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51)

#16

세민의 말에 이현이 떨떠름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선배라고 부르는 게 편할 것 같았다. 어차피 오늘 하루 보고 말 사인데, 괜히 촬영을 하면서 배우님, 배우님, 거리는 것도 웃겼고 세민 씨, 하자니 그래도 학연으로 얽힌 사이에 결례 같았다.

촬영 곧 들어갈게요! 작가의 말에 세민과 이현은 자리를 옮겼다. 수영은 못 하세요? 세민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수영은 할 수 있으세요? 혹은 수영 잘하세요? 도 아니고 마치 못 하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수영 못 하세요?’라고 물어오는 게 어딘가 묘했다.

이상하게 이현은 처음부터 세민의 모든 면이 미심쩍었다. 그러나 의심하는 것도 하잘것없는 짓이다. 팬이라고 했으니 어디선가 알게 됐겠지. 이현은 그저 ‘네.’ 하며 또다시 자동 응답기가 되었다.

복도를 지나 훈련실에 도착하니, 느지막하게 지완도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촬영이 임박해서야 겨우 시간을 맞춘 지완은 세민을 보자마자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 화가 ‘재앙 화禍’자라는 게 문제였고.

세민과 지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둘 사이에는 불친절한 팽만감이 차올랐다. 세민이 학교 선배라면 지완도 그를 알 만했다. 지완은 그를 기억하는 것일까?

“여길 진짜 왔네. 지랄도 참 가지가지….”

지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인사조차도 오가지 않은 채 내뱉은 첫 마디였다. 지완은 날이 서 있었고, 누구에게나 보이는 일상적인 까칠함을 넘어 다소 공격적이기까지 했다. 세민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일그러졌다. 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이현뿐만 아니라 대기하던 모든 스태프들도 알아챌 정도였다.

“넌 여전하구나.”

세민이 서늘한 말투로 대꾸하며 지완을 무시하려 했다. ‘여전하다’, 과연 어느 시점의 지완과 비교하는 것일까. 세민은 여러 사람 앞에서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싶었는지, 지완에게 등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이현을 마주 보고 서려는 세민의 움직임을 지완이 막아섰다. 틈을 내주지 않았다.

지완의 눈썹이 보기 좋게 치켜 올라갔다. 이현아, 너 얘 기억해? 지완은 손가락으로 바로 앞에 있는 세민을 가리켰다. 삿대질, 명백히 반감을 품은 삿대질이었다. 불똥은 가만히 서 있던 이현에게 튀었다. 아니, 이현은 머뭇거림 없이 단호히 부정했다. 세민의 기분을 살피며 거짓을 말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지완은 자연스럽게 나이가 많은 세민을 그냥 ‘얘’라고 칭했다. 물론 한 살 차이긴 했지만 지완의 그 몰상식은 상대를 차별하지 않았다.

“내가 말했었잖아. 채이현 성격이 더러워서 주변에 관심 같은 거 없다고.”

이현의 대답을 듣고는 지완이 비죽거리며 세민을 조롱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당연한 결과라는 듯이. 도리어 이번엔 이현이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갑자기 내 성격이 왜 나와? 기억 못 하는 걸로 성격이 더럽다는 말까지 들어야 하는 건가?

세민은 치미는 불쾌함에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그뿐이었다. 지완이 재단하듯 세민의 얼굴을 훑었다. 그 답답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이현이 입을 열었다.

“권지완, 너 하세민 배우…, 아니 선배님이랑 아는 사이야?”

“씨발, 선배? 이거 코미디네. 누굴 우스워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지완이 회의적인 웃음을 흘렸다. 나지막하게 깔리는 그 웃음소리는 퍽 거북스러웠다. 지완은 지금 이 상황이 못마땅한 것이다.

정말 넌 안 변한다, 이현아. 놀라울 정도로 병신 같아. 지완이 세민의 앞을 비켜섰다. 지완의 반감은 어느새 세민을 넘어 이현을 향하고 있었다. 이현은 엉뚱한 곳에서 짜증이 난 지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누가 권지완을 이해할 수 있겠냐마는.

“너야말로 왜 갑자기 짜증이야. 한동안 좀 조용하더니 또 지랄이네.”

지완이 어깨를 들먹였고, 세민은 여전히 지완을 겨눠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낀 이현은 어정쩡하게 둘의 사이를 가늠하고 있을 뿐이었다.

눈치를 보던 감독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꺼림칙한 셋의 촬영이 지체 없이 시작되었다.

*

모두의 우려와 달리 다행히도 촬영은 나름 무탈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세민이야 뭐 말할 것도 없이 촬영이 시작되자 프로다운 모습을 보였고, 지완도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물론 평소의 모습이라는 게, ‘평소만큼만 지랄 맞은’ 모습이었다.

