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51)

#61

며칠 내내 취조받다 온 사람한테 너무한데. 지완은 눈을 느릿하게 끔벅였다. 짙은 눈 위의 가선이 선명하게 획을 그었다.

“…그냥 다른 새끼가 끼어드는 게 싫었을 뿐이야.”

“뭐?”

“주제도 모르고 지랄을 해대니까 스폰 몇 개 쥐여줬어. 운동 그만둔 새끼가 밥 벌어 먹고살 수 있는 길은 몇 안 되니까. 그 시기에 부상 관련 얘기 나오면 나까지 곤란해지잖아?”

가라앉는 배에 스스로 올라탄 거지. 지완은 짜증 어린 목소리로 끝내 답을 내놓았다. 별 얘기 아니라는 듯 지완은 그만저만한 태도였으나, 이현은 아니었다. 이현은 입술을 달싹였다.

“끼어들어?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차피 날 망치는 건 너고, 그 반대는 내 몫이고. 저번에 말했던 것 같은데 이현아.”

“….”

“이제 됐어? 만족해?”

지완은 태연했다. 확인하고자 했던 욕구는 단박에 사그라들었으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지금에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들, 지완의 말대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뒤늦은 감사 인사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고마움 따위도 들지 않았다. 이현은 그때의 일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현은 다시 지완의 어깨에 연지탄을 박아 넣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현을 아직 찝찝하게 하는 것은….

“나한테 왜 말 안 했는데.”

“그게 중요해?”

“…중요해.”

“아닐걸. 그딴 게 너한테 중요했으면… 이현아, 넌 내 어깨에 총 같은 건 갈기지도 못했어. 네가 더 잘 알잖아. 이제 와서 왜 이래?”

지완이 작게 코웃음 쳤다. 그 웃음마저 술에 뭉개지고 있었다. 지완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다.

“고맙다는 말 같은 건 사양하고 싶은데.”

“그딴 말 할 생각 없어. 내가 부탁한 것도 아니고. 너랑 내 사이에 어울리지도 않잖아.”

“하하. 잘 아네. 그럼 이제 질문들은 끝이야?”

이현은 단순한 사실의 경위 따위가 궁금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해든 아니든, 적대의 시발점은 지완이었다. 지완이 제공한 그 지저분한 육탄전의 장에서 이현은 이제 빠져나오고 싶었다.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유 잃은 감정들이 힘을 잃듯, 지완을 향한 이현의 승부욕도 바닥이 드러났고, 이현은 그것을 인지했다. 적대감도, 혐오도 붕 떠버린 고루한 핑퐁을 계속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쩌면 또 한 번 시야를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전 같은 무심한 무시 따위는 아니었다.

이현은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지완에게 탭을 치려는 것이었다. 다만 이현이 들어 올린 기권패를, 지완이 승복할 것인지는 조금도 예상할 수 없었다. 권지완은 언제나 미지의 영역이다.

일순간, 다시금, 이해가 가지 않는 것, 새로이 의문이 이는 것은 바로… 왜 권지완은 채이현을 손에 올려두고도 움켜쥐어 일그러트리지 않았을까.

지완은 지독히도 모순적이다. 지는 것과 봐주는 것은 다르다. 봐주는 건 승자의 위치에서만 베풀 수 있는 것이었다.

‘늘 그랬듯이 좆같게 굴어, 나한테.’

‘원하는 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하고. 이번에도 그러고 넘어가면 되는 거 아니야?’

‘왜 제 발 저려 해. 나한테 사과라도 받고 싶어?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너만 가만히 있으면, 나도 제자리라고.’

‘날 망친다면 그건 너여야지. 병신같이 다른 새끼한테 뺏길 수는 없잖아.’

‘그 반대는 내 몫이고.’

‘굴러떨어지는 채이현을 못 잡을까.’

‘내가 널 얼마나 봐주고 있는지, 넌 늘 몰라.’

‘내가 널 싫어한다고 어떻게 확신해?’

‘네 눈앞에서 기웃거렸으면, 이현아, 네가 이렇게 나왔을까?’

‘넌 나한테 진 적 없어. 단 한 번도.’

제자리를 유지하고 싶은 것이라면, 관계의 변화를 회피하고자 했다면…. 무심한 이현이 눈치를 챌 정도로, 돌이켜 보면 지완은 그 모순의 간극을 너무나도 빈번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간극이 결국 흔들림 없던 이현을 공연히 자극한 것이다. 이 또한 책임회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건 지완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현은 지완의 숨겨진, 그 이해할 수 없는 일면을 포착했다. 그 순간을 잡아챈 이상, 이현은 기꺼이 새로운 걸음을 뗄 의향이 있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가 되었다.

적절한 표현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소꿉친구, 선의의 라이벌 같은 흔해 빠진 고리는 둘 사이에 어울리지 않았다. 마땅한 것은… 이제 찾아가면 그만이었다.

“권지완, 씨발 복잡한 새끼.”

“또 뭐가 남았는데.”

“난 청산하는 거야. 너랑 이 질척거리는 진흙탕 싸움에서 확실히 빠져나오고 싶다고.”

“….”

