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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관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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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관 외전
제국의 역사와 함께한 많은 황제 중에서도 최고의 황제를 꼽으라 한다면 사람들은 고민 없이 현재의 젊은 황제 레온하르트를 손꼽을 것이다. 현재의 제국은 강력하고 영토가 거대하며 평화로운 안정적인 나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황제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평화롭다는 것은 이전의 상황이 그렇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전에도 제국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일 뿐, 대륙 주변을 둘러싼 대륙의 정세는 그의 즉위 전에도 심상치 않았다. 주변 왕국에서는 산발적인 전투가 끊이지 않았고 제후국끼리의 갈등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백여 년 동안 강력한 해군으로 해상무역로를 장악하였던 제국은 해적 때문에 골치를 앓기 시작했다. 큰 소탕 작전이 있고 나서는 해적의 출몰이 잠시 잠잠해졌지만, 그것은 제국에 한한 것이다. 주변 왕국으로 그 목표가 옮겨졌을 뿐. 미봉책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지만 온전히 해적 소탕에만 힘을 쏟기에는 주변의 정세가 어지러웠다.
이러한 와중에 대륙을 경악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왕국 로윈의 봉신들이 왕을 살해하고 그 후계자인 다니엘 왕자와 로렌 왕자의 목숨까지 위협한 일이었다.
이 경악스러운 사건은 대륙 전역에 빠르게 알려졌다. 국가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왕과 왕의 일이었다. 자신이 명예를 걸고 충성을 맹세한 주군을 간계로 해치고 그 후계자마저 살해할 수 있는가? 그저 소국 내의 반란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일은 살해당한 후계자가 다니엘 왕자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다니엘 왕자는 제국의 황제 레온하르트와 돈독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 사이였다. 황제는 왕자와의 우정을 무척 기꺼워하였다. 모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기로 유명한 황제 레온하르트가 그저 우정을 과시하기 위해 일곱별의 무역로까지 로윈에 개방하는 특혜를 줄 정도로 다니엘 왕자는 그가 아끼는 친우였다. 로윈의 다니엘은 소국의 왕자임에도 황제 레온하르트와 나란히 이름을 올릴 정도로 그 능력이 뛰어난, 신이 빚어 낸 사람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출중한 이였으니 둘의 우정은 별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친우의 실종을 알리는 비보에 황제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다니엘 왕자가 실종된 시점에서 로윈은 해상무역로의 이용을 금지당했다. 제후국은 로윈과의 모든 무역 거래를 끊었고 주군을 음해한 자들을 비난했다. 많은 나라가 로윈에 등을 돌렸지만 비열한 자들은 저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득시글했을 뿐이다. 작지만 평화로웠던 나라인 로윈에 떨어진 재앙이었다.
많은 왕국이 로윈의 반역자에게 등을 돌렸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제 욕심을 감추지 못하고 음험한 욕망을 흩뿌리는 이들. 로윈의 반역은 왕국 내의 반역이었고 봉신이 주군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는 이곳저곳에 뿌려져 있지 않았나? 예를 들면 제국과 제후국의 관계 말이다. 가증스럽게도 로윈의 반역에서 제 야심을 키운 어리석은 자들이 있었다. 황제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로윈의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고 채 1년도 되기 전, 대륙에서는 전쟁이 발발하였다. 대륙 단위의 전쟁은 이미 몇 차례나 있었지만, 제국이 모든 왕국을 대상으로 선전포고를 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황제는 불안한 시국을 종결시키기 위하여 직접 검을 들고 근원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 어떤 때라도 고요하게 제 자리를 지켰던 역대 황제들과 젊은 황제 레온하르트는 달랐다. 그는 직접 검을 들고 망토를 두른 뒤 전장으로 나갔다. ‘신이 내려 주신 사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는 포효 한 번으로 대륙을 평정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대륙은 평화를 되찾았다.
검을 겨누는 이에게는 응징으로. 무릎 꿇는 이에게는 자비로써 대륙을 평정한 강한 황제 레온하르트는 그러나 결국 친우의 생존을 보지 못했다. 로윈의 다니엘 왕자는 끝내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왔고 그 뒤를 이어 로렌 왕자가 로윈의 왕이 되었다. 황제는 친우의 죽음을 애도하며 로윈에게 다시 일곱별이 무역로를 개방하고 물심양면으로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불안한 시국에서 황제의 도움은 무척이나 큰 것이었다. 로윈의 새로운 왕 로렌은 황제의 호의를 감사히 받으며 다니엘 왕자에 이어 여전히 제국, 황제와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휘몰아치는 대륙 내의 폭풍이 지나갔다. 그 여운이 채 가라앉기도 전, 황제는 중대한 발표를 했다. 황비 책봉 소식이었다. 전쟁의 여파를 수습하던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다. 하지만 곧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전해진 서신 안의 황비는 어떤 작위도 존재하지 않는 이였으며 그 이름은 분명히 남자의 것이었다. 뭔가 착오가 있었거니 생각하며 답신을 보낸 나라는 하나같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진실로 새로운 황비는 남자였다.
