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151)

#54

새트는 그렇다 치고 오전 트레이닝은 할 수 있으려나…. 이현은 숙취로 고생할 정연과 재민을 향해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재민의 불참으로 오늘의 새벽 트랙 러닝은 이현 혼자 나가야 했다. 고개를 돌리며 결린 목을 풀었으나 시원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사실 이현이라고 지난밤을 편안히 보낸 것은 아니었다.

어젯밤부터 이현은 세민의 뜻 모를 말들을 괘념하는 중이었다. 그냥 또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기면 될 일이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 야금야금 불쾌함이 좀먹는 것이다. 이현은 그런 자신이 마뜩잖았다.

그러나 이현은 다시 세민의 번호를 차단했다. 굳이 묻는다면 세민보다야 지완이 나았다.

핸드폰 번호까지 바꿔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하세민 때문에 그딴 짓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일어 관두었다. 기껏 바꾼다 해도 세민이 다시 알아낼 방법은 많고 많았다. 미등록 번호를 모두 수신 거부 설정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현은 지완에게 지니고 있는 유체의 감정을 정확히 명명할 수는 없었으나 한 가지만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세민의 발언, 적의 적은 동지라던 그 말에 단박에 피어오르던 반발심과 적대감은 지완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건 명백하게 세민을 향한 것이었고, 그 정제된 판단은 이현의 감정 위로 덮여있던 한 꺼풀을 벗겨내었다.

더 이상 스스로가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을 부인할 만큼 이현은 어리석지 않았다. 귀찮은 세민의 장난질에 괜한 자존심을 세우고자, 마음에도 없는 동참을 할 생각은 더욱 없었다.

상념의 몸집을 키우는 것은 세민이 의미심장하게 경고한 알량한 복수극 따위가 아니었다. 세민이 지완에게 얻어낸 것…. 그리고 얻어내고자 하는 것. 그것이었다.

‘내가 그 일로 이현 씨 어떻게든 해보고 싶었는데…. 그때까진 어려서 그랬다고 쳐줘요.’

‘근데 그냥 그 일을 덮더라고. 나한테 입 다물라고 하던데요. 난 그 아까운 건수를 그냥 날려야 했잖아요.’

‘뭐, 마냥 날린 건 아니지만.’

지난번 세민이 늘어놓았던 말들. 그때는 흘려들었던 말이 거북하게 되살아났다. 잊고 살았으나 잊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현이 지완과 세민 사이의 일을 구태여 신경 쓰며 골머리를 썩일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현은 석연찮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현의 감이 머릿속 어딘가를 쿡쿡 찔러대는 것이다. 이 또한 이현 자신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 그것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반추해보았을 때, 나름대로 지당했다.

이현은 ‘하세민’, 그 달갑지 않은 이름을 수차례 검색해가며 새벽의 아까운 잠을 바쳐야 했다. 어떠한 실마리라도 찾고자 한 것이다. 세민의 행적을 좇는 음침한 짓까지 해댔지만, 안타깝게도 유의미한 결과물은 얻어내지 못했다. 대신 성가신 피로감만 뻐근한 어깨 위로 첩첩이 쌓일 뿐이었다.

“오늘인가….”

6시, 시간에 딱 맞춰 나간 트랙에선 지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현은 발목을 돌리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검찰 조사를 받는 날이 아마도 오늘인 듯했다.

하루가 달리 짧아지는 해 길이에 주변은 아직 어둑했다. 걸치고 있던 아우터의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리며 이현이 휘슬에 맞춰 뜀박질을 시작했다. 모자 아래로 빼꼼 내밀고 있는 양 볼에 바람이 마구 부대꼈다. 이현은 속도를 좀 더 높였다.

유일하게 살갗을 내밀고 있는 양 볼과 양손이 시려왔으나 이현은 멈추지 않았다. 떼를 지어 달리고 있는 몇몇 종목의 무리들이 이현의 옆을 지나치기도 했고, 이현이 그 무리들의 옆을 지나치기도 했다. 그렇게 찬 공기를 한참 헤치고, 몸에 열이 오를 때쯤 이현은 제 뒤를 바짝 쫓는 인기척을 감지했다.

이번에도 자연스레 지나쳐 갈 것이라 생각하며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현은 변함없는 속도로 커브를 돌았다.

그러나 동시에 셋 정도의 익숙한 얼굴들이 부딪칠 듯 이현 쪽으로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순간적인 반사 신경으로 이현은 반 발자국 정도, 반대쪽으로 몸을 빼냈다. 스쳐 가는 인영들은 어떠한 머뭇거림도 없이 태연히 이현을 앞섰다. 이현이 먼저 방향을 틀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부딪칠 수 있는 거리였다.

이현은 그 의도적이고 불쾌한 접근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뭐야 씨발. 이미 이현을 앞서간 둘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었다. 곧이어 그 무리의 마지막 주자가 고개를 살짝 틀었다. 서서히 동이 트는 여명 사이로 흐릿한 옆모습이 보였다. 짜증 어린 이현의 두 눈동자와 가려진 그 시선이 얽혀 들어갔다.

