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지완은 가볍게 이현을 조롱했다. 이현의 얼굴에 비친 의문을 읽은 것이다.
그러나 지완의 조롱은 적절한 답이 될 수 없었다. 꽁꽁 싸맨 남자를 관중석에서 발견했다 한들, 누가 그것이 채이현이라고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까. 물론 이현의 의문은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
여기까지 찾아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지완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지완이 내뱉는 호흡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무척이나 평이했다. 이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멀쩡한 그 모습에 인상을 구기는 건 이현이었다. 제 눈앞에 태연히 서 있는 권지완이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너 뭐야?”
“이 상황에서 그 대사는 내가 쳐야 할 것 같은데. 아니야?”
이현아, 여긴 내 대기실이야. 지완은 이현이 바닥으로 내팽개친 대기실 이름표를 가리켰다. 단출한 음성은 도리어 이현의 살갗에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권지완의 변덕이야 말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이미 정평이 난 것이었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아니, 너… 뭐냐고. 왜 이렇게… 갑자기 왜 이래? 사람 패고 나니까 속이 좀 풀렸냐?”
“생각하는 거 한번 놀라워라.”
지완이 팔을 뻗어 천천히 문을 닫았다. 아직 갈아입지 않은 도복 사이로 널찍한 가슴팍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현의 손톱에 긁힌 생채기가 여태 붉었다.
“겁 질린 개새끼처럼 숨어 다닐 때는 언제고. 미친 새낀가, 이거? 너 계속 나 개무시하고 있었어. 기억 안 나? 권지완 맞아, 너?”
“그래. 개새끼처럼 알아서 잘 처박혀 있었는데 채이현은 여기까지 왜 왔을까.”
“….”
“관중석에 앉아있는 널 보고 내가…. 하하.”
뒷말을 웃음으로 끝맺은 지완은 이현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목도리와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각을 잡아 목도리를 개는 지완의 손놀림은 정갈했다.
“뭐가 됐든 이현아, 덕분에 혼자 병신 되는 꼴은 면했어. 좀 덜 억울해지던데. 늘 나보단 네가 옳지. 이번에도.”
“…억울? 아니, 그래서 지금 네가 다시 이따위로….”
안쪽에서부터 느닷없이 밀려오는 짜증이 애먼 곳으로 튀었다. 따져 물을 것들이 많았으나, 자약한 지완의 태도는 익숙한 흐름으로 이현을 이끌었다. 그 익숙한 응수에는 짜증이 좀 더 많이 담겼다.
“그놈의 억울은 대체…. 너희 회장도 판결 억울하다고 아직 난리를 치고 있더라. 그거 너희 집 유전이야? 가진 것도 많은 새끼들이 뭐가 그렇게 억울해? 이번에는 또 뭐가 그렇게 억울했는데. 억울해서 그렇게 사람을 개무시했다고?”
“원래 발버둥 치는 새끼들이 추잡해. 그 서러움을 천재가 어떻게 알겠어.”
“좀 어울리는 지랄을 해.”
발버둥? 재벌 새끼들이 자기 연민 한번 눈물겹다. 일종의 희롱과도 같은 지완의 익살은 무척이나 단조로운 투였다.
지완은 다 접은 목도리를 거울 앞 화장대에 올려두었다. 겉면을 툭툭 쓰다듬는 손길이 미적지근하다. 마스크는 곧장 쓰레기통으로 처박혔다.
“어. 이제 그러려고.”
“….”
“어울리지도 않는 짓 하느라 내가 요새 고생을 좀 했거든. 그럴 필요 없어졌으니 다행이네. 잠은 제대로 자겠어.”
지완은 퍽 침통한 말투를 연막처럼 내세웠다. 삐딱하게 들어 올린 입술이, 그 말에 진심은 없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지독히 가증스럽다.
그러나 한 가지 정도는 분명했다. 지완은 일전에 보였던 기이한 기류를 벗고 보통의 지완으로, 확신은 없었지만 아마도, 비슷하게 돌아와 있었다. 지완을 흔들었던 잠적의 이유가 적어도 조금은 희미해진 듯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이현이 알 수 없었다. 이현의 눈엔 그저 또 한 번의 변덕으로 보일 뿐이었다.
굳이 제 발로 찾아와 우스운 꼴을 직접 바친 채이현. 늘 그랬듯, 싱거운 놀림거리는 지완의 입가에 조소를 녹여냈고, 낯익고 실없는 말을 토해내게 했다. 다만 걸맞지 않은 자조의 빛이 스쳤다. 이현이 떨떠름하게, 그리고 아주 거북하게 받아들이는 작은 차이는 거기에 있었다.
뭐가 됐든 이현에게 이 상황이 달가울 리 없다. 돌연 자신을 피하던 지완은 또 돌연히 일전의 모습들을 지워냈다. 황당함은 응당 이현의 몫이었다.
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또 말린 건가. 이 새끼가 또 나를 놀린 건가. 이현은 작게 이를 갈았다. 턱 언저리의 근육이 도드라졌다.
이현은 성큼 지완에게 다가갔다. 반쯤 흐트러진 롱패딩이 성가셔 벗어 던졌다. 데워지지 않은 찬 공기가 단숨에 이현의 몸을 휘감았지만 이현은 주저 없이 지완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역시나였다. 지완은 이현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창피한 모습들을 빠르게 훑었다. 막상 직접 보니 죽을 만큼 민망하진 않았다. 하기야. 고작 이런 사진이 뭔 대수겠는가. 이현의 입술 사이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사진이 만족스럽나 봐. 그걸 보고 웃네.”
