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이현은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감독진을 통해 전해 들은 얘기들이며, 터져 나오는 기사들이며, 사실 이현은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빈틈을 보이는 권지완이라니, 정말 제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권지완의 괜한 반항, 혹은 불성실한 귀찮음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현은 그 이해 못 할 상황을 직접 목도하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확실히 지완은 보기 좋은 한 방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건… 대충 임한다기보다, 오히려 쫓기듯 한 박자 빠르게 움직여 애꿎은 기회만 날리는 형국이었다. 똑똑한 새끼가 저지를 만한 미스는 아니었다. 무엇이 지완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완에게서 보이는 저 미약한 초조함이 이 경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고작 국내 선수들을 가지고, 그것도 박상현 따위를 상대로 권지완이 그럴 리는 없었다. 그럼 대체 뭐 때문에….
빠르게 치고 들어간 박상현이, 지완의 옷깃을 잡았다. 테이핑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현의 손톱이 지완의 가슴팍을 단숨에 쓸어내리면서, 붉은 생채기가 지완의 몸 위로 길게 그어졌다.
<박상현 선수, 빠르게 옷깃을 잡아채고 그대로 어깨를 권지완 선수의 겨드랑이에 집어넣습니다. 어깨들어메치기, 일어나나요…!>
<…잠시만요! 이게 뭐죠, 지금?>
이현은 순간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에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건 이현뿐만이 아니었다. 동시다발적으로 관중석에서 야유와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이현은 겨우 입가에 빳빳하게 힘을 주며 말들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와, 씨발 저거 반칙 아니야?”
“미친, 권지완 다쳤어? 아니지?”
<어… 이런, 잠시만… 잠시만요! 어, 이거는… 엄중한 위반이죠! 심판이 손을 듭니다!>
<자…! 화면 보시죠. 어깨들어메치기를 권지완 선수가 벗어나려 하자, 박상현 선수, 잡은 권지완 선수의 오른팔을 꺾습니다! 네, 느린 화면으로 보면… 박상현 선수가 권지완 선수의 오른팔을 잡고 저렇게 잡아 내렸을 때, 확실히 오른팔 관절이 꺾였죠! 꺾고 눌러 내리기까지 합니다…! 아, 저게 실수일까요? 제 눈엔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입니다만…. 오른팔을 부여잡는 권지완 선수의 뒷모습이 지금 카메라에 담기고 있습니다.>
<같은 한국 선수들 경기에서 이런 장면이라뇨!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고의성이 아주 짙은데요, 개인적인 감정이 섞였다고 한들, 이건 아니죠.>
그렇다. 이건 반박의 여지 없이 누가 봐도 고의였다. 무엇보다, 박상현의 저 분에 찬 표정이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순식간에 관중석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경기를 카메라로 담고 있던 기자들과 촬영팀들은 분주히 셔터를 눌러댔다.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지르는 감독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현은 저려 오는 손끝을 그제야 인지했다. 손이 희끗희끗해질 만큼 꽉 쥐고 있던 손에는 마른 땀이 자욱했다.
지완은 제 오른팔을 왼손으로 받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저 오른팔은 매번…! 이현은 애먼 곳에서 솟아오르는 제 화를 삭이지 못했다. 정말 저 팔에는 지독한 저주라도 걸린 게 분명하다.
<판정을 마친 주심이 박상현 선수에게 반칙패를 선언합…, 어, 뭔가요. 권지완 선수! 박상현 선수에게 다가갑니다! 주심, 권지완 선수를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심판을 지나쳐…!>
<권지완! 그대로 박상현 선수에게 어깨들어메치기를 선보입니다! 깔끔하게 넘어가는! 군더더기 없는 한판! 한판을 보여줍니다! 같은 기술로 갚아 주는 걸까요? 다친 오른팔로 박상현 선수를 그대로 넘겨 버렸습니다.>
<이것 참 놀랍습니다. 이게 지금 경기가 맞는지… 이런 경기는 제 유도 인생에서도 처음인데요. 주심, 권지완 선수를 말립니다. 권 선수,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지완은 양손을 털어 내며, 미련 없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관중석의 야유는 순식간에 놀란 함성으로 바뀌었다. 주심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것도 반칙은 반칙이다. 이현의 입술 사이로 신경질적인, 그러나 얄팍한 안도가 밴 깊고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저 미친 새끼. 그래, 네가 제일 미친놈이다.
<권지완 선수, 사실 쇼맨십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선수죠! 이미 경기는 박상현 선수의 반칙패로 판정된 상황에, 권지완 선수가 마치 시범 장면을 보이듯 아주 정석적인 기술을 보여주었는데요! 저 기술로 인해 권 선수의 오른팔에 더 무리가 가진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만…!>
<네, 주심, 다행히 별도의 번복 없이, 빠르게 판정을 선언하고 승자를 표시합니다. 유도 국가대표 1차 선발전 남자 일반부 -90kg급 우승은 권지완 선수에게 돌아갑니다! 일그러진 박상현 선수의 표정이 보이는데요. 상호 인사를 하는 모습… 아, 이런. 박상현 선수 끝까지 예의를 차리지 않고….>
이현은 중계를 껐다. 박상현은 앓는 얼굴을 지우지 않은 채, 지완의 경례를 받지 않았다. 박상현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멍청한 새끼. 기어코 선을 넘는다.
