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지완 선배는 누구 부를 거래요? 아무래도 유도부?”
재민이 지완을 힐끔대며 이현에게 물었다.
지완은 꺼림칙한 얼굴로 스태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연예인이 뽑은 ‘여름휴가를 같이 보내고 싶은 파트너’>에서 또 1위 하셨어요! 축하드려요!’와 같은 인사치레가 오고 갔으나, 정작 지완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새 또 지완의 주변엔 선물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아닌 척 굴어도, 스태프들 중에서도 지완의 팬은 차고 넘쳤다. 대놓고 주면 받지 않을 걸 잘 알고 있기에 몰래몰래 지완의 옆에 두고 가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완은 그런 스태프들을 향해 ‘이제 좀 비키죠.’따위의 말만 남기고 주변을 물렸다.
“재민아, 권지완 저 새끼는 인기가 왜 많냐?”
“가식 없이 솔직한 모습 아닐까요? 아무래도 저런 까칠한 남자가 나한테만 잘해주는 그런 상상 하면 짜릿하잖아요. 저희 누나들이 그러던데요.”
“그건 진짜 헛된 꿈인데. 쟤가 누구한테 잘하는 꼴을 본 적이 없어. 쟨 쟤 어머니한테도 저러거든.”
“음…. 생각해 보니까 외모네요. 예쁘고 잘생겼잖아요.”
재민과 이현은 그렇게 속없는 대화를 나눴다.
“아, 재민아. 정연이가 너 안 찾아갔어? 나한테 찾아와서 하세민 얘기하던데.”
“정연 누나 저한테도 왔어요. 훈련 끝나고 숙소 가려는데 미친 듯이 쫓아오더라구요. 피곤해서 다음에 얘기하자니까 숙소까지 따라 들어올 기세라…. 근데 저도 수영부에 딱히 아는 사람이 없어서, 뭐.”
“너 있잖아.”
“누구요?”
“이지수.”
“저 촬영 접고 갈게요. 알아서 다른 사람 구하세요, 형.”
아, 알겠어, 알겠어. 미안해. 삐지지 마. 이현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며 토라진 재민을 달랬다. 덩치는 산만 해서 귀엽다니까. 아기 다루듯 재민의 뺨을 부비고 엉덩이를 토닥였다.
여자 수영 국대 이지수는 재민의 전 여자친구였다. 둘은 나름 뜨거운 국대 커플이었는데, 헤어진 지 이제 막 반년이었다. 종합상황실에선 CCTV를 통해 그 둘의 공공연한 연애질을 보며 놀려먹는 게 유행이었고, 그들 역시 아랑곳하지 않고 SNS에 커플 사진을 마구 올려대기도 했다. 그러나 뻔하게도 결국 그 흔한 성격 차이로 헤어졌다. 덕분에 옆에서 보던 이현은, 선수촌 내 연애와 럽스타그램, 그 두 가지는 절대 할 짓이 못 된다는 좋은 교훈을 얻었다.
“이현 씨는 재민 씨랑 되게 친하신가 봐요?”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 준비를 마무리하던 감독이 이현을 향해 물어왔다. 다 큰 남자 둘이서 스킨십을 너무 스스럼없이 하다 보니 아무래도 유별나 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행동이 좀 과했나…. 이현이 겸연쩍은 마음에 재민을 올려보니 재민은 그냥 실없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렇죠. 한 십 년은 붙어 있었고, 이재민 얘가 저보다 훨씬 작았을 때부터 이렇게 클 때까지 다 본 사이라.”
“제가 어렸을 때도 형보다 훨씬 작았던 적은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냥 넘어가.”
재민의 말이 맞긴 했다. 9년 전, 이현이 재민을 청소년 국가대표 후보단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재민은 작은 키가 아니었다. 당시 열여섯이던 이현의 키는 170 언저리쯤이었고, 열넷의 재민도 비슷했다. 이후 이현의 키는 17살에 180을 찍고 멈추었으나, 재민의 키는 끝을 모르고 커지더니 현재는 196을 넘어섰다. 아직도 피지컬 체크를 할 때마다 조금씩 느는 걸로 봐선, 여전히 성장 중인 듯했다. 괜히 사냥꾼 같다는 게 아니었다.
“그럼 지완 씨보다 더 친한가?”
재민과 이현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감독이 평이한 목소리로 단출하게 물었다.
참 묘한 질문이었다. 순간 주변의 공기가 붕- 떴다. 소파에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던 지완도 감독의 질문을 들은 것인지 때마침 눈을 떠 이현을 바라봤다.
감독이 그 나이 먹고 할 질문도, 이현이 이 나이 먹고 들을 질문도 아니었지만, 이현은 선뜻 무시하지도, 대답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정연과 재민을 두고 누구와 더 친하냐고 물어봤다면 쉽게 대답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상대가 지완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것이라 당황스러웠다.
친해? 권지완과 친하다? 내가?
늘 자신과 지완의 사이를 투닥거리는 우정 따위로 사람들이 오해할 때면, 그런 사이 아니라며 대뜸 부정부터 하던 이현이었다. 비교군을 두고 저울질을 해본 적은 당연히 없었다.
