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사진 안 찍히게 조심하고.”
“전 바로 인스타 스토리 올릴 건데요. 형처럼 죄다 염문설로 엮이는 타입은 아니라서요. 저랑 정연 누나를 봐요. 대놓고 다녀도 아무도 안 엮더라.”
“너 지금 나 놀리냐.”
이거 장난질만 쳐대고. 이현이 발꿈치를 들어 올려, 가볍게 재민의 목을 팔로 졸랐다. 형, 팔 운동해야겠다. 아니 근데 형 늘 팔 운동만 하지 않아요? 하하. 재민은 이현의 팔을 아주 쉽게 풀어내며, 역으로 본인의 팔을 이현의 어깨에 둘렀다. 이현을 봐주기라도 하는 양, 감싸 안듯 두른 팔은 여유로웠다.
순식간에 침체된 감정에서 튕겨 나오고야 말았다. 이현은 작게 몸을 틀며 의미 없는 반항을 해보다가, 헤헤, 실없이 웃는 재민의 소성에 그마저 관두었다. 넌 참 속 편해서 좋겠다. 재민과 노닥대며 복잡한 생각을 지우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몰랐다.
재민이 탈의실로 이어진 문을 열고는 이현의 등을 밀었다. 먼저 앞선 이현의 뒤로 딱 붙어 따라 들어오던 재민이 작게 놀라며 물었다.
“어? 형, 목 뒤에 이 상처 아직도 있네요? 흉터 제거 치료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티 많이 나? 난 잘 안 보여서.”
“가까이서 보니까 티 나는데요? 만져 봐도 돼요? 무슨 화상 자국 같기도 하고. 흉이 좀 예쁘게 졌네.”
“세균 옮아.”
형, 제가 무슨 병균 덩어리도 아니고…. 이현의 단호함에 재민은 습관적으로 칭얼거렸다. 이현은 제 뒷목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툭하면 훑듯이 뒷목의 여린 흉을 쓸어내리던 권지완의 손버릇. 소름 끼치는 살성, 높지 않았던 열감… 씨발. 복잡한 생각은 지우기로 맘먹은 게, 끽해야 일 분 전이었다. 부질없었다.
툭하면 지완으로 회귀하는 사고회로가 사사롭고 병신 같다. 처음에는 세상이 권지완으로 시끄러운 탓이었고, 다음엔 신경을 갉아 먹는 지완의 흔적들이 선수촌 안에 낭자한 탓이었으나, 이젠 권지완 그 새끼 자체가 문제였다.
또, 또, 권지완. 이런 식….
참담한 심정으로, 이현은 재민의 어깨에 고개를 푹 기대며 가만가만 물었다. 뭉개지는 발음이었다.
“…넌 지는 거랑 무승부 중에 뭐가 더 좆같냐?”
“에? 갑자기요?”
“지는 것보다 애매한 무승부가 더 재미없다는 말, 어떻게 생각해?”
재민은 맥락 없는 이현의 질문에,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또 시시한 농이나 던지려 했으나, 사뭇 진지해 보이는 이현의 태도에 우스갯소리는 넣어두었다. 재민은 천천히 보폭을 늦추었다. 나름 고심하는 듯했다. 여전히 이현의 어깨에 둘려 있는 팔 위로, 울긋불긋 불거진 근육들이 움찔거렸다.
아니다. 너한테 뭘 묻냐. 이현은 애쓰는 재민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재민은 강아지처럼 앓는 소리를 내다가, 신발장 복도를 지나 로커룸에 도달할 무렵에서야 이현에게 다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는 건 죽기보다 싫은데요. 차라리 지는 게 낫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누가 그래요?”
“…그냥 다른 얘기나 하자. 그보다 이제 좀 떨어져라, 으, 땀.”
하다못해 동네 조기 축구회도 승패에 목숨 거는데. 재미라니. 존나 중2병도 아니고…. 설마 진짜 이 바닥 사람은 아니죠? 승률이랑 관련 없는 종목이어도 그렇게는 말 안 하겠다. 재민은 이현의 거리낌을 못 본 척하며, 끝없이 재잘댔다.
“그건 애초에 이길 마음조차 없는 거 아니에요? 그래야 재미 따위를 찾을 텐데. 설마 형 생각은 아니죠? 그럼 재수가 너무 없을 것 같은데요.”
…이길 마음이 없어? 재민의 꿍얼거림 사이에서, 한마디의 말이 이현에게 빠르게 꽂혀 들었다. 어쩌면 선수로서 당연한 재민의 반응은, 이현을 잠시 얼어붙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이길 생각이 없는 권지완?
그 생경한 수식어구를 되뇌기도 전에, 순간 훅, 이현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코너를 꺾은 재민이 냅다 허리를 굽혔기 때문이다.
“앗, 선배, 여기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타이밍 한번 공교롭다. 재민과 이현의 앞에 나타난 건, 찾을 땐 보이지 않던 지완이었다.
지완은 이미 씻고 나와 나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지완을 향해 무턱대고 허리를 굽힌 재민에, 팔이 둘린 이현마저 덩달아 고개 숙여 인사를 한 꼴이 되었다.
악, 놀란 이현이 외마디소리를 내뱉었다. 아, 형, 미안해요. 근데 형 지금 방심! 예기치 못한 맞닥뜨림에 당황한 이현을 두고, 철없는 재민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기어코 이현의 뒷목을 지분거리는 것이다. 형 이제 병균 다 옮았다. 재민은 흡족한 듯 히죽거렸다. 지완을 앞에 두고도 장난질이다.
허? 이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현의 목을 주무르는 재민의 손은 떠날 줄 몰랐다. 반죽이라도 치대는 양 구는 재민의 손을, 조금 힘주어 뿌리쳤다.
