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151)

#65

“뭘 싸워, 애도 아니고.”

“하하. 지금도 싸우고 있는 것 같은데요.”

“….”

“근데 그 말을 선배가 한 거였어요? 그런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나? 혹시 진짜 형도 그래요?”

재민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민의 뒤로 탈의실을 빠져나가는 지완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쟨 왜 저래? 진짜 어디 아파? 근데 사람 말은 왜 무시해. 난 또 뭘 신경을 써서…. 이현은 속으로 꿍얼대며 상의를 벗어 팽개쳤다. 로커에 처박히는 옷처럼 이현의 속도 함께 구겨졌다.

재민이 건넨 상의에 얼굴을 집어넣자 이현의 체구보다 훨씬 큼지막한 옷이 한 번에 이현을 감쌌다. 거 봐요, 클 거라고 했잖아요, 재민이 옆에서 작게 웃었다. 이현은 마저 바지를 갈아입으려 바지춤에 손을 올렸다가, 이내 신경질적으로 로커 문을 닫았다. 시끄러운 소리가 이현의 심경을 대신했다. 권지완. 결국 상황이 매번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모두 권지완 때문이다.

“형, 내가 너무 많이 놀려서 화… 났어요?”

재민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알만 굴려댔다. 그 애처로운 웅얼거림을 알아주기엔, 이현의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

권지완은 확실히 해악이다. 이현은 끝끝내 다시 손에 쥔 담뱃갑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잘만 유지하던 금연을 기어이 깨트리고 담배를 입에 대기 시작한 것도, 생각해보면 지완과 함께 홍보대사를 맡았을 때부터였다. 지완이 눈앞에서 보이지 않던 지난 며칠 동안은 나름 잘 참아왔건만.

참자. 내가 무슨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아니, 파블로프의 개까지는 될 수 있어도 권지완의 개가 되는 건 참을 수 없다. 이현은 담뱃갑을 방구석으로 던져버렸다.

침대에서 일어나 닫아두었던 창문을 열어젖혔다. 바깥바람을 쐬고 싶은 마음이 일렁였으나, 춥기도 더럽게 추웠다. 그러나 창을 닫지는 않았다. 추위를 버텨내며 창틀에 몸을 기댔다.

‘특훈 전에, 그나마 시간 있을 때 바깥 공기 좀 쐐야죠.’

실실거리던 재민의 말이 떠올랐다. 드라이브나 할까. 느닷없는 충동이 일었다. 처박아 두기만 했던 차를 한두 번 끌고 나가기 시작하니… 예전 같다면 귀찮다는 이유로 꿈에도 꾸지 않을 고민이었다.

이현은 손이 가는 대로 핸드폰을 꺼내 사진첩을 훑었다. 딱히 볼 것도 없는 사진첩에는, 정연이 장난삼아 찍어두었던 재민과 정연의 웃긴 셀카 몇 장과, 새로 받은 훈련 일정표 따위만 저장되어 있었다. 이현은 좀 더 위로 올렸다.

바다. 밤바다인지, 그냥 어두운 하늘인지 분간되지 않을 만큼 대충 담아낸 바다. 막연히 찍어두었던 그 사진이 이현의 눈길을 가로챘다.

오랜만에 바다 보니까 나쁘지 않긴 했지. 늦은 밤 선수촌을 밝히는 인공적인 조명들, 그것이 전부인 창밖을 의미 없이 내다보다, 이현이 고개를 돌렸다.

…피곤하다는 새끼 괜히 붙잡아뒀나. 지난밤 지완이 앉아 있던 소파 위에는, 당연히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으나… 이현이 머리를 헝클였다. 생각을 지워내듯 그 자리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을 굴릴 대로 굴렸음에도 잠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맥주나 한 캔 깔까. 아니다. 그냥 진짜 바람이나 쐴까. 아, 그냥 맥주로 끝낼까. 이현이 턱 언저리를 더듬으며 고민하다,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외투와 차 키를 집어 들고 대충 모자를 푹 눌러썼다. 후드 모자를 그 위에 한 겹 더 덧씌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패딩을 입을까 싶었으나 그건 오버인 듯했다. 어차피 차로 가는데. 더 꾸물거리다간 결국 귀찮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 뻔했다. 스스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현은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충동이 이현을 이끄는 건 드문 일이었으나, 그 드문 일들이 근래에 잇따라 자주 벌어지고 있었다.

이현이 슬리퍼를 끌고 문밖으로 나올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정연이었다. 재민과 함께 시아를 만나러 간다는 식사 자리는 이미 끝나고도 한참일 시간이었다.

이거 불안한데. 이현이 대충 훑었던 마지막 단톡 내용을 떠올리려 애쓰며, 전화를 받아들었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어, 정연아.”

[미친, 채이현, 너 아직 안 자고 있었어?]

“응. 왜?”

그러니까 받았지. 정연은 당연한 사실에 엉뚱히도 놀라워했다. 평소보다 두 톤은 높은 목소리를 보아하니 술이 들어간 게 틀림없다. 술은 마시지 않겠다던 재민의 다짐 역시 진작에 수포로 돌아간 듯했다.

정연아, 너 술 마셔? 이현의 물음에, 응, 시아는 가고 다른 촬영 관계자분들이랑 이재민이랑 마시고 있어. 정연은 흐흐댔다.

재민이도 재민인데, 너도 진짜 너다. 이현은 조금도 이해 못 할 자리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쉽게 친해져 술까지 들이마시고 있는 정연이 경이로울 지경이다. 그 와중에 벌써 시아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불러댄다. 이현은 심심하게 웃으며 숙소 건물을 빠져나왔다.