“지금 내가 만족스러워서 웃겠냐?”
“하긴. 실물이 낫더라.”
지완은 제 핸드폰을 뺏기고도 심드렁히 이현을 지나쳐갔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이현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으나, 잠시였다. 이현은 대기실 안쪽으로 향하는 지완을 불러 세웠다.
“…너 어디 가.”
“담배.”
간결한 대답에, 이현도 지완을 따라 뒤를 돌았다. 이현은 대기실을 다시금 쭉 살피다 뒤쪽의 문을 찾았다. 불을 켜기 전에는 어두워 발견하지 못했건만 아무래도 뒤쪽에 테라스가 마련된 듯했다.
진짜 코미디다. 별 오버는 다 떨면서 기어이 여기까지 찾아와, 다시 뻔뻔해진 지완을 보고 나니… 맥이 풀린다. 그 허탈감 위로 흡연 욕구가 대신 자리했다. 물밀듯 넘쳐흘렀다.
이현은 인터넷 창을 끄곤 지완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던진 것과 비슷했지만. 지완은 붕대를 감지 않은 왼손으로 가뿐히 잡아챘다.
이현의 입술이 들썩였다.
“같이 가.”
그건 진실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태껏 참은 것만으로도 기특할 지경이다.
*
지완은 가만히 이현을 바라보다, 뒷문 쪽으로 다가갔다. 잠겨있던 묵직한 문을 열자 더한 찬 바람이 훅 불어 닥쳤다. 이현은 모자를 깊게 눌러 내리며 지완의 뒤를 따랐다. 휑해진 목덜미가 서늘했다. 패딩을 다시 걸쳐 입을까 했으나, 귀찮았다.
3층에 마련된 지완의 대기실 테라스에서는 종합체육관의 뒤편이 내려다보였다. 짐작했던 대로 기자들 몇 명과 촬영팀이 후문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들이 누굴 기다리고 있는지는 구태여 묻지 않아도 뻔했다.
“여기 흡연 구역 맞아?”
난간에 손을 짚은 이현이 지완에게 물었다. 도색이 벗겨지고 낡은 난간은 이현의 배 정도까지 올라오는 높이었다. 짚은 손바닥은 시릴 만큼 차가웠다. 이현은 손을 떼고 대신 팔을 난간에 걸쳐 올렸다.
“….”
지완은 대답하지 않고 대충 고개를 까딱였다.
지완도 이현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찬가지로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난간에 등을 기댄 지완은 대기실 안을 초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힐끔 지완을 살핀 이현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유도복만 덜렁 걸쳐 추울 만도 한데, 지완은 하얀 피부를 그대로 내놓고도 멀쩡했다.
“권지완, 너 25살이야. 이제 곧 26이고.”
“내 나이 정도는 나도 알고 있는데.”
“네가 고딩이냐고. 너 딱 그때 같더라.”
흥분해서 멍청하게 구는 거. 불필요한 소동, 그에 대한 하찮은 질타가 이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네가 그 난리만 안 벌였어도 난 진작 돌아갔어.
“박상현이 좀 불쌍해 보였나 봐.”
“그게 그 말이겠냐? 알지도 못하는 새끼가 너한테 처맞고 뒤지든 말든 내가 뭔 상관이야. 네가 걔 때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그딴 사진 찍힐 일은 없었으니까 하는 소리지.”
“하하. 넌 그 새끼한테 좀 미안해해야지.”
“내가 왜?”
지완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곡선을 그렸다. 결코 반색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맞닥뜨린 지완의 모호한 서늘함이 이현의 찰나를 메꾸었다.
“채이현, 너 때문이잖아. 제대로 숨기라도 하지 그랬어. 널 못 봤다면 또 모르지.”
“….”
“눈앞에 있던 게 하필 박상현이라…. 주리1를 패는 것보단 현명했다고 보는데.”
“그게 뭔 소리야. 나 보니까 화가 나서 박상현을 팼다고?”
“반대지.”
지완은 웃었고, 이현은 질색했다. 이현을 이곳으로 이끈 지완의 도섭은 그저 또 한 번의 변덕이었을까.
터무니없는 지완의 태도에 몸서리치고 싶은 마음은 처음부터 굴뚝같았으나, 그냥 말을 마는 것을 택했다. 이현은 온갖 심정을 한데 모아 깊은숨으로 대신했다. 분노와 당혹, 짜증과 억울, 굴욕과… 믿기 힘든 안도가 섞였다. 그건 자각 없는 자각이었다.
그래, 내가 광대 짓 한 번 해서 달래준 걸로 쳐. 애 같은 새끼.
이현의 이해는 그게 최선이었다. 자존심이 갈렸던 권지완은, 채이현의 광대 짓에 한풀 꺾였다고.
애매모호하고 복잡한 지완의 말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호도되었다. 안타까운 일인지, 잘된 일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늘 그래 왔듯, 지완과 이현은 전혀 다른 톱니임에도 이상하게 매번 맞물렸다.
근데 설마. 이현의 입에서 떨떠름한 의문이 흘러나왔다.
“너 혹시… 기술 일부러 당해줬냐? 그냥 걔 패려고?”
“이현아. 네가 내 몸 굴리는 거에 익숙해져서 잊었나 본데, 내 몸이 꽤 많이 비싸. 그런 병신한테 바치기는 아깝지.”
권지완 이 새끼, 그새 또 기고만장하네.
그래도 뭐가 됐든, 이대로 된 걸로 치자. 차라리 기고만장한 권지완의 재수 없는 꼴을 보는 게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