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51)

#20

몇몇은 세민과 지완, 이현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개인 SNS에 올려댔다. 순식간에 사진들은 일파만파 퍼져가며 수많은 해시태그를 재생산했고, 정치 이슈로 가득했던 검색어마저 갈아치웠다. 취기가 슬슬 오르는 이현은 물론, 무슨 꿍꿍인지 비릿한 웃음을 띤 채 이현과 연신 잔을 맞대고 있는 세민도, 울려대는 핸드폰과 검색어 따위엔 신경 쓰지 않았다. 지완만이 끊임없이 연락이 오는 제 핸드폰을 쳐다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을 뿐이었다.

지완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가 올린 것인지 그 좆같은 새끼를 찾는 듯했으나, 무용했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취해 인사불성이었다. 그간의 스트레스를 술로 토해내는 것인지, 술병은 끊임없이 늘어갔고, 잠깐 한눈을 팔았다가 다시 보면 그 배로 쌓여 있었다.

술집 안에는 촬영팀밖에 없었건만 시끄러운 고성방가와 알아듣지 못할 노랫소리, 누군가의 한탄 소리, 누군가의 욕지거리가 가득했다. 지완은 천천히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세민과 다르게 세팅을 하지 않아 손가락 사이로 자연스럽게 흩어지는 머리카락들이 이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마 하나는 잘생겼네, 속으로 웅얼거렸다.

그랬다. 속으로 웅얼거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술 냄새가 척척히 밴 착각이었고, 그 웅얼거림은 세민과 지완의 귀에 뿌옇게 꽂혔다. 지완은 왼쪽 볼에 작은 도랑을 만들었다. 옅게 파인 보조개가 이현의 것과 비슷했다. 지완이 이현의 이마를 검지로 지그시 눌러 밀었다. 정신 차려, 채이현.

이현의 고개가 뒤로 밀려나며 벽에 살짝 부딪혔다. 아프진 않았지만, 차가운 지완의 손가락이 열이 오른 이마에 닿자, 서리는 그 시원함에 이현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더 마시면 취하겠는데. 그러나 머리와 입이 따로 놀았다.

“이현 씨, 술 진짜 잘 드시나 봐요. 지금 혼자 몇 병째인지 아세요?”

그걸 알고 마시겠습니까? 하마터면 이현은 또다시 속으로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지껄일 뻔했다. 취기가 올라 이현의 기분도 점점 붕 뜨기 시작한 것이다. 술이 목구멍을 적시는 수준을 넘어 뜨끈하고 알싸한 열로 녹이고 있었다. 이현은 제가 얼마나 빨리 마시고 있는지 세기 위해, 속으로 수를 셌다. 한 번 마시고, 하나, 둘, 셋… 다시 잔을 채우는 건 고작 몇 초의 시간으로 충분했다. 그럼 씩, 웃고는 다시 입에 털어 넣었다. 미련하다 못해 병신 같은 짓이었다.

더구나 이현은 술을 들이켜며 연신 담배를 피우러 왔다 갔다 했다. 어느새 마지막 돗대, 그 끝의 끝까지 빨아들이고 나서도 이현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빈 갑을 겨우 버렸다. 씨발, 이현은 머릿속으로 욕을 하며 혀로는 입술을 축였다. 머리는 작작 피우라고 경고를 해대는데, 막상 입은 담배만 계속 당기는 것이다. 억지로 잠가놓았던 수도가 혹독한 겨울 끝에 동파된 것처럼.

지나친 담배와 지나친 술, 그 최악의 조합에 아무리 술에 강한 이현이라고 할지라도 이성은 당연한 수순으로 점점 멀어지려 했다.

그러나 이현은 어리석지 않다. 그 와중에 제동 장치가 걸려들었다. 그렇게 담배와 술에 허덕이더니, 울려대는 한계치의 경고음에 모든 것을 중단시켰다.

소주잔을 내려놓고 물잔을 들었다. 열을 좀 식히기 위해 벌컥 들이켰더니, 정말 지독한, 다 식은 소주 맛이 혀와 코를 장악했다. 씨발 누가 여기다가 술 버렸어? 이현은 자신의 옆에 앉은 유력한 용의자, 세민을 노려보았다. 세민은 어깨를 으쓱거리고 말 뿐이었다. 얌체 같은 새끼가 술도 버리고 있었네. 이미 전사한 멍청한 감독이 불쌍할 따름이었다. 이현은 한심한 작태에 혀를 차며 물을 뜨기 위해 팔을 뻗었다.

미친…. 이현은 아차, 싶었다. 순간 물통을 집어 든 손목에 힘이 풀려 그만 놓치고야 만 것이다. 테이블 위로 물통이 쓰러지며 주변을 흥건하게 적셨다. 순식간에 테이블 아래까지 뚝뚝, 아니 줄줄 흘러내린 물에 다리가 젖은 지완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드러날 정도였다. 나 때리려나? 이현이 침을 꼴깍 삼켰다. 술에 취해서 지완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 사람들이 왜 지완을 무서워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좆같게 굴라니까… 말은 잘 듣네.”

지완이 신경질적으로 휴지를 꺼내 들어 제 바지를 닦았다. 잔뜩 찡그린 얼굴에는 짜증과 역정이 가득했으나 그 험한 입에서는 이외의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참, 이현 씨, 번호 알려주세요. 연락하고 지내요.”