많은 반대를 뿌리치고 황제는 남자 황비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황제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을 감히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상상도 못 한 놀라운 결정에 모두가 체념하고 다가온 결혼식, 그날은 역사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날이었다.
황제 레온하르트의 짝으로 단 하나의 손색도 없었다.
황비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말을 외었다. 불안 반, 호기심 반으로 자리에 찾아온 사람들은 그날 처음으로 황비를 본 사람들은 황제의 결정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몸이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그 곁에 서는 순간 주변의 모든 빛을 잃게 만든다는 황제 레온하르트와 나란히 서 있음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그 말고 또 있을까? 그는 신이 내려 준 황제의 유일한 짝으로까지 보였다. 곧고 우아한 자세로 황제의 곁에 서 있는 그는 모든 이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마쳤고 정식으로 황비가 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행복해졌다.
“……라고 끝나야 하는 것 아니었나요?”
죽상이 된 레온의 얼굴을 보며 라엘이 빈정거렸다. 어째서 대회의에 다녀온 사람의 옷소매에 피칠갑이 되어 있는 것일까? 일단 저 표정이나 주먹과 소매에 묻은 피는 행복한 동화의 결말이라고 하기에는 장르가 갑자기 스릴러나 공포물이 되잖아? 레온이 투덜거리며 답했다.
“제국에 바보 멍청이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몰랐거든.”
레온의 답에 라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사람이 여기 있는데 또 있다고요? 정말로 이 동네 신은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월루라고 알아요? 월급 루팡이라고.”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라엘의 일에만 바보가 되는 것뿐이야. 하지만 그들은 매사에 멍청하지.”
“참으로 당당하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인데요?”
당당하게 느끼한 말을 던진 레온의 말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라엘은 피 묻은 장갑을 조심스럽게 벗겨 주었다. 피를 닦고 손을 살피자 손등이 조금 까지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어라? 그럼 이 장갑이랑 소매에 묻은 피는 대체 누구 거지? 라엘은 고개를 들어 레온을 보았다. 그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로윈에 북부 광산 채굴권 지분을 넘기는 것을 반대하더라고.”
레온의 말을 들은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 한 거 맞네. 지금까지 한두 개 퍼줬나? 결국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라엘은 시종을 불러 회의장으로 황의와 마법사를 보내도록 명령했다. 핏자국의 출처를 알았으니 일단 사람 목숨은 살리고 봐야지 않겠어?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라엘은 반대쪽 장갑도 벗겨 뒤로 던지며 말했다. 로윈에 미친 듯이 이것저것 퍼주는 그의 행동은 결단코 라엘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냥 레온이 퍼준 거였다. 찔린 건지 뭔지. 아니, 생각해 보면 원래도 저렇게 대놓고 퍼주는 편이었지. 떠오르는 기억에 라엘은 이마를 짚었다.
“그렇게 대놓고 퍼주면 당연히 다 싫어하죠.”
물론 ‘그 황제’ 레온에게 그 불만을 말할 수 있는 간 큰 귀족이 아직도 제국에 남아 있다는 것이 대단하긴 했다. 미친 듯한 존재감을 내뿜는 황제 레온이 태어나고 유난히 간이 큰 귀족들도 많은 제국은 어떤 수맥이라도 흐르는 것이 틀림없다. 라엘은 바닥으로 던진 장갑을 돌아보았다. 음. 그 수맥, 이제 맥이 끊기긴 했겠다.
제국 귀족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그들은 분명 제국의 미래를 걱정하여 나름의 충심으로 황제에게 진언하였던 것일 터다. 황제가 한 나라만 편애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온 것 같다만-. 결론은 황제에게 진언하였던 귀족들은 어떤 상상을 하든 그 이상의 피해를 보며 끝났지만.
사랑에 눈이 먼 황제의 주먹은 매서웠고, 특히나 그 의견에 동의했던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폭격은 피해자를 어마어마하게 늘려 냈다. 실제로 상해를 입은 귀족들과 서둘러 달아나려다 발을 접질린 귀족이 몇,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며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귀족들의 수를 헤아려 보면 사실 대륙전쟁 때보다 더 많은 부상자를 낳은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엄청난 부상자를 만들어 낸 레온은 무척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잘못 생각하긴 했어.”
“뭘요?”
