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51)

#60

내가 누구 때문에… 대신 이현은 지완의 넥타이를 확 잡아끌었다. 까닭 없는 화풀이에 가까웠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지완이 허리를 살짝 굽혔다. 주춤하는 것은 잠시뿐이었다.

“누가 보면 오해하기 딱 좋은 자센데. 스캔들 하나 더 만들어….”

“야, 닥쳐. 제발.”

이현은 지완의 가슴팍을 밀치듯 넥타이를 놓아주었다. 휙 몸을 돌려 곧장 앞장서서 숙소로 향했다. 보나 마나 뒤에선 지완이 그 밉살맞고 곱상한 조소를 지어 보이고 있을 것이 뻔했다.

아니다. 정정한다. 지금껏 이현이 봐왔던 그 쓸데없이 예쁘장한 웃음은 고작 한 줌에도 못 미치는 같잖은 것이었다. 진정한 것은 저 새끼 속에 꼭꼭 숨어 있었다. 아, 기분 좆같네. 간절기의, 아니 이제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찬바람이 이현의 기분에 동조하듯 일렁였다. 이현은 다시 뒤를 돌았다.

“야. 따라와.”

*

호기롭게 지완을 이끌었으나, 그래 봤자 숙소였다.

지완은 익숙하게 소파에 앉았고, 이현은 부엌으로 향했다. 거실 조명을 켜지 않은 숙소는 어두웠다. 커튼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얕은 불빛만이 거실을 야트막하게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불을 켜려 했으나 지완이 제지했다. 뻐근한 목을 돌리며 뚜둑, 근육을 푸는 지완의 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현은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다. 꿉꿉한 찝찝함도 신물이 났다. 어울리는 짓이 아니었다.

“권지완.”

“무슨 말을 하려고 방까지 끌고 왔을까.”

지완은 관자놀이를 지분댔다. 피곤한데…. 지완이 읊조렸다. 이현은 그런 지완을 못 본 척했다.

“어머니 또 사모님 병실 가 계시더라. 그 기사 너도 봤지.”

“….”

“너희 집 일은 좀 너희끼리 알아서 해. 존나 지겨우니까.”

이현은 냉장고에서 물을 두 병 꺼내 들어 하나를 지완에게 던졌다. 지완은 심드렁하게 잡아챘다. 말이 곱게 나가진 않았다. 사모님한테 전화 드려. 네가 애새끼도 아니고…. 이현은 어눌하게 말을 맺었다.

“나도 지겨워.”

“….”

“이현아, 나도 지긋지긋하다고.”

나지막하게 말하며, 지완은 몸을 소파에 기댔다. 늘어트린 그 자태에는 피비한 기색이 역력했다. 누적된 피로가 여실히 드러나는 듯했다. 지금은 어둠에 가려졌으나, 이현은 지완의 붉은 눈을 상기했다. 지완의 술기운이 점점 더 올라오는 듯했다.

이현은 예상치 못한 지완의 솔직한 반응에 차가운 물병만 움켜쥐었다. 지완은 여전히 앞만 바라본 채로, 몇 모금의 물을 삼켰다. 내리깐 지완의 두 눈에는 희미한 불빛이 올라탔다. 그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입술을 손등으로 가볍게 훔친 지완이 말을 이었다.

“어떡할까, 이현아. 내가 대신 굽실거려줘?”

그럼 만족스럽겠어? 가시가 돋은 지완의 말은, 모순되게도 그 문맥과 달리 유완했다. 완곡한 그 투는 정말로 이현의 말이 무엇이든, 당장 따르기라도 할 듯 부드러웠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 말투에는 여유가 넘쳤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이현을 내려다본다.

“권지완, 내가 너한테 지는 게… 넌 그냥 재밌지?”

이현은 포악하지 않은 숨을 불어넣었다. 예사로이 덤덤했다. 따져 묻는 것이 아니었다. 확인 같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소파에 기대 목을 가볍게 젖히고 있던 지완이 고개를 틀었다. 부엌 테이블 앞에 서 있는 이현을 향했다. 두 눈이 교차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이현은 피하지 않았다. 물병의 물기로 손은 축축했다.

“나도 내가 이런 말을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현이 운을 뗐다. 술을 마신 건 지완이었으나, 정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말을 내뱉는 건 이현 쪽이었다. 이현은 자조적으로 경소했다. 지완은 따라 웃지 않았다. 이현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너 동력으로 사용했다는 거, 그거 틀린 말 아니야. 너한테 질 때마다 목숨 갈아 넣어서 총질해 왔으니까.”

“….”

“너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수도 있지. 나 그거 부정 안 해. 이제 인정해.”

고백하라니까 진짜 하네. 이현아, 나 좀 부담스러운데. 지완이 밋밋하게 생긋거렸다. 지완은 진지하게 듣고 있지 않았다.

이현은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깔끔하게 세팅된 지완의 머리와 달리 이현의 머리가 자연스레 흐트러졌다. 지완은 물병만 느릿하게 돌려대고 있었다. 이현은 지완의 바로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지완이 손장난 치고 있던 물병을 낚아챘다. 물 몇 방울이 주변으로 튀었다. 이현은 남은 물을 마저 들이켜 비워냈다.

