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51)

#63

고마운 줄도 모르고. 이현은 짜증 어린 손길로 내선 번호를 눌렀다. 082, 선수촌 종합상황실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지금 다친 걸 알리자고?’

또다시 권지완이다. 지완이 조롱하듯 만류했던 그때 그 모습이 눈앞에서 희끄무레하게 떠올랐다. 이현이 내선전화를 내려놓았다. 다시 집어 든 건 핸드폰이었다.

“…코치님, 지금 훈련실 와 보셔야겠는데요.”

결국 이현이 건 전화의 주인은 코치였다. 알리더라도 선수촌의 확성기인 종합상황실보다야 이쪽이 나았다. 나름 울타리 안의 집 아니겠는가. 이현이 고개를 슬쩍 꺾었다. 흘깃 바라본 태우는 이현을 쏘아보고 있었다. 같잖다. 이건 다, 하필 오늘 같은 날 이현의 신경을 긁는 태우의 잘못인 것이다.

‘이상하게 태우 선배는 약물 관련 소문이 많더라구요.’

이현의 뇌리에 재민의 말이 번뜩 떠올랐다. 이현이 영 미심쩍은 얼굴로 태우를 훑었다. 경련하듯 덜덜 떨리는 손과 발, 턱 끝이 이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꺼림칙했다. 이현은 전화를 끊고 천천히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면 같은 바닥, 원치 않게 엮인 운동부 식구로 할 일은 다 한 것이다. 이현은 훈련실을 빠져나왔다. 가는 곳마다 사고였다.

진짜 약이라도 하나. 그렇다 해도 이 이상은 이현이 알 바가 아니었다.

*

“어, 형! 왔어요?”

곧장 트레이닝 센터로 향한 이현을 반기는 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재민이었다. 루틴을 막 끝냈는지 땀에 절은 재민은, 반가운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길쭉한 팔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쌀쌀한 밖과 달리 센터 안은 후덥지근한 열기로 가득했다. 웨이트에 매진하는 선수들의 앓는 소리와 머신들의 작동 소리로 어수선했고, 여기저기서 호통 어린 고함이 귀를 찔렀다.

“몸은 좀 어때요?”

“아파서 쉰 것도 아닌데 뭘. 게으름이나 실컷 부리다 왔지.”

“하하. 형 입에서 게으름이라니. 이제 좀 사람 같네요, 형.”

“당연한 소리 마라.”

“그동안 휴가도 제대로 안 썼잖아요. 형은 언제 숨 돌리나 했는데 요즘은 훈련도 막 빠지고, 이젠 아예 잠수까지?”

덕분에 심심해 죽는 줄 알았어요. 재민은 바닥에 두었던 물통을 집어 들고는 이현의 앞으로 터덜터덜, 뛰듯이 다가왔다. 걸음마다 젖은 머리칼이 함께 풀썩거렸다. 그거야 요새 자꾸 권지완 때문에… 명백한 문제의 원인을 굳이 밝히진 않았다.

이현은 주위를 살폈다. 정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스키트와 소총 3자세 종목 선수들만이 함께 트레이닝을 받고 있는 듯했다. 일정표 다시 받아봐야겠네. 이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잘 쉬었어요, 형. 특훈 곧 시작인데 이제 쉴 시간도 없잖아요.”

한참 숨을 고르고 나서야 재민이 다음 말을 이었다. 가까워진 재민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가 후끈했다.

재민은 며칠간의 성과를 자랑하려 한껏 들떠 있었다. 이곳저곳 근육에 힘을 주어 가며, 이현의 눈앞에 들이미는 것이다. 형 이것 봐요, 며칠 동안 칼로리 커팅하고 웨이트 조졌더니… 어때요, 대박이죠.

땀방울이 달갑지는 않았다. 이현은 재민을 슬며시 밀어내며 혀를 내둘렀다. 재민아 너 연습은 제대로 하냐? 재민이 말없이 헤실거렸다.

재민의 입술 한쪽에는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고작 며칠 사이에 어린 애처럼 상처를 달고 온 재민은, 이현의 시선이 본인에게 머무는 영문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피? 이현이 제 입술을 톡톡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재민에게 물었다. 아아, 중량 치다가 입술 잘못 깨물었더니 팍! 터졌지 뭐예요. 그제야 재민은 어처구니없는 답을 내어놓았다.

“너 그렇게 막무가내로 몸 굴리면 코치님이 뭐라고 안 하셔?”

“형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이젠 조절해야죠. 하하. 그래도 스트레스받을 땐 중량 치는 게 제일이라. 특훈 시작하면 자율 웨이트 할 시간도 없을 텐데, 지금 바짝 해둬야죠.”

조심 좀 해, 뭘 얼마나 세게 깨물면 그래. 심드렁한 이현의 잔소리에, 재민은 빠르게 주억거렸다. 굵은 피딱지가 엉겨 붙어 있는 모습을 보니 흐릿했던 꿈의 기억이 아주 잠깐 반짝였다. 피? 피 같은 걸 토했던 거 같은데. 이현은 잠자코 제 입술을 더듬거렸다.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딘가 불편한 마음만이 자질구레하게 남았다.

“그나저나 유도부는 2교대로 나뉘었다며.”

센터의 한쪽에는 사격부와 대조되는 덩치들이 모여 있었다. 대강 훑었지만 이현이 아는 얼굴은 없었다. 반사적으로 찾는 것은… 우습게도 지완이었다. 이현은 갈 곳을 잃은 두 눈을 거두었다.

“안 그래도 같은 타임 쓰면서 괜히 눈치 보인다니까요. 그나마 2교대 해서 다행이죠. 저기도 골치 아프겠어요.”

