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51)

#68

지완은 녹차 티백을 대충 띄운 컵 두 잔을 들고 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지완이 느릿하게 다리를 꼬았다. 낮에 본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낯 위로 서려 있던 뒤틀림은 좀 가신 듯했으나, 어딘가 할끔한 몰골은 그대로였다.

“이현아, 그렇게 걱정되면 전할 것만 전하고 좀 가지 그래. 쉬는 걸 방해하는 게 누구인지….”

지완이 두 팔을 요차하자, 어깨에서부터 깔끔하게 직각으로 떨어지는 팔의 윤곽이 티 위로 뚜렷해졌다. 재수 없는 새끼. 이현은 시선을 테이블 위로 떨궜다. 앞에 놓인 컵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었다.

“네가 정유진 씨 전화 받았으면 될 일이지.”

아니면 내 전화를 받지 말든가. 이현이 봉투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안에 든 물건이 테이블에 부닥쳐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든 게 대체 뭐야. 궁금은 했으나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컵을 집기 위해 팔을 뻗는 순간, 외투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브로슈어가 소파 위로 떨어졌다. 주워 든 건 지완이었다.

“…이거 받았어? 정유진한테?”

“선물이라던데.”

“버려.”

뭐야. 지금 나 견제라도 하냐? 기가 찬 이현이 지완의 손에서 브로슈어를 다시 뺏어 들었다. 지완은 그새 언짢은 얼굴을 했다가, 이어 저음의 웃음을 흘렸다. 이현이 그 앞에 브로슈어를 살랑대었다.

“내 선물인데 네가 뭔 상관이야.”

갈 생각도 없었지만, 꼭 이러면 공연스레 반발하고야 만다. 이 또한 습관이다.

“좋을 거 없을 텐데.”

“나 술 좋아해.”

“걔가 그래? 술 마시러 오라고?”

“그럼 술집에 술 마시러 가지 뭐 하러 가.”

“이현아, 거긴 술만 나오는 곳이 아닌데.”

지완이 가벼운 턱짓으로 브로슈어를 가리켰다. 브로슈어를 흔들던 이현의 손이 멈칫했다. 술만 나오는 곳이 아니라고? 지완은 이현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정유진이 네 게이설을 진짜 믿고 있나 본데. 지완의 말에 이현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속으로는 기함 중이었다. 설마….

“병신.”

“….”

“표정 보기 좋네.”

구라냐? 천연덕스러운 장난질에 질색한 이현을 아랑곳하지 않고, 지완은 이현의 컵을 먼저 집어 들었다. 기껏 요청한 이현의 따뜻한 차는 지완의 손에 들어갔다. 밉살맞다 못해 완증하다. 지완은 잠잠히 한 모금 들이켰다.

“왜 내 걸 마셔?”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잖아. 난 채이현 게 제일 커 보여.”

“아직도 예전 버릇 못 버렸네. 미친 새끼.”

“사람 쉽게 안 변하니까?”

지완은 꼭 다른 사람 얘기를 하듯 시답잖았다. 느즈러지는 변명이 우습다. 이현은 컵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지완의 손을 바라보다, 툭하니 말을 꺼냈다.

“…그러게. 사람 쉽게 안 변하는 건데, 지금 네 방에서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건 안 놀랍냐? 그 쉽지 않은 걸 지금 너랑 내가 해내고 있잖아. 난 존나 웃긴데.”

불쑥, 담백하게 튀어나온 이현의 말은 다시금 지난 대화를 토해냈다. 물론 말처럼 웃기지는 않았다.

원치 않는 주제를 회피하듯, 지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으로 간 지완은 다시 포트에 물을 받았다. 삐빅, 소리를 내며 물이 끓었다. 불완전한 이현의 문장은 본의에 닿지 못했다.

아프다는 사람을 붙잡아 두고 더한 대거리나 하고자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이현 역시 호도된 말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시큰둥하게 지완을 야유할 뿐이었다.

“권지완, 줬다 뺏는 것도 아니고… 아니, 넌 뺏었다가 주는 쪽이지. 하나만 해. 조련하냐.”

“조련당해?”

“말꼬리 잡지 마.”

“이런. 그 낙에 사는데.”

지완은 또 어물쩍 대화를 넘기며 능청을 떨었다. 이현의 입술 사이로 바람이 샜다. 권지완이나, 나나. 태만한 것인지, 태연한 것인지. 주고받는 덧없는 대화들은… 어느새 안일한 익숙함으로 자리 잡았다. 멍청하고 한심하다.

걸터앉은 자세를 고치자 바지 뒷주머니에서 감기약이 걸리적거렸다. 이현은 약갑을 꺼내 들었다. 덩칫값 못 하는 건 유도부 종특이야, 뭐야. 저 새끼가 뭐 예쁘다고. 이현이 지완을 힐끔 살폈다. …예쁘게 생긴 새끼긴 하지. 그 말이 그 말은 아니지만.

이현은 모호한 심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지완을 향해 감기약을 던졌다. 약갑은 아일랜드 식탁에 맞고 지완의 앞으로 떨어졌다.

“약 처먹고 잠이나 자. 아직 입은 살아 있는 걸 보면 크게 아픈 건 아닌가 보네.”

“….”

“나 때문에 좆같았다느니…. 괜히 내 탓 하지 마.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마셔대니까 그런 거 아니겠냐?”

지완의 묘한 시선이 이현에게 닿았다. 메디컬은 멀고 치료실은 지금 밤이니까 쥐여준 거야. 이상하게 보지 마, 씨발. 언젠가 지완이 했던 말을 따라 하며 이현이 무안히 짜증을 부렸다. 지완은 다물었던 입술을 터뜨리며 작게 웃어댔다.

