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감독은 짐짓 모르는 척 굴었다. 이현이 전해 듣고는, 지난번처럼 갑자기 지랄이라도 하면 사이에 낀 감독만 골치 아픈 것이다. 이현은 더 묻지 않았다. 듣지 않아도 알 법했기 때문이다.
“됐습니다. 어쩔 수 없죠.”
그러나 이현의 입술은 호선을 그렸다. 지완이 좆같이 군다면 자신도 좆같이 응수하면 그만이다. 이현은 밖에서 지완을 욕했던 유도부들의 험담을 떠올렸다. 무슨 말을 해야 권지완 기분이 제일 좆같을까. 좀 더 듣다가 내쫓을 걸 그랬나.
이현은 자신이 얼마나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조금도 자각하지 못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새삼스레 나서서 괜한 헛소리들을 말려대더니, 이제는 실컷 지완을 비비 꼴 생각에 들떠 있었다.
*
촬영의 첫 화가 방영되었다. 촬영팀과의 관계가 썩 좋지 않게 끝나버려 편집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이번 일로 더 이상의 촬영 제의가 들어오지 않는다면야 그것 나름대로 이현에겐 호사였다.
다만 선수촌이 민망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선수촌 곳곳의 대형 스크린 앞에서 옹기종기 사람들이 무리 짓기까지 했다. 하필 또 방영 시간이 저녁 식사 시간이었기에, 식당에 마련된 스크린 주위는 더욱 복작였다. 이현은 대형 스크린 가득 제 얼굴이 뜰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황급히 식당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이후로도 당연히 이현은 모니터링 따위는 하지 못했다. 아니, 못 했다는 표현보다는 안 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이현은 차라리 그 시간 동안 침대에 드러누워 쌓인 피로를 푸는 쪽을 택했다.
그러다가도 조금 전에 목도한, 어색한 제 얼굴이 떠오를 때면 공연히 덮쳐오는 민망함에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더구나 1화는 이현이 혼자 도맡은 선수촌 소개 촬영분이었다. 타임라인의 반 이상 동안 이현이 화면에 등장했다. 이현은 머릿속에서 그 남사스러운 모습들을 지우고자 안간힘을 썼다.
이현은 모른 척 굴고 싶었으나, 그조차 제 맘대로 되지 않았다. 재민과 정연은 계속해서 카톡을 울려댔다. 방송인처럼 능숙하게 구는 이현의 모습을 캡처해 올리면서, 정연은 실컷 킬킬댔다. ‘ㅋ’으로 도배된 카톡창을 바라보다 이현은 핸드폰을 꺼버렸다.
그러나 재민과 정연의 반응은 과한 것이 아니었다. 결이 다르긴 했지만, 방송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지완과 이현을 앞세워 홍보를 때려 붓더니 결과가 둘의 인기를 증명하고 있었다. 첫 방송이 시작함과 동시에 끝날 때까지, 그리고 끝나고 나서도 실검은 온통 선수촌 홍보 프로와 이현, 지완에 관한 것들로 도배가 되었다.
평소라면 선수촌 안에만 갇혀 사는 이현이 그런 반응을 실감하기 어려웠겠으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틈만 나면 놀려대는 정연과 재민, 그리고 ‘방송인 채이현’을 언급하며 짓궂게 장난을 쳐대는 선수촌 사람들 때문에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방송 촬영이 처음은 아니건만, 지완과 이현이 나란히 서 있는 작태가 색다른 것이다.
총감독은 자꾸만 이현이 연예인 물을 먹고 거들먹거린다며 유달리 흉을 보기 일쑤였다. 물론 반쯤은 농이겠으나, 촬영 전후로 이현이 부린 말썽에 대한 책망이기도 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정신을 전혀 못 차린 하세민 쪽이었다. 되든 안 되든 아가리부터 벌리고 보는 기자들은 아니나 다를까 또 근거 없는 기사들을 퍼다 나르고 있었다. 그 시작이 어디인가 하니…? 세민의 SNS였다.
이현의 번호도 작가를 통해 알아냈다고 하던 세민은, 이현과 지완이 치고받고 개싸움을 벌였다는 그 어불성설의 핑계를 어디서 주워듣고 진실로 믿은 듯했다. 세민은 말과 말 사이로 은근한 티를 내고 있었다.
hi_swimmin #공방 #케이헌정서 #촬영중휴식 제 작업실과 촬영 로테가 가까워 잠깐 왔어요 ^^ 지난번에 이현 씨랑 같이 들른 이후로 오랜만이네요. 홍보 촬영에 문제가 생기면서 이현 씨가 많이 힘들어 했었는데, 선수촌 방송이 성공적이라 다행입니다. 서로 바쁜 시긴데 이현 선수도 파이팅! 제가 출연하는 수영부 촬영분은 2회에 공개된다고 하니 기다려주세요 ^^
여우같이 은근슬쩍 이현과 지완의 촬영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암시하면서, 지난번의 좆같은 만남을 친목 도모로 둔갑시켰다. 교묘히 말을 바꾸는 철면피가 아주 놀라울 정도였다. 세민의 자약한 작태에 이현은 멀미 날 정도의 싫증을 느껴야만 했다. 이현이 반응하길 바라는 건지, 아니면 무심한 이현이 반박하지 않을 걸 알고 까부는 건지.
당연한 수순으로 이현과 지완이 싸웠다는 자극성 기사들이 터져 나왔다. 촬영 스태프들의 나름 신빙성 있는 뒷담까지 가세했다.
