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본래는 1월, 주로 3주에 걸쳐 진행되는 동계 전지는, 사격부의 선발전 일정에 따라 올해 안으로 앞당겨진 상태였다.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계속 변동 논의가 오가니 총감독도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감독진의 입장에선 그나마 다행히도, 끝끝내 별다른 수정 없이 진행될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친목 경기니 뭐니 그런 거 없다. 괜한 싸움 휘말릴라.”
“치고받을 일이었으면 진작 난리 났겠죠.”
유도부 돼지 새끼들이 진짜 대놓고 덤벼들 만한 패기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낯부끄러운 사태는 없었으리라. 이현의 덤덤한 말에 총감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그게 아니지. 총감독은 두툼히 접히는 턱살과 함께 둔한 몸을 의자에 한껏 기대었다. 끼익거리는 애달픈 의자 등받이의 마찰음이 생생했다.
“저쪽 집 애들만 문제가 아니다, 인마. 예전 전지를 생각해. 너 배군가 피군가 하다가 권지완 그놈한테 얻어맞고 기절했었잖냐. 너 이 새끼, 올림픽 앞두고는 절대 안 된다.”
“…배굽니다. 나가보겠습니다.”
“바락바락 복수전이나 만들어 달라고 할 줄 알았더니?”
그래, 나가서 몸이나 달궈라. 총감독이 휘휘 손을 저었다. 이현은 까딱, 형편없는 묵례를 남기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노인네 아침잠도 없다니까.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시간은 새트가 막 시작한 새벽 아침이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밖은 어둑했다. 새트를 알리는 휘슬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현이 역전승으로 지완을 기어이 눕히고야 말았던 그날 밤 이후로, 지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2교대로 나뉜 유도부의 훈련 일정은 번번이 이현과 타임이 어긋났으며, 선수촌의 모든 조직들이 정신없이 맞물려가며 선수들을 굴리는 탓에….
아니다. 단순히 그뿐만은 아니다. 교묘히 빗나가는 매 순간들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지완과 이현이 맞닥뜨리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일정 탓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고작 해봐야 이 선수촌 바닥 안이었다. 동선이 겹치는 경우는 무수히 많았다. 선수 식당에서도, 트레이닝 센터에서도, 흡연 구역에서도, 메디컬 센터와 숙소 로비에서도. 지완과 이현은 공교롭게 엇나가고 있었다.
이현은 그 미묘한 차이를 느끼고 있었고, 지완의 다음 행보를 눈독 들이는 것은 기자들만이 아니었다.
*
“와. 백만 스물한 번째 트랙을 돌고 있는 소감이 어때.”
나란히 트랙을 달리던 정연이 목을 길게 빼 주변을 둘러보다 이현에게 물었다. 터무니없는 과장을 해가며, 꽉 다문 이현의 입을 콕콕 찔러댔다.
매일매일 쳇바퀴 같은 훈련 일정. 반복되는 일상. 그럼에도 지루함 따위의 고루한 감상은 끼어들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이 바닥에서 흔히들 하는 말이었다. 정확했다.
“앞에 봐, 정연아. 그러다 넘어진다.”
이현의 무덤덤한 경고에도 정연은 입술을 샐쭉거릴 뿐이었다.
이현은 그러한 이 바닥 생활에 그 누구보다 만족해왔던 사람이다. 잡다한 생각이 끼어들 말미조차 내어 주지 않는 체계. 이현에게는 그간 의심의 여지 없이 최적화된 삶이었다.
그랬었다. 과거형이다.
“지루해, 지루해. 너랑 권 선수 얼마간 자주 붙어먹어서 볼만했는데, 재미없네. 너희 둘 이렇게 심심하게 구는 거 보니까 올림픽 다가오는 게 실감 난다니까?”
“누난 심심할 틈이 있어요? 난 눈 뜨고, 뺑뺑이 돌다가, 기절하고, 다시 눈 뜨고… 그게 전분데. 막 꿈에서도 돌아, 뺑뺑이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 선발전 때문에 손발이 벌써 덜덜 떨려. 이번엔 진짜 잘해야 한단 말이야. 이번 전지 일정 봤어? 존나 빡빡하던데.”
정연이 말하는 ‘붙어먹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현은 의미 없는 정연의 불평에 반응하지 않았다. 이현 대신 뒤따라오던 재민이 속도를 맞추며 대꾸했다.
“봤어요. 숨도 못 돌리겠던데요. 친목전도 없더라구요. 그 재미가 쏠쏠했는데.”
“그게 존나 아쉽지. 이번에 포항이라 드디어 서바이벌 게임이나 한 판 하는 줄 알았더니.”
“그걸 유도부에서 받아들이겠어요? 서바이벌은 무조건 사격팀이 유리한데.”
“그러니까 전멸전 말고 깃발 탈취전! 그런 걸 해야지! 야, 그건 두뇌 싸움이다? 체력 싸움이고. 거의 뭐 고지전? 군대, 전쟁, 전투, 그런 거. 짜릿하잖아.”
“군대요…. 아니, 아시안게임보다 세계선수권 대회가 더 크잖아요. 왜 군 면제는 아시안게임이랑 올림픽에만 주는지 모르겠다니까요? 나 면제받을 만한데?”
“그걸 여기서 화내 봤자, 누난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 억울하면 국방부에 따져. 남 선수들끼리 모여서 청원하든지.”
“그건 그렇죠…. 근데 이미 다녀온 선배들은 그런 문제에 관심이 전혀 없어서 단합이 안 된다니까요. 아, 이번에 무조건 따야 하는데, 메달.”
