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51)

#83

이현의 움직임을 읽은 지완이 빠르게 손을 잡아챘으나, 이미 반쯤 먹힌 주먹은 그의 입에서 짧은 신음을 토하게 만들었다. 권지완 상대로 이 정도면 선방이다. 이현은 나름 만족했다.

이현은 새삼 전과 다를 바 없는 저와 지완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방금 전 이현의 입을 불쑥 들쑤신 지완의 손장난 또한 이미 반쯤 잊혔다. 이현은 여러모로 한결같았다.

지완은 구겨진 얼굴을 펴내며 짧게 웃었다. 그 소성은 꽤나 진실했다.

“…하하. 그걸 네가 나한테 빼앗겼다고 생각할 줄은 정말 몰랐는데.”

“….”

“네가 나한테 빼앗긴 게 있었다니. 그거 꽤 짜릿하긴 한데… 이현아, 나도 그딴 건 필요 없어.”

그러나 지완은 잡은 이현의 주먹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현 역시 지완의 악력에 덤빌 생각은 없었다. 지완은 이현의 손에서 라이터를 꺼내 들곤 이현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너 뭐 하냐, 지금. 이현은 불퉁거렸으나 그 이상 더한 대거리 없이 필터를 빨아들였다. 이현은 어느 정도 체념했다.

아직 잡혀있는 손목은 아리지 않았다. 지완은 적절히 힘을 조절하고 있었다. 이상한 곳에서 치밀하다. 섬세하다는 표현으로 형용해 주고 싶지는 않다.

“내가 뺏고 싶은 건 너라서.”

“뭐라는 거야.”

잔뜩 찡그린 이현의 얼굴에도 지완은 차분했다. 지완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이현을 담배 연기 따위에 사레들게 했다. 이현은 침을 꿀꺽 삼켜내며 도리질을 쳤다. 이현은 지겨움 가득한 짜증을 내뱉었다.

“진짜 너 가지가지 한다. 나한테서 날? 순 미친놈이네, 이거.”

“그러게. 나도 참 당황스럽던데.”

지완은 퍽이나 당황스러운 얼굴로, 퍽이나 곤혹스러운 척을 해댔다. 이것 봐, 끝까지 말장난이나 쳐댄다. 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뭐 어쩌게. 가죽이라도 벗겨가게? 아, 네가 그딴 말 하니까 진짜 같아서 존나 소름 끼쳐.”

농지거리로 뱉은 말이겠거니, 싶어 대강 쏘아붙였으나 지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감싸는 살갗은 열감이 높아질 만도 한데, 더럽게도 냉랭한 지완의 손은 도리어 잡힌 이현의 손목만 더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현이 바르르 떨었다. 한 걸음 움직여 지완의 앞에 숨었다. 바람이 가로막히니 그나마 나았다.

“그거라도 벗겨볼까.”

“…야, 적당히 해.”

이현은 닳은 난간에 담배를 비벼 껐다. 뇌 구조가 어떻게 생겨 먹은 새끼야? 작게 중얼거렸으나 고작 한 뼘 거리에 있는 지완이 듣지 못할 리 없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또 재수 없는 얼굴로 빈정거릴 줄 알았던 지완은 잠자코 이현의 손에서 아스러진 담배를 뺏어 들었다.

그거 가지고 뭐 하게. 그보다 손목 안 놓냐? 이현은 공연히 지완의 유도복에 손가락을 닦아 내었다. 손끝은 진작 얼어붙어 있었다. 바싹 굳은 손끝을 인지하고 나니 기침이 터져 나왔다. 감기는 아니었어도 찬 기운이 알레르기처럼 이현을 간질였다.

도복도 이현의 손끝과 다를 바 없었다. 이현은 조금씩 손을 움직였다. 생각 따윈 담기지 않았다. 추위 속에서 열을 찾듯, 이현의 의지를 벗어난 손끝은 더듬더듬 도복을 스쳐 가다 지완의 가슴팍에 닿았다.

담배 냄새가 밴 이현의 손가락이, 새로이 자리한 생채기 위를 긁었다. 아프냐? 손톱 끝으로 상현이 남긴 생채기를 찔러가며 이현이 물었고, 지완은 서서히 얼굴을 구길 뿐이었다.

이현은 잡힌 제 손목과, 그 손목을 감싼 지완의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진짜 안 놔?

이현이 이번에는 엄지로 지완의 가슴팍을 꾹 눌렀다. 지완이 이현의 혀를 눌러 내렸던 것처럼. 이현은 자신이 박아 넣어 만든 그 흉터, 그 위로 새로운 탄을 박아 넣듯 힘주어 짓눌렀다. 지완의 몸이 움찔거렸다. 제 손짓에 반응하는 멍청한 지완의 꼴이 이번에도 이현을 꽤나 만족시켰다.

안 아프냐고. 이현이 빈정거리며 물었으나, 이번에도 지완의 답은 없었다. 밝은 눈동자가 더욱 밝은 호박색을 비추며 이현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현아. 네 말대로… 난 딱히 다른 방법은 모르겠고.”

대신 지완은 느릿하게 이현의 턱을 부여잡았다. 그제야 한없이 가까운 거리감을 인지한 이현이 흉터에서 손을 떼어냈다.

“야, 담배 다 피웠으면 들어가자. 손이 다 얼었는데.”

이현은 애먼 말을 돌리며 시선을 피했으나, 지완의 숨이 넓지 않은 간격을 더 좁혀들었다. 이현이 얼굴을 팍 일그러트렸다.

“이 방법이 아니면, 그럼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보고.”

“뭐가, 미친놈아. 아니, 그보다 들어가자고. 얼굴 들이밀지 마. 거북하니까.”