대뜸 세민이 물어왔다. 이현을 계속 살펴대던 세민의 눈빛이 교묘하게 형형했다. 기회만 보다가 빠르게 먹이를 낚아채는 것처럼, 이때다! 싶은 기색이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지완은 바지를 닦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뻔히 들리는 그 비아냥거리는 소성에도, 세민은 지완을 향해 조금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싫은데요.”

그러나 세민의 기대와는 달리, 술에 취한 와중에도 이현은 단호했다. 사리 분별을 못 할 정도로 취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정신을 다잡고자 노력하는 중이었고….

다들 한 번쯤 술자리에서 얄팍한 술기운이 올라 숟가락을 떨어트리고, 물을 흘리고, 중심을 잘 잡지 못하는 그런 경험은 있지 않은가. 이현은 자신이 딱 그 정도라고 생각했다. 기분이 적당히 좋아진 그 정도. 그런 본인을 마치 만취한 사람 다루듯 노려 먹는 세민의 모습이 꼴같잖았다. 지완이 조소를 흘리며 세민을 고깝게 바라봤으나, 세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왜요, 이현 씨? 제가 부담스러워요?”

“네.”

“왜지…. 저 뭐 실수했어요?”

미간에 주름이 진 세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불쾌한 정적이 흘렀고, 세민은 다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술을 마신 이현이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인지, 얼굴을 갈무리하는 텀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 간극이 대놓고 눈앞에 보였다. 마치 1인 단막극 같기도 하고… 우스웠다. 어쨌거나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살랑거리는 꼴이 비위는 좋아 보였다. 세민을 바라보는 이현의 얼굴 위로는 어떤 감흥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 오늘은 그냥 데려다드릴게요. 많이 취한 거 같은데. 그 정도는 괜찮죠?”

너도 존나 불쌍해. 지완이 세민을 비꼬았다. 세민은 그 깐족거림에도 꿋꿋해 보였으나, ‘그만 좀 하세요, 저 존나 멀쩡한데요.’ 이현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무너졌다. 씨발, 얼핏 들린 욕은 세민의 입에서 나온 것 같기도 했고, 술기운에 잘못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지완은 그런 이현을 보고 쿡쿡거리다가 느닷없이 이현의 턱을 부여잡았다. 테이블을 훅 가르고 들이닥치는 지완의 손에 이현은 하릴없이 제 볼과 턱을 내주어야만 했다.

채이현 기특하네….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은 지완에게서 꽤나 나긋한 음성이 드리워졌다. 지완의 손은 가볍게 이현의 볼을 살짝 간질였다가 붙잡을 겨를도 없이 떠났다.

이현은 종종 지완의 손가락을 눈에 담아 왔다. 얼굴값이라도 하는지, 지완은 그 예쁘장한 얼굴 따라 손끝도 새침했다. 지완은 종종 이현의 뺨이나 어깨, 혹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곤 했는데, 깔낏한 그 손짓은 지완과 퍽 잘 어울렸다. 때때로, 냅다 들어 메고 바닥으로 내리꽂는 유도보다 그 몇 번의 까딱거리는 손가락이 지완과 더 조화로울 정도였다.

술기운에 기분이 들뜬 이현은 마치 개를 쓰다듬듯 자신을 훑고 지나간 지완의 손길을 불쾌하게 여기지도 못했다. 그저 그렇게 손끝에 대한 생각을 연쇄적으로 이어나갈 뿐이었다.

아리송한 이현은 술병을 다시 집어 들었다. 아차, 이건 실수였다. 물병을 든다는 것이 그만, 다시 술병을 든 것이다. 그러나 이현이 실수를 정정하고 술병을 내려놓기도 전에, 지완이 가로챘다.

“이현아, 재밌기는 한데 작작 처마셔. 여기 너 챙겨줄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실수를 한 것뿐인데, 먼저 지랄을 하는 지완이 괘씸하다. 이현은 괜히 오기를 부렸다. 물론 진실로 마실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놔.”

“후회하지 마.”

권지완 이 새끼는 뭐가 그렇게 변덕스러울까. 좀 전까지 호선을 그리고 있던 권지완의 입꼬리가, 이번에는 삐딱한 일직선을 그었다.

지완은 이현의 잔을 채웠다. 회식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지완이 직접 따르는 잔이었다. 잔은 점점 차오르더니, 얼마 안 가 금세 술이 흘러넘쳤다. 그래도 지완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흘러넘치는 술은 테이블 위에 고일 정도로 흥건했다가, 결국 바닥으로 흐르며 이번엔 이현의 바지를 적셨다. 아까 별다른 말이 없더니, 흘린 물에 대한 복수인 것일까.

지완이 고의로 들이부은 술은 세민에게도 튄 듯했다. ‘하 씨발 진짜.’ 이번에는 세민의 목소리가 확실하게 들렸다. 그 주인이 분명하지 않았던 이전 욕지거리의 읊조림도 세민이 맞는 듯했다.

이 새끼 못쓰겠네. 욕이 입에 밴 새끼네. 이현은 주제 파악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정도껏 하고 말았다면 술도 먹었겠다, 그냥 넘어갔을 텐데, 소주는 끝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온통 젖은 바지는 차갑고 축축했다. 이현이 술병을 부여잡으나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상황이었다. 지완이 들고 있던 술병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술이 없어야 네가 안 처마시겠지.”

안 그래? 지완은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까딱였다. 병신 새끼, 여기에 널린 게 술인데 그거 하나 비운다고 술이 없겠냐? 어차피 마실 생각이 없던 이현은 지완을 흘기며 속으로만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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