“네가 나한테 대체 뭘 지고 있는지, 나 때문이라는 그 말도 안 되는 이유는 뭔지 모르겠는데…. 난 이제 아니라고. 나야말로 씨발 이 말을 몇 번째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그게 지금 하고 싶은 말이야?”

“이제 좀 끝내자. 끝낼 때도 됐잖아. 권지완, 너도 좀 솔직해져 봐.”

지완은 천천히 허리를 굽혀, 떨어진 물병을 집어 들었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지완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간 듯했다. 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탁한 시야를 보다 선명히 개고 싶었으나 소용없었다. 어두컴컴한 사이에서, 지완의 얼굴은 줄곧 흐릿했다.

“이현아 내가 이미 말했잖아. 넌 늘 나를 병신으로 만든다고. 네가 말하는 솔직함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절절한 고백은 내가 한발 빨랐던 거 같은데.”

“….”

“대책 없이 선 넘지 마. 너머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지완은 잘 보이지도 않는 쓰레기통에 물병을 단박에 던져 넣었다. 플라스틱들끼리 부딪히는 소리만 잘가닥거리며 자작했다. 철컥, 곧장 현관문을 연 지완 너머로, 대비되는 선명한 조명이 방 안을 비췄다. 나지막한 지완의 말도 함께 흘러들어왔다.

“애매한 무승부가 더 재미없잖아. 지는 것보다.”

쾅,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적막한 방 안에 울렸다. 어두운 이곳에 홀로 남는 것, 이번에는 이현의 몫이었다.

…재미는 개뿔. 서로 지기만 하는 게 무승부랑 뭐가 달라, 병신아.

이현은 몸에 힘을 풀었다. 이해할 수 없는 권지완. 평생 패배의 연속이었다던 지완은, 이현의 기권을 무시했다. 이 또한 모순이었다. 왜. 권지완은 대체 왜? 그 모순의 이유는 무엇일까.

이현은 알지 못했으나, 승기를 잡을 기회는 역설적이게도 기권패를 먼저 손에 쥔 이현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매듭은 이현이 쥐고 있는 한쪽 끈만으로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고단한 여독이 몰려왔다. 그것은 이현의 눈꺼풀을 지그시 감겼다.

“이따위로 굴면서 대체 누가 누구한테 진다는 거야.”

서로 지기만 하는 관계에서, 기꺼이 발을 빼는 것도 더럽게 힘들었다.

*

‘채이현.’

이현을 부르는 지완의 목소리는 이질적일 만큼 부드러웠다. 그 어떤 조소와 희롱도 배지 않고, 나긋한 그 음성에는 다정함만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이현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일말의 동요도 없이, 그 다정함이 무척 익숙한 것처럼, 막연히 지완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현아.’

눈앞의 지완은 단정하지 못한 교복 차림이었다가, 풀어 헤쳐진 유도복을 입고 있었다가, 편안한 검은 니트의 홈웨어를 걸쳤다가,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스리피스를 갖추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모습에도 이현은 한 치의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지완이 입은 옷에 따라 배경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교실, 학교 운동부, 그 옆에 난 샛길, 지독할 만큼 자주 마주쳤던 등하굣길, 지완이 꼭 담배를 물고 있던 골목길, 그리고 시간을 훌쩍 넘겨 올림픽 시상대 위로 이동했다가, 다시 평평한 매트 위였다가, 지완의 집이었다가, 을왕리의 밤바다를 스쳤다. 마지막은 우습게도 선수촌의 주차장이었다.

이현이 그 배경들과 관련된 추억 하나하나를 되새기자 지완이 끼어들었다. 지완은 늘 그랬던 것처럼 이현의 뒷목을 쓰다듬고, 양 볼을 쥐었다가, 어디서 났는지 모를 모자를 이현의 머리 위로 푹 눌러 씌웠다. 정돈되지 못한 머리카락들이 이현의 시야를 방해했다. 이현은 머리를 살짝 흔들며 머리카락들을 치워냈다.

훅 가까워진 지완의 인영이 이현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동시에 익숙한 지완의 향이 풍겼다. 담배. 골초 새끼, 한 번도 끊은 걸 본 적이 없다.

모자의 챙을 위로 올렸다. 이현의 시야가 눈부시게 개었다. 지완은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어 이현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이현이 모자의 챙으로 지완의 이마를 밀어내었다. 담배 냄새 나. 이현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현아, 너도 마찬가지야. 지완의 얼굴이 만개했다. 이현의 양어깨를 잡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허리를 굽혀가며 웃어댔다. 왼 볼에 어울리지 않는 아기자기한 보조개를 만들고, 지완은 눈꼬리를 한껏 접었다. 붉고 두툼한 입술이 활짝 보기 좋은 호선을 만들어냈다. 낮고 꽤나 호탕한 웃음소리가 이현의 귓가를 간지럽게 매만졌다. 사나워 보이는 곧은 눈썹은 웃음소리에 맞춰 조금씩 꿈틀대고 있었다.

이현은 그 모든 순간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짧은 찰나는 이현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잠시 일시 정지를 했다가, 다시 느린 배속으로 재생되었다가, 다시 일시 정지를 반복했다. 이현은 아주 미세한 변화도 놓치지 않았다. 지완의 긴 속눈썹이 눈가에서 한들거리는 작디작은 움직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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