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51)

#35

이현이 당황한 건 사실이었다. 지완과 자신 말고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으니까. 그 일이 있던 훈련실 옆 운동장 샛길은 학교 선수들이 아니면 오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다른 학교였던 세민이 그 일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부분에 있어서 놀랐을 뿐이다.

지완의 가슴팍에 새겨진 흉터에 이미 묻힌 일.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썩 내키지 않긴 했다. 이슈를 좋아하는 대중들에게 뜯기 좋은 미끼를 내던져주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다. 지완이 이제 와서 물고 늘어진다면야… 이현에게도 치명적이었다. 그랬기에 지완이 놀리듯 카메라 앞에서 흉터에 대한 언급을 할 때면, 이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긴장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현은 사석에서 지완을 만날 때면 바락바락 그 연지탄을 들먹이며 지완의 성질을 자극하곤 했다. 그럴 수 있던 이유, 그건 놀랍게도 이현과 지완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현에게만 해당되는 것일지 모르나, 그렇다. 적어도 이현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지완이 이 사건을 절대 세상 밖으로 꺼내지 않을 거라는 그 근거 없는 믿음. 그 신뢰는 디딤돌 없이 위태로워 보여도 지난 십 년을 버텨왔다. 그 일, 연지탄, 지완의 상처, 운동장 샛길의 총성. 그건 오로지 둘만의 비밀이었다.

그러나 지완도 아니고 제삼자인 하세민이라니. 뭐 대단한 건수라도 잡은 양 구는 게 오히려 가소로웠다. 이현이 코웃음을 치자 세민은 눈을 설핏 떴다. 이현을 협박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의 어조는 꽤 부드러웠지만.

“내가 그 일로 이현 씨 어떻게든 해보고 싶었는데…. 그때까진 어려서 그랬다고 쳐줘요.”

“본인이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압니까?”

“근데 그냥 그 일을 덮더라고. 나한테 입 다물라고 하던데요. 난 그 아까운 건수를 그냥 날려야 했잖아요.”

뭐, 마냥 날린 건 아니지만. 세민은 본인의 뻔뻔한 무례를 버젓이 밝히며 소용없는 변명을 덧붙였다. 뭐 하자는 거야? 차라리 협박을 하든, 회유를 하든, 반성을 하든, 회개를 하든, 용서를 구하든, 하나만 했으면 좋겠네.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이현이 공연히 어깃장을 놓는데도 못 들은 척 흘려넘기는 세민이었다.

미친 새끼. 말을 더 할수록 질색하는 이현의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세민은 혼연하게 제 할 말만 이어갔다.

“웃긴 건 그 새끼도 이현 씨를 끔찍하게 싫어하잖아요? 그런데 선발전 합격하자마자 선수 인생 말아먹을 뻔한 채이현을 그냥 둔다?”

“….”

“이현 씨.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새끼가 제일 위험한 거 알죠?”

세민은 그제야 종알대던 입을 다물었다. 이현이 깊은 호흡을 들이마셨고, 식힌 숨을 조용히 입술 사이로 흘려보냈다. 애들의 귀찮은 장난에 불필요한 상대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다.

“이걸 왜 이제 와서 나한테 말합니까?”

“이현 씨한테 용서받으려고. 음, 고자질?”

“….”

“권지완한테 맞은 뺨이 여태 아프기도 하고.”

미동조차 없는 이현의 응수에, 세민은 나름 놀랐는지 입가를 작게 꿈틀거렸다. 이현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도 총감독이었다. 이현은 액정을 흘깃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울만 왔다 하면 시간 낭비네.

“용서고 뭐고 다신 만날 일 없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싫어서 이렇게 다 말하는 건데요?”

“왜요? 아직도 그 어린 마음이 미치겠어요?”

이현이 빈정거렸다. 신경증적인 피로가 몰려왔다. 염치도 없나.

이현과 세민은 한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면서도 서로의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결의 생각들로 가득했다. 세민은 어딘가 지완과 닮은 듯했다.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이 비슷했다. 이현에겐 눈물 나도록 끔찍한 일이었지만.

“아뇨. 그런 마음은 내가 선수 생활 접으면서 끝났고…, 오랜만에 이현 씨 보니까 좀 색다르네. 계속 관심이 가요. 어릴 때 집착이 계속되는 건가?”

“미치셨나 봅니다.”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끝을 모른다. 제멋대로 감정을 귀결 짓고 있는 세민의 모습에, 이현은 염증을 느꼈다. 그러나 세민은 진지하게 고민하며, 마치 지난 술자리에서 이현이 게이냐고 물었을 때처럼, 사색에 잠겨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웬 정신 나가버린 새끼한테 물렸구나. 이현은 탄복했다.

“모르죠. 이현 씨에 대한 관심의 이유가 더 이상 찌질한 자격지심만은 아닌 거 같은데.”

“씨발 진짜.”

이현이 거칠게 테이블을 밀어냈다. 철제로 된 회색빛의 감각적인 테이블은 끼익거리며 시끄러운 마찰음을 냈다. 이현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현은 더 이상의 말 없이 그대로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세게 문을 여닫고, 계단을 오르며 곧장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차단이다.

