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51)

#24

이현이 재민의 어깨를 힘없이 흔들었다. 지완의 돈으로 차지한 스위트룸의 푹신한 침대 위에서 재민은 흐음, 입술을 적실 뿐이었다. 이현은 짧은 숨을 내뱉고, 뒤돌아 창문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치니 통유리 창 밖으로, 흐린 하늘이 이현을 반겼다. 예상대로였다.

이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어둑한 햇빛이 얼굴을 비추자 재민은 한껏 인상을 찡그렸다. 이현이 다시 한번 재민을 재촉했다.

“재민아, 빨리 일어나. 지금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한시라도 빨리 호모 커플 아니라고 해명해야 하니까.

벌써 호텔 밖에는 몇몇 기자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03. SIGHTING TIME START : 시사 시작

Editor K SCANDAL #3

▶ B군의 동성애 루머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다’는 팬들의 삐뚤어진 욕심 덕분일까? B군은 엉뚱한 방향으로 답을 내놓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꽤나 많은 이들에게 희소식인 듯하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바로 B군의 스캔들 상대! 열렬한 기대를 받고 있던 A군이 아닌 동료 선수 D군이 새롭게 등장했다. 그동안 B군에게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던 동종목 D군의 미모에, 대중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강경 AB파도 D군에게 흔들리고 있다는 웃기고 슬픈 반응들이 넘쳐나는데…. 누가 됐든, 그림만 잘 나오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훌륭한 미인들을 꾸준히 배출하는 해당 종목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A군이 경각심을 가지고 보다 부단-히 노력해주길 바라본다.

*

호텔 방에서 겨우 눈을 뜬 재민은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이현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이현이 기사를 직접 재민에게 보여주며, 물을 두 잔, 커피를 한 잔 건네고 나서야 재민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물론 예상대로 재민은 분개하는 대신, 숨이 넘어갈 만큼 크게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벌게진 눈가에는 촉촉하게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형이랑 제가요? 다들 미쳤대요? 내 말이. 아니 형은 몰라도 저는 왜요? 난 공개 연애까지 했었는데요? 너 말이 좀 이상하다? 농담이죠, 농담.

재민은 이현에게 여유롭게 장난까지 쳐댔다. 주섬주섬 떨어져 있던 상의를 주워 입고, 휙휙 주변을 둘러보며 새벽에 던져두었던 소지품들을 찾아 들었다. 이현은 그런 재민의 엉망인 머리를 대강 정리해주었다.

놀랍게도 나갈 시간이 임박해지니 도리어 점점 차분해졌다. 처음엔 호텔 앞에 깔려 있을 기자들 사이를 어떻게 헤집고 나가야 하나, 답이 없는 걱정에 허덕였지만 속 편한 재민을 보고 있자니 그런 걱정은 우습게 느껴졌다. 어떡하겠는가. 아니라고 말하는 거 외에 애초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선수 생활이 길어질수록 해탈에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스스로가 애달팠다.

형 덕분에 저도 스타 한번 되어 보네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잇따라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재민에, 이현은 긴장 풀린 헛웃음을 흘렸다.

아침이라 부어서 사진 찍히면 못생기게 나올 텐데. 마스크라도 쓸까요? 재민이 그치지 않고 한마디를 더하자, 이현은 흘렸던 웃음을 빠르게 주워 담았다. 하여간 장단을 맞춰주면 끝도 없다. 헛소리 그만하고 준비나 해, 늦었으니까. 이현의 일축에 재민은 곰살맞게 웃으며 모자를 눌러썼다.

그러나 재민의 철없는 기대와는 달리 그들이 기자진 앞에서 낯을 구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미 협회에서 직원 전용 출입구를 마련해 둔 것이다.

진천 바닥에 있는 호텔 중 그나마 가장 좋은 곳이라고는 해도 성급을 운운할 정도는 아니었다. VIP 엔트런스는 기대하지도 않았건만…. 어찌 됐든 다른 방향으로 일이 풀리자 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둘은 직원 출입구 앞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곧장 올랐다. 다행히 기자들은 눈치를 채지 못한 듯했다. 이미 협회 측에서는 루머에 강경 대응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한 상황이었다. 선수의 개인적인 루머에 뭐 이렇게까지 반응하냐는 여론도 있었지만, 이현의 이미지는 협회의 자산이었다. 그저 일개 운동선수로 규정지을 수 없었다. 물론 이현이 바라서 자리한 위치는 아니었지만. 또 안타깝게도…. 이현에게 게이설은 시도 때도 없이 툭하면 점화되는 가연성 골칫거리였다. 이렇게 생각하니 다시금 짜증이 치밀었다.

“형, 근데 이것 좀 봐요.”

재민은 차에 올라타 밀린 연락을 확인하더니, 곧 실실 웃음을 쪼개며 이현에게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뭔데? 이현의 물음에도 재민은 어깨만 들썩거릴 뿐이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든 듯했다. 이현은 떨떠름하게 재민의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빠르게 그 내용을 훑으며 얄궂은 웃음의 이유를 확인하는 순간, 제 이마를 턱, 하니 짚을 수밖에 없었다.