“이젠 티 덜 내면서 알아서 잘할게.”
알아서 한다는 말의 뜻이 황제의 주먹이 더 붉게 물드는 것인지 평화로운 대화로 끝낸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피의 레드색의 해결책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귀족들이여. 이제는 당신들 황제가 라엘, 로윈이라는 키워드에 미친 사자가 되어 주변을 다 물어뜯는다는 것을 제발 깨달아 주었으면 좋겠어. 어쨌거나 이제는 제국인이 되었으니 그 정도는 어쩔 수 없지.
그의 말에 라엘은 기가 차서 웃어 버렸다. 아, 그래. 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지. 라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네요.”
황제씩이나 되어서 폭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한, 그리고 해결은 쥐뿔 이미지만 더 나빠졌을 뿐인 레온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라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곁에 앉아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반성할 생각 자체도 없는 것 같다. 이 성격이 아마 이대로 갈 것인데 기나 죽이지 말아야지.
제 팔을 쓰다듬는 라엘의 팔을 보며 레온은 내심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라엘은 폭력적인 황제라고 구시렁거릴 일이긴 하지만 레온이 로윈에 온갖 것을 퍼주는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정말로 타당한 이유가.
라엘이 너무 걱정되었다. 그가 요즘 너무 이상하다. 그러니까,
라엘은 요즘 입맛이 없다고 했다!
* * *
3년이 지났다.
정신없던 일들이 끝나고 정착한 것이 딱 그만큼 지났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벌어진 것으로 온 대륙을 들썩였던 전쟁의 뒤처리도 이제는 거의 끝났다. 온갖 명분을 가져다 대며 일으킨 전쟁이지만 사실 그것이 상상도 못 할 미친 프로포즈 비슷한 짓인 것을 적어도 제국 귀족들은 안다. 그야, 이후에 황제가 남자 황비를 맞이했으니까. 처음에는 경악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익숙해졌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새파란 하늘에 깨끗한 색의 구름이 둥실거리며 떠다닌다. 살랑이는 바람에 꽃향기가 실려 온다. 겨우내 색채를 잃었던 나무는 훈기 도는 바람이 불어오자 빠르게 녹색을 되찾았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파도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라엘은 눈을 감았다. 무척 좋은 날이다.
“한가하네.”
봄 내음을 한껏 맡으며 라엘은 중얼거렸다. 3년. 모든 일이 끝난 지 3년이 지났다는 것은 라엘이 날백수로 산 것이 3년이 되었다는 뜻이며 로윈에 이것저것 온갖 혜택을 다 퍼주기 시작한 것이 2년 10개월이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라엘이 퍼준 것이 아니라 레온이 퍼준 것이다. 지레 찔린 것인지 뭐인지.
아니, 생각해 보면 원래도 저렇게 대놓고 퍼주는 편이었지. 떠오르는 기억에 라엘은 이마를 짚었다. 워낙 대놓고 퍼주다 보니 항의가 있긴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의 황제에게 대놓고 싫다는 티를 내는 나라가 있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편안한 날들이었다. 농담으로 말하는 돈 많은 백수가 실제로 되어 보니 이건 지루하다기보다는 매일매일이 편하고 좋긴 하다. 요즘 레온과 라엘의 사이도 언제나처럼 좋은 상태니 나쁠 일은 하나도 없다.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레온은 불안하게 떨리는 눈으로 테라스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라엘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좋은 날씨를 만끽하는 것이었으므로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한 달 가까이 되었다면 그건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레온은 세상에서 제일 심각한 표정으로 황의와 시종장과 마법사와 연금술사에게 물었다. 제 배우자의 상태를 물어보기에 적절한 직업군은 황의뿐이었지만, 라엘의 이상을 발견한 레온으로서는 일단 다 데려다 놓고 그중 하나라도 답을 내 주길 바랄 뿐이었다.
“확실히…… 식사량이 줄었죠.”
시종장의 말에 레온과 그의 뒤에 모인 이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타고난 몸이 건강한 만큼 식사량도 그에 비례하는 라엘이 식사를 남긴 지 보름 가까이 되었다. 게다가 지금 테라스에 내어진 간식에 손도 대지 않고 있지 않은가? 심각한 병이 걸렸거나 어떤 저주가 걸렸거나 어떠한 알 수 없는 화학작용으로 그리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그의 식사량이 일반인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무시하는 이들이었다.
“요전번에 보았을 때 건강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움직임이 없는데.”
“그래서 꼼꼼히 살폈지만, 역시 몸은 건강하십니다…….”
