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권지완, 제발 정도껏 해. 양심 없어?”
“있어 보여?”
지완의 웃는 낯을 향해, 이현은 다시 수십 번을 더 되뇌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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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민, “채이현 선수 오랜 팬, 촬영 설레 잠 못 자….”>
<수영 선수 출신 배우 하세민, 진천선수촌 홍보 프로그램에 자발적 참여>
<배우 하세민 과거 인터뷰 주목, ‘여자였다면 채이현 선수에게 들이댔을 것’>
<“채 선수는 나의 유년 시절 영웅” 배우 하세민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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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완이 지체 없이 상대를 눕혔다. 그대로 굳히기. 지완의 거센 팔얽어비틀기에 상대는 꼼짝도 못 하고 목을 긁는 신음만 흘렸다. 보통 이쯤 되면 이제 놔줘야 하는데, 지완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모두가 떠나고 지완과 대련 상대만이 남은 훈련실에는 지완이 상대를 우롱하는 낮은 소성만 조용히 깔리고 있었다. 지완의 대련 상대는 유도부 담벼락에서 지완의 추락을 간절히 바라던, 박상현이었다.
권지완! 놔, 미친 새끼야! 어깨 나간다고, 이 씨발! 깔려있던 상현이 울부짖었다. 지완은 얼마간을 더 그러고 있다가, 정말 파열의 직전에서야 상현을 풀어주었다. 상현은 고통에 씩씩대며 바들바들 떨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네가 원하던 거잖아. 나랑 꺾기 한 판 하고 싶던 거 아니었어?”
지완은 뒤틀린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선배라는 호칭 따위는 당연히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지완의 앞에서 상현은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이만 바득바득 갈았다. 인생이란 이렇다. 공교로운 것이다. 상현도 지완이 그 모든 대화를 듣고 있을 줄은 몰랐을 테니.
지완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실력도 없는데 열등감에 절어 엄한 곳에 화풀이를 해대는 경우는 허다했다. 굳이 일일이 상대하기도 귀찮은 일이니, 이번에도 그냥 내버려 두고자 했으나….
‘연습할 때 꺾기 기술 조심해.’
‘뭐긴. 너 성질머리 좀 고치고 살라는 거지. 선수 생활 말아먹기 전에.’
갑자기 이렇게 나오면 내가 당황스럽지. 지완이 이현의 말을 곱씹었다. 주춤대던 이현의 모습이 꼼지락대는 애새끼 같아 어그러트리고 싶었다. 그래서 대신 상현을 몇 번이고 업어 쳤다. 해소가 되지는 않았다. 기분이 영 찝찝했다.
“앞으로도 주제 파악 안 될 때 대련 신청하세요. 바쁘니까 너무 자주는 말고.”
여전히 바닥에 누워 끙끙대는 상현의 볼을 툭툭 건드리고는, 지완이 훈련실을 빠져나갔다. 굳은 얼굴과 대비되는 그의 희미한 허밍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02. 5 MINUTES PREPARATION : 5분 준비
Editor K SCANDAL #2
▶ A군에게는 동갑내기 라이벌 B군이 있다. 표적을 노리는 B군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고 누가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총을 든 그에게 제복이 없다는 것이 통탄스럽다. 한 배우의 유명한 인터뷰처럼 A군은 ‘한 번쯤 아찔하게 혼이 나고 싶은’ 피학성을 불러일으킨다면, B군은 묘한 정복욕의 가학성을 자극한다. 운동 빼고 다른 것에는 영 관심이 없어 많은 이들이 군침만 삼켰던 B군. 최근의 행보가 심상찮다. B군의 섹슈얼한 다정함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스코어뿐만 아니라 섹스 어필로도 라이벌 구도가 잡혀가는 A군과 B군. 뭐 어떤가. 보는 우리에겐 쏠쏠한 재미가 늘어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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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이 실검에 올랐다.
이현은 간만에 선수촌을 나갔다가 낭패를 봐야 했다. 이현의 자차가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와중에, 길가에 주차를 하고 카페를 들른 것이 화근이었다. 대회 일정으로 줄곧 외국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온 것이었는데, 안 그래도 보기 힘든 채이현이 떡 하니 출몰하니 팬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몰려들었다.
이현 씨 팬이에요. 오빠, 제가 진짜 많이 응원하고 있어요. 형! 이거 가져가세요! 선물입니다! 이현 씨, 올림픽 기대할게요. 실물이 더 대박이야! 사진 하나만 찍어주시면 안 돼요? 이거 드세요! 사인 하나만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 애가 그렇게 좋아해요. 이제 몸은 괜찮으세요? 아쉽지만 다음에 더 잘하실 거예요! 기운 내세요. 믿습니다. 저희도 사인 하나만요. 저는 사진 한 장만. 아 다음은 제 차례요! 오빠, 이미 여기 좌표 찍혀서 난리예요.
이현은 진땀을 흘렸다. 좆 됐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카페 안, 그리고 통유리 너머의 카페 밖까지 너무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왜 이래? 이게 아닌데? 이현만 몰랐다. 늘 해외만 돌아다녀서 그런지, 이현은 자신의 인기를 잘 실감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현이 거절치 않고 자꾸만 웃으며 받아주니, 사람들이 더 모이면 모였지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을 보기 위해 몰려든 팬들에게 야박하게 굴 수는 없지 않은가. 이현은 지완 같은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 겪는 일에 당황해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도 문제였고. 그렇게 이현은 쏟아지는 사진 요청과 사인 부탁을 다 받아주면서 계획에도 없는 소규모 팬미팅을 열어야 했다. 결국 협회 측에서 매니저와 가드를 보내 상황을 겨우 수습했고, 나오면서 이현은 카페 측에 변상액을 물어주기까지 했다. 카페 측에선 한사코 괜찮다며 거절했으나 이현이 불편해 억지로 욱여넣고 나왔다. 양손에 팬들이 전해준 선물을 가득 들고서.
