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차라리 대놓고 싸가지가 없는 게 낫지.
그 따위의 생각을 하며 골목으로 진입하려 할 때쯤, 그 상징과도 같은 지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널찍한 등짝에 선수촌 유니폼 외투가 대충 걸쳐져 있었다. 한 손을 트레이닝 팬츠의 주머니에 꽂은 채, 벽에 기대고 서 있는 지완은, 좁은 골목길을 거의 다 가로막고 있었다. 어느새 저녁이면 날이 서늘해 외투를 꺼내 입을 계절이 슬며시 다가오고 있었다. 이현은 자신을 감싸는 쌀쌀함에 제 팔을 두어 번 쓰다듬었다.
“…하면 할 말은 없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지완은 통화 중이었다. 계속 전화 중이라 자리에 없던 건가, 이현은 지완의 뒷모습을 보며 갸웃거렸다. 지완의 말버릇을 모르지 않았다. 전화를 하는 지완은 무심해 보여도 어딘가… 무난했다. 무난함,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유별난 점이었다.
“촬영 끝나면? …상황 봐서. 하하, 그게 걱정할 일이야?”
말도 안 돼. 권지완이 저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대체 누구와?
누군가에겐 그저 예사로운 일이겠으나, 지완의 이런 모습은 낯설다 못해 살갗이 오그라드는 것이었다. 지완은 본인의 부모와도 저런 말투로 대화하지 않았다.
그 이질적인 모습에 이현이 밀려드는 의문을 애써 삭이며 일부러 발소리를 내었다. 이대로 훔쳐 듣고 있는 것도 쓸데없는 짓이었고, 지완의 저 모습을 계속 보고 있을 자신도 없었다. 그저 골목을 빠져나가 다른 흡연 장소를 찾았으면 될 일인데, 이현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뭐야 씨발… 아.”
지완이 매서운 눈으로 뒤를 돌아 다가선 발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가로등 빛을 등지고 선 이현의 얼굴을 찡그린 눈으로 확인하더니, 헛웃음을 쳤다. 이내 전화를 끊고 한 발자국씩 이현에게 다가왔다. 하하. 지완의 웃음소리가 흩어지며 이현에게 닿았다.
“언제부터 훔쳐 들었어?”
“뭘 훔쳐 들어. 담배 피우러 왔더니 네가 여기서 그 지랄 떨고 있던 거지.”
“지랄? 내가 뭘 했는데?”
“너 연애 하냐?”
불쑥 떠오른 질문이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뭐긴 뭐야. 네가 존나 낯간지럽게 전화하고 있던 거지. 대체 누구길래 네가 그렇게 굴어?’ 사실 이 길고 긴말로 대강 떠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속으로 생각해야 할 말과 밖으로 꺼내야 할 말이 뒤바뀌었다. 그래도 술은 술이라고,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야 만다.
아뿔싸. 이현은 제 입에서 나온 질문에 스스로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완은 흠, 하더니 혀를 내밀어 본인의 입술을 핥아내었다. 가로등의 불그스름한 빛과 골목의 입구로 들어오는 술집 거리의 어지러운 조명들이 형형히 지완의 얼굴을 비췄다. 그 얼굴에는 이름 모를 감흥이 서려 있었다.
“연애 같은 거 안 하는데.”
예상과 달리 지완은 별다른 대거리를 하지 않고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이현도 그제서야 제가 골목으로 향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지완을 따라 연초를 물었다. 허구한 날 지완에게 감겨드는 작태가 어설퍼 공연히 쪽이 팔렸다.
“연애 같은 거? 그러는 네가 나한테 연애로 뭐라 할 자격이 있나 싶다.”
“나는 연애를 안 해도 섹스를 하는데, 넌 못 하지.”
“야, 네가 뭘 안다고….”
“섹스는 연애하는 사이에, 그게 넌 뇌에 박혀 있잖아. 아니야?”
지완은 나른하게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갓 불을 붙인 담배 냄새가 흩어지며 이현의 코끝을 간질였다. 이현의 입 안에서 맴돌던 소주의 씁쓸함은 지완의 독한 담배 향에 흐려졌다. 이젠 냄새만 맡아도 지완의 것이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쓸데없이 아이코닉하다.
이현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지완을 올려보았으나, 지완은 그런 이현에게 씩 웃어 보일 뿐이었다. 선명하고도 상이한 차이였다. 이현이 신경질적으로 물고 있던 연초에 불을 붙였다. 이상하게도 진 것 같은 기분이다. 늘 이런 식이다.
“하세민은 어디에 두고 혼자 나왔어?”
“하세민 씨 온 거 봤어?”
“하하. 이제 선배 아닌가 봐. 채이현 멍청한 줄만 알았더니 꽤 똑똑하네.”
아까 들어갈 때 봤지. 병신이 힘 존나 주고 왔던데. 지완은 그렇게 덧붙이며 비웃었다. 지완이 자꾸만 세민을 향해 이따위 반감 어린 말들을 늘어놓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현도 세민이 어딘가 미심쩍다는 것 정도는 느끼고 있었으나….
“둘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고등학교 때까지는 연락하고 지냈다며.”
“누가 그래?”
“하세민이 그러던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씨발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
“근데 이현아. 넌 그게 왜 궁금해?”
지완이 이죽거렸다. 이현이 연기를 흩뿌리는 지완의 입술을 가만히 노려보다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둘이 그렇게 지랄을 하는데 그럼 안 궁금해?”
