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51)

#66

대화가 잠시 끊겼다. 정연이 술자리로 돌아가고 있는지, 소란스럽게 웅성대는 술자리 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들어도 적은 인원이 아니었다. 거기에 정유진이라… 술자리 한번 거창하다. 오히려 세민이 자리 없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같은 촬영팀인데 왜 그 새낀 빠졌지? 물론 재민과 정연이 그 자리에 끼어있는 게, 그 무엇보다 가장 의아한 점이었지만.

유진은 누구나 인정하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였다. 이현이 유진의 존재를 제대로 알게 된 건 지완과 유진의 발칙한 스캔들 때문이었으나, 유진은 그 이전부터 명실상부 정상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정연의 이런 반응도 어쩌면 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결국 이현에게 있어 유진 역시… 지완을 떠올리게 하는, 심히 달갑지 않은 또 하나의 심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좁아터진 대한민국은 선수촌 안이나 밖이나 권지완이랑 연관 안 된 게 없지.”

[어? 뭐라고? 권지완? 아, 맞다. 유진 언니가 그 권지완…]

…아니야, 조금 이따 보자. 이현이 대충 둘러대며 또다시 길어지는 정연의 말을 잘라내었다. 응! 사랑해! 술에 취한 정연은 알아채지 못하고 들뜬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핸들을 쥔 이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복잡한 숨을 토하며 액셀을 지그시 눌러 밟았다.

*

이미 밤공기가 표묘히 깔린, 크지 않은 신척 저수지에는 진입로 내내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사실 대낮에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이었다.

선수촌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정연과 재민이 있는 가게와 근접했다. 번화가의 뒷길이라 도리어 더 한적한 듯했다. 잘된 일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한 이현이 본래 원하던 대로, 바람을 쐬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차를 잘 끌고 다니지 않았던 이현이 이곳을, 그것도 이 밤에 찾아온 것은… 당연히 이번이 처음이었다. 낮에 둘러보았던 기억도 아득했다. 몇 년은 더 된 일이었다. 선수촌이 태릉에서 진천으로 이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정연의 손에 이끌려 우연찮게 들러본 것이 전부였다.

저수지는 어둑했다. 캄캄한 고요가 스산한 느낌을 자아낼 정도였다.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데크 바닥에 조명이 깔려 있었으나, 흐리멍덩했다. 주변을 밝히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현은 좁게 마련된 주차장으로 차를 끌었다. 이게 저수지의 주차장인지, 아님 근처 다른 곳의 주차장인지 불확실했다. 고작 서너 대 정도만 수용 가능한, 허름한 뒷마당 같은 주차장. 그곳에는 이미 스포츠카 한 대가 전조등을 켠 채 정차해 있었다.

“설마.”

바닥에 달라붙을 듯 납작한 차체는 지난번 선수촌 주차장에서 봤던 유진의 차와 비슷했다. 확실하진 않았으나… 가게와 가까운 거리에, 이 정도의 고급 차. 높은 확률로 들어맞을 법한 추측이었다.

설령 맞다 한들 뭐 어쩔 것인가. 지금 당장은 별수 없었다. 여기가 술자리도 아니고. 조용히 머물다가 재민과 정연을 데리러 가면 그만이었다.

이현은 무심히 그 옆 빈자리에 차를 대었다. 주차선마저 희끄무레했다. 바로 옆은 아니었으나 차 사이의 간격이 그리 넓지도 않았다.

시동을 끄기 전, 이현이 고개를 돌려 옆 차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빛가림 처리가 진하게 되어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내려서 조금 걸을까 싶었으나 아리던 추위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에 온 것까진 좋았지만 막상 너른 물 따위를 보고 싶진 않았다. 어리석지만 또 당연한 일이었다. 이현은 물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때의 바다가 썩 괜찮았던 이유는 단지 오랜만이었기 때문일까. 이현은 싱거운 생각을 지워냈다.

이현은 좌석의 등받이를 뒤로 쭉 눕혔다. 히터의 온도를 높이고는 창문을 내렸다. 한여름에 에어컨을 틀고 이불을 덮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가차 없이 얼굴 위로 물가의 추적한 냉풍이 부대꼈다.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네. 권지완, 그 새끼는 메디컬 가봤으려나.

무뚝뚝한 바람이 이현의 콧잔등 위로 한 번 더 내려앉았다. 자잘하게 아픈 꼴을 본 적이 없어서 괜히 이런 것이다.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지르감은 이현의 눈을 다시 뜨게 만든 건, 옆 차에서 짧게 울리는 경적이었다.

짙게 선팅된 옆 차의 조수석 차창이 내려갔다. 얼떨결에 마주한 차의 주인은, 예상했던 바와 같았다. 정유진이었다.

당황해 머뭇거리는 이현과 달리 유진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채 선수님? 이런 곳에서 다 뵙네요.”

창문 너머의 유진은, 별다른 연이 없는 이현에게도 활짝 웃어 보였다.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청량하다. 유진은 지완의 집 앞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도 이랬다. 연예인들은 다 이런가. 이현과는 동떨어진, 그 허물없는 접근이 반갑지는 않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채 선수님도 드라이브하러 나오셨나 봐요?”