황의가 말했다. 라엘은 계절이 바뀌어도 감기 한 번 앓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지금도 테라스에서 쉬고 있지만 조금 전까지 하얀 털뭉치들과 함께 정원을 뛰놀고 있었다. 라엘은 레온이 자신 때문에 온 대륙에서 데려온 동물이니만큼 책임감을 느끼고 잘 돌보고 있었다. 여전히 그들은 라엘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부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중독 증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연금술사가 말했다. 당연하다. 독에 중독되었다면 진작 쓰러졌지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오전에 검술훈련을 한 뒤 점심을 먹고 털뭉치들과 뛰어놀다가 테라스에서 하늘을 보며 휴식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저런다는 말인가?”
레온은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다. 요즘 두 사람의 사이는 순탄하다 못해 깨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래서 불안하다. 라엘이 소리 지르지도 않고 머리를 쥐어박지도 않으며 물건을 집어 던지지도 않았고 빈정거림도 훨씬 줄었다. 가끔 애정 표현도 먼저하고 스킨십도 늘었다. 기분은 무척 좋지만 이건 레온에게 세계 종말 직전의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변화이기도 했다. 특히 황궁에 들어온 이후 라엘의 기분이 들쑥날쑥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말이다.
물론 로렌이나 부단장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스트레스를 별로 받지 않으니 식사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지 않은 것이고 운동을 열심히 하니 몸이 건강한 것이고 둘 사이에 큰 문제가 없어서 레온이 미친 짓을 하지 않아 사이가 좋은 것이다. 무엇 하나도 문제가 없다고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이곳은 제국이었으며 황성이었다. 레온과 가장 가까운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레온의 사고방식에 옮아 있었다. 특히 라엘에 관한 것이라면. 그래서 지금 그들의 눈에 보이는 라엘은 핼쑥하게 말라서 기운이 없는 병자였다. 본인이 들어도 기가 막힐 일이다.
이들의 콩깍지를 다 벗기고, 벗기고 벗긴 뒤에 볼 수 있는 진실은 딱 하나였다. 확실히 어느 날부터인가 라엘은 바깥을 보며 멍해지는 순간이 많아졌다. 그 때문에 레온은 당황해서 온갖 선물을 가져다 바치고-욕을 먹고- 로윈에 이것저것 퍼주고-그건 욕을 안 먹고- 그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다가-방에서 쫓겨났다- 결국 그의 상태를 판별할 수 있을 만한 전문가들을 불러오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본인에게 물어본다’는 선택지는 모두가 잊어버렸다.
라엘의 상태가 레온의 상태와 직결되는 만큼 그 자리에 모인 이들도 심각했다. 라엘이 이러다 앓아눕기라도 하면 레온은 또 눈이 돌아갈 것이다. 그럴 때가 되면 자애로운 황제는 마치 배우자를 지키는 짐승처럼 몹시 날카롭고 사나워지고 요 며칠 전처럼 눈먼 주먹의 피해자가 늘어난다. 라엘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제국의 안녕과 연결되는 요즘이다.
“혹시…… 향수병이 아니실지…….”
황의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나름 타당한 추론이었다. 라엘의 몸 상태는 아주 건강했으니 몸의 문제라기보다는 마음의 문제로 시야를 돌려보았다. 그렇다면 문제가…… 어마어마하게 많아진다. 그들은 레온이 라엘에게 했던 대부분의 행동을 보고 있었고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엘이 그와 함께하기로 한 것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이 참사랑이구나 싶을 정도로 당황했다. 물론 그가 함께하지 않겠다고 했으면 대륙이 멸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지만.
라엘, 과거 다니엘 왕자였던 그는 레온과 함께하기로 한 뒤 모든 것을 버리고 황성에서 지내고 있다. 심지어 로윈의 왕좌마저 그의 동생이 가지고 이름마저 라엘로 바꿔버리지 않았는가-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숨을 쉴 때마다 후회한다고 해도 이해한다. 왕좌를 걷어차고 얻은 것이 미친 사자의 사랑이니까. 예전에는 경외의 눈으로만 보던 황제였지만 라엘과 얽힌 일을 생각하면 그 시선은 달라진다. 라엘이 대체 왜 황제를 끼고 사는지 모르겠다.
하나같은 생각을 한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잠시 레온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눈썹이 꿈틀댔다. 뭔가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는 것 같긴 하지만 지금은 라엘의 상태 파악이 더 급한 일이니 다시 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향수병이라.”
레온은 황의의 진단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라엘이 제국에서 자리 잡고 지낸 것은 3년째지만 로윈에서 떠난 것은 4년이 더 넘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에서 의도치 않게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그보다 더…….
문득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만약 라엘이 정말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라면? 이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라면?
“……안 돼.”