빈 플라스틱 물병을 힘껏 구겼다. 물병의 입구엔 얕은 지완의 호흡이 여태껏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넌 우습냐?”

“하하. 응.”

진담은 얼어 죽었다.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어둑한 시야가 괜히 더 사람을 진지하게 만들었다. 먹히지 않는 상대 앞에서는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이현은 소파에 괜한 발길질을 한 번 하고는, 불을 켜기 위해 몸을 틀었다. 내 방인데 네가 어쩔 거야.

그러나 그런 이현의 움직임을 미리 읽기라도 한 듯, 순간 지완이 이현의 팔을 붙잡았다. 거센 악력은 이현을 거실의 낮은 테이블 위로 걸터앉혔다. 지완과 마주 보는 형국이었다. 아, 이 새끼 또 힘쓰네. 이현은 얼굴을 구기며 지완의 팔을 뿌리치려 했다. 지완의 손아귀는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한없이 가라앉은 지완의 두 눈이 박혀 들었다.

“이현아. 난 말이야.”

전과는 다른 지완의 음성이 익몰해 갔다. 삽시에 이현은 공교롭게 자신을 휘감는 낯선 공기에 사로잡혔다. 술 때문일까. 이로써 두 번째다. 전무했던 지완의 모습은 이로써 두 번이나 이현 앞에 들이닥쳤다. 하나는 구김 없이 만개하는 그의 얼굴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금 이 순간의….

“그런 좆같은 기분 따위 모르고 살 수 있었어. 너만 아니면.”

“….”

“동력이니 뭐니, 그딴 포장은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완은 말끝을 흐리며 한 손으로 넥타이를 풀어내었다. 불편한 듯 재킷마저 벗어냈다. 웃음기 없는 지완이 다시 이현을 불렀다.

“그러니까 착각하지 마.”

“…내가 뭘?”

“네가 져?”

“….”

“넌 나한테 진 적 없어. 단 한 번도.”

다시 고개를 돌린 지완이 고요히 웃었다.

그건 언제나 내 쪽이지. 지완은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한 손으로 이마를 괬다. 피로와 알코올로 범벅되어 갈라지고 탁해진 지완의 목소리가 드리웠다. 저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목소리는 고요 속을 유영했다. 자그만 소성도 그림자 지지 않았다.

“이현아, 난 늘 너한테 져. 져준다고. 씨발, 지는 건지 져주는 건지….”

남아 있는 지완의 손길은 서늘했다. 이현의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인지, 지완의 손이 차가운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 파악하기 힘든 열의 전도처럼 지완의 말 역시 모호했다.

“네가? 권지완, 네가 진다고?”

이현은 확인하듯 되물었지만, 지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완이 가볍게 손끝을 오므렸다가 피며, 손에 남아 있는 물기를 이현의 얼굴 위로 털어내었다. 그새 다시 농지거리처럼 넘어가려는 것이다. 이현은 튀는 물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현아, 말장난은 말장난으로 끝내. 지금처럼. 장난으로 받아줄 때. 지완은 실없이 덧붙였다.

“…야.”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일단은 접어두기로 했다. 무엇이 지완의 혀를 건드린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지완이 울컥하고 내뱉은 덩어리는 또 다른 갈래로 이현을 이끌었다.

“네 말이 맞다고 치자.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쳐. 난 너한테 지고, 넌 나한테 지고. 서로 지기만 하는 이런 개좆같은 관계가… 그래, 있다고 치자고.”

“….”

“그럼 넌 대체 뭐 때문에 나한테 지는데. 말해 봐.”

한번 트인 물꼬를 이현은 막지 않았다. 열등의 연료를 제공받아 지금껏 아무것도 묻지 않고 열심히 태워 오기만 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이현, 자신이 아니라면 지완도 아니어야 할 것이다. 묵은 의문을 해갈하고자 맘먹은 이상.

“하세민, 걔….”

“또 하세민? 하하. 씨발 진짜 지겹네.”

지완은 이현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겉옷을 챙겨 성큼 현관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발소리만이 선명했다. 이현은 구겨놓았던 빈 물병을 힘껏 던졌다. 우연찮게도 플라스틱 쪼가리는 지완의 오른쪽 어깨를 맞고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완이 멈춰 섰다.

“하세민이 너한테 앞으로 뭘 하든 그건 나랑 상관없으니까, 그래, 씨발 네가 알아서 하고.”

“그래. 그래야 채이현 너답지.”

“근데 그 새끼가 이미 한 번 너한테 뭘 얻어냈다고 하던데. 그거 나랑 관련된 거 맞지.”

“….”

“생각할수록 하세민이 그때 그 일을 그냥 넘어간 게 말이 안 되잖아.”

지완은 처지는 손길로 제 이마를 쓸어내렸다. 내가 아는 채이현은… 지난 일 들쑤시고 다닐 만큼 병신 새끼가 아니었는데. 지완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현아. 네가 그걸 알면 뭐가 달라지는데?”

“내 찝찝함이 해소되겠지. 그리고….”

“그리고?”

이현은 뒷말을 지워냈다. 사실 이현도 답을 얻는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지는 알지 못했다.

이현은 이어지지 못하는 대화의 맥락에 다시 지완을 불러 세웠다. 지완이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대답해. 나도 더 이상 너 귀찮게 할 일 없어.”

“진짜 가지가지 한다, 이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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