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51)

#37

삼두근을 위한 덤벨킥백을 반복하는 이현의 폼을 재민이 한참 봐주고 있을 때, 스태프가 다가와 이현에게 다다음 촬영 준비를 고했다. 이현은 흐르는 땀을 닦아내었다. 전체 응원 영상이야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권지완이었다.

이미 많이 해왔던 그 응원 영상이 좆같긴 해도…. 한 번 더 하는 게 뭐 그리 어렵겠는가, 싶다가도 웬일인지 이번 따라 더 낯간지러운 기분에 이현은 주춤거렸다.

예전처럼 형식적인 말이나 던지면 될 것 같은데 어쭙잖게 속이 답답했다. 응원 영상을 찍을 때마다 방송에 얼굴을 들이밀고 저를 비꼬아 댔던 지완이 생각나 입술을 씰룩거렸다. 이현은 덤벨을 내려놓았다.

“재민아. 담배 하나 피우러 갈래?”

“아, 잘됐네요. 저도 형한테 할 말 있었는데.”

담배 있어? 아뇨, 없어요. 형한테 빌릴래요. 자주는 아니었지만, 재민도 가끔씩 담배를 피우곤 했다. 변명은 아니지만 운동부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학창 시절부터 운동을 시작하면 운동부 선배들에게 담배를 배우고, 옹기종기 모여 돌려 피우고 하는 짓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 바닥에서 생활을 했는데도, 선후배 관계에 묶이지 않은 이현에겐 예외인 일이었지만. 이현은 선뜻 따라나서는 재민을 향해 담배를 건네며 트레이닝 센터를 빠져나왔다.

마지막 촬영을 위해 여타 종목의 선수들이 모여 있다 보니, 흡연 구역 역시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나름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전혀 모르는 얼굴들도 있었다.

국대 선수들이 무슨 담배를 이렇게 많이 피워? 웃기고 같잖은 행각에 이현이 퍽 미련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 형. 저기 유도부 있는 것 같은데. 다른 곳으로 갈까요?”

재민은 큰 키를 이용해 저 안쪽 구석까지 먼저 훑더니 이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현은 그런 재민의 행동에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손사래를 쳤다. 어이가 없었다. 예전엔 놀려 먹기식이었다면, 지금의 재민은 진심으로 이현을 걱정해 자리를 피하려는 듯했다.

“넌 진짜 내가 권지완한테 처맞기라도 한 것 같아?”

이현이 재민의 귀를 잡아당겼다. 키 차이가 있다 보니 아래로 한껏 끌어당겨지는 제 귀에, 재민은 고통에 버무려진 신음을 내뱉었다. 이현이 팔꿈치로 재민의 명치를 가볍게 치며 놓아주었다.

“아니에요?”

“이 새끼가? 일 절만 해라.”

한 번은 걱정이었어도 두 번은 까부는 거다. 이현은 곰살갑게 웃는 재민에게 주먹을 들어 보이고 흡연 구역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현이 제 연초에 먼저 불을 붙이고, 연초를 물고 기다리고 있던 재민에게 라이터를 건넸다. 감스흡느드. 연초를 물은 채 발음을 질질 흘리며 재민이 꾸벅거렸다.

이현은 벽과 재민 사이에 숨듯 몸을 움츠렸다. 철없는 고등학생들에겐 이 쪼그린 자세가 불량함의 상징일지 몰라도, 다 큰 어른들에게 이 자세는 일상의 고단함이 물씬 배어 나오는 것이었다. 이현이 뚜둑 고개를 돌려댔다. 담배 맛이 괜찮다.

그러나 그 순간은 짧았다. 애석하게도 이현의 담배 맛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누군 선발전 앞두고 좆뱅이 돌리는데 씨발 누군 휴가나 가고.”

“열심히 하는 꼴이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니야? 이젠 진짜 막 나가네. 좆같은 새끼.”

“말이 돼? 올림픽 일 년도 안 남은 상황에서 한 달 휴가를 쓴다는 게? 기사 보니까 정유진이랑 다시 만난다며.”

이현을 보지 못한 것인지, 걸걸한 목소리가 코너 너머에서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유도부 선수들이었고, 화두는 지완이었다. 재민이 슥 이현의 눈치를 살폈다. 이현은 담배를 볼이 패도록 빨아들일 뿐이었다.

“뒤에서 그러더라. 채이현이랑 존나 싸우고 정유진이랑 여행 갔다고.”

“인생 한번 존나 편하다. 저번에 상현 선배 팔 조져놨잖아, 걔가. 씨발 그런 건 징계 안 먹고 뭐 하는데.”

“뭐 하나 제대로 걸리기만 해. 진짜 다 터트리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 권지완 노리는 게 한둘이야?”

그 둘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재민은 더욱 어쩔 줄 몰라 했다. 재민은 손에서 타들어 가는 담배 말단을 한 번, 이현의 정수리를 한 번, 그리고 코너 너머의 목소리 주인들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재민의 시선이 난처한 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담배만 피우려고 하면 유도부 새끼들 뒷담을 듣네. 덩치는 산만 한 새끼들이 입은 존나 가벼워서 모이기만 하면 지랄. 씨발 덩칫값을 좀 해야지.