“그래. 여기보단 안이 낫겠네.”

이현이 데굴데굴 눈알만 굴리던 찰나, 지완이 그대로 이현의 손목을 이끌었다. 부서진 다리로 겨우 버티던 테이블은 지완의 발걸음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재떨이가 테라스 바닥에 부닥쳤다. 재와 꽁초들이 지저분하게 흩어졌고, 이현이 대충 올려두었던 담뱃갑은 난간 사이로 굴러떨어졌다.

지완은 대기실로 이현을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이현이 무어라 물을 새도 없이 지완은 다시 이현의 뒷목을 잡아챘고, 깊숙이 내려썼던 이현의 모자챙을 잡았다.

그러나 이현은 두 번 당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을 치며 간격을 벌렸다. 모자는 제풀에 벗겨져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연유 모를 긴장이 군데군데 관절을 동여맸는지, 이현의 무릎에서 뚜둑 소리가 났다. 이놈의 다리는 꼭 중요한 순간에 맥이 풀린다.

지완의 눈빛은 폭력적이었다. 뭐가 뭔지 알 수는 없어도, 권지완이 정말 미쳐 돌아 여기서 갑자기 자신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멍청한 생각이 퍼뜩 이현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건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지완의 얼굴은 진실로 비틀려 있었다. 위험하다, 순간의 절대적인 판단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아는 방식은 이거뿐이라서.”

“…야, 일단 좀 놔보라고. 뭐가 문제인지 말로 먼저….”

“역겨워도 참아. 이게 내 최선이야.”

지완의 경고와도 같은 말과 함께, 더 이상 뒷걸음칠 곳이 없던 이현의 몸은 소파 위에 그대로 넘어갔다. 풀썩, 쿠션감이 좋지 못한 소파는 이현의 몸을 안정적으로 받치지 못했다.

그러나 얄팍한 충격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몸을 무겁게 누르는 권지완의 체중, 그리고 벌어진 입술 사이를 곧장 침범하는 권지완의 들뜬 숨에 이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읏….”

…이게 뭐야? 당황하는 이현에게 어떤 겨를도 주지 않겠다는 듯, 지완은 두 팔로 이현을 가두고 다시 고개를 틀었다. 이현의 당혹은 지완의 두툼한 입술에 가로막혔다. 지완은 이현의 윗입술을 쓸었다가, 다시 아랫입술을 빨아냈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건 모두 당혹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건 그 버릇없던 손가락 따위가 아니었다. 차갑기만 했던 손가락 하나가 아니었다. 권지완과 어울리지 않는 열감을 지닌 입술이었다.

권지완이 채이현에게 입을 맞추고 있다.

이현은 그 사실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혼돈의 장에서 겨우 눈을 뜬 이현은 그 길고도 짧은 몇 초의 순간 동안 지완의 두 눈을 마주했다. 지완의 밝은 눈동자가 또렷이 이현을 담고 있음을 인지했을 때, 지완의 눈동자 안에 비치는 제 인영을 발견했을 때, 그제야 이현은 사태를 인지했다.

“미치….”

이현은 믿기지 않는 이 상황에 황급히 팔을 뻗어 지완의 어깨를 밀쳐냈다. 아니, 밀쳐내려 했으나, 지완은 한 손으로 이현의 격한 움직임을 저지했다.

잠깐의 간극을 다시 메우며, 지완의 호흡은 이현의 두 입술을 짓이겼다. 숨 쉴 틈도 내어주지 않았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지완은 끈질기게 이현의 입술을 따라왔다.

결국 한계에 다다른 이현이 입술 사이로 작은 빈틈을 만들어냈다. 토하듯 내뱉은 날숨은 다시 먹혀들었다. 지완의 신열이 담긴 혀가 이현의 입속을 능범했다. 축축했고, 물컹거렸다. 혀는 지체 없이 이현의 입 속 여린 벽을 훑고, 민감한 입천장과 혓바닥의 아래를 쓸었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이다. 이현은 들이닥친 이물감, 살갗이 벗겨지는 듯한 소름에 허덕였다. 말도 안 된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지완은 입맞춤이라는 명목으로 이현을 때려눕히고 있었다. 이건 폭력이다. 이건 명백한 약탈의 다른 이름이다.

“씨발, 야! …윽.”

지완은 어떤 분을 토해내는 듯, 혹은 어떤 원망을 토해내는 듯, 그렇게 이현의 모든 숨을 갈취했다. 숨이 막히는 걸 넘어 눈꼬리에 물기가 맺혀 들었다.

몸을 짓누르는 강한 압박과 희롱 가득한 엄습은 이현을 어떤 흥분 상태로 이끌었다. 지완의 밭은 호흡과 생경한 열감이 혀에서부터 퍼져나갔다. 이현의 혈관을 타고 손발 끝까지 오싹하게 만들었다.

똑똑.

“선수님, 안에 계세요? 코치님이 부르십니다.”

순간이었다. 뜨겁게 달궈진 공기를 가로지르고 누군가 대기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현의 온몸에는 다른 결의 소름이 우수수 돋아 올랐다.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상황에서 몸부림치던 이현이, 그대로 짓씹었다.

“씨발….”

들뜬 호흡의 교류는 검붉은 피에 쓸려갔다. 이현이 기어코 씹어 뜯은 게 제 여린 안쪽 살인지, 제 입술인지, 아니면 이 개새끼의 혀인지 불분명했다. 이미 고통보다 섬뜩한 낯선 감각들이 이현의 신경을 점령한 후였다. 터져 나온 욕설도 지완의 것인지, 이현의 것인지, 아니면 환몽처럼 이현의 귓가에서 울리는 착각인지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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