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총감독은 영 집중하지 못하는 이현의 어깨를 세게 두드렸다. 집중해, 인마. 이현은 주억거리며 고개를 들었으나 여전히 오른손으론 제 왼손을 더듬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데, 이 경기에서만 유독 전박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간 채 선수의 피로가 전박에 쌓였다는 걸 알 수 있죠. 컨디션이 따라주지 않을 때서야 드러난 겁니다. 전박의 각도가 수평을 축으로 현재 30도 이상….”
연구소장과 총감독은 이래저래 말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서류 더미는 한 장 한 장 넘어가더니 그새 끝을 향해 갔다. 집중하라는 감독의 말은 소용없었다. 이미 지난 파이널 후, 몇 차례고 들었던 내용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현의 경기는 변함이 없었다. 이현의 호흡, 이현의 자세, 이현의 격발, 모든 것이 정석이었고, 설령 정석이 아니라 해도 이젠 이현이 기준이 되었다. 국제 사격은 이현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적어도 50m 라이플 3자세, 그 종목은 온전히 이현의 것이었다.
“채이현이. 잘 들었냐?”
“네. 컨디션 조절만 잘하면 되겠네요.”
“그래, 인마. 그래도 지난 경기는 몇 번을 분석해도 모자라. 네가 대강대강 들으니까 계속 질질 끌고 오는 거 아니냐. 나도 귀찮다.”
“아닙니다. 제대로 듣고 있어요.”
“경각심을 가지란 소리야, 경각심. 넌 그런 게 그동안 너무 없었어. 경쟁자가 없다고 자만하지 말고, 지난 경기 말아먹은 네 과거를 경쟁자로 삼아라. 그런 굴욕, 두 번은 없어야지. 넌 좀만 더 욕심을 내면…. 아니다, 걱정이 안 되면, 욕심이 안 나면 차라리 부담을 좀 가져. 네 어깨에 대한민국의 영광이 달렸어. 내 밥줄은 덤이고, 인마.”
“걱정 마세요. 신경 쓰고 있어요.”
이현은 떨떠름하게 제 볼을 긁었다.
그러나 그건 말일 뿐, 신경 쓰는 건 올림픽 따위가 아니었다.
전 세계인의 관심이 몰린, 그 누구누구의 목숨보다 중요한 열망이 향한 올림픽에, ‘따위’라는 표현을 덧붙이는 건 오직 이현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현은 확고했다. 신경 쓰는 건 올림픽 따위가, 아니다.
물 빼고 올 동안 이 서류들 좀 들고 있어라. 감독은 이현에게 보고서 더미를 떠안겼다. 이현에 대한 보고서 아래에는 이전에 감독이 살피던 지완의 보고서가 있었다.
화장실로 향하는 감독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현은, 무심코 손에 힘을 주었다. 가장 밑에 깔린 종이는 신경질적으로 구겨졌다.
이현이 지완의 보고서를 꺼내 들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 용어들은 제외해 가며, 이현은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두 입술을 꽉 다물었다. ‘…오른팔에 힘이 풀려…’.
가지가지 하네, 진짜.
기다리라는 감독의 말을 무시한 채 이현은 건물을 빠져나왔다. 겨울바람에 펄럭이는 종이 더미들을 꽉 쥐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향하는 곳은 훈련장이었다. 사격 훈련장은 선수촌 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이게 다 클레이 사격장 때문이지만, 참 더럽게도 멀다. 그리고 춥다.
1 오후 2:49 { 권지완 너 나 좀 봐 }
그러나 이현이 그 외진 사격 훈련장으로 돌아갈 때까지, 답은 오지 않았다. 쉽게만 사라지던 ‘1’은 지워지지 않은 채 노란 말풍선만 화면 안에 두둥실 떠 있을 뿐이었다.
주머니에 넣지 못한 손은 추위에 아릴 대로 아려오고 있었다. 이현은 주저하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는 한 번 짧게 울리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친절한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건 수신 거부, 혹은 차단이다. 보자 보자 하니까….
1 오후 3:17 { 야이씨발 }
이현은 또 한 번 답이 없는 역정을 토해내야 했다.
*
<보령서 국가대표 1차 선발전 유도대회 개최>
<‘권지완’ 경기는 언제? 국가대표 선발전 일반부 –90kg급 경기 일정 주목>
<‘공정’ 논하던 대한유도회, 시작되는 1차 선발전의 승자는?>
<유도 국가대표 선발전 1일 차 종료, ‘연승’의 ‘권지완’이 남긴 실수>
<권지완, 흔들리는 입지 속 흔들리는 중심? 전문가들 우려 쏟아져>
<‘절반’을 내준 ‘승리’, 권지완의 이례적인 허점… ‘비난’의 여파 떨치지 못했나>
<남은 건 준결승·결승뿐, ‘권지완’ 결승 상대는?>
<올림픽 위해 체급 올린 ‘박상현’, 결승에 올라간다면… 기다리고 있는 상대는 ‘권지완’>
<유도 국가대표 선발전 ‘권지완-박상현’ 결승서 맞붙을지도… 뜨거운 한 판 기대!>
<내부 고발자vs갑질 논란? -90kg급 유도 국대 선발전 결승에 이목 집중>
*
지완을 향해 쏟아지는 기사들 속에서, 이현은 여전히 묵묵부답인 지완을 홀로 내씹었다. 카톡창은 아무리 스크롤을 올려보아도 노란 말풍선뿐이었다. 전화는 차단한 게 확실하다. 아님 핸드폰이 고장 났거나…. 퍽이나. 그럴 리 없지. 거북한 밥알을 대강 씹어 넘겼다. 거의 입에 대지 못한 잔반들을 국그릇에 밀어 넣었다.
