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51)

#48

이현이 냉장고에서 500ml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갈증에 허덕이는 목을 냉수로 축이며, 아무 데나 던져 놓았던 핸드폰을 확인했다. 새로운 것도 없는 카톡창을 한 번 더 확인하는 꼴이 마치 지완의 소식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현은 괜히 스스로 머쓱해져 재민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재민은 1차 선발전을 치르는 중이었다.

{형 너무 떨려요 미치겠다니까요 할 때마다 떨려서…ㅜㅜ}

{형은 오늘 뭐 해요? 방에만 있을 거예요?}

{선발전 끝나고 형 방으로 갈게요 오랜만에 피자나 조질까요 형}

{아 또 긴장돼. 형이 부럽습니다ㅠㅠㅠㅠ}

{잘하고 올게요 ㅎㅎㅎㅎㅎㅎㅎ} 오전 8:24

아침부터 재민은 답 없는 이현에게 제 할 말만 왕창 늘어놓고 있었다. 얜 말도 참 많아. 이현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재민이라고 이현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이현은 늦게서야 확인한 재민의 카톡에 ‘그래. 끝나고 연락해’ 정도로 대강 답장을 하고는 다시 핸드폰을 던져 놓았다. 성의 없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이현은 그리 걱정이 되지 않았다. 재민이 선발전에서 떨어질 일은 없으니까.

피자? 간만에 배달 음식이나 먹을까. 이현이나 재민이나, 선수촌 선수들은 대부분 식당을 이용했다. 식단이 따로 정해져 있는 체급별 종목을 제외하고, 먹을 것에 유별한 제재를 둔 것은 아니었으나… 나가서 먹는 게 귀찮기도 했고, 식당 밥이 끝내주게 잘 나오는 탓에 외부 음식이 그다지 끌리지도 않았다.

이현은 음식에 집착이 없는 편이었다. 아니 음식만 그런 게 아니고 사실 세상만사 집착 따위와 거리가 멀었으나, 특히 식탐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이현이 체질적으로 벌크업이 잘되지 않는 데에는 그 부진한 식욕도 분명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현은 어느새 다 비워버린 생수통을 꽉 쥐었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잔뜩 구겨진 생수통을 휴지통에 처박고는 욕실로 향했다. 동시에 핸드폰 화면에 새로운 카톡 알림창이 떠올랐다. 그새 이현의 무성의한 카톡을 확인한 재민이, 또 수다스럽게 떠들어 댔다.

{어 형 이제 확인했네요???}

{오전 일정은 끝났어요ㅎㅎㅎ 여기 분위기 살벌합니다. 막내 재민이는 죽을 맛ㅠ}

{근데 이 기사 보셨어요?} 오후 12:23

연달아 재민이 기사 링크를 보냈다. 이현은 정말 조금도,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기사야 하루에 수백 개씩 터져 나왔고, 요새 이현 놀리기에 맛 들인 재민이 보내는 것은 홍보 프로에 관한 극성팬들의 민망한 반응들이 전부였다. 이재민 이 새끼는 인터넷만 하고 사나? 이현은 카톡창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그대로 알림창을 지워내려 했다. 그러나 재민의 다음 카톡에 이현은 손가락을 잠시 멈추었다.

{이것 때문에 지완선배가 휴가 낸 건가 봐요} 오후 12:25

{검찰 소환까지 받고 재벌 아들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네요}

{ㅋㅋ 근데 전 시켜주면 잘할 자신은 있는뎅ㅎㅎ}

{지완선배는 괜찮대요? 형 친하자나요} 오후 12:26

검찰 소환? 이현은 공연히 제 입가를 더듬었다. 재민의 카톡창을 곧장 켜 기사 링크를 확인해볼까 하다가, 그보다 먼저 인터넷 창을 띄웠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권지완, 그 낯부끄러운 이름 석 자를 입력했다.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화면 밝기를 줄였다.

띵동.

그러나 이현이 검색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이현의 방 안에 흔치 않은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시간에? 내 방을? 이현이 이 방을 혼자 차지한 이후로, 재민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이현은 의아함을 가득 안고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이현이 입을 열어 방문자의 신원을 물으려 했으나, 이번에도….

{문 열어. 방 앞이야.} 오후 12:30

권지완이 먼저였다.

*

{문 안 열어?} 오후 12:31

{뺨도 갈기고 지갑도 훔치고}

{어디까지 뻔뻔하게 나오려고} 오후 12:32

이현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지완에게서 온 카톡이 연이어 울려댔다. 지완은 도어벨을 미친 듯이 누른다거나, 현관문을 부술 듯 쾅쾅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문 앞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만큼 조용한 낌새가 더욱 의뭉스러웠다. 이현은 지완의 카톡을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서둘러 침실로 향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너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들이닥친 권지완이었다. 문을 먼저 열까 하다가 ‘뺨도 갈기고’, 지완의 그 한마디에 불길함이 스며들었다. 지갑이나 쥐여주고 바로 돌려보내야겠다.

권지완 저 새끼는 누굴 도둑으로 아나,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지완의 지갑이 제 손에 있는 것, 그 안의 현금을 맘대로 사용한 것, 모두 사실이었다. 이현은 문 앞의 불청객을 떠올리며 침대 옆 협탁 안에서 지완의 지갑을 꺼내 들었다. 거만한 얼굴을 하고 있을 지완이 눈앞에 그려졌다.