진태우? 이현이 그 얼굴을 확인하는 사이, 그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멀어져 갔다. 짤막한 시선의 교류가 애매하게 허공에서 흩어졌다. 분명 진태우다. 가만히 이현을 흘기던 그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현은 멀어지는 태우의 뒤통수를 눈으로 좇았다. 불현듯 원망의 대상이 되어 걱정이라던 재민의 말이 떠올랐다. 하하, 이 나이 처먹고?

이런 식의 고까운 견제는 오랜만이었으나…. 어떤 식으로 나온다 해도, 이미 이 바닥에서 10년도 넘는 시간을, ‘재수 없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아주 심드렁하게 지내 온 이현이었다. 구태여 따지자면 그보다도 훨씬 전부터 권지완의 시비질에 단단히 단련되어 오지 않았는가.

그 외에는 별 볼 일 없는 장난에 불과했다. 이현은 페이스를 놓치지 않았다. 이현의 뜀박질 위로 남는 것은 되잖은 헛웃음, 그 흔적 정도였다.

*

“이야. 씨벌 오지게 잘생겼네.”

착장 뭐야? 권지완 슈트 미쳤나 봐. 얜 뭐 검찰에 시상식 하러 갔냐? 정연이 혼잣말 같은 탄사를 중얼거렸다. 미적지근하게 남아 있는 숙취 때문인지, 아니면 지완의 믿기 힘든 자태 때문인지 정연은 연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밥을 한 숟갈 듬뿍 떠 입에 욱여넣었다.

식당은 점심을 맞아 북적거렸다. 재민과 정연은 점심이 다 되어서야 훈련에 참여했다. 그마저도 총감독님께 진창 혼쭐이 나고 내쫓기는 바람에, 곧장 이현과 함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정연이 한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 화면에선 오늘 아침부터 세간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지완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검찰로 들어가는 지완의 모습을 담은 것이었다. 사실 지완은 일단 명목상 참고인일 뿐이고, 애초에 형사 사건은 검찰에서 포토라인을 세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악착같은 기자들에 의해 지완의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된 것이다.

그러나 이슈가 된 건 태성도, 주가조작 동조 의혹도 아니었다. 지완의 착장이었다. 지완이 평소라면 결코 보이지 않을 깔끔한 슈트 차림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숱한 사람들의 종잣돈을 농락하며 부당이익을 취한 주가조작 사건보다, 고작 권지완의 착장 따위가 더한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으나…. 옆에서 흘깃 화면을 살피던 재민도 살며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뜨거운 반응이 십분 이해가 간다는 투였다. 맞은편의 이현은 반찬만 뒤적거렸다. 이미 아침에 다 봤던 영상이다.

“지완 선배는 일상이 다 스캔들이네요. 존나 숨 막힐 것 같은데. 근데 기자들도 진짜 대단하다. 이걸 찍네.”

“권 선수 이거 노림수 아니야? 쫙 빼입고 사람 정신 홀려 놓는 거지. 아, 이참에 권지완 덕질이나 시작할까 봐.”

정연이 늘어놓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이현은 주춤했다. 기계적으로 반복하던 숟가락질을 멈추고 아연실색한 얼굴로 정연을 바라보았다. 탄식하는 건 재민도 마찬가지였다.

“누나 술이 덜 깼네. 하세민 다음 지완 선배요?”

“인생이 재미가 없어. 재미가. 덕질이라는 게 원래 자기 행복을 위해서거든? 하세민 덕질 그만두고 나니까 더 우울한 것 같아.”

덕질할 대상이 필요해! 잘생기고 몸 좋고, 근데 본인이 잘났다는 걸 모르는. 그게 존나 핵심이야. 알아들어? 정연이 숟가락을 곧게 세워 이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동의를 구하는 정연의 눈빛에 이현은 마땅찮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연은 그런 이현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근데 그런 남자는 없으니까 그냥 존나 잘난 애를 덕질하면 되는 거야. 겸손한 척 안 해도 이해되는 애. 그거 그냥 권지완 아니냐?”

“정연아, 정신 좀 차려라.”

이현이 촐싹이는 정연을 말렸다. 물론 정연도 진심일 리 없겠지만 듣고 있자니 고역이었다. 권지완을 덕질하는 김정연이라… 부자연스럽다 못해 역겨운 조합이었다. 정연을 위해 말리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를 위한 만류였다. 이현은 정연의 앞으로 자신의 물컵을 슥 밀었다. 술 좀 깨라, 정연아. 술 냄새가 아직도 나.

정연은 이현이 내미는 컵을 단숨에 비워냈다. 여전히 쓰린 속을 달래는 듯했다. 크으, 마신 게 물인지 술인지, 정연은 얼굴을 구겼다.

“근데 정연아, 너 언제부터 하세민 팬이었지?”

뭐? 하세민? 정연은 이현의 난데없는 질문에 컵을 내려놓고는, 이현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 두 눈에 이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약한 낯을 했다. 별다른 답을 내어주지는 않았다.

정연은 이현의 표정을 이리저리 살피며 본인의 식판을 숟가락으로 긁어댔다. 이현이 한 질문의 의중을 파악하듯, 혹은 이현의 변명을 재촉하듯, 듣기 싫은 마찰음을 연신 끽끽 만들어댔다. 참다못한 재민이 정연의 숟가락을 뺏어 들었다. 숟가락을 뺏기고 나서야 정연은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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