[이재민 선수님, 안녕하세요! AA의 시안데요…! 초면에 갑자기 DM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근데ㅠㅠ….]

[이렇게 물어보는 게 실례인 줄 알지만, 아닌 거 아는데요. 근데요ㅠㅠ… 채이현 선수님이랑 사귀는 거 아니죠? 루머죠?]

[채이현 선수님 게이 아니죠??? 그쵸????]

[이재민 선수님은 여자친구도 있지 않으셨어요??]

하? 이현이 재민의 가슴팍에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아득 물었다. 나름 세게 부딪힌 거 같은데, 재민은 아프지도 않은지 여전히 끅끅거리고 있었다.

“형, 이분 진짜 형한테 진심인가 봐. 고등학생이랬나?”

“너 말이 짧다?”

“하하. 좀 봐줘요. 아무튼 형 덕분에 아이돌이랑 연락도 해보….”

참다못한 이현이 재민의 입을 틀어막았다. 재민의 얄미운 입가는 이현의 손바닥에 몽땅 가려졌지만, 그 곱게 접어진 눈꼬리에서는 여전히 웃음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음표 따위가 달린 소성의 이미지가 이현의 눈에 보이는 듯했다.

이현이 엄지와 검지로 재민의 입술을 늘어 당겼다. 아, 형 으프여. 질질 샌 발음으로 재민이 애원한 후에야 이현은 그 입술을 놔주었다. 재민이 삐죽대며 토라진 척을 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금세 헤헤거리며, 기다리실 테니 답장해드려야겠네요, 따위의 속없는 소리를 해댈 따름이었다.

다행히 이후 차 안은 조용했다. 장난기 밴 재민의 숨소리가, 이현을 놀리듯 간헐적으로 새어 나오긴 했으나… 이현은 그저 풀리지 않은 피로를 체감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

이현이 헐레벌떡 사격부 회의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침의 소동으로 지각을 해버린 이현에게 수십 개의 눈동자가 동시다발적으로 꽂혀 들었다. 이현이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현의 사죄에 대한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묘한 눈초리로 이현을 훑어대며 요리조리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다리를 꼬고 편안히 앉아있는 지완만이, 퍽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이현을 반기고 있었다. 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닙니다.”

이현은 자신을 둘러싼 시선들에 대고 해명을 해야 했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이 토막 난 한마디였으나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두 알 수 있었다. 분하고 원통하기보단 어이가 없고 황당했다. 이걸 또? 내가 지금 이따위 루머에 또 해명을 하고 있다고? 이현은 진실로 부당한 현실에 한탄했다. 그제서야 스태프들은 뒤늦게 아아, 거리며 웅성대더니 이현에게 겸연쩍게 인사를 건넸다.

하하. 그럼요, 채 선수. 다 알죠. 그거 믿는 사람 없어요. 걱정 마세요.

그들의 입에선 걱정 어린 위로들이 연신 쏟아져 나왔지만, 슬쩍슬쩍 이현을 흘기는 수군거림에는 불친절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현은 입가에 힘을 주며 차오르는 욕지거리를 눌러 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완은 보란 듯이 즐겁게 웃어대고 있었다.

“넌 웃음이 나오냐? 지금 이게 누구 때문인데…!”

그러나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이현의 입에서는 얕은 기침이 터져 나왔다. 새벽 서리의 여파로 몸이 으슬으슬하다 했더니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이현이 지완을 매섭게 흘기며 소매로 제 입을 가렸다. 지완은 어깨를 으쓱거리고 말 뿐이었다.

“이현아 나 뚫어지겠어. 혹시 이거 플러팅이야?”

지완이 짐짓 진지하게 난처한 척, 진지하게 불쾌한 척을 하며 약을 올렸다. 여기서 반응하면 진다. 이현은 지완을 애써 무시했다.

인터뷰 곧 들어갈게요! 작가의 말에 이현이 할 수 없이 지완의 옆에 착석했다. 자신이 지각하는 바람에 연기된 촬영에, 괜히 성질만 부리며 머뭇거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럴 땐 훈련실에서 시원하게 총질이나 해야 하는데. 이현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표적이 아닌 카메라를 앞에 두고 있는 스스로에게 자조했다.

촬영을 시작한 이후로 권지완은 물론 시아, 하세민, 게이설, 재민이까지. 점점 모든 것이 이상하게 꼬여가며 이현의 일상은 시트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엔 그냥저냥 잘 풀린다 싶었는데, 착각이었다. 대중들에게는 오락용 리얼리티 쇼였고, 이현에겐 신파극이었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완은 이 상황을 그저 재밌게 관전하고 있었다. 이현이 괴로워하는 꼴이 마음에 들었으리라.

“평생을 알아 온 만큼 두 분은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 라이벌이라고 할지라도, 같은 스포츠맨으로서 배우고 싶고, 또 닮고 싶은 면은 어떤 게 있을까요?”

인터뷰의 질문까지 참 기가 막혔다. 스태프들이야 오늘 새벽의 눈물겨운 사연 따위를 알 리가 만무했지만… 기분이 좆같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와중에 권지완 이 새끼한테서 배울 점을 찾아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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