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51)

#41

이현은 경악했다. 미친 새끼, 그래, 그냥 나가 뒤져라. 지완은 상황에 맞지 않는 수려한 미소를 띠곤 이현에게 차 키를 건넸다. 이번엔 삼지창이었다. 주차장에만 처박아 둔다는 마X라티는 지완의 롤X로이스 옆에 얌전히 주차되어 있었다. 차 문이 열리는 짧은 신호음와 함께 이현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지완에게 건네받은 마스크를 귀에 끼우고 턱 아래에 걸쳤다.

“그래. 너랑 이 차랑 같이 폐차될지도 모르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타.”

“이번엔 진짜 죽이려고? 총 들고도 그동안 나 못 죽였잖아. 지금까진 병신이었어?”

“권지완. 나도 한계란 게 있어서 살고 싶으면 입 닥치는 편이 나을 거야.”

*

지완이 내비에 찍은 곳은 믿기 힘들게도 을왕리였다. 아니, 무슨 대학생 MT 가는 것도 아니고… 뻘하니 향하는 곳이 바다라니. 이현은 충북 진천에서 서울로, 다시 인천을 향하는 제 동선에 개탄했다. 물론 캠퍼스에 발을 제대로 딛지도 않고 대학 졸업장을 따낸 이현이, 대학 MT 같은 걸 가봤을 리 만무했으나 이현도 보고 들은 것이 있었다.

- 전방 500m 앞, 시속 80km 과속 단속 구간입니다. 안전 운전하세요.

내비의 친절한 안내 음성이 조용한 차 안을 메웠다. 이현은 지완을 흘깃댔다. 정말로 입 닥치고 잠이나 자는 것일까. 지완은 눈을 감은 채 조용했다. 모자와 마스크 사이로 힐끔 보이는 긴 눈은 호선을 그리며 잠겨 있었고, 곧은 긴 속눈썹이 그 위로 더 깊은 그림자를 그려내고 있었다. 진천, 서울, 그리고 인천까지 운전만 무려 3시간이었다. 이현은 하, 헛웃음을 흘리며 라디오를 틀었다. 평소 운전할 때는 단 한 번도 틀지 않는 것이었다.

차 안에 금세 웅성거림이 차오르자, 지완이 눈꺼풀을 설핏 들어 올렸다. 이현은 모른 척 앞만 봤다.

“꺼.”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현은 지완의 말을 그대로 무시하며 볼륨을 높였다. 지완이 마스크를 내리고 다시 한 번 입을 벌리려 했다. 그러나 뉴스가 한발 빨랐다. 이현과 지완의 호흡을 먼저 앗았다.

<…검찰은 태성제약의 권 회장이 제3자배정 유상증자 등으로 시세차익을 얻기 위해 시세조종 전문가 김모 씨를 섭외했고, 이를 통해 올해 2월부터 통정매매와 고가매수 등 총 1만 차례에 걸쳐 시세 조종성 주문을 제출해 회사 주가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렸다고 밝혔습니다. 금융위원회 증권선물위원회는 해당 사건을….>

멍하니 기자의 또박또박한 보도를 듣다, 이현은 한참이 지나서야 서서히 볼륨을 줄였다. 이래서 끄라고 한 걸까. 이현은 지완을 살폈다. 라디오를 끄라던 냉담한 말투와 달리, 지완은 무덤덤해 보였다.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으나 대충 들어도 지완의 집안에 좋지 못한 일이 생긴 듯했다. 어울리지도 않게 감성팔이 하듯 웬 바다인가 싶었는데, 이현은 제 마른 입술을 의미 없이 매만졌다.

“너희 회장 망하냐?”

이현이 퉁명스레 물었다. 어쭙잖게 마음에도 없는 걱정을 해봐야 먹히지도 않을 것이었다. 지완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완의 입에선 무심함이 흘러나왔다.

“글쎄. 망할 때가 되긴 했지.”

“그건 그렇지. 넌 그래도 아버진데 걱정 안 돼?”

이현이 내비를 따라 좌회전 차선으로 옮기며 심드렁히 되물었다. 지완의 무정함은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 지완의 불효막심함을 이현이 진실로 꾸짖고자 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형식적인 반응을 보인 것뿐이었다. 지완은 서늘한 눈으로 여전히 창밖을 주시하다가, 탁탁 창문을 두드렸다. 차 안에는 알 수 없는 공기가 차올랐다.

“이현아.”

“….”

“모든 집이 너희 집처럼 죽고 못 살진 않아.”

“갑자기 우리 집이 왜 나와?”

“어떻게 되든 회장님 일이지.”

지완은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이현은 객쩍게 입가를 뭉그러트렸다. 지완이 그의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한 사실은 이미 유명했다. 애초에 어느 재벌가가 상속받을 회사를 나 몰라라 내팽개치고 운동 바닥에 들어선 외동아들을 고깝게 보겠는가. 권 회장의 폭력적이고 가차 없는 성격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지완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며 뭔가 좀 달라졌으리라, 막연히 생각했다. 부질없는 짓이었나 보다. 이현은 창문을 두드리는 지완의 반복적인 손짓에서 가라앉은 무거움을 포착했다.

“이참에 이 바닥 은퇴하고 회사나 네가 물려받는 건 어때? 권 회장님은 이제 검찰로 보내드려. 지은 죄가 한둘이 아니잖아.”

“….”

“이왕 너까지 같이 콩밥 먹으면 더 좋고.”

올림픽 앞두고 도핑이나 좀 빨아봐. 이현이 반은 우스갯소리로, 반은 진심으로 조롱하듯 물었다. 지완의 입에서 피식하고 작게 바람 빠지는 숨소리가 흘렀다. 지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또 뭐라고 빈정거릴 줄 알았더니 지완의 입술 사이에선 전혀 다른 주제가 나왔다.

