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그만해. 이현이 지치기만 하는 대화에 선을 그으려 입을 벌리기도 전에, 지완이 말을 이었다. 조금 전까지와 달리 그 음성에는 날이 서 있었다. 흙길에 파였던 발자국들 안으로 비가 빠르게 고이고 있었다. 그 홈마다 빗물이 넘실댔다.
“채이현. 네가 날 헷갈리게 하는 거야.”
“뭐?”
“내가 널 헷갈리게 하는 게 아니라.”
“….”
“너만 가만히 있으면, 나도 제자리라고.”
지완의 목소리에는 이현을 향한 선명한… 아니, 어떤 뜻 모를 감정이 담겨 있었다. 명명할 수는 없었으나, 쉬이 흘려보낼 만큼 얄팍한 것도 아니었다. 주위의 모든 것을 희미하게 만들며 자신만을 쳐다보는 지완에, 이현의 손발 끝이 저려 왔다. 저릿저릿하다가 또 그새 무감각해졌다. 이현은 또 한 번 몰려드는 추위에 옷깃을 움켜잡았다.
“권지완, 예전처럼 너 죽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애새끼 아니야, 나. 너 죽일 거였으면 벌써 대가리에 투투탄 박았겠지.”
“….”
“그래. 옛날엔 진짜 너 죽여 버리고 싶었어. 너한테 탄환 박은 거… 그땐 정신 놨었어.”
“응, 그런 것 같더라. 내가 말했잖아. 그때 네 눈깔, 진짜 돌아버린 줄 알았거든.”
나름 짜릿했는데. 지완이 또다시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이현은 지완의 헛소리를 무시하며 제 말을 이었다.
“…네가 날 봐줘? 지랄하지 마. 하루에도 수백 번 참으면서 버텨왔던 건 네가 아니라 나야.”
“….”
“근데 이젠 아니라고. 징징거리면서 화만 내고 살진 않아. 스물다섯 처먹고 뭐 하는 짓이야 이게.”
흐음, 지완이 곁눈을 뜬 채 이현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크게 자리한 눈동자가 위아래로 이현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이현은 불쾌함에 휩싸여야만 했다.
“그리고 다쳐서 선수 인생 끝낼 거면….”
“끝낼 거면?”
“나 없는 곳에서 해. 괜히 씨발 내 인생 발목 잡을 일 만들지 마, 지금처럼.”
“채이현, 매정하네.”
“너만 할까?”
자신의 말을 그저 농담 따먹기 하듯 여유롭게 받아치는 지완에, 이현이 이를 아득 갈았다. 지완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짐짓 서운한 척을 하였으나 속은 이현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구워 먹는 능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이현은 그런 지완은 쏘아보았다.
“그렇다고 착각도 하지 마라. 네가 씨발 소름 끼치게 싫은 건 여전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걱정 마. 그건 충분히 잘 알고 있으니까.”
짜증이 가득 밴 이현의 말에 지완은 표정을 풀었다. 심지어 씩 웃으며 뜻밖의 대답마저 순순히 내놓았다. 이현의 말을 이미 한참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당황은 이현의 몫이었다.
“이현아, 그게 숨겨질 리 없잖아.”
“….”
“그 좆같은 표정은 다 드러나. 네가 굳이 말 안 해도….”
“하?”
“난 그 얼굴 좋아해. 네가 나한테만 보이잖아. 꽤 재밌어.”
지완은 다치지 않은 한쪽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현은 어깨의 움직임과 함께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지완의 눈썹을 눈에 담았다. 깔끔히 정리된 까만 눈썹은 그 산의 경사를 따라 치켜 올라가곤 했다. 이현은 그 미세한 근육의 떨림을 바라보다 입을 벌렸다. 그간 묵혀두었던 의문이 목 안쪽에서부터 반사적으로 툭 튀어나왔다. 어쩌면 이현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권지완.”
“….”
“그러는 넌 나를 왜 싫어하는데?”
흔들림 없이 평온한 어조. 긴장하지도, 반감이 배지도 않은 담담한 말투. 이현이 느릿하게 물었다. 연유 모를 물음이 몽글하게 둘 사이의 정적을 감쌌고, 중력을 체감하며 떨어지고 있는 빗방울들 사이를 헤집었다.
“…글쎄.”
“….”
“이현이는 재수가 없고.”
이번에도 장난일까. 그러나 지완 역시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유치한 한마디는 직선으로 이현에게 꽂혔다. 이현은 물기 젖은 입술을 천천히 벌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지완이 먼저였다.
“늘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고….”
빗소리가 더욱 거세지며 지완의 말꼬리를 집어삼켰다. 벙긋거리는 지완의 입 모양으로 어렴풋이 알아맞힐 뿐이었다. 동시에 지붕의 틈을 비집고 나온 빗방울이 이현의 눈가에 투둑하고 떨어졌다. 눈에 튄 물기에 이현의 시선이 흐릿해졌다.
“…근데 이현아, 내가 널 싫어한다고 어떻게 확신해?”
나도 모르겠는데. 지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뿌연 인영은 분명히.
시야가 개는 순간 비가 잦아들며 빗소리가 둘 사이에 고요히 멈춰 섰다. 변덕스러운 농간질처럼.