프로 반응도 좋겠다, 지완도 때마침 스캔들이 터졌겠다, 거기에 이현까지 이런저런 소문에 휩싸이고 있었으니, 이때다 싶어 ‘~로 보인다.’, ‘~라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따위의 두루뭉술한 어미를 사용해 양산형 기사를 찍어내는 것이다. 좋다고 몰려들어 다 같이 헛물을 켜고 있는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오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었다. 적어도 지완의 부상에 대한 건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현아, 너 하세민이랑 안 친하다고 하지 않았어? 얘 왜 자꾸 이 지랄이냐? 정연은 반은 짜증, 반은 걱정으로 종알대며 물었으나, 이현은 의뭉스럽게 갸웃거릴 뿐이었다.
재민과 정연에게 세민과의 일을 자세히 설명할 순 없었다. 대강 세민과 자신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것 정도만 밝혀둔 상태였다. 그런 세민을 아주 오랫동안 입이 닳도록 불러 대던 정연은 미련이 남지도 않는지, 자신의 스타의 께름한 행각에 착실히 팬심을 정리해 가고 있었다. 정연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이현이라고 좋아서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같잖은 새끼의 수작질이 어디까지 이어지려나. 그냥 보고만 있기에는 조금 답답했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험담을 해대는 것도 아니고, 친한 척 구는 짓에 공식적인 반박 발표를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더구나 SNS를 하지 않는 이현은 그 흔한 댓글 하나 남길 수 없었다. 이참에 SNS 한번 만들어 봐? 잠깐 고민했지만, 빠르게 생각을 접었다. 세민에게 그 정도 노력을 해주는 것도 과했다. 이러다 말겠지, 이현의 좋지 못한 버릇이 또 튀어나왔다.
*
“이재민-”
“형? 여기까지 웬일이에요? …아!”
이현은 스키트 야외 사격장으로 오랜만에 발걸음을 했다. 점심을 함께하기 위해 재민을 찾아온 것이다. 때맞춰 재민도 훈련을 마무리 짓고 있었는지 사대에서 벗어나 있었다.
재민은 능숙히 총열을 교환하다, 외마디 탄사를 뱉었다. 예기치 못한 이현의 등장에 깜짝 놀랐는지 손길이 엇나가고 만 것이다. 돌려 조이고 있던 총구 끄트머리의 초크가 톡 떨어져 나와 데굴데굴 이현의 앞까지 굴러왔다. 이현이 재빨리 초크를 집어 들었다. 후 바람을 한 번 불어 묻은 먼지를 떼어내고 재민에게 건넸다.
재민의 뒤로, 여전히 훈련 중인 다른 선수들이 클레이 피전을 경쾌히 명중하는 소리가 파바박 들려오고 있었다. 클레이가 연달아 터지며 붉은 잔재를 계속해서 공기 중에 퍼트리는 바람에, 이현은 맑은 하늘에도 코를 훌쩍여야 했다. 괜히 코끝이 간지러웠다.
정신 차려, 인마. 코를 슥 비비며 이현이 실없이 타박했다. 하하, 죄송해요. 재민은 다시 스키트 초크를 끼워 넣고는 산탄총을 가대에 세워두었다. 묵직한 산탄총이 안정적이고 둔탁한 소리를 냈다.
“오전 훈련 끝났지? 밥이나 먹으러 가자.”
재민이 살갑게 웃으며 손을 두어 번 털어대었다. 총기로부터 옮겨 묻은 먼지는 다 닦이지 못하고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재민은 물티슈 한 장을 뽑아 들곤 이현의 옆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식당 옆에서 손을 씻고 들어가야 할 듯했다.
“형. 제 인스타에 글이라도 쓸까요?”
별다른 대화 없이 야외 훈련실을 벗어나 식당으로 걸어갈 무렵, 재민이 넌지시 물어왔다. 꼭 이렇게 재민이 목소리를 깔 때면 피곤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아직 점심시간을 맞이하지 못한 여타 종목의 훈련 건물에서는 악에 받친 기함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현은 흐린 얼굴을 하고 재민을 올려다봤다. 하세민이요. 재민이 단호한 얼굴로 덧붙였다. 이걸 귀여워해야 할지, 고마워해야 할지.
재민 역시 올리는 게시글마다 묘한 뉘앙스를 풍기며, 날조 기사들에 소스를 마련해주는 세민을 마뜩잖아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니면 정연과 어떤 모의라도 한 것인지 재민은 결연한 표정이었다.
뭔 글? 이현은 걸음을 늦추며 웃음을 갈무리했다. 재민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씩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선 핸드폰을 꺼내 들어 이현의 앞으로 냅다 카메라를 가져다 댔다. 재민은 허리를 숙여 볼과 볼을 딱 부대끼듯 들이밀었다. 전면 카메라를 켜자 화면은 이현과 재민의 얼굴로 가득 찼다.
“너 지금 뭐 하냐?”
“웃어요, 형.”
까닭을 물을 새도 없이 쏟아지는 촬영음에, 이현은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뭐야? 이현이 재민을 흘깃댔으나 재민은 해사하게 웃으며 연신 촬영 버튼만 눌러댔다. 그렇게 한 수십 장은 찍었을까, 끝을 모르는 재민을 결국 이현이 밀어냈다.
볼이 손바닥으로 꾹 눌려 밀쳐지면서도 재민의 얼굴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했다.
“뭐 하냐니까?”
“형. 사진 좀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