서늘한 목소리에 주변의 이들이 흠칫하며 레온에게 시선을 모았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난간이 우그러지는 것에 사람들의 안색이 희게 변했다. 레온의 얼굴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라엘이 떠날지도 몰라.
자신과의 생활에 불만족한 라엘이 로윈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상했다. 심장이 조여 오며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아니, 그가 돌아가는 것이 로윈이 아니라 본래의 고향이라면?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그가 돌아가고자 한다면? 레온의 몸이 휘청거렸다.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도저히 불길한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물론 물리적인 힘으로 그를 붙잡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은? 그 많은 일을 겪고 나서 자신이 무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제 곁에 머문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라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억지로 라엘을 붙들었다가 그가 스스로를 포기하는 일이 생긴다면? 레온의 머릿속에 절벽 아래로 떨어지던 라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더욱 바라지 않는다.
털썩.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여 레온은 무릎을 꿇었다. 부축하는 손을 쳐 내며 레온은 중얼거렸다.
“이대로는 안 돼…….”
라엘을 잃을 순 없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사랑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며 현재의 자신에게 라엘의 존재란 절대적인 신과 같은 것이다. 그를 잃는다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레온은 라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라엘을 바라보는 레온의 시선을 보는 사람들의 눈빛도 심각하게 변했다.
큰일이다! 폐하의 눈이 맛이 갔어!!
저건 분명히 ‘라엘 집중 모드’다. 저 상태의 레온은 라엘의 실제 상태가 어떻든 제 머릿속에서 맹렬하게 상상을 시작하고 그것은 대부분 엉뚱한 결론으로 이어지곤 한다. 엉뚱한 결론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레온은 미친 사자처럼 폭주하기 마련이고 그 이후는…… 라엘이 화를 내고 쫓겨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그건 안 돼!
레온이 라엘에게 쫓겨나면 괴로운 것은 자신들이다. 종일 성의 모든 이를 들들 볶기 시작하며 일을 하다가도 발광하고 그 시기에 방문한 이들은 좋은 꼴을 보지 못한다. 그건 정말 막아야 한다.
“폐하!”
절박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드디어 레온이 고개를 돌렸다. 눈빛이 벌써 퀭하다. 반쯤 맛이 갔다. 어서 수습해야 한다. 마법사가 황급히 말했다.
“저희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향수병이라 한들 난 라엘을 보낼 수가 없어.”
그렇겠지. 그렇다면 상식선 내에서 해결을 하면 된다. 시종장이 용맹하게 나섰다.
“고향의 음식을 해 먹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고향의?”
분명 레온이 솔깃했다. 레온의 귀에도 이게 제법 그럴듯한 제안으로 들린 것이다. 하긴 자신이 생각해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음식을 사랑하는 라엘이니 먹을 것으로 슬픔을 지우는 방법도 가능하겠지. 일단 레온에게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도 라엘은 식사량이 는다. 응? 뭔가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데? 하지만 현재를 수습하는 것이 더 급하기에 시종장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로윈의 음식은 좀 더 담백하다고 들었습니다. 향신료를 좀 덜고 로윈식으로 음식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구금 기간을 합치면 최소 4년을 제국의 음식을 몹시 맛있게 5인분씩 꼬박꼬박 먹어 온 라엘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눈앞의 황제가 미친 사자가 되지 않기만을 바라며 아무 말을 내뱉을 뿐이다.
“특별히 드시고 싶은 게 있는지 폐하께서 말씀해 주신다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비장한 시종장의 말에 레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것도 좋을 것 같다.
다시 라엘에게 시선을 옮긴 레온을 보며 네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레온을 수습했다. 그러니 이제는 라엘을 어떻게든 해야 할 때지. 뭐, 그건 의외로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향수병이란 건 과거를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라엘을 정신없게 만들면 된다. 네 사람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라엘을 정신없이 바쁘게 만들 방법을 빠르게 짜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 방법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탄신제?”
“예. 내달부터 준비하여 두 달 뒤에는 일주일 동안 궁에서 연회를 열고 수도 거리에서 축제를 열 예정입니다.”
“아. 왜 몰랐지?”
“근래 라엘 님께서 정원을 가꾸시는 것에 심취하신 듯하여 따로 보고하지 못한 듯합니다.”
“그래?”
내가 요즘 바쁜 일이 있었나? 라엘은 열심히 생각해 봤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근래 정원에서 하얀 털뭉치들과 열심히 놀다가 가끔 정원 테이블에 앉아 멍 때리는 것을 제멋대로 정원을 가꾸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워낙 자신을 어려워하는 이들이 황궁에 널려 있다 보니 자신이 숨만 쉬어도 뭔가 일을 하는 것처럼 대한다.
