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51)

#72

‘지금 네 방에서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건 안 놀랍냐? 그 쉽지 않은 걸 지금 너랑 내가 해내고 있잖아.’

‘너도 나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어. 아니 아예 시작도 못 했지.’

‘이젠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망치고 싶고, 이기고 싶은데도 봐주는… 그런 게 대체 뭔지.’

‘너 진짜 이기고 싶은 마음은 있냐?’

채이현이 궤도를 달리하면 그 방향을 따라 다시 채이현의 등 뒤에 서면 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에는 제자리가 있다. 각자의 간격을 유지하며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묵은 자리들 위로 쌓이는 퀴퀴한 먼지들은 만지면 더러워질 뿐이다. 그러니 그대로 두어야만 한다.

그러나 좆같은 채이현은 또다시 순식간에 정확히 반 바퀴를 돌아섰다. 총구를 겨누던 그때처럼, 똑바로 마주 본다. 그러나 채이현의 손에 더 이상 라이플 따위는 들려있지 않았다. 적의로 형형하던 두 눈은 이제 차분히 가라앉았다. 가만히 서서, 그 보기 좋은 입술을 열고야 만다.

뒤쫓던 지완에게, 채이현은 더 이상의 추격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왜 간격을 안 좁히냐? 왜 안 잡아채는데. 날 앞설 생각도 없지? 지난 20년간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채이현이 이제 와 묻었던 혼돈을 들쑤신다.

‘넌 그냥 날 이길 마음이 없는 거야.’

‘날 망치는 게 네 몫이라고 그랬지. 아니, 넌 나 못 망쳐. 그랬다면 진작 했겠지. 내가 너한테 연지탄 박았던 것처럼.’

그 좆같은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7년 전 저 깊이 묻어두었던 것. 권지완은 채이현을 이길 수 없다. 채이현을 제친 권지완의 눈앞에 무엇이 보일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것을 직접 확인하고야 만다면, 그건 지완을 완전히 지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채이현은 가만히 마주 서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유지되던 간격을 좁히며 결국 지완을 눕히고 올라탄다. 멍청하게 멈춰 서 있던 지완은 평생을 뒤쫓던 이현에게 제 위를 순순히 내어 주어야만 했다.

지완을 내려다보는 채이현의 두 눈은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성장판이 가로막혀 여전히 열여덟에 머물러 있는 것은, 지완뿐이었다.

‘그 멍청한 이재민도 알아차리잖아. 네가 얼마나 병신 같은지.’

‘이딴 식으로 씨발 뭘 더 하겠다는 건지.’

다시 목을 조르는 질문이 지완을 괴롭힌다. 채이현은 해악이다. 그럼에도 지완은 이제 인정해야만 했다. 탐욕적이고 방자하고 교만하고 포악한 권지완, 그의 종주는 결국 채이현이다.

뺏고 싶은 것은 채이현의 손, 채이현의 시선, 채이현의 자리, 채이현의 총, 채이현의 목, 채이현의 발걸음 따위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건….

갖고 싶다, 얻고 싶다. 그 가련한 욕구를 드디어 지완은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어째서?

05. TAKE YOUR POSITION : 사격준비

Editor K SCANDAL #5

▶ 명품계의 명품, ‘B’사의 아시아 최초 앰버서더로 A군이 발탁되었다. 협회 관련 스폰십을 제외하고는, 상업활동과 척졌던 A군.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종식되어 가는 논란을 확실히 끊어내기 위한 새로운 걸음일까? 빅 매치를 앞두고 무리한 결정이라는 비판도 일고 있으나, 구질구질한 참견일 뿐이다. 그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A군의 파트너! 추천제를 통해 앰버서더 파트너를 결정하는 ‘B’사의 제도에, A군의 선택을 받는 이는 과연 누가 될 것인지…. 여전히 많은 목격담을 양산하고 있는 과거 파트너, 배우 E양? 아니면 의외의 친목으로 조명받은 신성 배우 F군? 예상은 여러 후보로 갈리고 있다. 그러나 단연코 가장 많은 기대를 받는 이는, A군의 영원한 파트너 B군! 누가 되든, 한시 빨리 ‘B’사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어놓길 바란다. 전 세계적인 축제가 다가오고 있으니까!

*

올림픽을 앞두고, 한 차례의 전지만을 남겨둔 훈련 일정에 박차가 가해졌다. 올림픽을 디데이로 내세운 특훈이 본격화된 것이다.

새벽 6시에 시작되었던 새트는 1시간에서 1시간 반으로 길어졌으며, 체력 훈련을 추가한 탓에 해가 뜨기도 전부터 진을 빼야만 했다. 오전 8시부터 1시간 동안의 아침 식사, 이후에는 오전 내내 이어지는 사격 집중루틴. 점심 식사 후 주어지는 잠깐의 휴식 시간, 남은 오후에는 실전 훈련과 개별적 코칭이 이루어졌다. 저녁의 마무리 체력 훈련과, 주기가 짧아진 메디컬 체크, 때로는 별도의 야간 훈련마저 소화해 내야 했다.

진실로 숨을 돌릴 여유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이현이 제멋대로 누렸던 짧은 잠수는 정말 마지막 휴가가 된 것이다. 사격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든 하계 종목들이 종주 스퍼트에 불을 붙었다.