“유도부 새끼들 눈치 보지 마. 넌 쟤들한테 비벼 볼만 해.”

“하하. 근데 형은 숙소에서 바로 온 거예요?”

“아니 잠깐 훈련실 들렀다가… 그보다 감독님은?”

“일정 바뀌고 첫날이라 둘러보러 오셨는데, 아까 무슨 전화 받고 나가시던데요?”

거의 형 오기 바로 전에, 급하게 가셨어요. 재민은 센터 출입구를 가리켰다.

태우에 관한 일일 것이다. 이현은 훈련실에서 마주했던 상황을 재민에게도 알릴까 싶었지만, 이내 관두었다. 재민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으나, 혹시 모를 소문의 근원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알리지 말라던 태우의 말에서 넘실대던 초조함이 이현의 발걸음 뒤로 따라붙었다. 이현은 맨땅에 발을 공연히 비벼댔다. 어제부터 아주 난잡하다. 난잡해.

재민아 너 여벌 있냐? 네. 근데 형, 트레이닝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갈아입게요? 응. 여기까지 왔는데 땀은 빼야지.

이현의 머릿속도 덩달아 혼잡한 상태였다. 총질이나 해대려 했으나 그것도 돌연히 기각당하고 말았다. 총질이 아니라면, 이현에게 남은 도피는 땀이나 진탕 빼며 몸을 굴리는 게 전부였다.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가늠하며 골머리를 썩이는 건 이현의 종목이 아니었다. 이현 자신의 머릿속도 스스로를 괴롭히는 데 한몫을 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한 번도 딛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에서 허우적대며, 이현은 과부하에 걸리고야 만 것이다.

이현은 탈의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재민이 쫄래쫄래 뒤를 따랐다. 하하. 형한테는 많이 클 텐데. 재민의 뒷말은 들은 체하지 않았다.

“아, 그보다 형. 태성 회장 결국 실형이라면서요. 그나마 잘 피해서 3년이라는데. 지완 선배는 좀 괜찮대요?”

“…그거 결과 나왔어?”

“오늘 새벽에 뉴스 나왔던데요. 확정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고…. 지완 선배는 미리 알고 있었을 텐데, 형한테도 별말 없었어요?”

재민의 말은 이현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다시 어젯밤 권지완의 앞으로 이현을 데려다 놓았다.

지완은 피곤해 보이긴 했어도, 아니, 그 전의 낯선 파안부터…, 이상했던 모습들은 그 때문일까.

아버지 일은 아버지의 일, 회사 일은 회사의 일이라며 못을 박고 살아온 지완이다. 이현은 무용한 생각을 접었다. 그런 걸로 신경 쓸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걱정이 되는 쪽은 제 어머니였다. 또 얼마나 넓은 오지랖으로 권씨네를 염려하고 있을까.

그럼에도 이현은 다시 덩치들 사이를 두 눈으로 헤집었다. 여전히 지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이 타임이 아닌가. 예전 같았다면 전혀 마음 쓰지 않았을 그 이질적인 모습들이, 이현을 넌지시 자극했다.

‘너희 집 일은 좀 너희끼리 알아서 해. 존나 지겨우니까.’

‘나도 지겨워. 이현아, 나도 지긋지긋하다고.’

못 할 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현은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지완의 붉은 눈에서부터 실핏줄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이현의 손끝에 옮겨붙던, 그 감각이 다시금 선연했다.

“지금 지완 선배 찾아요? 설마 걱정돼서?”

‘이현아, 또 나를 걱정해?’

한마디 한마디가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이현이 아무 말 없이 멈춰 서 있자, 재민은 이현의 시선을 따라 유도부 무리 사이를 힐끗 쳐다보고는 이현을 쿡쿡 찔렀다.

“…어젯밤에 잠깐 봤는데, 그냥 좀. 그 새끼 꼴이 최악이던데.”

“뭐예요, 형. 저랑은 밥도 안 먹어줬으면서 지완 선배 만날 짬은 있었어요?”

형, 좀 서운한데요? 이현의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보채는 재민을 대강 떼어내었다.

이미 던진 말을 내씹는 건 쓸모없는 짓이었다. 위로 따위의 말을 건넬 수도 없는 이현이었고, 그따위의 말을 기대조차 하지 않을 지완이었지만.

난 또 뭘 혼자 오버하냐. 이현은 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놓아주었다.

“맞다. 시아 영화 촬영 로테가 근처래요. 오늘 훈련 끝나면 같이 저녁 먹기로 했는데 형도 같이 갈래요?”

“저녁? 내가 거길 왜 가. 둘이 먹어.”

“하하. 형이 그렇게 말할 것 같긴 했어요. 둘은 아니고, 정연 누나 소개해 주려구요.”

“정연이도? 그럼 술 마시겠네. 조심해라.”

“시아 아직 학생이잖아요. 술은 안 마실 거예요. 특훈 전에, 그나마 시간 있을 때 바깥 공기 좀 쐐야죠.”

이현의 불편한 마음을 알 리 없는 재민이 화제를 돌리며 시시덕거렸다. 시아와 재민, 둘이 말을 놓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재민의 친화력에 새삼 놀랐었다. 그런데 벌써 밥까지 먹는 사이라니. 이현에겐 피곤한 친목질이었으나 재민은 즐거워 보였다. 성향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야, 너 설마 시아 씨랑 뭐… 그런 건 아니지? 몇 살 차이 안 난다고 해도 미성년자야. 이현이 재민의 가슴팍을 때리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와, 저를 뭐로 보는 거예요, 형 진짜! 재민이 억울함을 토하며 기함했다. 그럼 말고. 이현이 재민의 얼굴을 손으로 객쩍게 훑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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