“어, 형. 밥 다 남기게요? 웬일로 도가니 수육을 버려요?”
“….”
“도가니 수육 이제 질렸어요? 하긴, 그럴 만해요. 그것도 오래 좋아한다 싶었어.”
이현이 지완에게 퍼붓는 일방적인 시비들에 돌아오는 건, 일방적이고 멀미 가득한 짜증뿐이었다. 비겁한 새끼.
정연은 이현에게 물잔을 내밀었다. 야, 너 체했어? 표정 안 좋다? 정연의 물음에 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수 식당의 널찍한 스크린에선 이제 막 종료된 유도 국가대표 선발전 1일 차의 하이라이트가 재중계되고 있었다. 이현은 발칵발칵 물을 들이켰다. 추위는 지독하게 매서운데 속은 지독하게 들끓는다.
이현의 시선을 따라 스크린을 바라보던 재민이, 씹던 밥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근데 박상현 선배님은 왜 갑자기 체급을 올리셨대요? 당연히 지완 선배 때문에 출전은 불가할 텐데. 유도는 체급별로 출전권 한 장씩 아녜요?”
“어차피 나가리 될 거 어떻게든 권지완이랑 붙어 보려고 그런 거 아니겠어? 하다못해 이목이라도 끌어놔야…. 박상현 곧 퇴출될 거 아냐. 내부 고발 건 잠잠해질 때까지 협회가 봐주고 있는 거 누가 몰라. 난 여태 선수촌에 남아 있는 게 더 의아해.”
재민의 의문에 정연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심심한 조롱이었다.
“그게 맞지. 재민이가 아직 뭘 모르네. 내부 고발은 좀 비빌 만한 새끼한테 해야지, 권지완 선수는….”
“그리고 들어보니까 박상현이 먼저 시비 걸었다던데. 그것도 대단하다고 본다. 난 권지완 선수 실제로 보면 무서워서 뭔 말도 제대로 안 나오더라. 저번에 불 빌리려다가 결국 못 빌렸잖아. 말 못 걸었어.”
정연의 말을 받아 대화에 끼어든 건,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동료 사격 선수들이었다. 얼굴이 꽤 익숙한 10m 공기소총과 50m 권총 선수들이었다. 이현의 눈에 익었다는 말은, 곧 이현보다 선배들이라는 의미다. 그들은 한마디씩 말을 덧붙였다.
“선후배 관계 제일 들먹이는 게 유도부인데, 권 선수 나오고 족보가 존나 꼬였잖아. 딴에 선배랍시고 배알이 꼴릴 만해.”
“우리 사격만큼 선후배 관계 클린한 곳이 또 어디 있냐. 안 그래?”
정연과 재민의 동의를 구하는 양, 선수들은 어깨를 들먹였다. 재민은 헤실대며 고개를 끄덕였고, 정연은 한숨을 내쉬며 혀를 찼다.
“이재민, 넌 뭘 끄덕여. 네 룸메… 그 누구냐, 장 뚱땡이. 걔가 너 엄청 눈치 주잖아. 클린은 무슨. 선배님들, 밥 드세요, 밥.”
정연의 무시와 타박에 우쭐대던 선배들은 다시 멋쩍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근데 박상현도 꽤 잘하긴 하네. 급하게 체급 올렸는데도 4강까지 올라간 걸 보면.”
“이 악물고 하겠지. 저 정도로 잘한다고 치기엔 권지완 선수 벽이 너무 크잖아. 전지까지 살아남는지 내기할래?”
“살아남겠냐고. 유도 비리며 코치 해임이며 일이 그렇게 커졌었는데. 어차피 권 선수랑 같은 체급이니까 내보낼 명분도 딱이잖아. 내가 봤을 땐, 일부러 유도부가 박상현 부추긴 거 같아. 체급 올리라고.”
“박상현도 다른 방법이 없을 테니까, 뭐…. 난 저번 태성 게이트 때 권 선수 착장이 제일 이슈된 거 보고 눈물 찔끔 흘렸다. 박상현이 좀 불쌍해 보이더라.”
“눈물은 아껴뒀다가 네 점수에나 흘려. 아, 갑자기 속 얹히네.”
짧은 남 말은 가차 없이 끝이 났고, 대화는 다른 주제로 바로 넘어갔다.
선수촌에서 퇴출이니 뭐니, 나름 무거운 얘기를 주고받았으나… 내기 따위를 입에 올리는 그 경망한 반응은, 정말로 이런 일쯤은 싱겁기 때문이었다. 정연과 재민도 옆 테이블을 향했던 고개를 돌렸다. 다시 밥을 욱여넣고는 입을 오물거렸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바닥이 그렇다. 그렇기에 모두 그러려니, 적당히 심드렁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억울한 퇴출이니 뭐니 심각해 보여도, 결국 이 폐쇄적인 선수촌을 잠시 웅성거리게 만들 뿐, 유별난 일이 아니었다.
시대가 바뀌고, 시설을 증축하고, 선수촌을 뒤집어엎어도, 이 마을의 구성원들은 변하지를 않는다. 잘 포장된 건 보이는 이미지와 선수촌 내 아스팔트 도로들 정도. 결국 발화자는 실력과 성적이 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