“나도 뭔갈 준비해야겠군. 혹 도울 일은…….”
“그건 없습니다! 이미 잘 준비하고 있습니다.”
“없…… 구나, 그래.”
그럼 굳이 왜 알려 준 거지? 라고 생각한 라엘은 초롱초롱한 시종장의 눈을 보고 깨달았다. 레온에게 따로 할 선물을 마련하라는 거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레온의 선물을 뭘로 할까 고민하던 라엘은 당황해서 시종장을 보았다.
“폐하에게…… 뭘 선물하지?”
“아……!”
물론, 라엘이 레온의 취향이나 선호를 몰라서 이런 것을 묻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라엘이 주는 것은 뭐든지 좋다고 꼬리를 흔들며 받고 심지어 보물로 지정하려는 팔불출기를 보이다 보니 뭘 선물하는 것이 부담스럽다. 게다가 취향에 맞는 것이라도 선물하면 거의 기절 직전으로 흥분하면서 미친 듯이 자랑하기 때문에 선물을 하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심지어 타국 사신에게도 자랑했다-. 그래서 ‘생일에는 선물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바로 떠올리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 시종장의 표정도 난처함으로 물들었다.
“뭘 해야 하지?”
“으음…….”
시종장의 머리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 대책 없이 선물만 덜렁 안겨 주면 그 순간 레온은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행동할 것이고 그건 절대로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 당장 라엘이 로윈으로 돌아간다고 짐을 싸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시종장은 괴로웠다. 어떻게 해야 조금 더 자연스럽게 폐하가 덜 흥분하면서도 라엘 님이 집중하여 고민할 수 있고 둘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건 역시 모르겠다.
“폐하께서 좋아하실 만한 일을 하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좋아할 만한?”
라엘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안 좋아하는 게 없는데. 숨만 쉬어도 예뻐 죽겠다고 하는데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특별히 더 좋아했던 건…… 침대에서 일밖에 모르겠다. 그건 좀 그런데. 라엘의 표정이 심각해지고 시종장은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생각에 아무 말이나 던지기 시작했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를 기억해 두셨다가 깜짝 이벤트로 해 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오?”
그리고 라엘이 낚여 들었다. 뜻밖의 결과에 시종장 주변에 기립해 있던 시종들도 한마디씩을 보태기 시작했다.
“섬세한 배려가 담긴 이벤트는 좋지요.”
“폐하께서는 가지지 못할 물건이 없지 않습니까? 라엘 님의 그런 행동이 더욱 감동적일 겁니다!”
“라엘 님께서 평소에도 폐하께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어필되지 않겠습니까?”
그럴듯하다.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그런 노력일지도 모르겠다. 라엘이 혹하기 시작하자 시종들의 입이 더욱 빨라졌다. 거의 다 낚였다. 이것에만 낚이면 한동안 라엘은 생각하느라 바빠서 향수병이고 뭐고 멍하니 생각에 잠길 시간조차 없을 것이다. 꽤 오래 그의 곁에 있었기에 시종들은 이미 라엘의 승부사 기질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라엘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어느새 물고기 기질이 생긴 듯 라엘은 시종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미끼를 던지는 대로 모두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제법…… 그럴듯하다.
파닥파닥.
* * *
다시 돌아와서.
그러니까 시작은 무심코 답한 말 한마디였다.
“김치볶음밥이…… 먹고 싶긴 하네요.”
그 말에 레온이 즉각 반응했다.
“김치볶음밥?”
처음 듣는 요리의 이름을 되묻는 레온에게 라엘은 음식을 설명하려 했지만 말문이 막혔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레온이 뭔가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지 물어보길래 무심코 대답했지만 그것은 레온에게는 생소한 음식일 것이다. 라엘에게는 아주 당연한 음식인 김치와 밥과 고추장이었고 그것을 조합하여 만드는 음식은 자취할 때 수십 수백 번을 해 먹은 간단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김치와 고추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쌀 비슷한 것은 본 적 있지만 그것뿐이었다. 발효식품에 들어가는 그 음식들은 조리법이 따로 있는 것이고 이쪽 세계는 자신이 원래 살던 세계로 치면 서양 쪽에 더 가까웠기에 그런 음식은 본 적이 없었다. 레온이 온 대륙의 산해진미를 실어 나르는데도 못 먹어 봤으니 없는 거겠지.
“예전에 혼자 살 때 자주 해 먹던 음식이에요.”
“오, 직접?”
“만드는 방법은 어렵지 않아서 어렸을 때부터요.”
