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채이현 선수님, 저…. 권 선수님 시범 영상 따고 유도부에서 바로 인터뷰 진행할 거라서요. 같이 이동하셔야 할 것 같은데….”
굳이 개인 촬영 컷까지 따라다닐 필요는 없기에 다행이다 싶었는데, 이조차도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현은 하릴없이 유도부로 끌려가야 할 상황에 탄식했다.
괜찮아요. 뒤따라갈게요. 속마음과 전혀 달랐지만, 자신에게 말을 전하며 머뭇거리는 막내 작가를 향해 이현이 대충 웃어 보였다. 고맙습니다…! 막내 작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유도부가 위치한 제1 실내 훈련장은 이현도 처음이었다. 사격부는 트랩, 스키트의 야외 클레이 사격장도 함께 갖추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단순 실내 종목과는 훈련장의 거리가 멀었다. 더군다나 지완 말고 아는 사람도 없는 유도부를 이현이 찾아갈 일은 없었다.
“정신 안 차릴래? 빨리빨리 움직여!”
한창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는 유도부 훈련장에, 이현이 스태프들의 뒤를 따라 마지막으로 들어섰다. 입장과 동시에 유도부 장 코치의 호령이 내리꽂혔다. 이미 스태프들은 그 포효 같은 고함에 움씰거리며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복 구르기, 배틀로프, 메치기 등 파트를 나눠 훈련하고 있는 유도부 선수들이, 정말 문자 그대로 비 오듯 땀을 흘리며 대답 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선수들을 따라 땀이 맺히고 호흡이 가빠지는 기분이었다.
지구력, 집중력 단련 위주의 정적인 사격 훈련과 순발력, 근력, 민첩성 등을 요구하는 동적인 유도 훈련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이현은 낯선 광경의 생생함을 살갗으로 흡수했다. 예상치 못한 자극이었고, 그 광경은 나름의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이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유도…. 사격을 제외하고는 다른 종목에 제대로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이현이었으나, 고작 훈련임에도 불구하고 훈련장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이현을 달구었다.
사실 방송국 사람들이 와 있다는 이유로, 장 코치는 나름 언어를 순화하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중이었다. 보통 유도나 레슬링, 좀 더 나아가서 복싱, 태권도 훈련장 안에서는 ‘야 이 새끼들아! 진짜 다리 하나 분질러줘야 가드 제대로 할래? 오랜만에 날도 좋은데 처맞아야 정신 차리겠냐?’라든지, ‘그 틈을 내주면 네가 맞고 뒤질 일밖에 없지! 정강이 꺾여서 선수 생활 접으려고 그러지?’라든지, ‘더, 더, 더, 더, 더! 어쭈 힘 풀어? 국대 쪽은 너네가 다 팔아!’ 등, 보다 더 과격하고 난폭한 말들이 오갔다. 장 코치는 이 씨바…, 까지 흘러나온 욕지거리를 겨우 멈췄다.
“권지완! 이리 와서 대련 준비해.”
촬영 준비가 끝났다는 스태프의 말에 장 코치가 지완을 찾았다. 지완은 다른 선수들과 함께 메치기 훈련을 하고 있었다. 상대를 바꿔가며 서로 메치고, 메쳐지며 낙법하고, 그걸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잠시 코치를 힐끔대고는, 지완은 안쪽감아치기를 사용해 모로 누우며 마주하던 상대를 눕혔다. 아 선배님! 갑자기 기술을 쓰시면! 그대로 넘어간 선수가 징징거렸다.
지완은 후배의 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손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스태프들은 그 장면부터 화면에 담기 시작했다.
“권지완 상대할 놈들 나와 봐. 잠깐 방어자 역할 좀 해라.”
원래 방송은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유도의 경기 시간은 연장전을 제외하면 그다지 길지 않은 4분이었으나, 촬영은 4분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빠르게 필요한 장면만 얻어내면 됐으니, 한판승에서 볼 수 있는 통쾌한 업어치기 몇 장면으로 충분했다.
얼른 촬영을 끝마치고 스태프들이 철수하기를 바란 장 코치는 근처에 있던 선수들 몇 명을 질질 끌고 와 대련선수로 대기시켰다. 선수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지완아, 너 너무 전력으로 하지 말고. 굳히기 기술들은 쓰지도 마. 너무 많이 보여줄 필요 없어.”
장 코치의 말에 지완은 담담히 청색 유도복을 한쪽 벽장에서 꺼내 들었다. 대련 상대가 될 후배들도 줄줄이 백색 도복을 꺼내 들었다. 먼저 호명되는 선수가 청색을, 그 상대 선수가 백색을 입는 것이 기본 규칙이었다. 그 정도는 이현도 알고 있었다. 지완의 경기를 하루 이틀 본 것이 아니었다. 모두 무용하지만은 않았다.
“와….”
지완은 망설임 없이 입고 있던 운동복 상의를 벗어 던졌다. 후배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안타깝게도 주목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완이 옷을 벗어 던짐과 동시에 대기하던 스태프들에게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촬영 중임을 망각한 것일까.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반사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이현은 씨발, 따위의 험한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스러웠다.
목젖 언저리부터 흘러내린 땀 한 방울이 쇄골 근처에서 맺힐 듯 머뭇거렸다가 다시 가슴 사이의 골을 지났다. 널찍한 가슴 아래에, 선명하게 조각난 복근의 틈을 따라 이리저리 떨어져 내렸다.