물론 지완과는 친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단순히 우연찮고, 아니꼽고, 귀찮게도 어쩌다 보니 오랜 시간을 더럽고 좆같이 쌓아온 사이 정도로 정의하고 싶었지만…. 말이 길었다. 됐다. 뭘 고민하나.
열 살 먹은 애새끼도 아니고 이런 물음에 고민 따위를 하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워 이현은 정신을 차렸다. 어젯밤 떠올렸던 열두 살 때의 일이 생각난 것도 한몫을 했다.
“그쵸. 아무래도 같은 팀이니까.”
이현이 따분히 대답했다. 재민이 옆에서, ‘형, 저 괜히 눈치 보이는데. 말려 죽이려고 일부러 이렇게 대답하는 거죠.’ 하며 작게 칭얼거렸다.
“그래요? 지완 씨 서운하겠네.”
감독은 대충 지완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지완은 오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재민이가 붙임성도 좋고 착해요. 제가 낯을 좀 가리는 편인데 먼저 살갑게 다가와 줘서 고맙죠. 권지완은….”
좆같죠. 아주 많이. 뒷말은 입 안에서만 굴리고 통째로 꼴깍 삼켜 넘겼다. 못된 소문을 만들고 다니는 방송국 사람들 앞에서 나름의 정도를 지켜준 것이다. 물론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현아, 나 좀 섭섭해?”
“….”
“나도 너한테 예쁘게 굴잖아. 친절하게 담배도 직접 물려줬는데.”
지완이 어느새 이현의 옆으로 성큼 다가오며 낮게 읊조렸다. 웃음기가 잔뜩 밴 목소리였다. 이 새끼 또 지랄이네. 이현은 지완을 밀쳤다. 안타깝게도 지완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도리어 지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이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에 이현이 불쾌하게 몸을 움츠렸다. 이현은 스산한 기시감을 느꼈다. 얼마 전 흡연 구역에서 맞닥뜨린 날, 그때도 지완은 이렇게 훅 제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때와 달리 멀쩡한 정신에, 지척에서 지완을 마주하자니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손 한 뼘? 아니 한 뼘 반?
이현이 그렇게 가까이서 지완을 빤히 바라본 적은 처음이었다. 제가 처음이니 지완도 마찬가지리라. 지완의 눈동자는 황토색과 호박색 사이쯤, 굉장히 밝았다. 이국적인 외모야 워낙 유명하니 이현도 모르지 않았지만 그 눈은 마주하는 사람을 참 겸연쩍게 만들었다.
한국인답지 않게 깊은 아이홀, 짙게 진 쌍꺼풀, 그 아래로 동공이 생각보다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호선을 그리는 긴 눈매에, 가로로 길게 째진 눈꼬리가 잘생김은 둘째 치고 강인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심어주어 사람을 긴장시켰다.
“채이현, 지금 내 얼굴 보고 긴장했지.”
“아, 씨발….”
“병신.”
지완은 마치 그런 이현을 눈치채고 희롱하듯이,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간격이 멀어짐과 동시에 주위를 감싸던 기묘한 수축감이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이현은 삽시에 살짝 스몄던… 낯선 거북함을 상기했다. 정확히 명명하기에는 형체가 뚜렷하지 않았다. 미친, 나 지금 쫄았어? 이현은 본인이 졌다는 사실에 통탄했다.
“그렇게 갑자기 얼굴 들이밀면 누가 안 놀라. 미친 새끼네, 이거.”
이현이 짜증을 냈다. 지완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 더 열이 올랐다. 하하, 지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옆에서 서 있던 재민은, 또 시작이네, 할 뿐이었다.
“내가 이재민보단 나은데. 이현아, 넌 보는 눈이 없어.”
“너 혼자 뭔 소리야? 누가 외모 순위 정하자고 그랬냐?”
지완은 큼지막한 손으로 본인의 볼과 턱을 느릿하게 매만지며 으쓱거렸다. 지완의 뻘한 소리에 이현은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며 개탄했다. 가만히 있던 재민은 뜬금없이 자신이 멱살 잡히는 상황에 사뭇 억울했지만, 차마 이현을 대하듯 지완에게 대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봐도 저 멍청한 얼굴보단 내가 낫잖아.”
“….”
“예전에 이지수도 나 좋다고 하지 않았었나.”
지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재민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어떤 도발이 아니라, 정말, 진실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재민은 더욱 기가 차고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저, 지완 선배. 제가 선배보다 괜찮다고 말한 게 아니라서요.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재민은 답답함을 토로하고 싶었으나, 말해봤자 아무도 듣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바라지도 않은 자리에 끌려와 애꿎은 욕만 먹고 있었다.
“참, 지완 씨, 그래서 친한 동료 섭외하셨어요?”
준비가 끝나 제자리로 돌아가던 감독이 지완을 향해 물었다. 지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었다. 분명 누군가가 봤을 때는 매우 매력적인 모습이겠으나, 이현에게 그 얼굴은 참 싸했다. 지완이 저렇게 웃는 얼굴을 할 때면, 언제나 재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독할 만큼 익숙했다.
“전 친한 사람이 이현이밖에 없어서요. 이거 안타깝게 됐네요.”
능구렁이 같은 새끼. 음험한 새끼. 이현은 지완을 쏘아보며 속으로 수십 번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