이현은 경직되었던 근육을 풀고 좌석에 몸을 기댔다. 그 짧은 유도 경기 4분, 아니 그조차 다 채우지 못한 3분가량 사이 이현은 바짝 얼어붙었다.
몸이 풀어지며 다시금 열이 올랐다. 답답해 목도리를 풀어 헤치려다, 여전히 야단법석인 주변을 생각해 관두었다. 대신 좌석 아래 처박혀 있던 플래카드를 집어 들었다. 얼굴에 부채질을 해가며 열을 식혔다. 얄팍한 바람은 그리 효용은 없었다.
“어…? 어! 어!”
“권지완, 저거…!”
그러나 몸을 늘어트린 이현은 다시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미친…!”
“피…! 피!”
10m짜리 사각의 장내, 그 위에서 내려오자마자….
“저 또라이 새끼, 진짜 처돌았나!”
이번엔 이현의 입에서도, 끝끝내 참아온 기함이 튀어나왔다.
굽힌 허리, 정숙한 마무리, 상현에게 예를 보였던 지완의 경례는 경고였을까. 지완은 그대로 박상현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
그건 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폭행이었다. 망설임 없이 내리치는 지완의 주먹질에, 상현은 정신을 잃은 것인지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코피가 터져 검붉은 혈흔이 상현의 얼굴을 더럽혔다. 관계자들이 달려들어 지완을 떼어 놓았다. 순식간에 경기장은 또 다른 이슈로 난잡해졌다.
지완은 상현을 딱 한 번 더 내리친 후에야 제 발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의사가 호출되었고, 상현은 곧장 들것에 실렸다. 반칙을 쓴 선수가 들것에 실려 나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2층의 기자들과 촬영팀은 좋은 먹잇감을 놓칠세라 서둘러 짐을 정리했다. 지완의 뒤를 쫓는 것이다. 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왕좌왕하다가, 사람들이 우르르 출입구 쪽으로 몰려 관중석은 난장판이었다. 1층이라고 별다를 건 없었다. 종합체육관 전체가 북새통이었다. 질서를 부르짖는 방송이 나왔으나 듣는 이는 없었고, 상황은 진정되지 않았다.
이현은 몰리는 인파에 이리저리 치이고 있었다. 권지완 이 새끼는 진짜 도움이 하나도!
뒤에서 이현을 치고 가는 여러 사람들 때문에, 무선 이어폰 한쪽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설프게 쓰고 있던 안경도 어느새 계단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아, 다 버려, 그냥. 이현은 줍지 않았다. 도리어 나머지 이어폰 한쪽도 빼내어 바닥에 던졌다.
그게 문제였다.
“혹시 채이현 선수님…?”
데굴데굴 굴러간 이어폰은 내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의 발끝에 닿았다. 이어폰 한쪽을 굳이, 굳이, 굳이 주워 든 그 팬은 이현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이거 좆 됐다.
“맞죠! 아까 소리 지르실 때 목소리가 어쩐지…!”
이현의 눈가가 짧게 경련했다. 여기서 들켰다간 진짜 좆 된다. 잡힌 어깨를 뿌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내뱉었다간 들킨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미친! 저 채 선수님 팬이에요! 완전!”
지완의 팬으로 이 자리에 와 온갖 흥분을 토하던 그는 순식간에 이현의 팬으로 돌변했다. 그 성량 높은 한마디에 난리였던 주변의 이목이 단숨에 집중됐다. 출입구로 향하던 촬영팀은 ‘채 선수님’, 그 네 글자에 카메라를 아주 자연스럽게 돌렸다. 직업의식 하나 끔찍하게 본능적이다.
“채 선수? 채이현 선수님이세요?”
여기저기서 알아보는 이들이 하나둘 이현을 불러 젖혔다. 당황한 이현은 황급히 얼굴을 가리고 관계자용 출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미리 봐두길 잘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필 이현이 들고 있던 건.
“채이현도 권지완 응원하러 왔나 봐!”
“미친! 존나 잘생겼어…!”
‘♥권지완♥’ 플래카드로 얼굴을 가린 이현을 향해 수십 개의 카메라가 들이밀어졌다. 미치겠네…! 쏟아지는 셔터음 속에서 이현은 다급히 플래카드를 뒤집어 들었다. 이현은 이제 거의 뛰고 있었다.
그러나 더더욱 안타깝게도.
“다치지 마! 권지완, 다치지만 마!”
“씨발, 플래카드 들고 있는 거 존나 귀여워!”
뒷면에는 ‘♥다치지만 마♥’, 아주 지독히도 징그러운 다섯 글자가 박혀있었다.
어쩌겠는가. 거북하다며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은 이현의 잘못이다. 이현은 그대로 플래카드를 던져버렸다. 이미 사진은 온통 찍히고 난 뒤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