이현은 떠름하게 인사를 받았다. 딱히 대화를 주고받을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유진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곤 운전석에서 내렸다. 차를 돌아, 이현의 차와 유진의 차, 그 넓지 않은 사이에 섰다.

“담배 하나 피우실래요?”

조금 더 가까이서 마주한 유진은 별다른 조명 없이도 반짝였다. 눈이 부시다느니, 그런 흔해 빠진 미사여구를 덧붙일 생각은 없었으나, 확실히 연예인은 연예인이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에서도 남다른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정연의 감탄들은 딱히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거리낌 없는 유진의 말에, 아뇨, 금연 중이라서요, 반쯤은 사실이고, 반쯤은 완곡한 거절의 핑계를 둘러댔다.

마음에도 없는 겉핥기식 스몰톡을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운전석에 가만히 앉아 바깥에 서 있는 유진을 바라만 보고 있는 것도 무례였다.

그냥 다른 곳으로 가준다면 참 좋을 텐데, 유진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현이 성가신 상황에 미간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다.

흡연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럼 저만 피워야겠네요. 유진은 본인의 차에 몸을 기대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차에서 내리려 하는 이현을 보고, 자연스럽게 유진이 먼저 이현의 차 문을 열었다. 아니 열어주었다. 에스코트라도 하듯,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이현에게 눈짓했다. 이걸 친절하다고 해야 할지….

“채 선수님 직접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네요. 진천 참 좁아요, 그쵸?”

“아, 네.”

아, 네. 기본값처럼 박혀 있는 이현의 자동 응답기.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무심한 이현의 말버릇에도 유진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여유로워 보이는 그 태에서 어렴풋하게 지완의 모습이 비쳤다. 어딘가 닮아 보이기도 했다.

“매번 스치기만 했잖아요, 우리.”

매번? 이현이 기억하는바, 유진을 마주쳤던 건 지완의 집 앞이 전부였다. 의아한 이현을 알아차렸는지, 유진은 옆으로 담배 연기를 뱉어 내보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요. 주차장에서도.”

“주차장이요?”

“네. 그때 지완이랑 같이 선수촌 주차장에서 잠깐, 채 선수님 봤거든요.”

“아…. 좀 멀었던 것 같은데 보셨나 보네요.”

어젯밤을 언급하는 것일까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보다 전이었다. 그땐 유진이 자신을 발견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게 보였구나.

“저 말고, 지완이가 알아보더라구요.”

“….”

“갑자기 샐쭉거리기에 뭔가 했는데, 채 선수님이 멀찍이 계시던데요? 그… 재민 씨랑 같이요.”

그 삐죽거리는 지완이 표정, 아시죠? 원래 지완이가 잘 안 웃잖아요. 유진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 단정하고 성숙한 얼굴에 이현은 심드렁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공감이 가서 보인 반응은 아니었다.

권지완이 잘 안 웃어? 다른 곳에서는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은, 그 생소한 지완의 파안을 받아본 유진이 할 말은 아니었다. 이현이 이걸 따지고 있는 게 더 웃긴 일이었지만, 이현은 찰나에 스쳐 가는 자신의 연유 모를 불만을 자각하지 못했다.

“참, 잘됐네요. 저, 채 선수님한테 뭐 하나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부탁이요?”

유진이 무언가 생각 난 듯, 손뼉을 치며 물어왔다. 갑자기 부탁이라니. 아예 연이 없는 사이는 아니었으나… 부탁 따위를 할 만큼 막역한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유진이 손가락을 툭 튕겨 재를 털어내었다. 열려 있는 차창으로 팔을 뻗어 서류 봉투 하나를 조수석에서 꺼내 들었다.

“이것 좀 지완이한테 전해 주실 수 있나요?”

유진이 밀봉되어 있는 두툼한 서류 봉투를 이현에게 내밀었다. 탐탁지 않은 이현은 선뜻 받아들지 못했다.

“이걸 왜 저한테…. 직접 전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갑자기 진천 다시 오게 된 김에 들고는 왔는데… 지완이가 연락이 안 되네요. 나름 급한 거라, 선수님 괜찮으시면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급하다는 것치곤 무척 평온해 보이는 모습으로, 유진은 쭉 내민 손을 다시 한 번 들이밀었다. 이현은 할 수 없이 떨떠름하게 받아들곤 미심쩍은 얼굴로 봉투를 살폈다. 들어 있는 건 종이뿐만이 아닌 듯했다. 걸리적거리는 물건은 겉으로 만져 보아도 무엇인지 추측되지 않았다.

“다행이다. 안 그래도 곤란했거든요. 곧 또 가봐야 해서 어떻게 전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

“바람이나 쐴 겸… 지완이 연락 기다릴 겸 잠깐 여기 들른 건데, 오길 잘했네요. 지완이 연락 대신 채 선수님이 오셨으니까요.”

“재민이한테 맡겨도 됐을 겁니다.”

“안 그래도 그 생각에 술자리 들러본 건데, 너무 취하셨기도 하고…. 생각해보니까 다른 사람 손에 함부로 맡기기에는 걱정이 돼서요.”

“….”

“고마워요, 채 선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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