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51)

#75

“채이현! 너 경기력 분석실 안 가? 네 차례 된 지 한참 됐어. 감독님이 찾으시던데?”

이현이 오늘도 점심을 반납하고 웨이트에 몰두할 무렵, 정연이 이현을 불러 세웠다. 기분이 불쾌하고 더러워 근래 밥맛이 바닥을 쳤다. 어느새 정연은 이현의 바로 옆으로 다가와 한심한 얼굴로 이현을 채근했다.

분석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이현은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도 건너뛰더니 오후 일정마저 잊고 있던 이현의 어깨를, 정연이 툭툭 다독였다. 채이현, 너 정말 왜 그래?

“정신 차려. 존나 이상하다니까, 요즘. 올림픽 때문에 그래? 안 하던 짓을 하네.”

“…분석실에서 오는 길이야?”

“응. 나 축 흔들린대서 전완근 집중 코스 들어간다.”

정연이 니코틴 패치를 입으로 뜯으며 왼팔을 흔들어 보였다.

“니코틴 패치?”

“어. 나 이제 연초는 끊으려고.”

“갑자기 왜? 피지컬 체크 때 문제 있었어?”

어쩌면 금연이 당연히 전제되어야 할 운동선수들끼리 주고받기에, 이현의 질문은 어딘가 핀트가 엇나간 것처럼 보였어도… 이 바닥에서는 나름 또 지당한 물음이었다. 니코틴이 순간적으로 가져다주는 집중력과 수행력 향상에 의존하고 있는 선수들은 숱했으니까. 오히려 금단 증상 때문에 성적을 내지 못하고 다시 담배를 찾는 선수들도 허다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마음 다잡는 겸. 분석 보고서 보니까 정신이 확 들더라.”

정연은 말을 마치며 늑장을 부리는 이현을 뒤에서 떠밀었다. 이현이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뜸 들이는 정연의 목소리가 다시 이현을 불러 세웠다.

“…아, 맞다, 이현아. 시아가 전지훈련 일정 물어보더라고. 대답해주긴 했거든?”

떠듬거리는 정연은 그새 찜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머리는 짱짱하고 높게 묶여 있었고, 길지 않은 그 포니테일은 정연이 입을 열 때마다 함께 달랑거렸다. 이현은 가볍게 웃었다.

“개인적으로 연락도 해?”

“응. 단톡 팠어. 이재민 껴서.”

“너, 이재민, 시아. 그거 한번 귀여운 조합이네. 근데 그게 왜?”

“아니… 하세민이 그걸 좀 물어봐 달라고 했대. 근데 하세민이 전지 일정을 왜 궁금해하냐구. 네가 선수촌에서 나오길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존나 찝찝하게.”

하세민, 참 잊힐 만하면 등장한다. 대단하다, 대단해. 그것도 능력인데. 그러나 세민은 더 이상 거치적거리는 이물질 따위의 역할도 부여받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만 해도 과한 처사였다. 세민은 그냥 지완의 부속품 정도다. 그 입에서 지완의 이름을 거들먹거리지만 않았다면 세민은 진작 잊혔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그냥 무시해.”

“저번엔 네가 갑자기 하세민 데뷔를 물어보질 않나. 너랑 하세민, 둘이 뭐 하냐? 서로 연락하는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 통해서 찔끔찔끔… 너 하세민이랑 사이 나쁜 건 여전한 거지?”

괜찮다는 이현의 말을 정연이 그냥 수긍할 리 없다. 걱정과 의문을 늘어놓는 정연을 잠자코 바라보다, 이현은 눈을 끔뻑이며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다.

정연아, 총감독님 나 기다리느라 눈 빠지겠다. 이현의 시큰둥한 대꾸에 정연은 눈을 부라렸다. 야, 이제 와서 감독님 신경 쓰는 척하지 마. 매섭게 치켜 올라간 정연의 두 눈이 현재의 시간을 대신 말해주었다. 1시 50분.

“이현아, 투덕거릴 거면 하세민 말고 권 선수랑 해. 그게 미관상 보기 더 좋으니까. 얼굴 합은 확실히 권 씨랑 잘 맞아.”

정연은 쓸모없는 우려를 놀림으로 바꾸며 이현의 등을 콕콕 찔러댔다. 이현이 손을 대강 휘적이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이현은 스포츠 의·과학센터 3층에 도착했다. 복도의 양옆으로는, 코치진과 함께 영상 분석 결과를 의논하는 여러 랩실들이 늘어져 있었고, 복도의 가장 안쪽엔 경기력 분석실이 있었다.

이현은 맞은편 홀에 마련되어 있는 휴식터로 향했다. 머리가 점점 더 벗어져 가는 총감독의 뒷모습이 눈에 들었다. 미리 와 이현을 기다리고 있던 감독은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저 구식 커피 자판기는 이미 전부 선수촌에서 퇴장했고, 유일하게 이곳에 마지막 한 대가 남아있었다. 이제 스X벅스 커피를 선수촌 어디에서나 마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지독히도 고루했다. 굳이 옛 자판기에 동전까지 넣어가며 다방 커피를 뽑아 마시는 모습은, 누가 봐도 ‘나 운동부 감독이요’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감독님도 컨셉 한번 참 지독하시지. 이현은 서류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총감독에게 다가갔다.

“어, 채이현이 왔냐. 중요한 시기에 정신을 얻다 두고 다니냐, 인마. 핸드폰은 폼이여?”

