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가라. 재민이 오기 전에 나도 좀 씻어야 하니까.”
“이재민? 이 방으로?”
“어. 네가 싫어하는 하와이안 피자 처먹을 거니까 빨리 지갑 갖고 꺼져.”
“….”
“왜? 또 내 입으로 들어가는 건 다 뺏어 먹고 싶냐?”
하와이안 피자라뇨, 형 진짜 너무하십니다! 제 말을 들으면 울상을 지으며 고래고래 투정을 부릴 재민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저 지완을 내보낼 핑곗거리에 불과했다. 이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현을 바라보던 지완의 고개도 이현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안 일어나냐? 이현이 추궁 어린 눈빛으로 지완을 흘겼다.
“많이 먹어. 안 뺏어 먹을 테니까.”
지완은 담담히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촉한 이현만 괜스레 뻘쭘해졌다.
좁은 숙소 안에서 배웅이라는 것도 웃기지만, 이현은 몇 걸음 지완의 뒤를 따랐다. 현관으로 가는 길에 욕실이 있었다. 겸사겸사였다.
신발을 갖춰 신은 지완이 불시에 뒤를 돌았다. 지완이 숙소를 나가는 뒷모습을 생각 없이 지켜보던 이현을, 지완이 마주했다.
“이재민이 오는데, 씻고 얌전히 기다린다는 말이지?”
“그걸 또 그딴 식으로….”
틈만 나면 게이설로 희롱하는 지완이 이젠 우습지도 않았다. 언제까지 지랄할래. 바락바락 화를 내는 게 지완이 바라는 바임이 분명했고, 이현은 이미 익숙해졌다. 애달픈 일이었지만, 입술까지 내어주고 나니 저 정도 희롱은 별다른 타격도 되지 않았다. 이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같잖은 게 누군데.
“그래. 너 나한테 동정 떼이기 전에 튀어라, 빨리.”
자고로 남자라면, 자신의 엉덩이를 탐내는 자가 가장 두려운 법 아니겠는가. 이현은 손을 뻗어 지완의 엉덩이를 툭툭, 가볍게 쳐댔다. 이현의 능글맞은 손길과 당돌한 경고에, 지완은 인상을 팍 구기며 하? 어처구니없는 단발의 대식을 내뱉었다.
그니까 꺼지라고. 이번에는 이현이 다리를 들어 발로 지완의 허벅지를 밀어냈다. 탄탄하다 못해 단단한 지완의 허벅지가 조금도 밀리지 않자, 씨발, 이현은 은근한 억울함을 토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방금 행동은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미는 거 말고 그냥 차 버릴걸. 얄팍한 후회를 했으나 이미 늦었다.
“상체 말고 하체 운동 좀 해야겠다, 이현아.”
“….”
“그래서 날 어떻게 따먹으려고. 눕힐 수는 있어야지.”
지완이 능청스럽게 희롱을 희롱으로 맞받아쳤다.
또 정신 차려보니 이 새끼랑 이러고 있다. 이현은 자조적으로 고개를 휘젓고선 욕실로 방향을 틀었다.
알아서 가겠지. 난 또 뭘 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냐. 이현은 걸음을 내디디며 티셔츠를 벗어젖혔다. 이미 한 번 땀이 스민 것이라, 아까부터 찝찝한 상태였다.
대충 벗은 티셔츠를 욕실 문 옆에 던져두었다. 바지도 마저 벗으려 허리춤에 손을 올린 찰나, 지완이 아직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현은 멈칫했다. 현관에는 지완이 이현의 몸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냐?”
“몸 예쁘네, 채이현.”
예뻐? 놀리냐? 이현은 지완의 시혜적인 칭찬에 코웃음을 쳤다. 한편으로 이현은 바지를 벗을지 말지 계속 갈등 중이었다. 허리께를 잡은 손은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저 새끼 왜 안 나가? 같은 선수들끼리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공동 샤워실을 사용한다거나, 나체로 전지훈련 숙소를 돌아다닌다거나. 모두 흔해 빠진 일이었음에도, 이현은 제 몸에 달라붙는 지완의 시선에 창피함을 느끼고 있었다. 창피함을 느낀다는 것조차 창피했으나, 지완의 시선은 진득했다. 이현이 예민한 것이 아니라 분명 그랬다.
그런 이현의 주저함을 눈치챈 것인지, 지완은 다시 한번 가볍게 웃음을 흘리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쾅, 눈앞에서 닫히는 문을 끝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이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가 저 새끼를 이해할 날이 올까? 이현은 답이 없는 의문을 되새기며 욕실로 들어섰다. 한낮의 이현은 이미 녹진함에 한껏 짓눌리고 있었다. 모든 것은 전부 지완 때문이었다.
*
“…그래서 전 그냥 오늘 정연 누나랑 밤새우려구요.”
으으. 술로 죽나 눈치로 죽나 거기서 거기 같지만요. 피자 한 조각을 한입에 몽땅 집어넣은 재민이 칭얼거렸다. 이번 1차 선발전에서 정연은 죽을 쑤고야 말았다. 오전의 컨디션 난조를 오후에도 극복하지 못하고 실망스러운 성적으로 1차를 끝낸 정연은, 오늘 밤 술로 스트레스를 풀어야겠다며 재민과 이현을 들들 볶았다.
선발전 당일까지 밖으로 나돌아다니기엔, 이현의 상황이 좋지 못했다. 피곤한 재민 역시 거절하려 했으나…. 방을 함께 쓰는 같은 종목의 룸메 선배마저 선발전을 말아 먹는 바람에, 재민은 결국 정연을 따라 선수촌을 나가기로 한 것이다. 실력 좋은 후배는, 후배 노릇을 하는 것도 고단했다. 이현은 재민이 눈치 보는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 곤혹스러워 보이는 상황에 재민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였다.