[뭐야? 너 지금 뭐 해? 어디 가?]

“들려?”

[너 설마…!]

“그 술자리는 안 가. 그냥 드라이브나 하러 나온 거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기대가 꺾인 정연이 불만스럽게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잘 들리진 않았다.

“술은 언제까지 마시려고. 너도 좀 취한 거 같은데.”

[이제 곧 파해. 이재민 이 새끼는 개취했어. 얜 술이 너무 약해서 재미가 없다니까. 처바르는 재미도 한두 번이지.]

“그래, 그것 참 안타깝게 됐다.”

[너까지 재미없게 굴지 마. 아, 근데 존나 어지럽다. 택시 타다 토하면 어떡해, 이현아?]

“데리러 가?”

주차장으로 향하는 그 멀지 않은 길에도 찬바람은 매몰찼다. 핸드폰을 잡고 있는 손에도 바람이 아렸다. 이현은 발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슬리퍼를 신은 발까지 시려왔다.

[미친, 그거 노리고 던진 말이긴 한데… 근데 괜찮냐? 너 안 피곤해?]

“그럴 줄 알았어. 끝나면 불러. 괜히 다른 사람들 마주치는 건 피곤해.”

[씨발, 당연하지, 이현아!]

술에 무르익어 신나 하는 정연의 모습은 꽤나 귀여웠다. 제가 숙소에 박혀 있었다면 모를까, 이미 나온 이상 그렇게 고마워할 일도 아니었다. 차도 없는 재민이 택시를 타고 길가에 버려진 이현을 거두러 온 적도 있지 않은가. 이현은 구석에 주차된 차를 향해 연신 차 키를 눌러댔다.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자정의 추위 속에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정연이 타이밍 좋게 전화를 건 것인지, 아니면 이걸 위해 이현의 맘속에 바람이 불었던 것인지. 이현은 홀로 어깨를 으쓱였다.

전화기 너머로 물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정연이 술을 깨기 위해 세수라도 하는 듯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 혼자 물고문을 하던 정연이 어푸거리다 말을 이었다.

[아아, 맞다, 이현아. 근데 여기 멤버 대박이다?]

정연은 무척 즐거워 보였지만, 이현의 관심 밖 이야기였다. 그래? 이현은 건성으로 대꾸하며 차에 올라탔다.

[너 안 궁금하지. 그래도 맞춰 봐. 누가 있게? 진짜 대박이라서 그래. 막 네 얘기도 많이 했어. 너도 스타긴 한가 봐.]

“그래, 거기 이재민 있겠지.”

이현이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연예인은… 굳이 찾아본다면 시아뿐이었다. 술자리에 시아는 이미 가고 없다고 했으니, 그럼 한 명도 없었다.

이현은 누군지 모를 유명인사와 정연 사이에 오고 갔을, 자신에 대한 신변잡기적 대화들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었다.

[이재민 그 새낀 개뒤졌다니까.]

“그럼 하세민?”

[야 씨, 나 그렇게 병신 아니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연예인, 생각해 보니 한 명이 더 있었다.

더구나 시아와 함께 촬영을 하는 관계자, 떠오르는 건 세민밖에 없어 대강 던진 말이었다. 무덤덤한 이현의 말에 오히려 흥분한 건 정연이었다. 가뜩이나 적지 않은 술까지 들이켠 정연은 요란했다.

술기운에 물을 틀어놓은 것도 잊은 것인지 물소리가 희미하게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정연아, 지금 혹시 물 틀어 놨어? 잠가야겠는데. 이현이 감흥 없는 태도를 일관했다. 야, 이거 내가 튼 물소리 아니야. 이게 자꾸 술 취한 진상 취급하네? 마음에 차지 않는 이현의 반응에, 정연이 퉁명스레 굴었다. 그러나 잠시였다. 또 주절주절 신이 나 말을 이어갔다.

이현은 통화가 블루투스로 연결된 것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조수석으로 던져두었다.

[아무튼 나 오늘부터 정유진 판다. 그렇게 정했어.]

“…정유진?”

[실물 보고 깜짝 놀랐잖아. 화면발을 안 받아. 실물이 존나 미쳤어! 처X처럼에 붙은 얼굴이 그 소주병을 직접 들고 있는데… 오버가 아니라 진짜 성스러웠다니까? 나 진짜 술 취해서 오버하는 거 아니다?]

“….”

[그리고 너무 착해. 연예인들 알고 보면 성격 더럽다는 거, 그거 다 남연예인 한정인가 봐. 하세민 그 새끼가 너 엿 먹이는 거 짜증 나서 관두긴 했어도, 사실 나 존나 심심하고 좀 서글펐거든? 이렇게 말하니까 좀 찌질해 보이는데, 아무튼 딱이야, 딱. 아니 글쎄 정유진 언니가 처X처럼을 들고….]

이현은 정연의 입에서 나온 예상치 못한 인물에 짐짓 당황했다. 흥분한 정연은 말이 점점 빨라졌고, 험한 수식어를 덧붙여가며 같은 말을 거듭 반복하고 있었다.

[아니, 무슨 우정 출연? 그거 촬영하고 잠깐 들르셨는데, 사람 아닌 것 같아. 아무리 너라도 직접 보면 깜짝 놀랄걸? 아니다. 이 말은 취소. 네가 여자 연예인을 보고 놀라는 게 상상이 안 간다. 아무튼….]

이미 한 번 직접 마주한 적이 있었지만, 거기다 놀라기도 했었지만, 정연에게 말하진 않았다. 또 화들짝 놀라며 난리를 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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