핸드폰 잘 안 보는 거 아시잖아요. 그럼 늦질 말아야지, 이 자식이. 감독은 종이를 둘둘 말아 이현의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쯧쯧, 이거, 이거. 감독은 남은 커피를 한 모금에 몽땅 비우고는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종이컵은 오차 없이 처박혔다.

이현의 시선은 감독이 들고 있는 서류로 향했다. 이현 자신에 관한 보고서일 거라 생각했으나, 그래프나 이미지들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건 유도부의 보고서였다. 둘둘 말렸던 종이가 다시 빳빳해지자, 가려졌던 보고서의 주인이 드러났다. …권지완?

“이거? 권지완이 놈 건데, 1차 선발전 앞두고 장 코치가 한숨을 푹푹 내쉬기에 좀 들여다보고 있었다. 궁금하냐?”

이현의 두 눈이 의아하게 빛나자, 감독은 끌끌대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닙니다.”

별거 있겠는가. 이현의 부정에도 감독은 페이지를 차르륵 넘겨 가며 말을 이었다.

“최근 대련들에서 권지완이 그놈, 과하게 공격적이라 문제라더라. 흥분하면 빈틈이 나오게 돼 있어. 걱정이 갈 만도 하지. 원래 영리하게 게임하는 놈이, 어디 정신이 빠진 건지. 그러고 보면 너나 저놈이나 정신 팔리는 것도 비슷허다? 뭔 일 있냐?”

“…전 기록에 이상 없는 걸로 아는데요.”

“눈깔이 풀렸잖아, 눈깔이. 아무튼 일단 들어가자. 선생들 기다리신다.”

연습에 목맨 것처럼 굴더니, 뭐? 이현은 감독 손에 들린 보고서를 흘기며 미적미적 감독을 뒤따랐다.

감독과 함께 들어간 곳은 랩실이 아닌 분석실이었다. 어둑한 분석실의 벽 한쪽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경기 분석용 스크린들에는, 눈이 아플 정도로 쨍하게 경기 영상들이 재생되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실행되고 있는 프로그램은 여러 각도의 경기 장면들을 층층이 겹치고, 다시 이리저리 쪼개가며 뭐가 뭔지 모를 분석을 해대고 있었다.

뒤쪽에는 갖가지 그래프들이 벽면을 차지했다. 책장들에는 무수히 많은 서류 봉투들이 일자와 선수별로 빈틈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물품 보관실 같기도 하고, 컴퓨터실 같기도 하다. 볼 때마다 낯선 곳이었다. 이현은 어둑한 시야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현과 감독이 들어오자, 전문 연구원 두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둘을 맞이했다. 익숙한 얼굴들이다.

곧이어 분석실 뒤쪽으로 연결된 별도의 특별실에서 연구소장이 이현과 감독을 불렀다. 몇몇 선수들만 따로 이용하는 공간이었다.

“…이대로 컨디션 조절만 무리 없이 하면 걱정은 없을 것 같습니다. 채 선수야, 뭐 몸 관리가 우선이죠. 다만, 아무래도 지난번 ISSF 파이널과 비교해 봤을 때, 채 선수가 이례적인 컨디션 난조를 겪게 되면….”

연구소장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이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현은 여전히 감독이 한쪽에 올려둔 지완의 보고서를 힐끔대고 있었다.

유도부의 국가대표 선발 규정이 미세하게 변경되었다는, 그래서 또 욕을 부단히 처먹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이현도 알고 있었다. 실상 어느 종목이나 내부 선발전 규정은 툭하면 조금씩 수정이 되어온바, 이번 유도부의 결정이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놈의 ‘보여주기식’ 행보를 위해, 자기들이 세운 선발 규정까지 위반해 가며 야단을 떠는 꼴이 우스운 화제로 대두되었을 뿐이다.

선발전을 별도로 치른다고는 하나, 이전까지 쌓아온 랭킹 포인트의 비율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올림픽 국가대표로 누가 선발될지는, 선발전을 치르기 전부터 대충 확정이 되어있는 수준이었다. 고작 강화 위원 평가와 코치 평가의 비중을 하향 조정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다는 소리다.

“…슬사 시 발목에 들어간 무리감이, 오히려….”

이전까지의 점수 분배가 불공정하다고 말할 수 없다. 편파적이라든가, 비리 논란으로 불거질 일 따위는 결단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놈의 공정 타이틀을 쥐고자 목매는 꼴이 같잖다. 결국 이 또한 ‘권지완’의 이름을 내걸고 쇼를 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 속내가 구질구질하다.

어차피 무슨 지랄을 해도 권지완에겐 달라질 게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겉치레 퍼포먼스에 곤혹스러운 건 여타 선수들이다. 1, 2점으로 선발이 갈리는 선수들만 난처하게 된 것이다.

“…종아리가 사대 지면에 닿아 발을 눕히는 경우에 더 안정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큰 차이는 아니긴 하나, 영상을 잠깐 보시면 본선의….”

그 모든 걸 충분히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기에 더. 이현도 아는 걸 지완이 모를 리 없다.

이현은 제 왼 손바닥을 매만졌다. 튀어나온 마디마디마다, 그 위로 자리 잡힌 오래된 굳은살을 더듬거렸다. 대체 뭐가 문제여서…. 사람 개무시했으면 연습이라도 제대로 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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