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대신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지완의 볼을 잡아챘다. 이 또한 지완이 이현에게 습관처럼 자주 하던 행동이었다. 이현이라고 못할 것은 없었다. 상황을 무마하려 무턱대고 구는 것은 아니었다. 가까이에서 본 지완은, 더욱 극예해진 얼굴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완은 예상치 못한 이현의 행동에 한 박자 늦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현은 한 손으로 부여잡은 지완의 양 볼을 좌우로 돌려가며,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키 차이로 인해 이현의 손과 고개는 조금 위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지완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현아, 지금 나 따라 해? 이현은 대답지 않았다.
“살 빠졌냐?”
이현이 싱겁게 물었다. 지완은 잠시 그대로 이현을 내려다보다 이내 얼굴의 힘을 풀었다. 지완의 입술 사이에선, 픽 바람이 샜다. 실핏줄이 터진 지완의 두 눈은 한껏 충혈되어 온통 붉었다. 지완이 이현의 손을 잡아 내렸다. 행동 하나하나가 야금야금 이현을 간질였다. 터진 실핏줄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이현에게 옮겨지는 것 같았다.
“보기 안 좋아?”
“응. 존나.”
그럴 리가 없는데. 뻔뻔히 대꾸하며 지완이 이현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그보다 여기까지 마중 나오고 말이야…, 아주 감동인데? 마중 아니라고, 그냥 바람 쐬러 나온 거야. 이현아 넌 갈수록 어설퍼져, 자꾸 기대되게.
지완은 이현의 목 아래쯤을 한 손으로 가볍게 밀며, 흡연 구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현은 마지못해 맞춰주었다. 찬바람을 몽땅 맞아 서늘했던 뒷목은, 높지 않은 열기에 뒤덮였다. 차에서 막 내린 것치곤 지완의 손도 따뜻하진 않았다.
지완은 검지와 중지로 이현 뒷목의 상처를 훑듯이 어루만졌다. 이현은 몸서리를 쳤다. 아주 그냥 내가 네 장난감이지. 이게 한 번 봐주니까 자꾸 지랄이네? 이현은 지완의 명치를 가격했다.
지완이 대수롭지 않게 웃음을 흘렸다. 웃음이 잦아진 걸 보아하니 술이 들어간 것이 확실했다.
“어디 갔다 와? 뭘 이렇게 빼입었어?”
“왜. 이것도 보기 안 좋아?”
“어. 존나.”
“그건 정말 그럴 리가 없는데.”
지완은 했던 말을 반복하며, 태연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난 금연.”
“하하. 또?”
흡연 구역에 다다르자 지완이 담배 하나를 물어 들며 이현에게 담뱃갑을 건넸다. 이현은 사양했다. 대신 이현은 지완이 손에 들고 있는 라이터를 빼앗아 들어 불을 지폈다. 연신 갑작스러운 행동을 하는 이현이 의아한지, 지완은 미간을 꿈틀거리면서도 연초의 말단을 내주었다. 익숙한 담배 향이 퍼졌다.
“정유진이랑 무슨 사이야? 언제까지 발뺌할 건데?”
조금 전 이현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지완의 말간 웃음은, 그새 마음 한구석의 거슬림으로 변모해있었다. 발칫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걸리적거렸다. 억울하고 분하다. 괘씸한 건 당연지사였다.
그런 모습을 제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지완이었다. 그 순간 드러난 그의 가식 없는 천연한 작태를, 이현은 고까워하고 있었다. 이 개새끼… 그런 얼굴도 할 수 있으면서. 나한테는 왜 매번 지랄인데? 그건 억하심정에 가까웠다.
“연애 같은 거 안 한다고 했잖아.”
“퍽이나. 네 꼴을 봐.”
“내 꼴이 어떤데?”
“네가 존나….”
이현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적합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이현은 윽, 토악질하는 척을 해댔다. 대비되게도 지완의 입술은 계속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현은 더 못마땅했다.
“뭘 웃어.”
“시비도 다양하게 건다 싶어서.”
“나한테도 좀 그렇게 살갑게 굴어봐. 어?”
별 의미 없이 뱉은 말이었다. 속에만 담아 두려던 심정이 아주 조금 새어 나왔으나 그 정도는 충분히 장난처럼 넘어갈 수 있는 언사였다. 흩어지는 연기에 지완의 모습이 가려졌다가, 이내 다시 드러났다. 그 다밭은 사이 지완의 표정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지완이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어떻게라니.”
“내가 뭘 어떻게 살갑게 굴까,”
“….”
“응? 말해 봐, 이현아. 난 섹스할 때 말고 살갑게 굴어본 적이 없는데.”
“그냥 입을 열지 마. 넌 그게 최선이다.”
우습지도 않은 지완의 희롱에, 이현은 시시하게 코웃음을 쳤다.
지완은 그새 몽땅해진 연초를 마지막으로 들이마시고는 긴 연기를 되뱉었다. 이현은 자신 쪽으로 날아오는 연기를 손사래 치며 흩트렸다. 묻고자 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보다… 하세민 말이야. 걔 대체 뭐야?”
“….”
“걔가 너한테 뭘 얻어내겠다고 나보고 도우라던데. 적의 적은 동지라나 뭐라나.”
