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51)

#53

엄격히 제재를 가하는 약물인 만큼, 사격, 양궁 따위의 종목들 안에서 빈번히 논란이 되어왔다. 동료 선수가 건넨 음료수를 마시고 양성 반응이 검출되어 억울하게 이 바닥을 떠나게 되는 케이스도 종종 있었다. 그 의도성이야 확실히 판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어찌 됐든 그만큼 손에 넣기 쉬운 약물이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태우 선배는 약물 관련 소문이 많더라구요. 형은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겠지만.”

“그런 소문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마. 확실한 것도 아닌데 잘못 퍼지면 선수 인생에 치명적이야. 알잖아.”

“알죠. 저도 다른 데서는 말 안 해요.”

근데 좀 찝찝하긴 해요. 매번 알코올 기준치도 아슬아슬하게 미만 찍으시는 분이라. 재민은 혀를 차며 담배를 튕겼다. 솜씨 좋게 재떨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몽땅한 꽁초는 금세 남아 있던 열기를 빼앗겼다. 꽁초들은 산을 쌓고 있었다. 지저분한 재떨이를 바라보던 이현은 벽에 기댔던 등을 세웠다.

니코틴 패치를 엄청 달고 다니긴 하더라. 함께 경기에 나갔을 때, 한쪽 구석에서 니코틴 패치를 팔 안쪽과 허벅지에 가득가득 붙여대던 태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재민의 말마따나 태우는 니코틴 기준치도 언제나 조마조마했다.

“왜 그런 말 있잖아요. 금지 약물 복용하고 5년 뒤 사망하는 대신에, 금메달 보장해주면 그 약물 복용하겠냐고. 그 질문에 대부분 복용하겠다고 답한 거… 전 그 맘 알 것 같긴 해요.”

“정신 차려라. 그렇게 해서 메달 따봤자 선수 아니야. 약쟁이지.”

“그건 그렇지만…. 좀 억울해요. 맘먹고 숨기면 숨겨지기도 하니까.”

“….”

그냥 그렇다구요. 괜히 이 시즌만 되면 감성팔이가 된다니까요. 재민은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대꾸 없는 이현의 어깨를 양손으로 밀며 재민이 걸음을 옮겼다. 이현은 구태여 말을 보태지 않았다. 재민이 대답을 원하고 늘어놓은 한숨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현도 알고 있었다.

“춥다. 이재민, 너 네 방으로 갈 거야? 나갈 때까지 형이랑 있든지.”

“형, 설마 지금 저 꼬시는 거예요?”

“…너 요새 권지완 따라 하냐?”

“예? 뭘요? 형, 지완 선배도 꼬셨어요?”

“됐다. 말을 말자.”

이현은 제 어깨를 살살 밀어대는 재민을 뿌리치지 않았다. 재민의 속도에 맞춰 숙소로 돌아가며 싱거운 소리를 해댔다.

이현의 마음속에도 또 다른 고심의 줄기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 줄기를 제공한 재민은 정작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 고심의 줄기는 처음부터 이현의 시야 뒤편에 자리하고 있던 것이었고, 재민은 그 줄기를 이현의 눈앞으로 가져다 들이민 것이다.

일단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그건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했으니까.

“아무튼 좋겠어요, 형. 형은 그런 거 없이도 약 빤 스코어가 나오니까.”

“타고났지.”

“으, 확실히 좀 재수 없다.”

“잠깐. 그전에… 너 뭐라고 그랬지? 시아? 언제부터 말을 놨어? 둘이 친해졌어?”

“하하. 어쩌다 보니 그냥 친구 먹었어요.”

*

[이현 씨, 저녁은 먹었어요?]

세민은 뻔뻔한 웃음을 가득 담아 이현에게 물었다. 이현은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다시 그 번호를 확인했다가,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채고 신경질적인 숨을 뱉었다. 어쩜 저번과 똑같은 루트다. 아, 이 미친 새끼. 안 뒤지고 또 왔네.

시간은 11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었고, 재민과 정연은 술을 마시기 위해 진작 선수촌을 나간 참이었다. 복잡해지는 마음을 넣어두고, 일찍 잠자리에 들려 했던 이현이 별생각 없이 받은 전화는 바로 세민으로부터 걸려온 것이었다. 차단을 해두었던 번호와는 또 다른 번호였다. 정성도 갸륵하다. 이현은 세민의 태연한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전화도 차단하고 SNS도 없고. 선수촌 밖으로는 나오지를 않으니까…. 시아가 직접 선수촌 갔을 때는 만나줬다면서요? A군, B양, 나 그거 다 봤는데. ‘고가의 선물’도?]

끊자. 이현은 무가치한 소리를 늘어놓는 세민에게 어떠한 응수도 하지 않았다. 욕을 하더라도, 상대해주는 것 자체가 세민이 바라는 바다. 이현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 이상한 집착의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고.

차단할 번호가 점점 느네. 이현은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러나 세민은 웃음기를 거두며 그런 이현의 행동을 막아섰다.

[전화 끊지 말아 봐요. 할 말 있어서 그래.]

“…말을 높이든지 낮추든지 하나만 하시죠.”

[너도 둘 다 하시잖아요. 저도 맘대로 할게요. 그래야 공평하죠.]

아직도 나한테 좆까라고 욕하던 게 생생해서. 꿈에도 나와요. 반했나 봐. 세민은 궁금하지도 않은 얘기를 늘어놓으며 저 혼자 웃음을 흘려댔다. 모르는 번호는 받지를 말아야지. 시발 그냥 핸드폰을 없앨까.

