데, 다 똑같은 스폰십 자금에서 나온 거 아닙니까? 혜택은 다 받으면서 귀찮은 일은 안 하겠다… 이건 너무 불공평 한 거 아닙니까? 보는 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대놓고.”
감독과 이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격 선수들 사이에서 누군가 손을 들었다. 불만 가득한 그 목소리의 주인은, 태우였다.
총감독의 얼굴은 미묘하게 꿈틀거렸고, 주변 선수들은 아연한 얼굴로 태우와 이현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입을 떡 벌린 채 큰 눈을 끔뻑이는 재민과, 인상을 팍 구기고 태우를 노려보는 정연도 있었다.
아, 진짜 별게 다…. 이현은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짜증 나는 건 태우의 괜한 시비가 아니었다. 제 약을 올릴 수 있을 거라 착각하는 태우의 같잖음이야 그냥 넘길 수 있지만, 이 타이밍에 불거진 게 문제다.
왜 이딴 친목전에. 차라리 특실을 가지고 시비를 걸지. 그럼에도 이현은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총감독이 뭐라 입을 열기 전, 이현이 먼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은편의 재민이 이현을 바라보며 열렬히 고개를 도리질 치고 있었다. 이재민, 쟤 뭐 하냐.
재민은 이현에게 무언의 저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이현이 이상한 쪽으로 튀며 돌발행동을 벌이는 경우가 잦아졌지 않은가. 재민은 혹여라도 이현이 태우에게 맞대응을 할까 싶어 열심히 고개를 도리질 치고 있던 것이다.
물론 이현이 재민의 말을 알아차릴 리도 없었고, 이미 이현은 마지못한 선택을 내린 후였다. 재민의 걱정처럼, 이현이 아무 데서나 소란을 일으킬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누가 누굴 걱정하나.
“할게요, 그럼. 이게 뭐라고 참 살벌하네요.”
“….”
“방금 농담한 건데. 선배님은 안 웃기신가 봐요.”
내가 진짜 권지완… 그 새끼 마주쳐서 목이라도 매면 그건 다 너 때문입니다. 이현은 손가락을 풀었다. 뚜둑뚜둑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심상찮았다.
어딘가 비틀린 이현의 말 한마디에 세미나실은 묘하게 얼어붙었으나, 다른 짜증에 빠진 이현만 인지하지 못했다. 확실히 이현은 점점 누군가와 닮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