“근데 피자 이렇게 많이 먹어도 되겠어? 이따 나가서도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이미 해는 저물고, 선수촌은 저녁 시간을 맞아 시끄러운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재민은 벌써 다섯 조각을 먹어 치우고 마지막 여섯 번째 조각을 집어 들었다. 이현은 재민을 말려보았으나, 사실 재민에게 그 정도는 가뿐했다. 이현은 두 조각을 먹고 이미 손을 씻은 상태였다. 하와이안 피자는 당연지사 아니었다.
오랜만에 먹은 피자는 느글거렸다. 이거 개운하게 쌀밥 먹고 싶은데. 이현은 확실히 한국인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어차피 밤에 나갈 거라. 형은 안 되겠죠?”
“응. 난 좀 곤란하지. 다른 선수들한테 괜히 트집 잡힐 만한 일 만들어주는 것도 싫고.”
“그렇긴 하죠. 그래도 술 마시고 싶으면 연락해요, 형.”
“술은 이제…. 아무튼 정연이 오늘 속상할 텐데 잘 달래줘. 맛있는 거 사주고. 너 또 술 먹다 뒤지지 마라, 알겠지?”
“넵.”
재민은 남은 피자를 마저 깔끔히 입에 넣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현은 텅 빈 피자 박스를 주섬주섬 정리해 봉투에 집어넣었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재민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정연이 맛있는 거 사줘. 재민은 해맑게 웃으며 기름이 묻지 않은 손으로 카드를 받아들었다. 비싼 술 사 먹어도 돼요? 술집을 사도 돼. 아싸! 그새 신이 난 재민이 환호했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올려두었던 담배를 챙겼다. 쓰레기도 버릴 겸 담배도 피울 겸. 의자에 걸쳐 둔 겉옷을 집어 들며 재민에게 눈짓했다. 재민도 이현의 담타 신호를 알아듣고는, 잠시만요, 저 손 좀 닦고요. 재빠르게 화장실로 향했다.
이현은 정연에게 ‘내 몫까지 많이 마셔. 머리에 연지탄 박지 말고 짜증 나면 그냥 재민이를 대신 패.’ 싱거운 카톡을 보냈다. 정연은 얄팍한 격려 따위를 바라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이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현이 보낸 짧은 문장은 어딘가 낯익었다. 거기까지는 이현이 자각하지 못했다.
상황이 곤란한 이현을 알고 있기에 정연도 이현을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평소의 정연이라면 성적이 안 좋을수록 연습에 몰두할 텐데, 최근 기록이 잇따라 좋지 못해 쌓였던 스트레스가 터진 듯했다.
손을 말끔히 씻고 나온 재민과 함께 숙소를 빠져나왔다. 날이 춥다. 숙소 건물을 나오자마자 아리는 찬 공기에 이현이 팔짱을 끼고 몸을 말았다.
형은 추위를 너무 잘 타요. 나 더위도 잘 타. 알죠, 진짜 효율 떨어지는 몸인 거. 닥쳐.
이현은 저를 놀려대는 재민의 팔뚝을 주먹으로 가볍게 쳐댔다. 별 느낌도 없을 텐데 재민은 얼굴을 찌푸리며 아픈 척 신음을 흘렸다. 그래도 형이라고 맞춰준다. 이현은 그런 재민이 귀여워 낮게 웃었다.
찬 바람이 더욱 강하게 불어왔다. 서둘러 흡연 구역으로 종종걸음을 옮겼다. 이제 막 저녁 식사 시간이 시작해, 숙소 옆 흡연 구역은 텅텅 비어있었다. 이현은 한쪽 벽에 등을 기대며 자리했다.
“어? 지완 선배랑… 누구지?”
재민이 팔을 뻗어 손가락질하는 곳은 주차장 입구 쪽이었다. 흡연 구역에서 직선거리로 보이는 주차장 초입에는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차체 낮은 스포츠카가 서 있었고, 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녀의 형체가 보였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고, 이미 어둠이 자욱한 저녁 시간이었기에 얼굴을 정확히 확인하는 건 어려웠으나, 재민의 말대로 그 실루엣이 지완임은 확실했다. 지완의 차는 아니었다. 이현이 모르는 지완의 차가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시선을 강탈하는 화려한 차종을 보아하니 지완의 취향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상대 여성의 것인 듯했다.
이현은 담배를 하나 입에 물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표적을 겨냥하는 것처럼 눈에 힘을 주고 그 실루엣을 살폈다. 정유진. 정유진이다. 한 번 실제로 마주했던 이현은 자신의 판단을 확신했다.
지완이 자신의 방에서 나가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사이 또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일까. 권지완 저 새끼는 툭하면 사람 오라 가라 하는 게 취민가. 이현은 자신을 집 앞으로 불러냈던 지완을 상기했다. 지완과 유진 사이의 일을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유진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이 슬쩍 비쳤다. 동일한 선상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 달갑지 않았다. 정유진과 자신의 모습이 겹쳐질 정도로, 어느새 이현은 지완과 꽤나 빈번한 순간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게 씨발 요즘 무슨 일이야.
“정유진.”
“네?”
“저 여자 정유진이라고.”
재민아, 너도 피울래? 이현이 담뱃갑을 내밀며 재민에게 물었으나 재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전 지금은 괜찮아요. 재민의 거절에 이현이 담뱃갑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입에 문 연초의 말단에 불을 붙이며 이현이 남녀의 실루엣에서 시선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