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이현은 이번에도 선수를 놓친 것에 통탄했다. 나름 ‘내가 널 도왔다’ 정도의 생색을 먼저 낼 수 있는 기회였다. 도와주고도 말리는 기분. 꼭 이현은 이런 순간에 패배감을 맛봐야 했다.
오후 8:20 {너 어디냐?}
이현은 샐쭉이 물었다. 이 와중에도 재민에게서 오는 카톡이 울려대고 있었으나 하등 쓸모없는 이야기뿐이었다. 이현은 상단에 뜨는 카톡 알림창을 위로 올려 없앴다. 동시에 지완에게서 짧은 답이 왔다.
{어디면?} 오후 8:21
오후 8:21 {?}
지완의 대답은 뜬금없었다. 이현은 곧바로 물음표 하나를 찍어 보냈다. 1은 바로 사라졌으나 한동안 답장은 오지 않았다. 뭐 하자는 거야? 이현이 다시 물음표 하나를 더 보내려 할 때쯤, ‘권지완’, 세 글자가 액정 위에 떠올랐다. 카톡 대신 전화였다.
[어디면 어떡할 건데, 이현아.]
“너 술 마셨냐?”
무작정 제 할 말을 내뱉는 지완에, 이현이 빈정거렸다. 하하, 지완의 야트막한 웃음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였다. 가벼워 보이는 말투와 달리 지완의 목소리는 한껏 갈라지고 탁했다. 두 마디만으로도 충분히 알아차릴 만큼, 피곤함이 여실히 녹아 있었다. 그 뭉개지는 음성은 지완이 취했을 때와도 어딘가 비슷했다. 이현의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마셨으면?]
“말장난 작작….”
지완이 자꾸 말꼬리를 잡아 물었다. 단호히 어깃장을 놓는 이현의 말을 지완이 뚝 잘라냈다.
[마셨으면 데리러 올래?]
“…돌았어?”
[로맨틱하게 고백한 김에 좀 더 용기 내 보는 건 어때. 내가 한번 고민해 볼게.]
“고백 같은 소리 하네, 이게 은혜도 모르고…. 야, 내가 너 크게 도운 거야.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부탁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런 걸로 치고 그럼.]
며칠 새 더 양아치가 됐네. 탕아 같은 지완의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입술 사이로 실소가 새었다. 어딘지나 말하고 대리를 부르든가. 이현이 지완을 향해 더한 타박을 하기 전에, 지완이 다른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완아 내가 데려다줄게. 요즘 같은 때에 대리 불편하잖아.]
[네가 왜.]
[나 아마도 내일 스케줄 없을 거야. 진천 금방인데 드라이브하는 셈 치지, 뭐.]
배죽대던 입술은 미동 없이 멈춰 섰다. 또, 또. 익숙한 목소리였다. 달갑지는 않았다. 정유진이었다. 정유진이랑 술을 마신 건가?
“진천으로 오냐?”
이현은 둘 사이의 대화를 못 들은 척 물었다. 지완이 그런 이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점이 항상 문제였다.
[하하, 이현아 다 들었으면서 왜 못 들은 척해. 그럴 때마다 병신 같은데.]
“…그래 네 좆대로 해. 나 휴가야, 건들지 마.”
[한두 시간 걸리겠다.]
“너 내 말은 안 들리냐? 인성 논란이 왜 터지겠냐고.”
[지금의 너를 만들어준 내가 가잖아. 아주 반가울 텐데.]
꺼져. 아직 휘몰아치는 ‘태성 게이트’의 히어로 권지완은, 마치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여유로웠다. 이현은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태연한 지완의 작태에 비위가 나빠졌다. 헛물을 켠 기분이다. 통화는 끊겼지만 귓가엔 지완의 나지막한 소성이 잔잔히 울리는 듯했다. 징그러워 죽겠네. 이현은 귀를 마구 손으로 털어냈다.
{난 반가운데}
{꽤}
{아주 많이?} 오후 8:32
미친 새끼.
*
이현이 시간을 얼추 맞춰 밖으로 기어 나온 것은… 의도치 않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사모님께 연락이나 하라며, 모친의 당부를 카톡으로 전하고 말 생각이었다. 때마침 튼 TV에서 세민과 시아의 인터뷰 따위만 나오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더 이상 미룰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어찌 됐든 세민이 내뱉은 말을 시한폭탄처럼 홀로 껴안고 싶진 않았다. 세상이 소란스럽게 지완에 대해 떠들수록 이현의 머릿속은 쿡쿡 쑤셔댔다. 확인하고자 하는 낯선 욕구를 다시금 자극시켰다.
군데군데 설치된 가로등이 선수촌을 밝히고 있었고, 훈련이 끝나지 않은 곳곳의 건물들에선 아직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현은 숙소 옆 흡연 구역에서 주차장 쪽으로 몸을 틀었다. 담배를 피우러 나온 것은 아니었다.
저번에 재민에게 남은 담배를 건넨 후로 이현은 연초를 다시 물지 않았다. 훈련도 마다하고 숙소에만 처박혀 입이 심심할 법도 한데, 흡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나마 잘된 일이었다.