이현이 저 깊은 곳까지 가득 채웠던 담배 연기를 진득하게 뿜어내며 속에 담긴 말을 흐렸다. 이걸로 분명하다. 남자는 덩치가 다가 아니다. 유도의 정신, 상대를 존중하기, 별 지랄을 다 떨면서 제대로 정신머리를 갖추고 있는 새끼가 없다. 정작 뒤에서 말은 저렇게 해도 지완의 앞에서는 입도 벙긋거리지 못할 새끼들이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저번에 유도부 담벼락에서 염병을 떨던 그 둘은 아닌 듯했다. 유도부 그거 몇이나 된다고 벌써 넷씩이나 권지완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야? 이현은 발을 동동 구르는 재민을 토닥였다. 됐어. 담배나 피워, 아깝게. 그제야 재민은 어설프게 필터를 입으로 가져다 댔다.

재민의 담배 연기와 이현의 담배 연기가 동시에 뿜어지며 한데 섞였다. 뿌연 연기가 이지러지며 흩어지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현의 안에서 짜증이 치밀었다. 저번도 꼭 이런 상황이었다. 그땐 내가 어땠더라. 이런 맘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현은 다시 한 번 신경질적으로 목구멍 안쪽에 담배 연기를 때려 박았다.

어쩌면 이건 지완을 향한 어설픈 죄의식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런 마음이 든다는 사실 자체가 이현의 짜증을 도리어 더 부추기는 형국이었다. 이현은 담배를 피우다 죽겠다고 다짐한 사람처럼 연달아 깊이 빨아댔다. 순식간에 연초 한 대가 동이 나고, 이현은 흐름이 끊길세라 다시 새 개비를 물어 들었다.

재민이 이현의 연초에 불을 붙였다. 화가 나 보이는 이현의 모습에 재민이 한마디 더 하려 했으나, 이현이 먼저였다. 이현이 한 모금도 미처 들이마시지 않은 연초를 재민에게 내밀었다. 재민은 얼떨결 받아들었다.

일단 들고 있어. 이현이 중얼거리곤 재민이 말릴 새도 없이 코너를 돌았다. 그 뒤에서는 경악스러운 얼굴로 양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재민이 어버버 거릴 뿐이었다.

“그 권지완이랑 싸웠다는 채이현이 접니까?”

이현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고까운 얼굴로 물었다. 실컷 분을 풀고 있던 산만 한 덩치의 둘은 고개를 홱 돌려 이현을 확인하더니 얼굴을 점점 굳혔다. 풍채를 보아하니 100kg 이상 체급인 듯했다. 그러나 이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싸울 것 같으면 형을 들고 튀자. 재민은 이현의 바로 뒤에 서서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다.

“저 권지완이랑 안 싸웠는데요.”

이현이 예민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남 말 하다 딱 들키고 만 유도부 덩치들은 들고 있던 담배를 슬금슬금 비벼 껐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줍게 굴었다. 오리발 내미는 거야 뭐야. 이현은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나직이 말을 뱉었다.

“같은 선수촌 사람들끼리… 담배 맛 떨어지게 좀 하지 맙시다.”

재민은 이현의 뒤에서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연신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이 형이 왜 이럴까? 재민은 상황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가 알던 이현은 이런 데에 나설 성격이 아니었다.

유도부의 둘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이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이현이 재민의 손에 걸쳐 두었던 제 담배를 다시 뺏어 물었다. 재민은 그런 이현을 퍽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 타들어 간 담배를 비벼 껐다. 재민은 몇 모금 들이마시지도 못했다.

“재민아, 할 말 있다며. 그건 뭔데?”

“하하. 다음에 할게요.”

어딘가 평소와 달리 까칠해 보이는 이현의 모습에, 재민은 침만 꼴깍 삼키고 다음을 기약할 뿐이었다.

*

짤막한 담배꽁초를 한 개 더 만들어 내고 난 후에야 이현은 트레이닝 센터로 돌아왔다. 이현이 희끗희끗한 담배 연기를 뿜어 대는 동안, 재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현을 이리저리 살펴댔다. 데구루루 굴러가는 재민의 두 눈동자는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이현은 재민의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헤집었다. 아 형, 촬영 앞두고 머리를 망가트리면 어떡해요. 한껏 억울해진 재민이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리며 칭얼거렸으나 이현은 낮게 웃어넘기고 말았다.

이어진 작가의 호명에, 이현이 빠르게 구강청결제로 담배 냄새를 헹구어 냈다. 머리를 두어 번 털어 가라앉히고 입술을 축였다. 불편한 티를 대놓고 드러내며 저를 힐끔거리는 감독이 영 탐탁지 않았으나, 먼저 다가가 다시 한 번 가볍게 묵례했다. 감독은 대강 손짓하며 이현의 위치를 잡았다.

“감독님. 권지완도 이거 찍었습니까?”

감독이 저를 시답지 않아 하든 말든 이현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이현은 샐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감독에게 태연히 물었다. 감독은 이현의 뜬금없는 질문에 눈을 치켜뜨며 이마 위로 주름을 자글자글하게 만들었다.

“직접 찍진 못 했구요, 대신 협회 통해서 영상 전해 받았습니다.”

“뭐래요? 권지완이?”

“그게 아직 편집이 다 안 돼서….”

“그래도 뭐라고 했는지는 들어 보셨을 거 아녜요.”

지완이 이번에는 또 뭐라 헛소리를 지껄였는지, 그에 맞춰줄 심산으로 물어본 것이었다. 이현의 고집에 감독은 큼큼, 헛기침을 해댔다.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는 걸로 봐서 대답이 곤란한 듯했다. 이현은 감독의 머뭇거림에서 지완의 멘트를 대략 읽어낼 수 있었다. 또 얼마나 빈정거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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