수영부 대표 선수들이 몇몇 나와 올림픽에 대한 포부를 밝히고, 훈련 시설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이었다. 이현과 지완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MC 노릇을 할 만한 성정들도 아니었고, 그냥 멀찍이 서 있을 뿐이었다. 재민의 전 여자친구 이지수가 어색하게 이현에게 눈인사를 건넸고, 이현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도중에 지완과 이현의 인서트를 따는 것도 같았으나, 어디에 사용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완은 카메라가 눈앞에 들이밀어져도, 끔찍이도 지루한 그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중간중간 세민의 살가운 모습들을 혼자 비웃을 뿐이었다.

수영 컷을 따기 전,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주니어 수영 선수 출신이라던 세민도 수영복으로 환복을 하고 나왔다. 대표팀 선수들은 세민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SNS 맞팔 따위를 제안하고 있었으나, 세민은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정중하게 거절을 하고는 한쪽에서 몸을 풀었고, 대표팀은 멋쩍게 돌아섰다.

“이현 씨는 물에 아예 못 들어가세요?”

다만 세민은 끊임없이 이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현이 계속해서 단답식의 대답만을 내어놓는데도 불구하고, 세민은 저 혼자 할 말을 잘 찾아냈다. 어느새 호칭도 채이현 선수에서 ‘이현 씨’로 바뀌어 있었다. ‘이현 씨’와 ‘선배님’, 어긋난 호칭이었으나 상관은 없었다. 이현이 세민을 먼저 부를 일은 없었으니까.

잘 나가는 배우 아니랄까 봐, 세민 역시 허우대 자체는 훌륭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수영을 했던 몸이어서 그런지 어깨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그 또한 특별할 것 없었다. 몸이 좋은 사람은 이곳에 차고 넘쳤다.

세민은 발목을 마저 풀고는 반 나신의 상태로 이현에게 다가왔다. 반 나신의 상태, 라고 말을 하니 어딘가 변태스럽게 느껴지지만 결국 수영복 차림이란 말이다. 남자들의 몸은 질릴 정도로 익숙한 이현이었으나 세민의 접근은 어딘가 부담스러웠다. 세민 자체에서 느껴지는 공교로운 부담감.

씨발 뭐지? 혹시…. 이 새끼 게이인가? 설마 나도 게이라고 오해하나?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25년 차 이현의 빅데이터가 이상한 신호를 주야장천 보내기도 했고, 끈덕지게 달라붙는 세민의 눈빛은 어딘가 질퍼덕거렸다.

언젠가 이현을 둘러싸고 게이설이 돈 적이 있었다. 연애설 한 번이 안 터지니 냅다 던져진 지라시에 불과했지만,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조했다. 얄궂은 상황이었다. 때마침 이현은 해외만 내내 돌아다닐 시즌이라 빠른 반박을 하지 못했고, 그사이 그 말도 안 되는 낭설은 몸집을 불려갔다. 이현과 지완을 엮는 구도는 당연하게도 무수히 재생산되었고, 이현이 다른 남자 선수들 사이에서 웃는 모습, 남 감독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들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마치 게이설의 근거처럼 여겨지곤 했다.

나중에서야 사태를 파악한 이현이 곧장 해명을 내놓았으나 사람들은 원래 터지는 불꽃놀이에 매료될 뿐, 그 후의 뒤처리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이현의 게이설은 지금까지 종종 회자가 되고 있었고, 게이 커뮤니티 사이에서는 일종의 어떤… 희망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아, 이거 씨발 맞는 거 같은데.

“물 자체를 안 좋아해서요.”

“제가 가르쳐 드릴까요?”

세민을 게이라고 생각하니 앞뒤가 맞는 것도 같았다. 갑자기 변경된 촬영은 세민이 입김을 넣어 그런 것 같았고, 지완이 세민을 가증스러워하는 것도, 어쩌면 세민이 게이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권지완은 동성애 같은 걸 이해할 새끼가 아니니까. 물론 지완에 대한 추측에는 조금도 확신이 없었다. 예상 범주 안에서 노는 놈이 아니었다.

이현은 동성애를 적대한다거나, 혐오한다거나 뭐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상이 자신이라면 말이 달랐다. 한번 세민을 의심하기 시작하니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 오싹했다.

“아뇨. 배울 생각 없습니다.”

“그래도 수영은 배워두면….”

“사격으로 충분합니다.”

이현은 단호했다. 혹시라도 여지로 보일 모든 가능성을 차단했다. 미세한 틈도 내주지 않는 이현에, 세민은 흐음, 그러세요? 하며 짐짓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칼 같은 엄격함은 예상 밖이었던 것이다. 한쪽에서 지루히 몸을 풀던 지완이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조소였다.

“채이현 잘 배웠네.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지완의 조롱에 세민의 낯빛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둘 사이의 묘한 신경전이 재차 점화되었다. 상황이 참 지랄 맞고 재밌게 흘러간다.

“너도 수영 못 해?”

세민이 환복하지 않는 지완을 향해 물었다. 유도 선수가 수영팀 촬영에 나서서 실력을 행사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민은 어떤 흠이라도 잡아, 지완에게 시비를 걸고 싶어 안달이 나 보였다. 딴에 유치한 서열질인 것이다. 하세민, 이 새끼 보기보다 병신이구나. 이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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