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51)

#25

이현은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어 버릴까 싶다가도, 이슈 거리를 찾아 반짝거리는 작가와 감독의 눈을 마주하고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이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에 고인 욕지거리를 정제해냈다. 머리가 제대로 된 필터의 기능을 수행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겨우 퉁명스러운 말을 토해냈다.

“…선수들은 본인의 페이스를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권지완은 오로지 본인에게만 집중하니까요. 그 점은 참 놀랍다고 생각해요.”

배우고 싶지는 않고, 그냥 대단하단 말입니다. 이현이 못마땅하게 말을 덧붙였다.

결국 지완은 본인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새끼라는 거다. 그 속뜻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스태프들은 눈치껏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현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유감이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지완이 심드렁하게 반박했다. 기가 찬다. 이현이 팩 지완을 쏘아보았다. 지완은 팔짱을 끼며 소리 없이 이현에게 벙긋거릴 뿐이었다. 뭘 봐, 이현아. 그 입 모양을 알아본 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익숙하다 싶었더니… 어젯밤의 술자리에서 지완에게 ‘뭘 꼬나봐.’ 하며 이죽거렸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쪼잔한 새끼, 그걸 기어코 또 써먹네.

“하하. 두 분은 참 달라 보여도, 알고 보면 은근히 닮은 구석이 많은 것 같아요. 팬분들도 그런 점에 즐거워하시는 것 같구요.”

작가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이현은 큰 눈을 더 치켜떴다. 작가가 한 말이 시비인지 아닌지, 모욕인지 아닌지, 의도적인지 아닌지 이현은 한참을 고민해야만 했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세민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긴 한데….

“일각에서는 두 분을 브로맨스로 자주 엮고는 하는데, 어떻게 보세요? 두 분만의 특별한 케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현이 허튼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작가가 조금 주제를 틀어 물어왔다.

씨발 지금 어쩌라는 거야? 이현이 신경질적으로, 정돈되지 않은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사납게 헤집어진 머리칼은 천천히 제자리를 찾으며 다시 이현의 이마를 덮었다. 지금 게이설에 휘말리고 있는 이현에겐 조금도 유쾌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작가는 뻔뻔히도 제 말을 이었다.

“특히 이현 씨는 남성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걸로 유명한데요. 최근에는 배우 하세민 씨의 적극적인 팬심 공세로 주목을 받았죠? 동성조차 사로잡는 인기의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작가는 옳다구나 싶어 미끼를 던진 것이다. 말 한 번 잘못했다간 MSG 가득 친 기사들이 쏟아질 게 뻔했다. 질문을 마친 작가는 큼큼, 괜스레 헛기침을 해대며 시선을 돌렸다. 이현은 서늘한 눈을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저번 지완의 스캔들 때도 이러더니 작가는 반성이라는 게 없어 보였다.

“하하. 씨발 별걸 다 물어보네.”

그러나 짜증을 내는 쪽은 지완이었다. 지완의 위로, 어제의 술자리가 오버랩되며 겹쳐 보였다. 어제도 분명 세민이 이현에게 건넸던, 알아듣지 못할 말들에 덜컥 어깃장을 놓은 건 지완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으나….

빈정거리는 지완의 옆모습을 흘기다 이현은 생각을 관두었다. 이 새끼도 그동안 엮이는 게 존나 짜증 났나 보네.

자신의 실수를 반복한 작가는, 또다시 사태를 어수룩하게 수습해가며 세 번째 인터뷰까지 말아먹어야 했다. 그러나 이현 역시 이번에는 그를 안쓰러워하지 않았다.

*

“아, 다음 촬영 장소를 미리 섭외해야 하는데…. 두 분 말씀은 좀 나누셨어요?”

이번 인터뷰 역시 별 소득 없이 어영부영 마무리가 되었다. 스태프들이 살얼음판 안에서 정리를 하는 사이 감독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물어왔다. 하여간 방송판 능구렁이 새끼들. 이현은 속으로 혀를 차며 냉담하게 되물었다.

“그냥 선수촌에서 하면 안 됩니까? 굳이 꼭 나가야 해요?”

다음 촬영은 ‘추억’ 따위의 컨셉을 내건 부담스럽고 거북한 일정이었다. 선수촌 밖 추억이라 할 게 뭐 있겠는가. 굳이 뽑자면 길거리에서 치고받고 싸움박질 벌였던 고등학교 옆 골목이나, 이현이 지완의 가슴팍에 연지탄을 쏘아 박은, 훈련실 옆쪽에 위치한 운동장 샛길쯤이 되시겠다.

“아무래도 선수촌 말고 새로운 앵글을 잡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두 분 다 초중고를 같이 나오셨으니까 모교 방문은 어때요?”

“싫습니다.”