*
퍼붓던 소나기가 장난스럽게 그친 이후, 사태는 빠르게 일단락되었다. 금세 촬영팀을 정리한 협회 측의 전화에 둘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걸음을 옮겨야 했다. 이현과 지완의 헤아리기 힘든 대화 역시 흐지부지하게 증발되었다. 이현의 두 눈이 지완을 뒤좇았으나 지완은 그런 이현의 시선을 스쳐 넘길 뿐이었다. 둘은 하릴없이 선수촌에서 보낸 차량에 올라탔다.
지완과 이현 모두 곧장 메디컬 센터로 이송됐다. 이현은 단순 타박상에서 그쳤으나, 지완은 달랐다. 오른쪽 어깨 관절와순의 후방에 미세한 크랙이 보여 수술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관절막은 후방 인대와 같이 늘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수술을 해야 한다면 관절막 중첩술과 후방 관절와순 봉합을 동시에 시행해야만 했다. 수술이야 빠르게 끝난다고 해도 장장 몇 주간 보조기를 착용해야 할 만큼 골치 아픈 문제였다.
유도 감독진은 발칵 뒤집혔고 유도 협회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지완은 바로 정밀 검사에 들어갔다. 이현과 지완이 불암산에서 크게 싸워 촬영지를 이탈했고, 이후 지완은 갑작스럽게 휴가를 떠난 것으로 상황은 정리되었다. 정말 사실인 양, 둘의 싸움 사실을 비밀에 부쳐 달라며 촬영팀에 간곡히 부탁까지 할 정도였다. 영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현은 넌지시 사실 관계를 물어오는 제작진들의 연락을 모두 무시했다.
맥락을 벗어난 휴가 핑계는 당연히 의심을 받을 만했지만, 상대는 권지완이었다. 그의 변덕은 일방적인 이탈 통보의 그럴싸한 변명 거리가 되었다. 지완의 성격이야 이미 유명했기에 오히려 오래 버텼다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완의 지랄 맞은 성격이 처음으로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유야무야 덮어져 가는 듯 보였으나, 당연히 뒷말은 퍼지고 있었다. 제작팀 안에서는 이런저런 추측들과 헛소문들이 알음알음 파다했다. 우습게도 그 루머들에는 주로 시아와 세민이 함께 등장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여파는 신경 쓸 문제도 아니었다.
이현은 지완이 메디컬 센터에서 병원으로 후송되었다는 소식까진 감독진을 통해 전해 들었으나, 그 뒤의 내용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이현 역시 상처 치료에 매진해야만 했다. 목 뒤에 자리한 상흔은, 흉이 남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소견과 함께 두꺼운 거즈로 덮어졌다.
<권, 갑작스러운 휴가 일정, 알고 보니 옛 연인 정유진과 동행>
<한 번쯤 아찔하게 혼나고 싶었던 정유진, 결국 다시 찾은 권지완?>
<권지완-정유진, 세기의 커플 다시 재회하나>
<채이현 동성애 논란 당일, K호텔로 들어가는 권지완 목격>
<권-채-하 술자리 친목 후 권지완이 찾은 건 바로 정유진>
<할리우드st 전 연인 관계였던 권♥정, 이제 다시 연인으로?>
사태를 무마하기 위한 또 다른 스캔들에 불과한지, 아니면 느닷없는 타이밍으로 운 좋게 불거진 사실인지 알 방도는 없었으나 이현은 쏟아지는 기사들을 통해 지완의 소식을 접했다. 늘 골칫거리였던 스캔들 덕분에 지완과 이현을 둘러싼 다른 여러 추측들은 모습을 감췄다.
촬영팀에서는 이현과 지완의 싸움을 덮기 위해, 협회 측에서 뿌린 거짓 기사로 여겼으나, 전말을 알고 있는 이현은 속으로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날 씨발 길거리에 나 버리고 정유진 만나러 갔나 보네. 물론 휴가 동반은 거짓 기사일 것이다. 지완은 지금 치료를 받고 있을 테니까.
지완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파트너들 중에 단연 가장 인상 깊은 상대는 정유진이었다. 아찔하게 혼이 나고 싶었다는 전설적인 인터뷰를 남긴 그 배우. 이현이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지완의 스캔들 상대기도 했다.
사실 팩트가 어떻게 되든 상관은 없었다. 이렇게 기사들이 낭자하게 뿌려지는 걸로 봐선 지완의 상태가 좋지 못한 것만은 분명했다.
재민과 정연이 매일같이 시끄럽게 이것저것을 물어왔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이현의 목에 난 상처를 보고, 지완과 이현이 다시 한번 치고받고 싸운 것이라, 재민과 정연은 추측할 뿐이었다.
지완의 이탈과 스캔들을 핑계로 촬영은 연기되었다. 다행히도 지완과 이현이 참여해야 할 컷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둘이 함께 나올 장면들이 이현 단독으로 수정되었다.
그러나 고작 며칠 미뤄졌다고 해서 이현의 몸 구석구석에 새겨진 상처가 모두 지워질 순 없었다. 이현은 추워진 날씨에 감사해야만 했다. 긴팔, 긴바지, 목티를 입어가며 상처를 가렸다.
이러나저러나 몇 남지 않은 이후의 촬영은 오로지 이현의 몫이었다. 애초에 이번 촬영에서 이현은 굴러온 돌이었으나, 도리어 일을 몽땅 맡게 되어 억울할 만도 했다. 그럼에도 이현은 불평하지 않았다. 열심히 임하지도 않았지만. 이현은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방송에 대한 책임감은 아니었고, 그것은… 지완의 부상에 대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