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지완의 말에서 그날 접어두었던 자문들이 다시금 피어올랐으나, 눈감았다. 애매한 정적 사이를 지완이 이어진 물음으로 메웠다.
“내 집은 어떻게 들어갔을까.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지완이 흘러내린 수건을 주워 들며 이현의 옆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땀이 묻어 더러울 만도 한데… 아무렇지도 않게 수건을 손에 쥔 지완의 모습에, 멋쩍어지는 것은 이현이었다. 징그럽게 깔끔 떨면서 쟨 저걸 왜 주워. 이현이 다시 잡아채기도 전에 지완은 소파 앞 탁자에 수건을 던지듯 올려두었다.
잊고 있던 비밀번호가 떠올랐다. 반갑지 않은 우연의 일치, 이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야말로 당황했으니까 그렇게 수상한 눈으로 보지 마. 한 대 더 처맞기 싫으면. 넌 나랑 비밀번호 같다는 거에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안 열리면 버리고 가려고 그랬어.”
너랑 나는 병신 같은 곳에서 통한다고.
이현은 별생각 없이 말을 덧붙였다. 뱉은 뒤에야 민망함이 몰려왔다. 통하기는 뭘 통해? 이현은 속으로 방정맞은 제 입을 꾸짖었다. 그렇게 유별난 표현도 아니었건만, 이현은 늘인 몸을 바로 세우며 딴짓을 했다. 그만큼 이현에게는 낯간지러운 어감인 것이다. 그런 이현을 약 올리듯, 지완은 짐짓 굳어 있던 얼굴을 해사하게 개어 내었다.
“지금 네 방 비번이 2580이라는 소리지? 이것도 혹시 플러팅인가.”
그놈의 플러팅 씨발! 이현은 그동안 자신이 참 많이 참아왔다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실감했다. 얼굴 한 대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이현은 자신의 인내심에 감탄하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쥐어패는 대신 제 머리나 헤집는 것이다.
씹새끼가 얼굴 말고 대가리를 잘못 맞았어? 하며 욕을 몽땅 들이부으려 했으나, 불쑥 들어오는 지완의 손에 이현은 타이밍을 놓치고야 말았다.
지완이 다시 한 번 이현을 끌어안듯 감쌌다. 불을 켜지 않아도 만연히 들어오는 햇빛으로, 더할 나위 없이 밝은 숙소 안에서. 지완은 다시 그날의 상황을 재현하려 했다. 그때의 손길과 같이, 지완은 이현의 뒷머리를 감싸고 본인의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이현의 작은 머리는 하릴없이 이끌렸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지완이 이현의 머리를 쓰다듬듯, 목의 뒤쪽까지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훑어 내렸다. 입술을 맞대진 않았으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까지 순식간에 사이가 좁혀졌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변이 너무 밝다는 것, 섞이는 호흡에서 술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지완이 눈을 감지 않았다는 것.
뚜렷이 아로새겨지는 지완의 밝은 눈동자를 당황스럽게 마주하다가, 이현이 둘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지완의 얼굴을 밀어내었다. 터무니없는 지완의 행태에 이현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입을 열었다. 돌았나, 이 씹새…, 그러나 흐릿한 지완의 목소리가 이현의 말을 잘랐다. 지완은 이현의 목 뒤를 쓸었던 본인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느낌이 맞는 것 같은데. 음, 그땐 좀 더….”
이현은 뻔뻔한 지완에게 놓여 있던 쿠션을 던지며 소리 질렀다. 지완은 보지도 않고 날아오는 쿠션을 한 손으로 쳐내더니 입술을 축였다. 무엇인가 검증이라도 하려는 듯, 빤히 이현의 목 뒤편과 본인의 손바닥만을 느릿하게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너 진짜 돌았어? 씨발 뭐 하자는 거야? 또 술 먹고 왔냐 지금?”
“뭐긴. 채이현 성희롱하잖아. 근데 그때랑 좀 다르네. 확실히 내가 게이는 아닌가 봐? 너라는 걸 알고 만져서 흥분이 안 되는 건가.”
부들거리는 이현은 보이지도 않는지, 태평하게 지완은 제 할 말만을 지껄였다. 그럼 그땐 흥분이라도 했다는 거야? 너 게이냐? 변태야? 입술만 부딪히면 흥분해? 이현은 갈무리되지 않은 말을 내뱉으며 지완에게 분개했다. 지완은 깔끔히 묵살했다.
“내가 말했잖아. 요즘 섹스하는 것도 지겨웠는데 그때는 흥분을 좀 했던 것 같거든. 이현이한테 꼴리기라도 한 건가 싶었는데…. 착각이었나 봐. 이것 봐. 잠잠하잖아.”
지완은 본인의 오른쪽 허벅지를 가리켰다. 폭넓은 추리닝 바지 위로도 자태를 확실히 드러내고 있는 남사스러운 지완의 물건에, 이현은 다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이 새끼는 지금 뭘 보여주는 거야?
지완의 것은 지완의 허벅지 반절을 넘어서까지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실 지완이 제 옆에 앉을 때부터 드러난 저 형태가 눈이 걸리긴 했다. 주머니에 뭔 통을 집어넣고 있나 했더니…. 근육 스프레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저 정도로 크다고? 사람 새끼야? 아니 잠시만.
