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151)

#28

권지완에게 묻고 싶던 것?

오해에 대한 죄책감? 내가? 권지완에게? 그럴 리가.

또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이제 와서 내가 궁금한 건 뭐지?

왜… 권지완은 다 알면서 가만히 있었지?

권지완은 다 알고도 가만히 있었으면서 왜 이번엔?

지완의 까만 뒤통수와 이어진 발자국, 걸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손과 스치는 나뭇잎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땐 묻었던 권지완이 왜 이제는 입 밖으로 꺼낸 것일까. 왜 그때의 날 봐줬을까. 날 괴롭힐 이유만 찾아 헤매던 권지완이 왜? 그냥? 이현이 가진 의문의 대상은 더 이상 세민이 아니었다.

이현은 권지완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복잡한 머리와 반대되는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연쇄적인 질문들 사이에서 순간, 주의를 놓친 이현의 발이 꼬이고 말았다. 이현의 손은 지완의 팔 언저리를 스쳤다. 잡지는 못했다.

아차. 오르고 있던 것은 계단이었고, 이현은 제 몸이 뒤로 기우는 것을 느꼈다. 몸이 그대로 굳었다. 놀랍게도 그 찰나의 순간은 꽤 길게 느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모션도 취할 수 없다는 점이 비참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 이현은 자신이 몇 계단을 올라왔는지 머릿속으로 헤아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누군가는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죽기 전에는 주마등도 본다고 하지 않는가. 열몇 계단 정도…. 이현은 한편으로 안도했다. 죽진 않는다.

“아… 씨발”

이현은 등산로 계단을 타고, 제 몸이 둔탁하게 굴러떨어지는 것을 온몸으로 감각했다. 이곳저곳에 치이고 긁히고 부닥치는 소리들이 마치 격발 소리처럼 귀에서 크게 울렸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이현은 그렇게 올라온 길을 빠르게 되돌아가며, 남긴 발자국을 제 몸으로 다 쓸어 없애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큰 암벽에 부딪힌 충격에 온몸이 자릿했다.

그러나 이상했다. 축축한 바닥의 흙냄새가 아니라 체온을 머금은 익숙한 향이 코를 스쳤고, 욕설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이현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현의 아래엔 인상을 한껏 찌푸린 지완이 깔려 있었다.

*

“야 씨발 너 미쳤어?”

이현은 지완에게 소리치며 넘어질 때의 상황을 되짚었다. 그대로 무게 중심이 뒤로 향하며 넘어지려는 찰나, 스쳤던 지완이 팔을 뻗어 이현의 허리를 잡았다. 지완이 버티기도 전에 지완의 몸마저 아래로 쏠리면서 둘이 함께 계단을 뒹굴게 된 것이다. 이현은 지완에게 안기듯 포개져 타격이 완화되었지만, 지완은 달랐다. 성인 남성의 무게가 더해진 충격을 날 몸으로 받은 것이다.

이현은 사색이 되었다. 바로 몸을 곧추세우지 못하고 이를 꽉 깨무는 지완의 모습을 보니 사태가 심각해 보였다. 크게 다쳤을지 모른다. 올림픽이 일 년도 채 남지 않았다. 이 시기에 부상은 치명적이다. 이현은 치미는 당혹스러움을 눌러 내리며 몸을 일으키는 지완을 부축했다.

“너… 너 어디 다쳤어? 일어설 수 있겠어?”

이현은 침착하려 노력했다. 이미 지완의 얼굴에는 이곳저곳 긁힌 상처가 보였고, 쓸린 손바닥엔 피가 자욱했다. 지완의 입술은 이현의 머리에 부딪힌 것인지 발간 피를 머금은 채 터져있었다. 지완이 혀로 입술을 축이다 별안간 쓰라린 상처에 인상을 찌푸렸다.

긴팔과 긴바지에 가려져 바로 눈에 보이진 않았으나, 옷이 헤집어진 모양새를 보아하니… 지완의 팔과 다리에도 상처가 가득할 게 뻔했다. 이현의 물음에도 지완은 낮게 깔린 숨소리를 고를 뿐이었다. 그러다 뒤늦게 통증이 자각되는지,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았다.

이현이 허리를 숙여 지완을 살폈다. 초조함, 불안함보다 어떤… 반감과 거북함에 가까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어깨 아파? 나간 거 같아? 골절? 다른 곳은? 팔은 움직일 수 있겠어? 어깨 돌려봐. 안 돼?”

이현은 날 선 어조로 다급히 질문을 뱉어댔다. 지완은 짧은 숨을 내쉬었다.

“좀 닥쳐, 이현아. 어깨보다 너 때문에 고막부터 나갈 것 같으니까.”

“….”

지완은 왼팔로 이현을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행히 쓸린 곳 외에 다른 심각한 부상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한시 빨리 정밀검사가 필요했다. 타박상이란 건 가벼워 보여도, 후에 치명타로 돌아올 수 있다.

“너… 어깨는?”

지완은 제 몸이 부딪힌 큰 암석에 몸을 기대섰다. 앉기에는 가팔랐고 겨우 몸을 기대는 게 전부였다. 여전히 지완은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고 있었다. 이현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물었다. 다친 건 지완이었으나 이현의 얼굴이 더 구겨져 있었다.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은데.”

지완의 목소리는 퍽 담담했고, 그에 이현의 속은 묘하게 들끓었다.

“…넌 무슨 생각으로 나를 잡은 거야? 진짜 정신 나갔어?”

“이현아, 네가 내 팔 잡았어. 기억 안 나?”