이현은 처음으로 스포츠 매니지먼트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런저런 계약이 불편해 여태껏 협회 소속으로, 다른 매니지먼트의 관리를 받지 않았으나…. 사실 해외에서도 전담 매니지먼트가 없어 불편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또 고민이 되는 것이다. 스포츠 매니지먼트와 계약을 하는 순간 상업활동은 당연한 수순으로 맞물리게 되어 있었다. 차라리 좀 불편한 게 낫지. 이현은 잠시 든 생각을 빠르게 접었다.
이현의 이런 깜짝 이벤트는 인터넷에 다양한 후기들을 통해 일파만파 퍼졌고, 결국 ‘채이현 인성’과 같은 검색어까지 실검에 오르게 된 것이다. 내가 권지완도 아니고…. 이현은 엽기적인 상황에 자책했다. 오랜만에 이루어진 서울 나들이는 그렇게 죽어라 웃음만 팔다가 끝이 났다. 지친 이현은 곧장 진천으로 내려왔다.
“너도 참 가지가지 한다. 이제 연예인질 좀 해보려고?”
이현이 진이 다 빠져 사격부 회의실에 주저앉으니, 정연이 놀려댔다.
“정연아, 내가 그렇게… 인기가 많았나?”
“얼씨구? 이게 무슨 염병이야. 그런 거 유행 지났어. 연습이나 해.”
이현은 제가 내뱉고도 어이가 없었으나, 선수촌 밖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남들은 웃고 이현 혼자 울었다.
*
정연이 속되게 말했던 ‘연예인질’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또 다른 문제는 촬영의 첫 게스트, 인기 아이돌 그룹의 막내 멤버인 시아로부터 시작됐다. 실제로 이현은 그녀가 누군지도 잘 알지 못했으나, 촬영 소식을 전해 들은 다른 선수들이 ‘권지완이랑 전에 스캔들 났던 애 아니야?’, ‘아, 스캔들이 아니고 시아가 권지완 극성팬이라던데.’, ‘실물은 더 어려 보이네. 몇 살이랬지?’, ‘고등학생일걸?’ 하며 하도 쑥덕대는 탓에, 강제로 머릿속에 각인이 되고야 말았다. ‘시아, 아이돌, 권지완 팬, 고딩.’
“와, 진짜 천재는 괜히 천재가 아닌가 봐요! 실제로 보니까 표적이 훨씬 더 멀고 작은데…. 어떻게 저 작은 곳을 계속 맞히시지?”
시아는 이번 프로그램에서 리듬체조 소개를 맡아 선수촌에 방문했다. 타 종목 소개는 지완, 이현과 관련 없는 별개의 촬영분이었기에, 이현은 시아와 굳이 만나게 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오프닝 촬영 때문에 시아가 사격장으로 찾아온 것이다.
촬영 스태프들은 빠르게 컷을 따고 다들 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하는데, 시아는 떠나지 않고 계속 이현의 옆에서 조잘거렸다. 시아와는 촬영이 시작되기 전 인사를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시아는 낯가림이 전혀 없었다. 어리기도 했고, 어딘가 재민이 떠올라 이현은 시아를 쉽게 밀쳐내지 못했다.
“식사 안 하세요?”
“전 식단 조절해야 해서요. 말 편하게 하세요! 선수님은요?”
좀 가세요, 라는 의도가 담긴 완곡한 질문이었으나 시아는 알아채지 못했다. 이현은 난처했다.
“아닙니다. 전 몸 좀 풀린 김에 입사 시리즈만 끝내려구요.”
“저 옆에서 구경해도 돼요?”
말할 게 뭐 있겠는가. 당연히 귀찮고 곤란하다. 그러나 이현은 거절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이현이 무례하지 않은 답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시아의 스태프들이 선수를 쳤다. ‘그럼 우리 밥 먹고 올 테니까 시아, 너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 하며 시아를 훈련실에 두고 나가버린 것이다.
이현은 난감함에 잠시 멈칫하다가, 짧은 한숨과 함께 사좌를 정리했다.
“한번 해보실래요?”
그러니까 이현의 말은, ‘운동선수가 본인의 훈련실 안에서 던질 수 있는 최적의, 아주 능숙한 플러팅’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물론 이현도 말을 하면서 자각을 못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의도라고는 아주 조금도 없었다. 애초에 이현의 눈에 시아는 너무 어렸다. 연예인이라고 해도, 고등학생은 고등학생이다. 시아도 별다른 오해를 할 것 같진 않았다. 애초에 지완의 극성팬이지 않은가.
이현은 그냥 혼자 남겨진, 거기다 밥까지 굶어야 하는 어린 여자애가, 흥미로워 보이는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연민 어린 마음으로 덜컥 말을 뱉은 것이었다. 뒤에 처음 보는 사람을 덜렁 앉혀 두고 혼자 훈련을 하는 것도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현은 ‘나이 어린 여동생’을 대하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