“…그게 지금 비발이라고?”
다행히도, 이현은 말을 더듬는 멍청한 짓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터져 나오는 의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인간적인, 인체 해부학적인 의심 혹은 호기심에 가까웠다. 아연실색한 이현의 표정에도, 지완은 흔들림이 없었다. 너무나 당연해서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지완은 어깨를 으쓱이며 표명했다. 그러나 마땅히 온몸에서 풍기는 그 재수 없는 자신감은 태생적인 것이었다. 타고난 것. 그 무엇보다 이건 타고난 것이었다. 아니, 이건 인종적으로, 아니 인간적으로 말이 안….
“어떤 좆이 발기 후에 이렇게 얌전히 누워있겠어. 이현아, 넌 그래?”
그렇다면 실망인데. 지완의 조롱에도 이현은 맞받아치지 못했다. 졌다. 이건 완패다. 크다는 것 정도는, 무성한 소문들에 의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간 그곳에 시선을 둘 이유도 없었으니까.
이현도 어디 가서 꿇리는 사이즈가 아니었다. 꿇리기는커녕, 적어도 제 주변에서는 형님, 형님 소리를 들으며 존경의 시선을 받을 만한 크기였다. 그런 이현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한 번 지완에게 패배감을 맛봐야 했다. 이건 아주 예민한 문제였다.
그럼 대체 발기 후에는…? 끊임없이, 자연스럽게, 그러나 원치 않게 의문들이 잇따랐다. 자꾸만 그쪽을 힐끔대는 자신의 시선을 갈무리하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었다.
“저번에 네가 그랬지? 따먹는 쪽은 너라고. 어때 이현아? 비빌 만해?”
“나가.”
*
이현이 기고만장한 지완을 내쫓으려 할 무렵, 때마침 이현의 핸드폰이 잠시 울리다 끊겼다.
지잉 지잉.
{형 바빠요? 전화 안 받네요?}
{다 좋은데 하와이안 피자는 안 돼요.}
{차라리 두 판을 시켜요. 알았죠?} 오후 1:19
{이모티콘} 오후 1:20
몇 개의 카톡이 줄줄이 이어졌다. 연락의 주인은 아니나 다를까 재민이었다. 귀여운 곰이 절규하는 이모티콘까지 보내 가며 이현의 확인을 채근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이현의 이기적인 음식 취향.
하와이안 피자 맛있는데. 억울하네. 이현은 ‘알겠으니까 선발전 집중해’ 짤막한 대답을 보냈다.
재민과의 카톡을 나누다 다시 고개를 드니, 눈앞의 지완이 장난기를 거둔 얼굴로 이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완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날카롭게 빠진 긴 눈매나 그림자가 지는 아이홀, 굴곡 없이 직선을 뻗은 짙은 눈썹에 인상은 예민하다 못해 매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지완도 본인의 그런 점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괜히 표정을 지우고, 말없이 잠자코 바라보면서, 주춤대는 이현의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았으니까.
뭐. 지완의 뜻 모를 시선에 불만 어린 이현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지완은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거렸다. ‘형. 절대 안 되니까 잊지 마세요.’, ‘그때도 안 시킨다고 해놓….’ 이현의 대답에도 여전히 불안하기만 한 재민이 또다시 반복해서 강조를 해댔다. 다시금 화면 액정에 카톡창이 떠오르자, 지완의 시선이 이번에는 이현의 핸드폰으로 향했다. 파인애플 어쩌고 하는 재민의 카톡과 지완의 뚱한 시선을 번갈아 보다 이현이 입을 열었다.
“야. 너 하와이안 피자 좋아하냐?”
“아니.”
“…그래? 입맛 비슷한 줄 알았는데.”
내가 먹는 건 다 뺏어갔으면서. 단호한 지완의 대답에 이현은 혼잣말하듯 말을 뭉갰다. 하도 예전 일이라 잊고 살았지만, 이현만 이런 음식 취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와이안 피자, 민트 초코, 건포도, 녹차… 식탐이 없는 이현이 그나마 취향이라고 지니고 있는 것들은 유난히도 호불호가 갈리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완과 이현의 입맛은 비극적으로 일맥상통했다. 초중고 시절 운동부니 뭐니 왁자지껄한 단체 회식 자리에서 꼭 지완은 이현이 입에 대는 것들을 족족 먼저 차지하곤 했고, 그보다 더 어린 시절에도 이현이 간식으로 입에 물고 있는 것이라면 뭐든 낚아채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우습고 유치한 괴롭힘이지만, 그때의 이현에겐 정말 서럽고 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거야 네가 좋아하니까.”
“뭐? …맛있어 보이기라도 했어?”
“네가 뭘 좋아하는 모습이 재수 없어서.”
“….”
“다 맛없던데 대체 뭐가 맛있다고 먹는 건지.”
가끔 이현은 그런 생각을 했다. 권지완 인생에 유일한 장난감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일 것이다. 어린 애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이유가 따로 없듯이, 지완의 맥락 없는 뒤틀림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사실 그 이유를 찾으려 깊이 고민하지도 않았다. 가끔 궁금해할 뿐. 똑같이 응수하는 게 먼저였다.
이상한 곳에서 지완과 이현의 유별난 성격이 틈 없이 맞물려왔다. 아이러니한 관계였다. 이현과 지완, 둘 중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