“그니까 남들이 지랄을 하든 말든 네가 왜 궁금하냐고. 지금 내가 물었잖아.”
이현의 한마디에 지완이 사납게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또, 또. 같은 패턴이다. 지완은 습관처럼 말꼬리를 물었다. 제 꼬리를 물기 위해 제자리를 빙빙 도는 개새끼처럼 왈왈댄다. 광견병이라도 걸린 병신같이. 이현이 입을 벌리기도 전에 지완이 다시 얄궂게 빈정거렸다.
“남한테 관심 없는 새끼잖아, 너. 이제 운동도 슬슬 지겨워져? 요새 왜 이래?”
“….”
“그냥 평소처럼 살아. 덜 큰 애새끼처럼 이곳저곳 기웃거리지 말고. 평소처럼. 응?”
지완의 손이 이현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그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는 여전히 가만가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어깨에서부터 퍼지는 것은 흐린 담배 연기였고, 배어 있는 것은 멸시였다.
“좆까 미친놈아. 어디서 훈장질이야.”
“….”
“그럼 씨발 둘이 알아서 일을 해결하든가. 하세민 이 새끼도 네 얘기…. 신경 쓰는 게 싫으면 좆같은 티를 내지 마. 보는 사람 불편하고 짜증 나니까.”
이현이 제 어깨 위에 얹힌 지완의 손을 탁, 하고 쳐내며 몽그라진 담배를 튕겼다. 바닥으로 처박힌 연초는 이현이 발로 비벼 불씨를 끄기도 전에, 깜빡깜빡 붉은 빛이 소등되더니 이내 파스슥 열기를 모두 빼앗겼다. 지완은 이현의 손에서 버려진 그 꽁초를 빤히 바라보다, 그 위로 들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렸다. 두 개의 짧디짧은 담배 도막이 겹쳐졌다.
“들어갈까? 술 마셔야지.”
“하…?”
“기자들한테 또 내 욕하면서 지랄 한번 해봐. 너 술 취하면 그러잖아. 재밌었는데.”
정적은 잠시였다. 지완은 그새 애매한 표정을 가다듬고 평범한 미친놈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쳐진 제 손이 민망하지도 않은지, 이번엔 자연스럽게 이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매번 이런 식으로 지완은 알 수 없는 곳에서 예민해지고, 날이 섰다가, 다시 이현이 지지 않고 쏘아붙이면 평소의 재수 없는 권지완으로 돌아왔다.
“권지완. 넌 내가 너한테 지랄 떠는 게 좋아? 너랑 나 좀 평범하게 지내면 안 되냐?”
이현의 입에서 불쑥 술기운이 어린 말이 튀어나왔다. 근래 촬영으로 지완과 다시금 마주하면서 새삼 자각한 싫증이었다. 말대로, 지완과 이현은 더 이상 코흘리개 어린 애들이 아니었다. 다 큰 성인 남자 둘이서 언제까지고 치고받고 으르렁거릴 수는 없지 않은가? 같은 바닥에서 아예 마주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없는 마당에, 그냥 좀 좋게, 좋게까지는 아니더라도 형식적인 보통의 허울을 차리고 살면 얼마나 좋은가. 이현은 그 가능성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그 또한 속단이고 오판이었다.
“응. 난 네가 그럴 때 제일 재밌거든.”
이현의 바람과 달리 지완은 예쁘게 웃어 보이며, 단박에 평화 협정 제안을 발로 차버렸다. 큼지막한 손으로 가게 문을 열더니, 이현을 밀어 넣었다.
“그러니까 같잖은 짓 하지 마.”
늘 그랬듯이 좆같게 굴어, 나한테.
가소로운 소리였다.
*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이현의 옆자리엔 여전히 세민이 앉아있었고, 감독은 어느새 한 쪽에 드러누워 있었다. 세민만 멀쩡해 보였다. 세민과 눈이 마주친 지완의 얼굴이 잠시 굳는 것도 같았지만, 지완도 더 이상 날 선 대립각을 세우지 않고 가만히 착석했다. 물론 그 뒤로도 표정은 좋지 못했다. 골목에서 홀로 전화를 하던 지완의 편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현은 세민을 향해 벽을 세우며, 묵묵히 제 잔을 채웠다.
지완이 자리로 돌아오자, 기회만 보고 있던 스태프들이 다시 슬그머니 몰려들었다. 그러나 가까워지기만 할 뿐, 지완에게 소주잔 한 번 내밀지 못하고 괜히 만만한 이현에게로 향했다.
맘만 먹었다면 이현 역시 그런 어쭙잖은 술잔들 정도는 내칠 수 있었겠으나…. 술은 원래 처음 그 한 잔이 문제인 것이다. 담배와 같다. 적당히 먹겠다, 조금만 피우겠다. 모두 우스운 얘기였다. 한번 비비 꼬인 기분은 사그라지던 담배꽁초같이 숨을 죽였다. 모르겠다. 설마 마시고 죽기야 할까. 그 어리석은 생각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현은 조금씩 스스로를 놨다. 주는 술은 절대 사양 않고, 잔이 비면 본인이 채웠다. 무자비한 속도로 페이스를 올렸다. 세민은 말리기는커녕, 감탄을 하며 놀라워했고, 지완은 혀를 찼다. 병신, 저러다 또 뒤지지. 이현이 지완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당당히 펴 보였다. 지완은 얼굴을 찡그렸으나, 지완을 제외한 모두는 깔깔 웃어넘겼다. 다들 술기운이 최고점을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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