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너… 설마 나 좋아하냐?’
미쳤지! 거기서 그 말이 왜 나와? 달라붙는 재민과 정연을 떼어두고 곧바로 훈련장에 도착한 이현은 또다시 홀로 자책하고 있었다. 더듬더듬 안전기를 매만지다가 소파에 주저앉았다.
곱씹어보면 이번이 벌써 두 번째였다. 권지완, 그 미친 새끼와 입을 부빈 게 벌써 두 번째라는 소리다. 처음 한 번은 술김에 일어난 실수로, 그 정도의 추잡한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있었으나 두 번째는 아니었다.
‘하하. 정말 설마. 정신 차려, 이현아.’
‘혹시 진심이야? 그런 이유로 설명이 되는 건가. 몰랐는데 채이현 꽤나 감성적이네.’
담담하던 지완의 질타가 치욕스럽게 이현을 동여맸다.
입을 맞춘다는 것, 보수적인 이현에게 그런 일은 연인 사이에서나 가능했다. 좆을 맘대로 놀리며 문란하게 사는 권지완이면 또 모를까. 그래, 권지완. 그게 그 권지완이긴 한데.
권지완의 성별을 여자로 바꾼다고 해도, 지완과 자신의 관계에서 그딴 짓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와중에도 이현의 가정은 지완의 성별을 바꾸는 쪽으로 향했지, 자신의 성별을 바꾸는 쪽으로는 결코 향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아니, 그래도 같은 남자 새끼들끼리. 살다, 살다 씨발!
‘요새 계속 지겨웠거든. 섹스 안 한 지도 오래됐고. 이제 여자가 질리나….’
이현이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결국 이것이었다. 여자가 질린다던 권지완, 그 문란한 권지완은 드디어 핀트가 나가도 한참을 나가버려 호모질을 시작한 것이다. 가벼운 그 지완의 몸이 또 한 번 가볍게 놀아났다. 어디에서 버튼이 눌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거기에 재수 없게 걸린 게 바로 이현, 자신이었고.
놀림도 아니고,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애정도 아니라면, 답은 하나다. 희롱 섞인 호모질. 자신을 게이로 매번 몰아세우던 권지완의 색다른 추삽질.
“어… 채 선수. 어휴, 아직 여기 있었어?”
훈련장을 살피러 온 코치 한 명이 이현을 발견하곤 탄식을 내뱉었다. 코치는 조심스럽게 훈련장 메인 조명을 끄며 손짓했다. 감독진이 아닌 코치들 중 대부분은 이현을 어려워했고, 이현도 그 점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밥 먹으러 안 가? 또 밥때 제대로 안 챙기면 박 감독님이….”
“좀만 더 하고 갈 테니까 불 켜주세요.”
“곧 식당 시간 끝날 텐데?”
“제가 알아서 합니다.”
이현이 의도적으로 무례하게 군 것은 아니었다. 언뜻 건방져 보일 수 있겠으나, 이현은 말을 가릴 여유가 없었다. 지금 나 존댓말은 제대로 썼나? 이현은 그따위 자문을 곱씹고 있을 정도로, 정말 여유가 없었다.
*
그러나 이현 몫의 여유까지, 지완은 두둑이 챙겨두고 있었다. 주객이 전도되고, 상하가 전복된 이 아이러니한 사태에 이현은 어금니를 아득아득 으깰 수밖에 없었다. 이현의 습관은 어느새 정도를 벗어나 턱관절 건강을 해칠 지경에 이르렀다.
“이현아, 저녁이 늦네.”
식당이 마무리하기 직전에서야 선수식당을 찾은 이현은, 몇 숟갈 뜨지도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능글맞은 얼굴로 이현 앞에 기어이 자리한 것은 지완이었다. 퍼 담아 온 도가니 수육을 이현의 식판에 옮겨주며, 지완은 턱을 괬다. 여전히 입술 한쪽은 너절하게 찢겨 있었고, 그 능글맞은 모습은 이현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너 뭐 하냐, 지금.”
“뭐긴. 채이현 기다렸다가 같이 밥 먹잖아. 며칠 바빠서 선수촌 못 들어왔는데, 오랜만에 식당 밥 먹으니까 꽤 맛있네.”
지완은 하는 말마다 구라였다. 바빠서 선수촌에 못 들어왔다는 건 모르겠고, 적어도 맛있다는 말은 확실히 구라였다. 지완은 식사에 한 입도 손대지 않았다. 심드렁히 몇 번 국을 뒤적이더니, 이현의 두 눈만 빤히 바라볼 뿐이다.
“….”
“이번엔 네가 날 차단했던데. 왜. 안 보고는 못 살겠다며. 매몰차네.”
지완은 심심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볼썽사나운 피로감이 혁혁했던 지완의 얼굴은 그새 곱상하게 펴있었다. 살맛 나 보이는 얼굴이다. 배배 꼬인 거슬림과 분노는 이제 지완에게서 이현에게로 전이되었다. 그 수단이 입술과 입술이었다는 게 웃지못할 사실이었고.
“그딴 말 한 적도 없고, 소란 만들기 싫으니까… 제발 좀 꺼져.”
“그건 싫은데. 이현아, 너도 굳이 네 발로 선발전 찾아왔었잖아. 나도 차단당하니까 그 기분 알겠더라고. 그래서 내일 전지 때 합류하려던 거 굳이, 굳이 오늘 온 거거든.”
식당 앞에서 나름 오래 기다렸는데. 지완은 어깨를 부여잡고 팔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기다림의 시간 동안 고생이라도 꽤나 한 듯이.