뒷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지만… 이현의 입에서 나온 하세민이라는 이름 세 글자에 지완은 다시 날 선 얼굴을 했다.
연초를 비벼 끈 지완이, 이현 뒤쪽에 놓인 재떨이로 팔을 뻗었다. 순간 가까워진 지완의 호흡에선 희미한 술 냄새가 스며 나왔다. 지완의 주량을 가늠했을 때, 한두 잔 정도 걸친 듯했다. 진짜 얜 어딜 갔다 온 거야? 다시 한 번 묻고 싶었으나 관두었다. 소주나 맥주 따위의 지독한 냄새는 아니었다.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지완은 대답 대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현은 불만족스러운 한숨으로 응수했다.
“넌 어떻게… 제대로 된 대답을 한 번도 안 하냐? 내가 먼저 물었잖아.”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 하세민이 무슨 짓을 할지?”
“….”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물을 상대가 잘못된 것 같은데.”
“아니, 넌 안 찝찝하냐?”
일말의 우려도 보이지 않는 지완의 모습에, 이현은 그의 몫까지 미심쩍어 할 수밖에 없었다. 지완은 세민이 어떻게 나올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감흥 없어 했다. 본인과는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흐음, 지완은 이현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차근차근 뜯어보며 의뭉스러운 숨을 토했다. 본인의 턱을 두어 번 매만졌다. 긴 손가락으로 제 볼을 탁탁 느릿하게 두드리더니 다시 손을 내렸다.
“이현아,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뭔데.”
“….”
“네 입장에서 나나 하세민이나 다를 게 뭐야?”
지완은 손목을 돌려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 두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습관처럼 치켜 올라간 눈썹은 어딘가 탐탁지 않아 보이는 지완의 속을 내비치고 있었다. 묻는 건 지완 쪽이었으나, 의문이 이는 건 이현도 마찬가지였다. 얜 대체 무슨 생각일까. 이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모든 관계가 그렇다. 뒤집어 헤집지 않으면 속을 알 수 없다.
20년을 붙어 살아왔지만 맞댄 등은 서로의 표정을 가리기만 했다. 지완은 언제나 흐리터분했다.
“지금 내가 내 얘기 해? 권지완, 너에 대해서 말하고 있잖아.”
“…뭐?”
지완이 얼굴을 구기며 되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하하, 이현아… 또 날 걱정해? 지완이 소리 내어 비웃었다. 반응하지 않는 이현에, 지완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난 내가 하세민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 네가 고작 몇 개 오해했던 걸로….”
“….”
“내가 하세민을 그냥 봐주고 있었던 건, 걔가 하는 짓이 재밌으니까 그런 거야. 날 좀 닮기도 한 거 같고.”
“널 닮아?”
알 듯 말 듯,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 소리를 해댄다. 지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완과 닮았다? 이현은 공감할 수 없었다. 처음에 세민에게 느낀 그 꺼림칙함이 지완에게서 느꼈던 기시감이라 여겼으나, 아니다. 세민과 지완은 조금도 같지 않았다. 이젠 알 수 있었다.
그걸 지완 본인은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완이 하는 말은 그저 변명거리처럼 아득했다. 막연히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현은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는 지완의 태도에 탄식했다. 깊은숨은 담배 연기를 대신했다.
“내 어깨 두 번 작살 내고 나니까 미안함에서 못 헤어 나오겠어? 아니면 고생하는 내가 불쌍한가. 계속 이러는 건 좀 실망인데.”
“꿈 깨. 미안함 따위는 씨발 네가 내 입술에 박치기했을 때 끝났어, 개새끼야. 또 짜증 나게 만드네.”
“그럼 다행이고.”
이현의 욕지거리에, 지완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까 봤던 그 웃음에 비하면 턱없이 겉도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현은 또 심술이 일었다. 심술은 퉁명스러운 말투에 녹아들었다.
“진짜 하세민이 무슨 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글쎄. 그건 가봐야 알겠지.”
“여기서 논란거리를 더 키우게? 너 때문에 장 코치님도 그만두신다던데.”
우리 전지훈련도 너희 유도부 돼지 새끼들 때문에 다 꼬이게 됐잖아. 네 책임이야, 양아치 새끼야. 이현이 덧붙인 질책에도 지완은 그저 소성만 갈무리할 뿐이었다.
이현은 습관처럼 몸을 움츠리며 팔짱을 꼈다. 드문드문 밀려 닥치는 추위에 또다시 몸이 떨리는 탓이다.
“장 코치 그만두는 건 내가 방금 해결하고 오는 길이고.”
“네가? 협회의라도 참석하고 왔냐?”
“그것보단 채이현 발발 떨어대는 거나 신경 쓰는 건 어때.”
그렇게 추운 날씨도 아닌데 말이야. 지완이 숙소 쪽으로 턱짓했다.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현은 밥 먹듯 잘리는 제 말도, 추위에도 더위에도 나약한 제 몸뚱어리도 고까웠다. 이현이 지완을 흘겼다. 누구 맘대로 대화를 끝내.
무어라 반박의 말을 꺼내려 했으나 멀리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자정도 되지 않은 시간이다. 훈련이 이제 막 끝난 선수들이 흡연 구역으로 몰려오는 듯했다. 여기서 더 나눌 만한 얘긴 아니었다. 이현은 입술을 달싹거렸다가, 이내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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