정연은 해볼 만한 승부가 물 건너간 상황에 퍽 아쉬워했다. 울상을 짓고 있는 건 재민 쪽이었지만.
포항 지자체와 연계된 리조트 스폰십은 서바이벌을 포함한 마운틴 레저를 유치하고 있었다. 포항 전지 얘기가 나올 때부터, 이번이 유도부의 콧대를 꺾을 회심의 찬스라며 사격부 안에서는 나름 들뜬 분위기가 유희 거리처럼 형성되고 있었다.
전지훈련 마지막 날에 이루어지는 친목 번외 경기. 유일하게 머리를 식힐 기회였고, 내리누르는 부담감에서 잠깐이나마 빠져나올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올림픽을 앞둔 마지막 전지훈련은 특히 더 그랬다. 물론 이조차도 승부욕을 들끓게 만들었지만. 뼛속까지 스포츠인의 피가 흐르는 것이다.
“아무튼 불암산 크로스컨트리 기억 안 나? 산에서 뛰어다니는 건 유도부 주 종목이잖아. 아무리 봐도 이게 존나 공정한 게임인데.”
“그래도 우리 러닝 타겟 선수들은 좀 유리하지 않을까요? 누난 해본 적 있어요?”
“어차피 머릿수 맞춰야 하니까 걔넨 빼면 돼. 그리고 전멸전 아닌 이상 잘 맞힌다고 해서 그렇게 유리한 것도 아니고…. 난 국대 후보단일 때 몇 번 해봤지. 아니 근데 이렇게 말해 봤자 뭐 하냐고. 우리가 비벼볼 기회는 이미 나가리됐는데.”
지금까지 벌여 온 족구, 배구, 피구, 발야구, 소프트볼… 하다못해 총감독끼리 각 팀의 자존심을 걸고 잔을 부딪치는 술 대작까지, 사격부의 승률은 그리 좋지 못했다. 뭐든 이래서 근력이 기본이라고 하는 것이다. 묘하게 친목전에 집착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또 하나 이기는 것이 있다면… 번외 경기가 끝나고 사격부와 유도부가 모여 밤새 술을 마시는 그 뒤풀이 현장이었다. 사격부는 유도부 덩치들을 이겨내고 끝까지 살아남곤 했다. 경기의 패배가 사격부의 승부욕을 더욱 고취시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도부는 국대 중에서도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했다. 다른 안주는 필요 없고, 술을 안주로 술을 마시는 무지막지한 팀. 그럼에도 그 위를 점하는 건 사격부였다. 명실상부 대한민국에서 제일 술을 잘 마시는 건 결국 사격부라는 소리다.
총감독은 다음 날 호탕한 웃음을 끌끌대며 ‘확실히 사격부가 장기전에 특출나지. 인내심, 어? 그 끝까지 유지되는 정신력, 우리는 그게 포인트야.’ 따위의 말을 내뱉곤 했는데, 논리는 없었다. 한마디의 당찬 말을 마치고 총감독도 숙취에 골골대었다. 그런 자리에는 결코 참여하지 않는 지완만 멀쩡한 낯이었고, 분위기를 조금 맞추다 자리를 뜬 이현 정도만 버틸 만한 기색이었다.
지완이나 이현 모두 해외 일정으로 전지훈련에 빠질 때가 많았으나, 올림픽을 앞두고는 언제나 참여해왔다. 이현이 참여한 마지막 유도·사격 합동 전지훈련에서, 총감독의 말마따나 배구 경기 중 지완이 던진 공에 맞아 이현이 기절을 했던 좆같은 일은, 지금껏 종종 술자리 안줏거리로 회자되고 있었다. 특별한 대회를 앞둔 상황이 아니라 망정이지. 두 번 다시 유도·사격의 합동 전지훈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러나저러나 좆같은 권지완. 이현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유도부 무리의 선두에서 무덤덤하게 달리고 있는 지완의 널찍한 등이 이현의 눈에 들어왔다. 지완은 일정한 속도로 흔들림 없이 달리고 있었다. 투기 종목들은 다른 종목들에 비해 배를 넘는 바퀴를 모래주머니를 두른 채 돌고 있었고, 점점 뒤처지는 이들도 꽤 많았다. 꼿꼿이 앞만 바라보는 지완의 시선이 어딘가 괘씸했다.
“채이현, 총감독님이 일정 변경 없을 거래? 너 며칠 전에 총감독님이 불러서 면담하고 왔잖아. 예전에 너 기절했었던 거, 그 복수 안 해?”
“언제 적 얘기를 해.”
“뭐야? 왜 갑자기 어른인 척해?”
깔끔히 온점을 찍은 이현과 달리 지완은…. 더럽게 복잡한 새끼가 순순히 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완은 어떠한 반응도,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분명 승기의 깃발은 이현이 손에 쥐었으나.
“채이현, 진짜 너 좀 이상해?”
“내가 뭘.”
“너 요 며칠 표정 썩어 있잖아. 입 꾹 다물고.”
“훈련에 집중해야지. 날도 춥고.”
“추위 같은 소리 하네. 너 지금 몇 겹을 껴입었는지 알아?”
우리 할머니도 이렇게까진 안 입어. 안 덥냐? 이 정도면 너만 거의 한겨울이야. 정연이 장난스럽게 이현의 옷깃을 들쳐댔다. 싸늘한 새벽어둠에도 열이 후끈하게 달아오를 만큼, 몸은 풀릴 대로 풀렸으나 이현은 뜀박질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할당량을 다 채운 상태였다. 이현이 조용히 정연의 손을 잡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