이현은 변태 같은 본인의 시선을 자각하고 거두려 했으나, 순간 지완의 쇄골에 위치한 흉터가 눈에 들었다. 흉터는 연한 새살로 덮여있었다. 자신이 박아 넣은 것이 분명했다. 연지탄이 박혔던 그 부분만 유독 더 하얬다. 더 보고 있다간 괜한 감정이 일 것 같아 이현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지완이 띠를 꽉 조여 매며 매트 위로 올라왔다. 상대를 할 첫 선수는 어설프게 웃고 있었다.
“선배님. 저 자연스럽게 넘어갈 테니까 기술 쓰지 마세요. 저 정말 지쳤습니다.”
후배의 간청과 함께 경기 시작음이 울렸다. 입례는 건너뛰었다.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지쳤다고 봐달라던 후배도 눈빛을 바꾸고 진지하게 돌입했다. 짜고 치는 한 판이라도, 대련은 대련이었다.
지완의 기색을 살피던 상대가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깃과 소매를 잡았으나 찰나였다. 순식간에 지완이 빠져나와, 축이 되는 발로 외발을 뛰며 곧장 안다리후리기에서 밭다리후리기로 연결시켰다. 20초 만에 이뤄진 한판이었다.
굳히기에 들어가려던 지완이 코치의 말을 떠올렸는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배는 등을 완전히 바닥에 댄 채 허허, 깔끔하게 져버렸습니다, 하고 맥없는 웃음을 흘렸다.
“다음!”
코치의 심드렁한 호령에 대기하던 다음 선수가 또 매트 위로 올라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올라오면 지완이 메쳤다. 이리 업어치고, 저리 업어치고, 이리 감고, 저리 감았다. 그래도 촬영에 협조할 마음이 있었던 건지, 지완은 매 겨루기마다 다른 기술들, 다른 연속 동작들을 선보이며 상대를 눕혔다. 알다가도 모를 놈이었다.
확실히 스포츠는 스포츠였다. 지완이 상대를 군더더기 없이 넘길 때마다, 짜릿한 쾌감이 일었다. 하긴 이 맛에 경기 보지.
“수고하셨습니다! 휴식 시간 갖고 잠시 뒤에 인터뷰 갈게요!”
지완의 시범 촬영 역시 다양한 각도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었지만, 별다른 지연 없이 끝났다. 사실 제일 간단한 촬영 중 하나였다. 늘 하는 연습에서 하이라이트만 따면 되는 촬영이었기에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지완은 맺힌 땀을 닦아내고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이현은 그 순간까지 모두 눈에 담아내고 있다가, 미적미적 화장실을 갈 겸 훈련실을 빠져나왔다. 사격 선수 혼자 유도 훈련실에 있다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게 뻔했다. 은근슬쩍 달라붙는 시선들도 성가셨다. 겸사겸사 담배도 하나 피워야겠다 싶었다.
“…발, 지 잘난 맛에 살잖아.”
“어쩌겠냐. 원래 그런 새낀데.”
이현이 볼일을 보고 유도부 뒤쪽 흡연 구역을 찾아 건물을 꺾어 돌 때쯤, 분이 어린 말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얘기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얼굴을 들이밀었다간 난처해질 것 같아 이현은 벽 뒤에 몸을 숨겼다.
“지만 주인공이라 이거지. 언제까지 병풍 노릇 하고 있어야 돼?”
“권지완 그 새끼 원래 인성 바닥 치잖아. 방송 나간다니까 더 힘준 거지. 걘 뭐 부상이라도 안 당하냐?”
이현은 그들이 욕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아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래서 뒷담은 좀 더 조용하게 해야 하는 건데. 지완에게 시원하게 넘어간 선수들인 듯했다. 지완의 독보적인 실력 행사가 영 아니꼬운 것이다. 불만은 예전부터 계속 쌓이고 있었으리라.
“씨발 연습 때 아시가라미라도 해서 조지고 싶다니까?”
“관둬. 그러다 너만 큰일 나. 괜히 그러다가 자격 박탈당하고 네 인생만 종 친다.”
“이번에 올림픽도…. 채운 형님 나이 때문에 이번이 마지막 기횐데 또 밀렸잖아. 권지완 걘 선배 그런 꼴을 보고도 좆도 신경 안 쓰더라?”
“재수 없는 새끼. 씨발 근데 뭘 어쩌겠냐.”
“좆같네. 진짜 한 번만 꺾어버리면 선수 생활 못 하게 할 수 있는데.”
아시가라미, 즉 다리얽어비틀기는 현재 유도에서 금지된 기술이었다. 부상의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방어자의 발목이나 무릎을 비트는 꺾기 기술 중 하나였는데, 통증을 느끼기도 전에 인대가 끊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야 살벌하네. 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완의 더러운 성질머리는 그 누구보다 이현이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의 패배감과 분노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재수 없는 놈 중 가장 재수가 없는 건 누구냐? 바로 재수는 없는데 실력은 좋은 놈이었다. 그런 놈들은 공공연하게 깎아내리지도 못하는 것이다. 입 밖으로 꺼내면 본인만 열등감에 찌든 아류가 되곤 하니까. 누구누구의 마지막 기회니, 뭐니, 공연히 다른 사람을 들먹이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다. 비겁하게 다른 사유를 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