라엘의 무릎 위에서 노닥거리던 레온이 그의 답에 눈을 휘며 웃었다. 음. 잘생겼다. 살인적으로 잘생긴 사람이 사람 여럿 죽일 것 같은 매력적인 미소를 짓네? 라엘은 매우매우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 볼을 꼬집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남자의 살결이 이렇게 비단결 같고 뽀얘도 되는 거냐? 어쩐지 심술이 돋아 더욱 세게 꼬집었지만 레온은 실실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쩐지 바보 같아져서 손에 힘을 풀었다. 아픈 티는 내지 않았지만 뺨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이건 좀 너무했나? 달아오른 뺨을 쓰다듬자 레온이 다시 입꼬리를 당긴다. 심장 떨려 뒈지겠네.
“먹고 싶어?”
뜬금없는 질문에 라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먹고 싶으냐고 한다면…… 확실히 그렇긴 하다. 아무래도 이쪽 세계에 와서 먹은 것들은 향신료 맛이 강하고 예전에 먹었던 것들과는 다른 조리법의 음식이니 처음에는 익숙해지느라 생소했으니까. 한동안은 어째서 한국 사람이 외국 나가면서 굳이 김치를 챙겨 가는지를 뼈저리게 느꼈었다.
“뭐, 고향 음식이니까요.”
고향 음식이라는 말에 레온의 귀가 쫑긋 선 것 같지만 라엘은 무심코 넘겼다. 제 말에 레온이 반응하지 않는 것이 더 드물었으니까.
“만들어 줄까?”
레온의 말에 라엘은 웃어 버렸다. 밥은 몰라도 김치와 고추장은 무리다. 말은 귀엽긴 하네.
“괜찮아요.”
“왜?”
“만드는 방법 여기선 저밖에 모를 거예요.”
라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레온은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번엔 또 뭘 저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나? 눈을 도로록 굴리는 심각하게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레온이 말했다.
“그럼 만들어 주면 안 돼?”
만드는 방법을 라엘만 안다면 라엘이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되겠군! 레온의 사고는 그렇게 흘러갔다. 하지만 라엘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무리예요.”
“어렵지 않다며?”
“그거야 거기서는 재료가 다 있었지만 여긴 아니잖아요. 무엇보다 재료 중에서 제일 중요한 김치 만드는 방법도 전 몰라요.”
“음…… 그런가?”
하긴. 라엘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다니엘을 만나기 이전의 그는 학자와 비슷한 삶을 지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직접 요리를 한다고 해도 요리사처럼 능숙하게 재료부터 만들지는 않았겠지. 레온의 표정을 본 라엘은 그가 실망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의 머리카락을 휘저으며 말했다.
“나중에 뭐라도 배워서 만들어 줄 테니 서운해하지는 말아요.”
“음…….”
이미 생각에 잠긴 레온의 답은 영 시원찮았다. 내가 직접 만든 음식이 먹고 싶었나? 눈에 띄게 실망하며 생각에 잠기는 레온을 보며 라엘은 차선책을 제시했지만 그마저도 흘려보낸다. 그렇게 서운했을까 싶지만 정말로 김치와 고추장을 구할 방법은 이곳에 없었으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무심코 생각났을 뿐 이곳에는 그것보다 더 맛있는 것들도 널려 있는데 굳이 김치볶음밥을 고집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도 서운해하는 것 같으니 꼭 뭐라도 만들어 주자. 생각해 보니 생일도 곧이다. 직접 만든 음식이라…… 좋은 것 같다. 어차피 시간도 많으니 괜찮겠지. 그때 레온이 물었다.
“라엘.”
“네?”
“그 맛은 아직 기억해?”
김치? 김치볶음밥? 무엇을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답은 하나다.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어떻게 잊어?
“일상적으로 먹던 거니까, 아마도?”
“그래.”
레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기분이 좀 풀렸나? 그때의 라엘은 그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그 반응이 앞으로 어떤 일을 불러올 줄도 모르고…….
* * *
재앙이 닥쳐온 것은 꼭 한 달이 지난 뒤였다.
“……뭐죠, 이건?”
“김치를 만들 거야.”
“……네?”
라엘은 눈앞에 쌓인 양상추와 양배추의 사이에 놓인 어떠한 채소들과 무언가 새빨갛고 매워 보이는 것들과 기타 등등을 보며 경악했다. 그 종류가 아니라 그 규모에 놀란 것이다.
이게 다 뭐냐며 시종들을 돌아보았지만 그들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레온이 명령하여 온 대륙에서 김치 재료 비슷한 채소를 모두 긁어모은 것을 이곳에 옮긴 것뿐이었으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 날 정도로 엄청난 종류와 양의 채소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을 보며 라엘은 넋을 잃었다. 어쩐지 시도 때도 없이 김치의 맛이며 재료를 물어보더니…… 이거였어? 기가 막혀 레온을 보자 그가 생긋 웃었다.