혹여라도 세민의 입에서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까 싶어 한 박자를 기다려주었으나, 그건 헛된 기대였다. 대꾸하지 않고 전화를 끊으려는 이현을 눈치챈 듯, 이번에 세민은 다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구질구질하다. 알량한 협박, 그 엇비슷한 것이었다.

[난 내 맘대로 하는 타입이라. 연락마저 무시하면 피곤해지지 않을까요?]

“…뭐 하자는 겁니까?”

[그걸 나도 잘 모르겠다니까요. 어렸을 때는 열등감, 그런 게 맞았던 거 같고. 이미 다 사라진 것 같았다가… 나 기억도 못 한다니까 어이도 없었고? 또 이현 씨가 짜증 내는 모습이 재밌는 거 있죠.]

“….”

[그리고 이현 씨가 권지완보다 나를 더 불편해한다는 게 좀 화가 나고. 그 시큰둥한 표정도 재수가 좀 없구요. 하하.]

고작 댄다는 핑계가…. 그건 결국 열등감이 파생시킨 미적지근한 미련과 다를 게 없었다. 이미 이 바닥을 떠난 하세민이 결코, 어떠한 방법으로도 충족시킬 수 없는 미해결의 집착 덩어리. 이현은 그렇게 여겼다. 그걸 상대해줄 의향은 조금도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같은 편 할 수 있는데. 적의 적은 동지, 그런 말도 있으니까요. 이현 씨도 권지완 싫어하잖아요. 안 그래요?]

“….”

[내가 필요한 게 생겼는데요, 이현 씨가 잘하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연락했어요. 우리 같이 팀 먹자고. 하하. 내가 그 ‘고가의 선물’보다 더 좋은 거 해줄게요.]

같은 편이란다. 이현은 코웃음을 쳤다. 그 희미한 소성을 세민이 놓치지 않았다.

[내가 이 배우 생활에 슬슬 염증을 느끼나 봐요. 새로운 걸 시작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뭐가 좀 필요해요. 난 그걸 권지완한테 얻어내고, 이현 씨는 날 조금만 도와서 권지완이 좆 되는 걸 즐기면 돼요. 잘하면 아예 권지완 그 바닥 떠나게 할 수도 있는데. 이거 이현 씨가 원하던 거 맞죠? 완전 이현 씨와 나의 윈윈 게임.]

우스갯소리로 흘려듣던 이현은, 세민의 이어진 제안에 얼굴을 짐짓 굳혔다. 장난스러운 말투는 변함이 없었으나, 분명 이전까지의 시답잖은 농들과 달리 골이 있었다. 일전의 소리들은 본편을 위한 영양가 없는 미끼들이었을까. 이것까지 그의 농지거리에 속한 듯 보이지는 않았다.

권지완? 이현은 알 수 없는 세민의 말에 되물으려다, 이내 입을 닫았다. 괜한 관심이 오히려 세민의 입맛을 당길 것이 분명했다.

“실컷 혼자 하세요.”

[나 못 믿나 본데, 그런 거 꽤 잘해요. 이미 한 번 얻어냈거든. 그냥 믿어보면 편할 텐데. 밑질 거 없잖아요, 이현 씨는.]

이미 한 번 얻어냈다고? 이현은 세민의 말을 곱씹었다. 무슨 의미일까. 세민의 다음 말에서 무언가 힌트를 찾고자 했지만 안타깝게도, 전화 너머로 세민을 찾는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민은 좀 전까지의 대화를 모두 청산하듯 낮고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돌렸다. 그마저도 어딘가 음흉해 보였다.

[이래서 배우는 오래 할 직업이 못 된다니까요. 너무 피곤해. 차단 풀어둬요. 또 연락할게요.]

이현의 의사와 상관없이 걸려온 전화는, 이번에도 이현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끝을 보았다. 이현은 끊긴 전화를 손에 쥐고 세민이 했던 말을 수차례 되새김질해야만 했다. 복잡했던 마음을 구석으로 모두 몰아낸 세민의 전화는, 더 큰 의문만을 이현에게 남겨두었다.

하세민이 권지완에게 얻어냈다. 무엇을?

하세민이 권지완에게 얻어내려 한다. 무엇을?

04. STOP & UNLOAD : 사격 중지 & 실탄 제거

Editor K SCANDAL #4

▶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이슈 메이커 A군이 또다시 논란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이제 연예란을 벗어나 경제란, 사회란, 스포츠난의 1면까지 장악 중인 A군. 욕심도 많다! 스캔들이 일상인 A군에게 그동안의 이슈들은 그저 우스운 해프닝에 불과했으나, 이번에는 판도가 다르다. 굵직한 논란들이 줄지어 쏟아지며 화약고가 터질 듯 말 듯 위태롭다. 어쩌면 매력적인 문제아의 말로가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이때다 싶어 물어뜯는 아류들의 농간질일지, 한계에 다다른 패악질의 배드엔딩일지는 지켜봐야 아는 것. 다만 사심을 가-득 담아 한시 빨리 사태가 진정되길 바라본다. 연예 가십지 1면의 단골손님 A군을, 이대로 놓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

{형 ㅈㅓ 오늘 새트패스요 뒤지ㄹ거같아여} 오전 5:12

{이제드러ㅓ왓음 ㅜ} 오전 5:13

이현이 눈을 뜨자마자 확인한 건 재민의 오타 낭자한 카톡이었다. 시간을 보아하니 선수촌의 출입 통제가 풀릴 때까지 정연과 진탕 술을 마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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