이현이 단박에 반감을 표했다. 답 없이 입을 다문 지완도 마찬가지였다. 하하, 싫으시구나. 감독은 단호한 지완과 이현의 태도에 쩝, 입맛만 다셨다. 감독은, ‘그럼 다른 마땅한 장소를 내놓으라’는 식의 채근 어린 눈빛을 쏘아댔지만 이현과 지완은 둘 다 시간만 끌 뿐, 완벽히 무시하고 있었다.

“이현이 형!”

기다리다 못한 감독이 다시 따져 물으려 할 때쯤, 재민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등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찰나에 회의실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재민을 향했다. 한 공간에 이슈의 당사자들이 다 모이게 된 것이다. 하던 일까지 멈춘 스태프들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려 가며 한 번은 재민을, 한 번은 이현을, 또 한 번은 지완을 힐끔댔다. 재민은 멋쩍게 볼을 긁으며 몰린 시선에 가볍게 묵례했다.

“형, 지금 나가봐야 할 것 같은데…. 형 촬영 끝나는 거 맞춰서 기다리고 계세요. 주차장에.”

“응? 누가?”

외부인이 선수촌으로 이현을 찾으러 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부모님이었다면 미리 연락을 했을 텐데…. 가늠되지 않는 상대에 이현이 갸웃거리며 물었으나 재민은 말이 없었다. 대신 주변 눈치를 보더니 이현에게 나오라며 손짓했다. 감독의 떠듬거리는 입가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말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이현은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촬영이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누군데?”

“형, 놀라지 마세요.”

복도로 빠져나오며 이현이 재민에게 물었다. 재민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작당 모의라도 하는 것 같았다. 불안한데.

“시아 씨가 오셨어요!”

“뭐?”

이현이 자리에 멈춰 섰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의외의 인물이었다. 시아라니? 그분이 여길 왜 와? 이현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아침 이후로 좀 더 DM 나눴는데, 형 잠깐 만날 수 있냐고 그래서 제가 방문권 끊어드렸어요. 형 촬영 중이라 제가 말을 미리 못 했는데… 저 실수했어요?”

인상을 찌푸린 이현에, 재민은 혹여 본인이 실수를 한 것인지 초조해져 다다다다 말을 늘어놓았다. 밖도 아니고, 선수촌 안에서 잠깐이야 그리 곤란한 건 아니었다. 이해가 되지 않을 뿐. 서울에서 여기까지 왜…? 이현은 미간을 좁혔다.

“아냐 재민아. 그냥 좀 놀라서 그래. 날 왜 보자고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셔서 전 뭐 따로 연락이 된 줄 알았어요. …죄송해요.”

“미안할 건 없는데…. 오늘 하루 종일 나 때문에 고생한다. 훈련하다 온 거야?”

“네. 전 다시 스키트 존 가볼게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형. 꼭이요!”

사격부 건물을 빠져나오며 재민과 이현은 흩어졌다. 그래도 자신이 신체 건강한 남잔데, 무슨 일이 있기야 하겠냐마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재민에 이현이 작게 웃으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곳까지 왔다니 안 보고 그냥 보내는 건 결례인 듯싶어 찾아가는 것이었다. 이현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주차장으로 들어가자마자 입구 쪽에 커다랗고 까만 밴이 떡하니 이현을 반기고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했다. 선수촌 안에서 이런 밴을 몰고 다닐 만한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요즘에는 연예계 안에서도 이런 밴은 허세고, 미니밴이 대세라는데… 시아가 속한 AA그룹의 것으로 추정되는 큼지막한 밴은 그 그룹이 누리고 있는 인기를 공고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현이 창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이현을 알아봤는지 안쪽에서부터 덜컥 문이 열렸다. 시아가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이현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밝게 웃는 얼굴은 이전의 촬영 때 마주했던 것과 다름없었으나, 무대를 하고 바로 온 것인지 화장이 훨씬 진했다. 아이돌은 아이돌이구나. 이현은 내심 당황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셨죠! 일단 들어오세요!”

이현은 어딘가 묘하게 적극적으로 변한 시아의 공세에 하릴없이 밴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연예인들은 스타일리스트며, 매니저며 여러 명을 대동하고 다니던데, 밴 안에는 운전석에 앉아있는 로드매니저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을 일부러 먼저 보낸 것인지, 심지어 그 로드매니저마저 이현이 차에 오르자 운전석에서 내렸다.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현과 시아, 단둘만이 밴에 남았다. 매니저는 몇 걸음 차에서 떨어지더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현이 퍽 성가신 얼굴로 시아를 바라보았으나 시아는 방긋방긋 웃고 있을 뿐이었다. 뭐 하자는 거지 대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이현이 조금은 시큰둥하게, 조금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본론을 묻자 시아는 웃음을 거두고 요리조리 이현을 살펴댔다. 본인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이현의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한 건지 주절거리며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제가 청주에서 행사가 있어서요! 진천이랑 별로 안 멀어서… 올라가기 전에 선수님 한 번 뵙고, 그러면 좋을 것 같아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