“안 잡았어. 스친 거지. 거기서 팔을 왜 뻗어? 너답지 않게 왜?”

“글쎄. 우물에 빠진 애도 구한다는데 굴러떨어지는 채이현을 못 잡을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다른 사람 다 그래도, 권지완 넌 아니야. 씨발 네가 나 때문에 다치는 꼴을 보고 내가 좆같은 기분에 처박히길 바란 거면 모를까.”

자신 때문에 지완이 크게 다친 것이라면? 자꾸만 나락으로 꽂히는 기분이었다. 상쾌하다고 생각했던 숲은 어느새 끔찍한 진흙밭이 되어 있었다. 갯벌에 다리가 움푹움푹 빠지듯, 지완이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여보며 어깨의 부상을 가늠하고 있는 그 일 초 일 초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이현 자신의 상처를 돌볼 틈 따위는 없었다.

“이현아 겁나? 왜 이렇게 흥분을 해?”

“넌 지금 장난이 나와?”

“너 이미 내 어깨 한 번 박살 냈었잖아. 고작 이런 걸로 그렇게 발발대니까 나는 좀 억울한데.”

지완은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일상적인 어조였으나 이현은 아니었다. 이현은 누가 저 위의 계단으로 저를 끌고 올라가 다시 한 번 밀어트린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그랬다. 순간순간 잊고 살았지만, 애초에 지완의 선수 생활을 끝낼 뻔했던 건 이현 자신이었다. 이현은 어떤 본성과 이성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채이현 표정 볼만하네.”

“….”

“왜? 그때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이제 좀 감이 와? 올림픽 선발전에 합격하자마자 선수촌 근처에도 못 가보고 선수 생활 종 칠 뻔했잖아.”

“….”

“이현아, 다 너 때문이었어.”

혓바닥 아래에 가득 고인 침을 이현이 꿀꺽 삼켜내었다.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양가적인 마음이 들었다. 당시에 이현은 곧장 선수촌에 입단하고 지완의 입원 소식만 건너 들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선수촌 안에서 다시 맞닥뜨렸을 때, 지완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와 같은 태연한 모습이었다. 덕분에 그 사건은 지완의 가슴팍에 새겨진 흉터처럼 옅어져 갔다. 적어도 이현에겐 그랬다. 이현은 그때에도, 단순하게 넘어갔다.

“그래서 씨발… 지금 다시 한 번 어깨 부러트리게? 그때 따지지 그랬어. 그렇게 억울했으면.”

“이현아 몇 번을 말해. 내가 매 순간 그딴 생각을 했었으면 넌 지금 여기 못 서 있어.”

“….”

“내가 널 얼마나 봐주고 있는지, 넌 늘 몰라.”

지완과 이현, 둘 다 만신창이 꼴을 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지완은 재수 없는 미소를 띠었다. 이현은 그대로 지완의 어깨를 내리누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감정적인 얘기는 차후의 문제였다. 그때가 어땠든 지금 권지완은 새로운 부상을 당했고, 이현의 책임이었으며, 사태를 진정시키고 병원으로 당장 가야 했다. 이현은 바싹 마르는 입술을 축이곤 제 가방에서 스프레이를 꺼내 들었다. 지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일단 이거 뿌리기나 해.”

“내가 준 게 아닌데?”

“그때 내가 말했지. 네가 준 걸 뭘 믿고 쓰냐고.”

“하하. 서운하네.”

지완이 왼손으로 스프레이를 받아들었다. 입으로 그 뚜껑을 물어 연 채, 가볍게 흔들어 자신의 어깨에 분사했다. 단순한 근육통이 아니기에 큰 효과는 없을 테지만 무엇이라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권지완, 너 내려갈 수 있겠어? 내가 밑에서 사람들 불러올게. 정 안 되겠으면 구급대원 불러서….”

“지금 다친 걸 알리자고?”

지완이 이현의 가슴팍으로 던지듯 스프레이를 돌려주었다. 뚜껑은 이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여전히 오른팔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지완이 주춤거리는 이현의 어깨를 밀쳤다. 이현을 위아래로 훑는 지완의 시선에는 이현을 향한 한심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아 씨발, 이현은 낮게 읊조렸다. 이현이 놓친 것이 있었다.

지완은 쓸리지 않은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오른손잡이인 지완이 왼손으로 전화를 거는 모습조차 엉성하고 어설펐다. 전화의 상대는 협회일 것이다. 아니면 선수촌이거나.

파이널에서 이현이 벌인 작은 실수. 고작 그것만으로도 온갖 추측이 난무하며 이현을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단순히 여론 몰이로 끝나지 않는다. 이현의 자세, 이현의 호흡, 이현의 장비 그 하나하나를 다 따져가며 전 세계 사격판에서 실패의 원인을 분석해댔다. 일 위의 약점을 내놓는 꼴이다. 알아내기만 한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경기에서의 방해는 쉬운 일이었다. 표적의 5mm짜리 원을 아무리 열심히 겨냥해봤자, 천재라 일컬어지는 일 위를 이길 방법은 없다. 그렇기에 그 작은 빈틈이 아주 매력적인 것이다. 그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흔들릴만한 경기’는 나가지 않아야 했고.

그런데 부상이라니. 부상은 보다 심각한 문제였다. 소식이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엔 또 한 번 이 바닥이 발칵 뒤집힐 것이 뻔했다. 상대방들로 하여금 파고들 보너스 과녁판을 몸에 떡하니 붙이고 경기하는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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