<‘주가조작’, ‘갑질 논란’ 태성 권 회장, 2년 5개월의 실형 선고>

<금메달리스트 권, 부당이득 ‘무혐의’로 밝혀져>

<남은 건 내부 분란뿐… 만신창이가 된 국가대표 유도팀>

<코앞으로 다가온 올림픽, 흔들리는 유망주들… 金 확실 종목은?>

<‘태성 게이트’ 지겹다고? 아직 밝혀내야 할 ‘검찰 결탁’ 가능성>

<주가조작 태성 제약 권 회장 징역형 “항소할 것”>

<권지완, 논란 속에서도 'B'사 아시아 최초 엠버서더 발탁>

<‘B’사, “드디어 권 선수를 뮤즈로 모실 수 있어 영광”>

바삐 돌아가는 선수촌과 달리, 선수촌 밖 사태는 나름 잠잠해지고 있었다. 여전히 잡음은 질척거리고 있었지만… 적어도 지완을 둘러쌌던 무성한 논란들은, 지완이 혐의없음으로 판정 나면서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처음부터 뜬구름 잡는 식의 헛된 가십들이 대다수였지 않은가. 그새 단물이 빠져 시들해진 것이다. 유도부에선 반가운 일이었으나, 또 마냥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유도부 내부는 이미 곤혹스러운 상황이었고, 기자들은 지완의 다음 행보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대체 무엇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금메달로 보답할 일만 남았다.’라는 식의 맺음말들이 온갖 기사들에 성행했다. 덤벼들 때도, 발을 뺄 때도 개성이라곤 없다.

“진태우는 일단 치료 시작하기로 했다. 워낙 민감한 문제라 이현이 너만 알아둬. 약물 반응 검사에서….”

회의실로 이현을 불러낸 총감독의 입에선 흥미 없는 얘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우에 관한 것이었다. 금지 약물 복용 여부에 관해서는 더 정확한 검사가 필요하다느니, 결국 종래로 당부하는 것은 입단속이었다. 이현은 적절한 타이밍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적당한 반응을 보였다.

이현의 주의는 다른 곳에 사로잡혀 있었다. 회의실 데스크 위에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훈련 일정표와 동계 전지 계획표. 뒤죽박죽 섞여 있는 종이 쪼가리들 사이에서 유도부, 합동, 협조, 공고 따위의 글자들이 눈에 콕콕 박혔다.

“…상황 보고 동계 전지부터 재합류할 거야. 때마침 네가 잘 발견했다. 그놈 눈깔 뒤집힌 게 아무래도 걱정된다만… 아무튼 이제부터 너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동계 끝나면 올림픽 코앞인 거 알지?”

“….”

“채이현, 너 지금 듣고 있냐?”

“…동계 전지는 예정대로 진행합니까?”

불쑥 이현이 물었다. 유도부가 소란스러워지면서 덩달아 사격부 안에서도 논의되던 사안이었다. 새끼가 감독 말은 안 듣고, 뜬금없는 이현의 질문에 총감독은 혀를 차며 너저분한 서류들을 한데 모았다.

“그래. 곧 공고될 거다. 유도 협회 얘기가 쏙 들어갔으니 원래 계획대로 진행될 거고.”

지자체들 전지훈련 유치에 혈안인 거야 하루 이틀 아니잖냐. 거 계속 시끄러웠으면, 이번 기회에 유도부 둘로 찢어서 양평에 하나, 포항에 하나 나눠 주고 스폰서 지원금이나 뜯어먹으려 했던 것 같은데…. 다행히 조용히 끝나가니까 더한 소란 안 만드는 거지. 장 코치도 죽다 살았고. 그놈의 유도 협회 놈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운이 좋았어. 총감독은 찌뿌드드한 허리를 두드리며 지겨운 상황에 염증을 냈다.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번복하는 유도 협회가 영 올곧잖은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척 없이 지냈던 장 코치의 복귀에 내심 안도하던 총감독이었다. 내부 고발에, 협회 비리까지, 갖가지 것들이 터져 나오면서 책임을 떠맡을 희생양이 될 뻔했으나….

관련되어 협회의가 있었고, 지완이 거기에 참석했고, 문제를 대강 해결했다. 그 정도는 예상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스폰십을 두고 협회와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뜬금없는 앰버서더 발탁 기사를 통해 대충 짐작해 볼 뿐이었다.

이 또한 당황스러운 점이다. 권지완이 누군가를 위해? 처음부터 지완의 집안 문제로 발화된 논란들이라고는 하나, 지완이 굳이 나설 만한 새끼는 결단코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무려 권지완이 그 귀찮은 일까지 떠맡아 가면서….

아니, 모르겠다. 생경한 일면들이 한둘이 아니다. 지독히도 복잡한 권지완 그 새끼의 속을, 잘 알고 있다고 지금껏 단순히 자부했던 것이 실수다.

이현에게 분명한 건 하나였다. 적어도 권지완이, 이 관계에서만큼은 병신이라는 것 정도.

“선수촌 안에서 이러는 것도 눈꼴사나워 죽겠다. 유도부 놈들 저 보여주기식 2교대를 뭐 언제까지 하고 있을는지. 디데이까지 저러려나 싶다, 나는.”

거참, 우리 애들이 눈치 보는 상황만 없었으면 좋겠는데. 총감독은 다 모은 서류를 탁탁, 데스크에 부닥쳐 가며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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