“그럼 너나 밥 처먹어라. 내가 갈 테니까.”
지완이 선사한 수치스러움에 이현은 매 순간 몰락되고 있었으나, 견뎌내야 했다. 권지완이 바라는 대로 굴어주고 싶진 않았다. 이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지완, 난 네 심심한 호모질에 동참해줄 생각 좆도 없으니까 다른 상대 찾아봐. 네가 나 게이니 뭐니 놀리다가 진짜 착각을 한 것 같은데, 네 그따위 실수를 상대해 줄 바에….”
“실수? 박상현한테 팔 내어준 게 실수고, 그건 실수 아니었는데.”
지완은 맑게 웃었다. ‘맑게’ 웃었다는 건 정말 말 그대로였다. 그 웃음에 이현은 결단했다. 종잡을 수 없는 권지완, 그 선을 이상하게 넘어버린 권지완을 상대하려면 주춤거려서는 안 된다.
이 상황에서 놀림은, 얄궂은 조롱은 자신이 당해야 할 것이 아니라, 가당찮은 호모질을 선보인 권지완이 당해야 할 몫이었다.
“실수로 포장해줄 때 그냥 입 닥치고 감사히 생각해, 이 호모 새끼야.”
“호모라니. 하하. 나도 다른 남자 새끼들한테 관심 없어.”
손대지 않은 지완의 식판 위로, 이현이 제 식판을 던지듯 올렸다. 음식물들이 테이블 위로 살짝 튀었다.
지완은 그새 옆에서 티슈를 뽑아 들고 있었다. 뭐가 불만인지, 눈썹을 치켜올리며 느릿하게 테이블을 닦아 냈다.
“남자가 남자한테 흥분하면 그게 호모인 거야. 호모는 뭐 남자끼리 절절한 사랑이라도 나눠야 호모냐? 차라리 그 절절한 사랑이라도 있으면 납득이라도 되겠지만, 이건 뭐… 그냥 더러운… 됐다, 씨발. 됐어.”
이현은 더 이상의 말을 잇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뒤따르는 지완의 기척을 뻔히 다 알아차렸음에도 이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고작 몇 걸음이었다. 이현의 식판까지 정리한 뒤, 큰 보폭으로 이현을 따라잡은 지완은 선수식당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현의 팔을 잡아챘다.
이미 어두워진 주변은 선수촌을 밝히는 가로등 빛이 전부였다. 훈련에 열을 올리는 선수들의 기합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도 같았으나, 그런 건 이 장면에서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온통 인위적인 조명들 사이에서 이현은 본능적으로 지완을 뿌리쳤다. 이제 지완의 접근은 이현에게 위협이다.
다른 때와 달리 지완의 손아귀는 쉽사리 뿌리쳐졌다. 돌아본 지완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지워져 있었다.
“이현아, 당황스러운 건 알겠는데 말이야.”
“….”
“좋게 생각해 봐. 난 충족하고, 넌 해소하고. 그때 너도 나름 흥분했잖아.”
지완은 길쭉한 손가락으로 치켜 올라간 제 눈썹을 천천히 매만졌다. 심사가 뒤틀려야 할 건 이현 자신인데, 오히려 지완이 어딘가 수틀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은 똑바로 해. 흥분? 같은 남자한테 숨 막히면서 어떤 새끼가 흥분을 해? 넌 화랑 흥분을 구별도 못 해?”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야?”
이현은 해소되지 않는 부아를 손끝에 가득 실어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내가 뭘 몰라? 내가 뭘 알아야 하는데.”
“….”
“아니, 그냥 닥쳐. 아무것도 안 궁금하니까. 그냥 모르는 채로 살게.”
흐트러지는 한숨과 함께 이현은 지완의 말을 되물었다. 뱉으면 다 말이 되는 줄 아나, 그렇게 생각하며.
“이현아, 너 그때 섰잖아. 반쯤. 그게 다 선 거면 좀 실망이고.”
“….”
“화나면 발기하는 타입이야? 남자한테 발기하는 것보다 그게 좀 더 질이 나쁜 것 같은데….”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에 이현은 다시 발끝부터 몸을 굳혀야 했다. 속에서부터 터져 나온 경악은 이현의 머릿속을 점령한 뒤, 온갖 곳을 헤집었다. 통제할 틈도 없이 얼굴에 열이 올랐다. 진위를 따지기도 전에 지완의 담담한 어조가 이현의 귀마저 붉혔다.
이현의 얼굴을 살피던 지완이 얕게 웃음을 내뱉었다. 그 얄궂은 소성은 이현을 칭칭 옭아맸다.
“진짜 몰랐나 봐. 이런, 난 창피해서 모르는 척하는 줄 알았지.”
지완은 유감이라는 듯 제 턱을 쓰다듬었다. 콧잔등을 찡긋거리는 지완은 또다시 이현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주무르고 있었다. 벗어났다고 생각한 지완의 손바닥 위. 이현은 머리털이 삐죽삐죽 곤두서는 감각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 봐. 윈윈 게임이라니까. 남자가 남자한테 흥분하면 호모라고 그랬나? 난 네 호모질에 응해줄 의향이 충분히 있어, 이현아.”
더한 치욕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남아 있었다. 상상도 못 할 것이.
꿈이다. 권지완의 유도 선발전 그날부터, 지금까지. 이건 전부 꿈인 게 확실하다.
이현은 아득해지는 시야에 두 눈을 꼭 감으며 돌아섰다. 그대로 내달리듯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나 재수 없는 지완의 곱상한 미소는 이미 이현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