“튈 곳이 어디 있다고 간을 봤어.”

문을 열자, 심드렁한 얼굴의 지완이 비아냥대며 이현을 반겼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알량하게 피딱지가 내려앉은 입가와, 살짝 푸른 기의 멍울이 스며든 지완의 뺨이었다. 며칠 지난 지금에도 이런 흉이 남아 있는 걸 보니, 꽤나 깊게 피가 맺혔던 듯했다.

내가 주먹 하나 제대로 꽂았구나? 이현의 입가에 웃음이 서릴 듯하다가 모습을 감췄다. 이현의 시선이 본인의 얼굴에 고이는 것을 눈치챈 지완은 한쪽 볼에 얕은 보조개를 보였다. 처맞은 얼굴로 웃어대니까 볼품도 없네. 이현은 의심쩍은 두 눈으로 지완을 살펴대다가, 이내 코웃음을 쳤다. ‘튈 곳이 어디 있다고…’ 지완의 말이 그제야 머릿속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튀긴 왜 튀어. 존나 웃기네, 이 새끼. 이현은 지완의 우스운 추궁에 미간을 좁혔다. 따지고 보면 이현에게는 잘못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원인제공은 다 지완이었지 않은가. 이현이 지완의 가슴팍에 지갑을 때려 박듯 던졌다. 그래, 돈 잘 썼다. 이현이 무덤덤하게, 허울뿐인 감사의 인사를 덧붙이며 문을 도로 닫으려 했다. 한시 빨리 지완을 내쫓고 싶은 것이다.

그날 새벽의 불운한 사고와도 같던 접촉을 지완이 기억하고 있다는 게 최악이었다. 남자 새끼들 둘이서 입술을 부닥친 후에, 얼굴 보고 무슨 소리를 해대겠는가. 씨발, 이현은 사실 지완이 문 앞에 찾아온 순간부터 맘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막상 마주하려니 민망함을 넘어 수치스러운 것이다. 그냥 입술 박치기도 아니었다. 그때의 그 숨, 호흡, 얇은 표피에 닿던 신열의 혀….

때릴 거면 좀 더 세게 때려서 아예 저 새끼 기억을 잃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아니면 내가 어디 부딪혀서 기억을 잃든가. 권지완도 양심이 있다면 그 일로 입을 나불대진 않겠지.

이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문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지완의 이죽거리는 입꼬리는 이대로 이현을 그냥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지완이 먼저 손을 뻗어 문을 잡아챘다. 문전박대를 하려 했던 이현의 허술한 몸놀림을 삽시에 가로챘다.

“손님이 왔는데 물 한 잔 대접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손님 같은 소리 하네.”

“이현아 도둑질을 했으면 미안한 기색이라도 보여야지. 내가 며칠간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지랄하지 마. 필요했으면 진작 찾았어야지. 이제야 나타난 걸 보니 이 정도 없어도 살 만했다는 거 아니야?”

“내가 늦게 와서 섭섭했어?”

이현이 지완의 말에 탄복과도 같은 신음을 흘렸다. 이 미친놈은 진짜 한마디 한마디가 가관이구나. 이현이 아찔한 두통을 달래기 위해 문고리에서 손을 떼자, 지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싱긋 웃는 지완의 능청스러운 작태에, 이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틀었다. 내쫓아봤자 내쫓길 새끼가 아니었다.

“그래서 뺨 한 대 갈기니까 속은 좀 시원해?”

“네가 씨발 어떤 짓을…. 한 대로 끝난 걸 다행으로 생각해.”

언성을 낮추며 바득거리는 이현을 뒤로 하고, 지완은 자연스레 이현을 가로질러 숙소로 들어섰다. 마치 본인의 방인 양 태연하게 구는 지완의 뒷모습에, 이현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지완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때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그저 입술을 한 번 샐쭉거리고 말 뿐이었다. 묘하게 지완과 자신 사이의 공통된 모습들이 발견될 때마다 이현은… 애매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유쾌하지 않았다. 유쾌하지 않아야 했고.

숙소는 그 내부가 크게 다를 바 없이, 방마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완은 새삼스레 이현의 숙소를 샅샅이 훑어댔다. 한눈에 들어와 딱히 볼 것도 없는 집구석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새로울 것도 없을 텐데 지완이 괜한 짓을 한다 싶어, 이현은 지완의 팔을 가볍게 쳤다.

이현이 먼저 거실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지완은 방문이 열려있는 이현의 침실에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이현을 따라 거실로 걸음을 마저 옮겼다. 이현은 던져두었던 수건을 집어 들어 목에 둘렀다. 목 언저리에 맺혔던 땀이 수건에 절로 닦였다. 이현이 대강 목과 쇄골 근처의 나머지 땀도 닦아 내었다.

지완은 그런 이현의 모습에, 방문에 달려 있는 풀업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풀업바를 한 번 보고, 이현을 한 번 보고. 지완은 가소롭다는 듯 희미한 웃음을 얼굴에 새겼다. 이현은 괜히 치미는 짜증에 걷어 올렸던 소매를 다시 풀어 내렸다. 펌핑을 한 건 이현인데 자꾸만 지완이 의식되는 것이다. 지완은 도리어 입꼬리를 더 들어 올렸다. 얄미운 지완의 음성이 새어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