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러나 일어난 건 이현뿐만이 아니었다. 쉬는 시간의 종료를 알리는 구령과 함께 지완이 모습을 드러냈고, 동시에 주변의 모든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막이 찢길 듯한 환호성을 내질렀다. 과장이 아니었다. 이현은 일어나자마자 제 귀를 틀어막았다. 타이밍 한번….
이현은 한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나마 가장자리에 앉은 것이 다행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려 고개를 돌린 순간… 카메라가 이현을 가로막았다. 어느새 방송국 촬영팀이 이현의 바로 옆 계단에 자리해, 팬들의 모습과 내려다보이는 경기장을 담고 있었다. 아니, 뭐 여기까지 와 있어? 이젠 팬들 이벤트도 뉴스거리야?
자리 선정이 놀라울 만큼 최악이다. 이현은 틀어 막힌 제 자리에 어쩔 수 없이 착석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플래카드 따위는 좌석 밑으로 처박았다. 그냥 바닥에 두었다간 분명 제 옆의 팬이 다시 쥐여주리라.
“야…. 권지완… 존나… 존나 미쳤다. 누나 마음을 후벼 파네, 저게 또…! 오랜만에 실물 보니까 말문이 턱 막혀. 잠깐만, 가슴, 가슴…! 더 커진 것 같은데? 봤지? 방금 옷깃 털 때?”
“가슴도 가슴인데, 전체적으로 살이 조금 빠진 거 같은데? 뺄 살이 어디 있다고….”
“진짜 상태 안 좋나 봐. 근데 아프다니까 괜히 더 꼴리네. 오랜만에 백색 도복이라서 그런가? 역시 지완이 흰 피부에는 백색 도복이 딱 맛있게 잘 어울….”
이현은 다급히 이어폰을 꺼내 들었다. 가뜩이나 이것저것으로 얼굴을 둘러싼 이현은, 힘겹게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아 넣었다.
차마 지완을 향한 노골적인 찬사들을 번듯이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팬들의 대화를 엿듣는 건 처음이다. 자기 얘기도 아닌데, 낯부끄러움에 열이 오른 이현은 고개를 털어냈다.
서둘러 핸드폰으로 경기 중계를 틀고 좌석에 등을 기댔다. 어차피 환호성으로 현장 중계는 잘 들리지 않을 터였다. 잠깐의 버퍼링 후 해설위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이제 이번 선발전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남자 일반부 -90kg급 결승전이 시작됩니다! -81kg급에서 체급을 올린 박상현 선수가 끝끝내 결승에 올라왔습니다. 성사된 매치에, 이곳의 열기는 아주 뜨거운데요. 백색 도복의 권지완! 그리고 청색 도복의 박상현 선수가 경기장에 모습을 보입니다.>
이현은 천천히 팔짱을 꼈다. 중계에 따라 이현의 두 눈도 다시 경기장을 향했다.
<그렇습니다. 얼마 전 사태가 사태인 만큼, 이번 매치는 정말 많은 주목을 받고 있죠. 과연 박상현 선수의 설욕전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권지완 선수의 굳히기 한판이 될지!>
<물론 박상현 선수가 권지완 선수를 쓰러트리고 승리를 거머쥘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또 모릅니다. 스포츠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어제 치러진 선발전 1일 차에서, 권 선수가 이전과는 달리 흔들리는 모습들을 많이 보여줬어요?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하는데,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이번에도 아주 손쉽게 결승에 올라온 권 선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오른팔에 힘이 풀리는, 그런 자잘한 실수를 몇 차례 보이고 말았죠. 상대와 승패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건 권지완 선수, 본인에 대한 문제거든요. 그런 허점을 보이는 건 올림픽을 앞두고 매우 염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우세한 경기에서도 권 선수는 결코 가벼이 임해 오지 않았어요. 그러나 어제의 경기들에서만큼은 순간순간 집중을 놓친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죠. 권 선수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한 것 또한 이례적….>
주심과 양 부심이 경기장 안전지대 중앙에 서서 상석에 예의를 표했다.
백색 도복의 권지완과 청색 도복의 박상현이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둘 사이의 4m 거리. 차려 자세의 두 선수가 고개를 숙여 경례했다. 플래카드를 꼭 쥔 수백 개의 손들이 관중석을 메웠다. 환호성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이어 경기에 집중하는 수백 개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박상현 선수의 경기를 조금 전 4강전에서도 전해 드렸지만, 확실히 힘이 남다른 선숩니다. 거기다 권지완 선수가 박상현 선수보다 키가 훨씬 크다 보니, 서로의 깃이 잡혔을 때 권 선수의 힘이 보다 분산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죠.>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키 큰 선수들의 장점은 긴 팔다리를 이용한 다양한 기술 활용에 있겠습니다. 또 권 선수는 힘만으로 경기를 하는 선수가 아니죠. 아주 영리해요. 현 국제 유도에서 가장 까다로운 선수 아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아, 경기는 지체 없이 시작됩니다! 국가대표 1차 선발전 –90kg급 남자 일반부 결승! 이곳, 보령 종합체육관에서 진행 중 입니….>
이현은 음량을 높였다. 내려다보이는 경기장에서, 눈에 들어오는 백색 도복의 권지완. 지완은 드디어 이현의 눈앞에 나타났다. 좀 멀긴 했지만.