지완이 찬찬히 약을 집어 들었다. 이현은 괜히 손가락을 튕기며 딴짓을 하고 있었다. 정말 성미에도 안 맞는 조악한 오지랖이다.

“이현아.”

“….”

“설마 고맙다는 말 필요해?”

지완의 덤덤한 말과 함께 부글대던 포트가 꺼졌다. 이현은 의미 없이 깐작대던 손짓을 멈추었다.

“…그럴 리가.”

“그래 그럼.”

“할 수는 있고?”

“그럴 리가.”

이번에는 지완이 이현의 말을 따라 하며 부질없는 대화를 받아쳤다. 그럼 그렇지. 새 잔에 물을 따르는 소리가 성근 공백을 메웠다.

아직 열기를 잃지 않은 잔과, 여전히 우려지지 않은 티백이 두둥실 떠 있는 컵. 테이블 위를 바라보던 이현이 눈길을 거두었다.

무심코 이현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투명 단상이 덩그러니 자리해있었고, 그 안에 메달들이 대충 흐트러져 있었다. 그 꼴을 봐선… 꽤 오랫동안 처박힌 채, 무신경한 지완의 관심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과거의 영광들인 듯했다.

저걸 저렇게 처박아 둬? 다른 사람들이 보면 기겁을 하겠네. 근데 내 메달은 어디에 뒀더라….

너무나 오랫동안 부동의 정상에서 안주해 온 이현은, 같은 눈높이의 지완을 새삼 다시 인식했다. 문득 깨달았다. 이현의 입에선 건조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어제 네가 그랬지. 나 때문에 평생 좆같았다며. 좋게 포장은 할 수 없을 정도로.”

“….”

“근데 너, 나 때문에 이 바닥 들어왔잖아. 맞지? 네 말대로 내가 좆같아서.”

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 앞으로 향했다. 메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지완은 이현의 행동을 저지하지도, 그렇다고 다른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방치된 메달에는 오래된 먼지들이 눌러앉아 있었다. 이현이 메달 위에 양각으로 새겨진 오륜기를 매만졌다. 7년 전 올림픽에서 얻은 금메달, 이현에게도 같은 것이 있었다. 오돌토돌한 질감이 손 끝에 선명했다.

“거 봐. 결국 너나 나나. 너도 나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어. 아니, 아예 시작도 못 했겠지.”

하긴 넌 그냥 회사 일이나 물려받았으면… 될 일이었겠네. 말하고 나니 득 될 게 없었다.

그러나 결국, 채이현의 메달은 권지완을 태워 만든 것이었고, 권지완의 메달은 채이현을 다져 만든 것이었다.

더럽게도 유감스러운 관계가 더럽게도 오래되었다. 오래된 메달들, 오래된 관계, 의식의 흐름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훨씬 어렸던 시절의 지완을 떠올리게 했다. 앳된 얼굴의 권지완.

“너희 집, 아직 거기 그대로냐? 한남동 말고 본가. 어렸을 땐 꽤 많이 갔던 것 같은데.”

“왜. 다시 가고 싶어? 당분간은 주인 없는 빈집일 텐데.”

이현이 지완을 처음 본 곳도, 지완의 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태성 회장의 집이었지만. 성벽 같은 담벼락에, 마당이라 부르기엔 무안할 만큼 넓은 정원, 재벌 티를 고스란히 내는 3층 주택은 어렸던 이현의 뇌리에도 잊히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요새 같은 큰 몸체를 거만하게 자랑하던 집. 초인종을 누르고 대문을 통과할 때면, 들어서는 계단 위에는 건방지게 이현을 내려다보던 어린 권지완이 있었다.

“아니. 미쳤냐. 내가 거길 왜 가.”

“갑자기 추억팔이를 하길래.”

“뭘 추억팔이야, 그냥….”

이현은 말끝을 흐렸다. 메달을 대충 다시 얹어놓았다. 추억팔이, 지완의 그 표현은 가당찮은 것이었다. 추억이라 이름 붙일 만큼 기꺼운 순간들은 아니었다.

어린 지완의 모습과 함께, 아주 어렸던 예전부터 지금껏, 때때로, 별안간 솟았던 물음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권지완은 왜 채이현을 싫어했을까.

이현은 마구잡이식으로 이리저리 튀어나오는 생각들을 막지 않았다. 생각에 제동을 거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 이곳에 들어와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충동의 결과물이었다.

다시 대화는 넘칠 듯 굽이쳤다.

“어렸을 때, 그니까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니, 너랑 나, 그 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이야.”

“….”

“너 왜 그렇게 날 싫어했냐?”

“문장이 과거형이네.”

“네가 그랬잖아. 모르겠다며.”

이현은 묵묵히 씨줄과 날줄을 꿰어가듯 말을 이었다. 마치 시시콜콜한 얘기인 것처럼. 지완이 포트를 내려두었다.

“그래, 너 분명 그렇게 말했었어. 너도 모른다고. 그 말, 존나 이상하잖아.”

“….”

“네가 날 처음부터 왜 그렇게까지 싫어했던 건지 그 이유도 모르겠는데, 더 모르겠는 건 ….”

“….”

“이젠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망치고 싶고, 이기고 싶은데도 봐주는… 그런 게 대체 뭔지….”

“그럼 그냥 둬.”

이현의 물음을 앗아간 지완의 음성이 바닥으로 침잠했다. 이현이 천천히 뒤를 돌아 지완을 바라보았다. 가마득하게 느껴지는 거리감을 지완이 한 걸음씩 좁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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