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51)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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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 올림픽을 위한 마지막 전지훈련, 동계 전지의 첫날이 밝았다. 일반인들에겐 크리스마스이브, 달콤한 성탄 전야겠으나 선수촌에서 크리스마스 따위는 한낱 쓸모없는 남의 생일에 불과했다.

“형! 이번에도 짐이 이거밖에 안 돼요? 또 스킨로션은 안 챙겼죠? 호텔 리조트 어메니티 질이 별로라니까요. 형 피부 좋다고 너무 자만하고 그러면 안 된다니까.”

멍하니 서 있는 이현의 뒤에서 재민이 덥석 팔을 둘렀다. 이현의 간소한 짐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3주간의 짧지 않은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이현의 짐은 큰 백팩과 가벼운 더플백이 전부였다. 버스를 기다리며 태극 광장에 모여 있는 선수들은 제각기 캐리어 하나씩을 끌고 있었다.

“형, 근데 왜 이렇게 눈이 퀭해요…? 요 며칠 다크서클이 계속 진해져서 안 그래도 걱정이었는데, 오늘은 어제보다 훨씬 심한데요. 무슨 일 있는 거 맞죠, 형.”

무슨 일, 무슨 일이라 함은… 말할 수 있을 리가.

“…아니야. 그보다 좀 업어봐라, 재민아. 피곤해서 눈 뜨기가 힘들어.”

“이거 심각한데요.”

재민은 잡고 있던 캐리어를 앞쪽으로 밀어두고 군말 없이 이현을 들었다. 얼마나 대수롭지 않은 일이냐면, 갑자기 남자 둘이 광장 한복판에서 공주님 안기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흘겨보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다들 감독진이 오기 전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기에 바빴다. 이현처럼 마냥 졸고 있는 이들도 많았고.

물론 공주님 안기는 잠시였고, 이현은 익숙하게 재민의 등 뒤에 안착했다.

저 멀리 입구에서부터 대형버스 네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한 대는 유도부, 두 대는 사격부, 한 대는 양 종목의 감독진 몫이었다.

매 시즌 전지훈련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수는 일반적으로 유도부가 대략 3-40명, 사격부가 6-70명이었다. 덕분에 언제나 사격부엔 선수용으로 버스 2대가 배분되었는데, 짬밥이 좀 찬 선수들은 옆자리를 내주지 않고 두 자리를 차지하는 게 관행이었다. 몇 년 차부터 두 자리, 딱히 이런 게 정해진 것은 아니었고 그냥 눈치껏, 연차 별로 남는 좌석에 한하여 홀로 자리를 이용했다.

“어… 유도부도 이제 내려온다. 저쪽은 매번 단체 행동이네요.”

“선수촌에서 제일가는 콩가루 집안 주제에 별 지랄은 다 한다니까.”

어느새 다가온 정연이 재민의 말을 받아 유도부를 비꼬았다. 태극 광장의 진입로에 유도부가 열을 맞춰 모습을 드러냈다. 둔중한 덩치들이 눈에 들자 이현은 고개를 돌렸다. 미치겠네. 버스 언제 타. 이현은 최대한 빨리 버스 안으로 몸을 숨기고 싶었다. 다시 쫓기는 입장이 된 이현은 떫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고개를 돌리자 정연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이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현은 가만히 정연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재민에게 업힌 채로 내릴 생각은 없었다.

얼씨구, 정연은 그만저만하게 이현의 꼴을 비웃으며 재민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네가 고생이 많다, 재민아. 정연도 이미 이 선수촌 생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선수였다.

그러나 정연이 어딘가 꺼림칙해하는 건 재민과 이현의 우스운 꼴이 아니었다. 상태가 좋지 못한 이현의 얼굴이었다.

“얘 상태 계속 이상하네. 왜 이래?”

정연이 이현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답 없이 얼굴을 파묻는 이현이 답답한지, 정연은 패딩 지퍼를 쭉 내리곤 찬바람을 선뜻 맞이했다. 이현은 재민의 등에 더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졸음으로 발음은 뭉그러졌다.

정연아, 너 그러다 감기 걸려. 내가 너냐? 지금 네 얼굴도 안 보여, 패딩에 파묻혀서. 정연은 한심한 이현을 향해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하하. 근데 누나, 어디 아파요? 누나도 안색이 안 좋은데.”

“아, 나 생리 좀 전에 터졌어. 안 그래도 배가 슬슬 아파 온다.”

“하필 전지 때… 누나 약은요?”

“챙겨 먹었지. 그래도 지금 하는 게 나아. 선발전이 전지 막주니까.”

정연을 걱정하는 재민의 종알거림을 자장가 삼아, 이현은 가만가만 졸기 시작했다. 당연지사 어젯밤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자정에 가까워 건물 경비가 훈련실을 찾아왔을 때에서야 이현은 사좌를 벗어나 숙소로 돌아갔다.

그마저도 눈을 충분히 감지 못하고, 침대에서 수차례 벌떡 일어나야만 했다. 이유는 당연지사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결국 이현은 잠 대신 미뤄뒀던 짐 꾸리기로 새벽 시간을 보내야 했다.

“사격-! 종목별 이 열 종대 집합! 어이, 이재민이. 이제 그 애물단지 내려놔라. 그거 이현이 놈이지? 고발함에 저놈 자식 이름 쓰라니까. 이거 선배라고 툭하면 후배 이용해 먹고… 쯧. 김정연, 너는 저쪽 가서 서고, 빨리빨리 움직여.”