할 것도 없이 쌀쌀한 밤공기에 뒤척일 때쯤, 주차장 쪽으로 낮은 폭의 날렵한 차체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이현은 가로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입구에서는 몇 걸음 떨어진 거리였다.
익숙한 차였다. 지난번 바로 저 자리에서 맞닥뜨렸던 정유진의 차가 분명했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파파라치처럼 구는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으나….
탁, 조수석에서 내린 지완이 문을 가볍게 닫았다. 바람이 곧게 깎인 이현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현은 잔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꿀꺽 삼켜내며 잠시 숨을 멈췄다. 연극 속 주인공이 무대에 오르듯, 지완은 주차장의 가로등 조명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얜 뭐 검찰에 시상식 하러 갔냐.’ 이현은 정연의 빈정 어렸던 감탄사를 다시금 되뇌었다. 맞는 말이었다. 아니 그건 우스운 정도였다. 흔해 빠진 가로등 조명은 마치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처럼 지완을 한가운데에 올려두고 있었다.
지완의 너른 등을 감싸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들어맞는 슈트는 마치 지완과 한 몸인 듯했다. 손목의 시계가 빛을 반사시키며 얼핏 반짝였다. 논란보다 더 뜨거웠던 그 영상 속 모습, 그대로였다. 이현은 눈을 느리게 끔뻑이며 그 자태를 직접 목도했다.
영상 속 지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완벽한 스리피스라는 것. 어딜 다녀온 것인지 베스트까지 갖춰 입은 지완은, 땀 냄새 자욱한 선수촌 안에서 홀로 영화제의 포토라인을 세우고 있었다. 이현은 무의식적으로 일소했다. 작정했네, 저 새끼….
뒤로 깔끔히 넘긴 머리는 이현이 꽤나 마음에 들어 하는, 지완의 흠 없는 이마를 온전히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유도복이나 운동복 차림을 훨씬 많이 봐왔지만, 그 이전의 모습은 희미해지고, 지금의 모습이 하나의 이미지처럼 강하게 머릿속에 들이박혔다.
살 좀 빠졌나. 조금 더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에 이현이 눈가를 찌푸렸다. 조수석의 차창이 내려갔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유진이 무어라 지완에게 말을 전하는 듯했다. 당연히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현은 다시 한번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권지완, 그 새끼가 아주 환한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맑은 웃음은 지완의 왼쪽 볼가에 보기 좋은 도랑을 만들어 내며,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을 한순간에 앗아갔다.
이현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못한 채 찬 공기를 아득 베어 물어야만 했다. 차창에 손을 짚고, 여기까지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릴 만큼 즐겁게 웃는 지완의… 그 파안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지완임을 몰랐다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극명한 차이였다. 그 표현에는 일말의 과장도 섞이지 아니했고, 지완의 그 모습은 이현이 결단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현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려는 듯, 그 웃음은 가벼운 살랑거림만을 남겨두고 금세 모습을 감췄다. 잠깐의 몽환처럼. 금세 본래대로 돌아온 지완이 차에서 몸을 떼었다. 다시금 차에 시동이 걸리고, 멀끔한 지완의 뒷모습과 당황스러움에 얼어붙은 이현을 뒤로 한 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뱀 같은 매끄러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권지완 맞아, 저거…?”
씨발 잘못 봤나? 헛것이라도 본 듯, 떨떠름한 이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완은 천천히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안쪽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파의 잔류는 이현을 굳게 만들었다. 지완을 눈에 담고 있으면서도 그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지잉- 지잉-
울리는 진동 소리에 이현은 헐레벌떡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 미친…! 서둘러 수신 거절을 눌러 진동 소리를 거두었으나, 이미 늦었다. 피할 수도 없었다. 지완에게서 온 전화였다. 이현은 어물쩍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발 발각되지 않기를 바랐으나 그건 과한 욕심이었다.
몇 발자국 앞에는 아주 당연하게도 지완이 서 있었다. 지완은 수신 거절당한 전화를 천천히 귀에서 떨어트렸다. 지완의 차분한 두 눈동자는 다급해하는 이현에게 올곧게 꽂혀 들었다. 부유하는 이현의 시선을 조용히 잡아채다가, 슬그머니 싱긋거렸다. 한 걸음씩 지완은 이현이 숨어있는 그림자 속으로 다가왔다. 이현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손에 잡힌 핸드폰만 더욱 꽉 움켜쥐며, 벗어날 수 없는 낭패감에 몰락 중이었다.
“이현아.”
“….”
“나 훔쳐보고 있었어?”
지완의 물음에, 이현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시선을 떨어트렸다.
“우연이야.”
이현은 먹히지 않을 핑계의 말을 쥐어짜 냈다. 본인이 말하고도 너무 하잘것없었다. 하하, 지완은 작게 웃었다. 미약한 술기운이 비쳤다.
“우연히 이 시간에, 하필 이곳에? 아주 기가 막히네.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
“네가 그렇다면 뭐 그런 거겠지.”
지완은 조금의 진심도 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더 발칙했다. 이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선수촌 이 좁은 바닥 안에서 뭐… 좀 볼 수도 있지. 이현은 휘감고 있던 민망함을 애써 털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