지완은 그대로였다.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소리겠지만. 날렵한 얼굴선도 마찬가지였다. 체중 증가에 주력하고 있다더니,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긴, 몸이 남아나겠냐. 그 일정으론 잠잘 시간도 부족할 텐데.
하얀 도복, 그리고 더 하얀 권지완. 남자 새끼가 새삼 놀라울 정도로 하얗긴 하다. 단정히 갖춘 도복을 바라보던 이현의 시선은 허리춤의 검은 띠를 스쳤다가 다시 얼굴로 향했다. 쟨 도복이 꼭 피부 같네. 심드렁한 감상이었다. 그러나.
‘역시 지완이 흰 피부에는 백색 도복이 딱 맛있게 잘 어울….’
…아, 씨발! 이현은 무심코 떠올린 팬의 한마디에 홀로 소스라칠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끼어든, 원치 않게 엿들었던 그 찬사는 건조한 이현의 시선을 순식간에 추잡하게 만들었다. 이현은 들이닥치는 거북함과 함께 자신의 감상을 황급히 치워냈다.
그런 이현을 알 리 없는, 아니, 이현이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 알 리 없는 지완은, 이현의 시선이 고였던 도복을 펄럭이며 능숙하게 경기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능숙함과는 별개로, 잔뜩 구겨진 얼굴에선 지완의 공격적이고 짜증 어린 심기가 여실히 드러나는 중이었다.
쟤 왜 저래…? 경기에 임할 때만큼은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며 차분히 상대를 계산하는 지완이다. 장 코치가 우려했던 그 흔들림이라는 게 무엇인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양 선수 모두 체력적으로 부담이 클 수밖에 없겠죠. 아, 이때 권지완 선수가 빠르게 안다리걸기를 시도합니다! 버티는 박상현… 그러나 결국 넘어갑니다! 권지완 선수, ‘절반’ 하나를 얻어냈습니다!>
지완이 긴 팔을 뻗어 상현의 옷깃을 낚아챘다. 지완의 손은 손가락마다 칭칭 테이핑이 되어있었다. 이현은 시선을 옮겼다.
박상현. 지완을 제외하고, 이현이 인지하고 있는 유일한 유도 선수. 멀리서도 상현의 들끓는 치기는 아슬아슬하게 그 두 눈을 옭아매고 있었다. 꽉 다문 상현의 입가는 파리하게 떨렸다. 이현은 표적을 주시하듯 초점을 놓치지 않았다.
<네! 권지완 선수의 안다리걸기에 박상현 선수가 잘 버텨줬어요! 그러나 권지완 선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기술을 이어갔습니다. 장면 다시 보시죠. 네, 저렇게 오른쪽 맞잡기에서 안다리걸기로, 여의치 않자 즉시 상체를 기울이는 권지완… 왼발! 저 왼발로 중심을 잡고, 허벅다리걸기를 성공시킵니다! 한판승을 얻어내지 못해 아쉽긴 해도, 나쁘지 않은 시작입니다.>
<기술을 즉각 연결시키는 노련한 모습이 과연 권 선수답다, 싶으면서도… 사실 권 선수라면 첫 안다리걸기만으로 충분히 한판을 받아내고도 남을 선수 아닙니까?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일까요. 아, 그런데… 지금 박상현 선수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요, 왼쪽 팔꿈치에 부상이 있어 보입니다.>
<넘어가는 과정에서 방어를 위해 왼팔을 짚었어요. 약간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데요. 네, 다행히 심각한 부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박상현 선수, 다시 일어섭니다. 경기는 재개됩니다!>
“박상현 엄살떠네. 지금 시간 끄는 거지?”
“아, 아깝다. 힘 좀만 더 실었으면 바로 한 판인데.”
“근데 박상현 언제 죽냐. 쟤 때문에 지완이한테 구설수가 몇 개나….”
“그리고 일단 박상현은 존나 못생겼잖아.”
주변에서 나지막하게 새어 나오는 섬뜩한 응원들에, 이현은 마스크 아래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어폰을 꼈음에도 그 진심 어린 음성들은 귀에 드문드문 꽂혀 들었다.
사랑 한번 살벌하다. 이현은 은근슬쩍 팬들을 곁눈질했다. 표정들은 모두 험악했다. 개중엔 눈을 꼭 감고 기도를 하고 있는 어린 학생들도 보였다. 이거 참…. 이현은 발끝으로 만져지는 플래카드를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내가 유도 안 해서 망정이지. 만약 권지완과 같은 종목으로 부대꼈다면…. 자신의 극성팬들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다는 걸 모르는 이현은 속으로 실없는 말들을 흘리고 있었다.
<…자! 권지완 선수! 다시 한번 잡아챘습니다! 아! 그러나 박상현…! 잘 빠져나왔습니다. 권지완 선수, 어제 경기들에서 나왔던 실수가 또 나오고 말았어요?>
<네, 그렇습니다. 권지완 선수가 왼발을 박상현 선수 다리 사이로 조금만 더 밀어 넣고 기술에 들어갔다면 아마 박상현 선수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을 텐데요. 다른 선수들이라면 몰라도, 권 선수는 아니죠! 저건 분명 계산 실수입니다! 저 상황에서 틈을 주지 않았어야 해요. 그게 권지완 선수의 플레인데, 많이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