박 감독의 호령은 겨우 붙인 이현의 눈을 다시 뜨게 만들었다. 정말 방금 전 눈을 감은 것 같은데, 그새 10분 정도는 존 듯했다. 하하, 재민은 실없이 웃으며 이현을 들썩였다.

형, 이제 내려놓을게요. 재민이 가뿐히 이현을 내려놓자 이현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손을 휘적였다. 주변을 살피니 어느새 이현이 맨 앞이었다. 옆에는 잘 알지 못하는 동료 선수가 멀뚱히 서 있었다. 괜히 어색해하며 이현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으나, 이현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한시 빨리 버스에 몸을 실어 그대로 잠들고만 싶었다.

“맨 앞은 비워두고,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타. 짐 실을 거 있으면 싣고.”

이렇게 막 들여보낼 거였으면 이 열 종대는 왜 부르짖은 것인가. 이현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버스는 히터를 튼 지 얼마 되지 않아 밖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토록 원하던 버스였건만 이현은 군기침을 내뱉어야 했다. 건조하고 추웠다.

감독의 말대로 맨 앞을 비워둔 이현은 곧장 두 번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창가에 몸을 기대고 가방은 대충 옆에 내려두었다. 이현은 짐을 따로 짐칸에 싣지 않았다. 캐리어가 아니라고 해도, 부피가 작지는 않았음에도…. 이현은 아주 익숙하게, 그리고 당연하게 두 자리를 차지했다.

이어 들어오는 동료 선수들이 이현의 뒤쪽으로 하나둘 자리했다. 그중엔 이현처럼 좌석을 독차지하는 선배 선수들도 있었고, 눈치껏 나란히 앉은 어린 선수들도 있었다. 그들만의 팽팽한 눈치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이현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같은 버스에 타게 된 정연은 그새 잠이 든 이현의 얼굴을 밉살맞게 흘겼다. 정연은 아직 두 자리를 당당히 차지할 만큼 연차가 쌓이지 않았다.

이 부러운 놈. 정연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인지, 이현은 퍼뜩 눈을 떴다. 지나가는 정연의 손을 이현이 빠르게 잡아챘다. 당황한 건 정연이었다.

“…또 졸았네. 정연아, 너 앉아.”

짐은 둘게. 걸리적거리면 바닥으로 내려. 잠에 잠식되어 이현의 목소리는 갈렸고, 한없이 낮았다. 정연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배 아프다며. 눈 좀 붙여.”

이현은 졸음으로 무딘 몸을 일으키며 정연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누가 누구보고 눈을 붙이라는 건지. 눈을 다 뜨지도 못한 이현은 정연의 어깨를 가볍게 짚고는 뒤쪽으로 이동했다.

지체 없이 재민이 앉아있는 좌석으로 가 손가락을 까딱일 뿐이다. 나와, 이재민. 내가 창가 앉을 거야. 아, 형! 울먹이는 재민의 칭얼거림만 애달팠다.

“쟨 가끔 이상하게 다정하다니까.”

그걸 언제 들었지. 재민이한테 업혀서 자는 거 아니었어? 정연은 이현의 무심함을 모르지 않았고, 몇 없는 가까운 이들에게마저 종종 내비치는 매정함은, 더더욱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연은 이현이 데워놓은 좌석에 몸을 눕혔다. 히터의 방향은 몸의 가운데 쪽으로 조절이 되어있었다. 채이현이 인기가 많은 이유가 있긴 해. 언젠가 이런 무심한 새끼를 왜 좋아하냐며 이현의 극성팬들을 비아냥거렸던 정연은,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디까지나 친구로서의 애정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어떻게 보면 팬심도 적잖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볼 때나 야박하고 병신 같은 채이현이지, 멀리서 보면 잘생긴 사격계 우상이지 않은가. 아니, 그래도 가끔 너무 병신 같다. 정연은 혀를 찼다.

“형, 창문에 그렇게 고개 기대면 목에 담 와요.”

“담보다 잠이 먼저야.”

이현은 바로 창문에 머리를 처박았다. 창문에 서린 냉기에 몸을 움찔 떨었으나, 그뿐이었다. 형, 목 베개라도 해요. 이현은 작게 도리질 쳤다. 다 성가셨다.

그런 창문 너머로 지완의 두 눈동자가 이현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당연히 잠에 젖어 들어가는 이현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

“형, 형!”

어깨를 흔드는 재민의 손길에 이현은 겨우 눈을 떴다. 어느새 선수들을 태운 버스는 호텔 리조트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뭐야, 벌써? 이현은 뻐근한 목을 돌려 풀었다. 분명 휴게소를 들렀을 텐데,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한 번도 깨지 않고 포항까지 온 걸 보면 정말 쌓인 피로가 지독했던 것이다.

“휴게소에서 형 깨울까 했었는데, 너무 잘 자서 그냥 관뒀어요. 잘했죠.”

“응, 잘했어. 밥은?”

“형이 웬일로 밥을 찾아요? 호텔에서 먹는대요. 형, 일정표 확인 또 안 했어요?”

이현이 쭉 기지개를 켰다. 그리 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아침을 먹지 않아 설핏 허기가 돌았다. 옆에서 재민이 따박따박 쏘아대는 잔소리는 무시했다. 기지개를 쭉 켜며 눈을 질끈 감자 얼굴 근육마저 결렸다. 재민의 옆자리를 선택한 건 실수다. 이재민은 덩치가 너무 컸다. 잠을 자고도 이현의 몸이 불편한 데에는 분명 이재민의 덩치도 한몫을 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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