“연락할게요. 이현 씨가 홍보해주신 영화 촬영 때문에 당분간은 바빠서 못 하겠지만.”

“좆 까세요.”

따라 나온 세민이, 계단을 오르는 이현의 뒤에 대고 떠들었다. 이현은 계단을 이제 두 칸씩 오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

“권지완, 내 지갑 가지고 내려와. 지금 너희 집으로 갈 테니까.”

[하세민은?]

그 길로 선수촌에 돌아가 숙소에 드러눕고 싶었으나, 지갑이 지완의 손에 있었다. 지완이 적어도 한 달 뒤에나 복귀하는 상황에서 지갑을 두고 진천으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차에 오르자마자 이현은 핸들을 몇 번이고 내리쳐야만 했다.

지완이 전화를 받자마자 이현이 인사말도 없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지완은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어투로 심드렁히 물었다. 이현이 되물었다.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왜 물어.”

[들켰네. 진짜 궁금해해 줘?]

아니나 다를까. 지완의 재수 없는 대답은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지갑이나 들고 내려와. 5분 후면 도착이야.”

지완의 집에 다시 올라가기는 귀찮았다. 지완의 빌라에 진입하려면 방문자 확인이니 뭐니 그 성가신 일을 구태여 해야만 했다. 차라리 바로 앞 도로까지 지완이 가져다주는 게 나았다. 지완이 이현의 편의를 봐줄 가능성은 현저히 적었지만.

[누구야?]

빨간 불에 멈춰서 핸들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이현이 짐짓 눈을 크게 떴다. 전화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이현은 차의 스피커에 귀를 가까이했다. 그러나 들리는 건 지완의 목소리뿐이었다.

[귀찮으니까 네가 올라와서 가져가.]

지완은 툭 말을 내던지고 대강 전화를 끊었다. 누구야? 단 한마디, 고작 세 글자였지만 이현이 들은 그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여자였다.

지완의 집에서 봤던 여자의 외투, 속옷 브랜드의 쇼핑백… 최근 여자가 있는 건 확실했다. 그렇다면 스캔들 상대인 정유진일까? 상대를 추측해 가는 이현의 머릿속에 연이어 반나체의 지완이 떠올랐다. 설마. 섹스라도 하다가 날 부르는 건 아니겠지.

이현은 여전히 또렷한 신호등의 빨간불을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카톡창에 새로운 친구로 뜬 지완을 눌러 빠르게 문자를 적었다.

오후 8:38 {야 너 설마 집에 여자 있는데 나 부르는 거 아니지?}

이현은 초조하게 제 카톡창을 한 번, 신호를 한 번씩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툭툭 핸들을 두드렸다. 곧이어 1은 사라졌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답은 없었다. 신호가 바뀔 때까지 화면에는 이현의 노란 말풍선만 초라하게 떠 있을 뿐이었다.

이현이 거칠게 액셀을 밟아 눌렀다. 아, 이 개새끼.

*

빌라 주차장에 들어와서도 이현은 올라갈지 말지 한참 고민해야만 했다. 방문자 확인까진 했으면서, 이후로 지완은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귀찮으니까 알아서 올라오라는 의사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문 앞까진 나오겠지, 씨발.

지갑을 두고 온 제 잘못이었다. 이현은 흐트러지는 앞머리를 연신 쓸어 올리며 차에서 내렸다. 곱슬기의 머리가 삐죽하다.

승강기는 빠르게 이현을 6층으로 실어 날랐다. 목이 뻐근해 고개를 두어 번 돌려가며 스트레칭을 한 이현이 열리는 승강기 문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찌뿌드드한 고개는 발끝을 향했다. 목 뒤 뼈를 지그시 눌렀다. 상처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이질적인 살결의 감촉만이 낯설 뿐이었다.

“채이현 선수?”

한 층에 한 세대만 거주하고 있기에,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현관문 앞이었다. 이현이 제 흉터를 매만지며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누군가 이현을 불러 세웠다. 여자 목소리였다. 꾹꾹 제 목을 눌러대던 이현이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정유진…? 지완의 스캔들 상대이자 현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배우, 정유진이었다. 이현이 어정쩡하게 멈춰 섰다. 시나리오처럼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지완이 보러 오셨나 봐요.”

유진이 살포시 미소를 얼굴에 들이며, 친절하게 이현에게 물어왔다.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현에게 낯을 가리지 않았다. 부드럽고 침착한 그 말투에는 또래에게서 느끼기 힘든 성숙함이 스며있었다. 그럴 만했다. 그녀는 이미 30대에 접어들었으니.

“정유진, 이거 또 놓고 가….”

이현이 어색하게 인사에 답하려 할 때쯤, 덜컥 문이 열렸다. 보조기는 그대로였으나, 언제 옷을 주워 입었는지 아까와는 달리 품이 넉넉한 검은 브이넥 니트를 걸치고 있는 지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완은 유진에게 전할 외투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현이 봤던 그 아이보리색 외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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