“하세민이 뭐래?”

“하세민?”

“SNS로 아주 지랄을 하던데. 하하. 진짜 너랑 호모질을 하고 싶나 본데?”

잠깐 가라앉았던 주변 공기는 하세민 이름 석 자 하나로 금세 경망스러워졌다. 그 이름이 풍기는 가벼움에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완은 그 웃음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짐짓 눈썹을 치켜올리며 거북함을 보였다.

“그 표정은 뭐야. 미쳤냐? 아니, 씨발 내가 진짜 게이인 줄 아나.”

“이현아, 너 남자랑 자본 적 없지.”

이 씹새끼가… 훅 치고 들어오는 지완의 질문에 이현은 인상을 팍 쓰며 지완을 쏘아보았다. 지완은 미동 없는 얼굴이었다. 평온한 얼굴에 이대로 주먹을 갈길까 하다가 핸들을 꽉 쥐는 것으로 참아내었다. 때마침 신호에 걸렸다. 이현은 브레이크를 신경질적으로 밟아 눌렀다.

“그러는 넌, 있냐? 어?”

“없지. 앞도, 뒤도.”

지완이 씩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현은 그 자약한 작태에 자신이 희롱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귀를 붉혔다. 씨발 뭐 이런 TMI까지 말하고 지랄이야. 궁금하지도 않은데. 이현은 들은 말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다급히 저었다. 그러나 지완은 입을 다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요새 계속 지겨웠거든. 섹스 안 한 지도 오래됐고. 이제 여자가 질리나….”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을 나불대는 지완의 주둥이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이젠 남자랑도 자고 다니겠다고? 이현이 메스꺼운 기분에 제 입을 틀어막았다. 충격받은 이현의 얼굴에도, 지완은 글쎄, 따위의 애매모호한 대답만 내뱉었다. 능글맞기 짝이 없다.

정말 웃기는 소리였다. 얼마 전만 해도 정유진이 그 집에서 나오는 걸 똑똑히 목격한 이현을 앞에 두고.

“정유진 씨는 뭔데?”

“여자가 남자 집에서 나오면 다 섹스한 거야? 사고방식이 기자들이랑 똑같네. 좀 더럽다.”

지완이 웃음을 흩트렸다.

이현은 손을 뻗어 지완이 턱으로 내린 마스크를 다시 들어 올렸다. 아예 지완의 눈까지 가려버릴 정도로 끌어올렸다. 지완이 갑자기 가려진 시야에 손을 들어 마스크를 다시 내리려 하자, 이현이 그 지완의 손을 차지게 잡아챘다. 형편없는 복수였다.

지완은 잡힌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오른팔을 들어 올리려다, 보조기에 고정이 되어있음을 깨닫고 소리 없이 웃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희 집인데. 당연한 거 아니야?”

이현은 다시 한 번 핸들을 꺾었다.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친절한 안내 음성이 내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차 안의 두 인간들보다 더 인정 어린 말투였다. 이현이 이죽거렸다.

“채이현, 잊었나 본데 너도 우리 집 들어왔었어.”

“….”

“이현이 기대에 부응을 못 해줬네, 내가.”

지완이 가볍게 잡힌 팔을 돌려 빼내곤, 제 마스크를 내렸다. 마스크 아래의 왼 볼엔 이현의 것을 닮아 깊게 도랑이 파인 보조개가 숨어있었다. 이현은 그 도랑에 짜증 가득한 시선을 꽂아 넣었다. 입만 벌리면 희롱이지. 대체 뭐가 웃긴데?

“아랫도리 못 놀리니까 이제 입을 막 놀리는구나. 더러운 새끼.”

“그러게. 이건 좀 재밌네.”

이현은 반사적으로 지완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지완은 멱살을 내주고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이현은 본능적인 오싹함을 느꼈다. 진짜 미친놈…. 머릿속에서는 이현이 통제할 틈도 없이 지완이 남자와 붙어먹는 장면이 그려졌다. 웩, 이현은 헛구역질을 하며 다급히 지워냈다.

그 누구도 알 수 없겠지만, 가장 웃긴 사실은 지완이 깔리는 쪽이었다는 것이다.

*

이른 저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주변은 어둑해져 있었다. 이제는 자연스레 땅거미가 지면 스리슬쩍 몰려드는 추위와, 밤바다의 찬 공기에 이현이 몸을 웅크렸다.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일출몰의 반복은 계절을 훌쩍 건너 뛰어가는 중이었다. 가을이 가을 같지 않은 탓에 이현은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 늦여름 다음이 바로 초겨울만 같다. 이현은 제가 얇게 입은 건 헤아리지 못했다.

평일의 저녁에도 을왕리에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웃음을 가라앉히고 먼저 차에서 내린 지완은 이현보다 세 걸음 정도 앞서 걸었다. 지완은 다치지 않은 손으로 모자를 한껏 더 눌러쓰고, 마스크를 더 치켜올렸다. 이현도 다른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 듯싶으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계속 운전대만 잡다가 한숨을 겨우 돌린 이현은 어깨를 가볍게 풀었다. 지랄 맞게 뜬금없이 감성 파는 새끼라며, 속으로 지완에 대한 욕을 수천 번 정도 했으나, 코끝으로 들어오는 찬 바닷바람의 냄새와 들뜬 사람들의 웅성거림, 벌써부터 이곳저곳에서 터뜨리고 있는 폭죽 소리, 줄지어 만석인 조개구이 가게들의 바쁜 움직임까지, 이현의 마음도 묘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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