재민의 인사에도 지완은 말이 없었다. 지완은 날연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심기를 거스른 것처럼 어딘가 수틀려 보였다. 시선은 이현의 목 뒤를 감싸던 재민의 손을 향했다가, 뿌리치는 이현의 손을 따라갔다. 지완의 입가가 살짝 찡그리듯 움찔거렸다.
혹시 방금 얘기 들었나. 이현은 지완의 얼굴을 힐끗 곁눈질했다. 물기는 다 마르지 않아 지완의 머리는 젖어있었다. 머리카락 끝에 송골송골 맺혀있던 물방울들이, 지완이 얼굴을 응그림과 동시에 후드득 지완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이현은 괜히 마른 손을 바지에 쓸었다.
답이 없는 지완의 냉대가 한두 번은 아니었기에, 재민은 스스럼없이 방긋거렸다. 이현만 어딘가 어색한 정적을 감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샤워실과 연결된 로커룸에서는, 물소리와 헤어드라이어의 위잉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사에 대한 답 대신 지완은 반질했다. 되묻는 것인지 혼자 곱씹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이길 마음조차 없다….”
“…예?”
“뭘 믿고 그렇게 확신해.”
다 들렸구나. 이현보다 사색이 된 건 단연코 재민이었다. 재민은 눈에 띄게 목울대를 넘겨 가며 쓴 침을 삼켰다. 하하… 그게 지완 선배님 얘기였나 보네요…. 이현은 난처해하는 재민의 앞에 섰다. 등 뒤로 재민이 다 가려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밝은 곳에서 다시 본 지완은, 밤에 보았던 것보다 매서운 모습이 더욱 여실했다. 건조하다 못해 메마르게 뜯겨있는 그 입술에 이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다.
왜 어젯밤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운동할 게 아니라 메디컬이나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이현은 그딴 것부터 눈에 들어오는, 자신의 상식 밖, 지나친 연민에 자괴했다.
내가 지금 어머니 오지랖을 걱정할 때가 아니구나. 그런 찰나의 자기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지완의 습기 없이 마른 두 눈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지완은 크디큰 한 손을 올려, 양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두통이 잦을 때면 나오는 지완의 버릇이었다. 흔들리던 지완의 두 눈은 한 손에 가려졌다.
“이현아, 난 한숨도 못 잤는데 말이야. 누군 곰 새끼랑 희희낙락거리고 있고….”
“….”
“이거 좀 억울한데.”
손에 느릿하게 힘이 들어갈 때마다, 손등 위로 뚜렷하고 푸른 힘줄들이 움칠거렸다. 흰 피부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익숙한 말이었다. 권지완은 억울한 것도 참 많았다.
“억울할 것도 많다, 너.”
시원찮은 이현의 알량거림에 지완은 짧게 비식거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지완은 더 이상의 말 없이, 지저분한 시선을 거두었다. 탁. 로커의 문을 닫는 쟁연한 소리만이 남았다. 닫히는 문 사이로 보이는 지완의 얼굴이 저릿하게 찌푸려졌다. 찰나였으나 그 거슬리는 경련을 이현은 놓치지 않았다.
“야.”
재민은 어느새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님 약삭빠른 건지.
이현이 먼저 입을 열어 지완을 불러 세웠다. 그러나 지완은 거둔 눈길을 다시 내어 주지 않았다. 이현이 그 앞을 다시 한번 막아섰다.
꼭 일을 두 번 하게 하지. 이현이 재수 없는 지완의 팔을 잡아챘다. 미지근한 열이 올라오고 있었다. 평소보다 높은 체온에 이현은 짐짓 놀랐다. 얘 진짜 열이라도 나나?
“회장님 일은 유감이긴 한데, 이렇게 될 거 넌 대충 예상 했을 거 아니야.”
“….”
“왜 유난을 떨어? 안 어울리게.”
딴에는 옅은 걱정을 내비친 것이었으나…. 지완을 상대할 때면 케케묵은 말의 습관이, 이현의 의도와는 달리 먼저 선수를 쳤다. 하하. 유난? 지완은 싱겁게 두 입술을 터트렸다.
지완은 앞을 막는 이현의 어깨를 움켜쥐어 옆으로 밀어냈다. 적당한 압력이 이현의 어깨를 감쌌다.
“잘못 짚었어.”
“….”
“채이현, 난 너 때문에 밤새 좆같았던 건데.”
지완은 입술을 축였다. 거칠고 얇은 표피가 적셔져 붉은빛이 선명했다. 지완은 고개를 비스듬히 까딱였다. 이현은 똑똑히 꽂혀 드는 지완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혼탁한 지완의 두 눈이 이현의 위로 내려앉았다가, 무미건조하게 지나쳤다.
“…야. 그걸 왜 내 탓을 해.”
“….”
“네가 왜 좆같아?”
뒤늦은 이현의 말은 지완에게 닿지 못하고 맥없이 허공을 맴돌아야만 했다. 지완은 무심히 거울 앞쪽으로 가 본인이 꺼내둔 짐을 챙겨 들 뿐이었다.
“형. 어제 지완 선배 만났다더니… 또 싸웠어요?”
아님 집안일 때문에 기분 안 좋으신가. 지완과 이현을 멀리서 관전하던 재민이, 이현의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와 속삭였다. 혹여 제 목소리가 지완의 귀에 들어갈까 아주 작게 속닥거리며, 로커에서 운동복을 꺼내 들어 이현에게 내밀었다. 이현은 떨떠름하게 그 옷가지들을 받아들며 부정했다. 말과는 달리 발칵 짜증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