“이 중에서 맞는 재료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없는 것 같은데요?”
“음…….”
“그냥 제가 다른 음식을 만들 테니까…….”
“그럼 다시 구해 보지.”
라엘의 얼굴도 시종들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모여 있는 재료는 척 봐도 온 대륙을 뒤져 라엘이 말한 비슷한 식감이며 외견을 가진 채소를 다 끌어 모은 것이었다. 그 과정을 시종들은 옆에서 다 보고 있어서 질릴 수밖에 없었고 라엘도 그 과정을 순식간에 깨달았다. 라엘은 기겁하여 레온을 말렸다.
“아, 아니. 잠깐만요! 어차피 제 고향 음식은 여기서는 못 구한다니까요?”
라엘의 말에 레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지다 보면 하나쯤은 나오겠지. 뭐 하고 있어? 어서 채소를 구햅읍읍읍읍읍……!”
“기다려 봐요! 맛이 비슷한 것이 하나쯤은 있겠지!”
서둘러 레온의 입을 틀어막은 라엘이 말했다. 이놈의 황제가 말이면 다 되는 줄 알고! 그런데 말하면 다 되는 사람이 맞잖아! 그게 맞네!
솔직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싶었지만 여기서 자신이 정신 차리지 못하면 또다시 브레이크를 놓은 레온은 한도 끝도 없이 불도저처럼 돌진할 것이고 그 아래에서 신하들은 죽어날 것이며 그 원망은 자신에게로 올 것이 틀림없다-사실 이미 레온만 욕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니 있어야 한다. 저 안에서 있어야 해! 저렇게 많으니 저 채소 중에서 배추나 고추 비슷한 맛이 나는 채소가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그래야 한다!
만약 없다면……. 없으면 안 되지만 없다면…… 그냥 대충 만들어서 입 안에 쑤셔 넣어 줄 거다! 먹어 본 적도 없는데 자기가 어떻게 알 거야!?
일단 좀 진정된 것 같은 레온의 입에서 손을 떼어 낸 라엘은 그 입을 심술궂게 쭉 잡아당겼다. 다행히 다시 명령을 내릴 기색은 보이지 않아 라엘은 채소의 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배추와 비슷하다고 모아 놓은 것 같은데…….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것들이 있긴 하지만, 척 봐도 생김새가 영 서양틱하다. 개중에서 양상추와 비슷한 모양이 있긴 하다. 정 안 될 것 같으면 저거다. 상추나 배추나 한국 상추나 양상추나! 대충 비슷하겠지!
영 내키지 않았지만 라엘은 일단 채소 몇 가지를 집어 냄새를 맡고 만져 보았다. ……는 향신료도 아니고 이런 채소를 향으로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결국 라엘은 종류별로 이파리를 떼서 조금씩 씹어봤다. 아, 안 돼……. 음식은 고기인데……. 이런 풀쪼가리를…….
아무런 조미도 하지 않은 채소를 씹어 내며 맛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이건 혹시 고기 위주의 식단을 고집하는 자신의 건강을 위한답시고 시답잖은 고문을 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거 일부러 괴롭히는 거지? 라엘은 뒤를 돌아 레온을 흘겨보았지만, 그는 무척 기대에 찬 표정으로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니군. 그냥 뇌가 깨끗할 뿐이다.
꽤 시간을 들인 뒤 라엘은 먹은 것 중 그나마 배추와 비슷한 것들을 골라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고추에 도전을 하려고 했는데…… 색만 봐도 매워 보이는 채소를 씹어 볼 자신은 절대로 없다. 이번에는 슬쩍 향만 맡았다.
“으허억.”
톡 쏘는 향 때문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옆에 척하니 달라붙어 손수건으로 빠르게 눈물을 닦아 주는 레온을 원망스럽게 노려본 뒤 라엘은 이번에는 대충 비슷한 정도로 매울 것이라고 유추되는 채소들을 골라내어 시종들에게 알려 줬다. 이건 뭐, 내가 대장금도 아니고!
“이거면 돼?”
“……네. 아마도……?”
절대 아닌 것 같지만, 김치에 배추와 고추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십수 년을 거쳐 온 김장철의 어깨너머 배움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말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말을 꺼내는 순간 레온의 신하들은 재료를 찾아온 대륙을 헤매야 할 것이다. 그들의 안녕을 위해 라엘은 다른 재료를 과감하게 생략하기로 했다.
“기대된다.”
“아, 네. 그러네요…….”
이쯤 되자 뭐 어떤가 싶었다. 어차피 레온도 알지 못하는 음식이다. 대충 하자. 라고 라엘은 생각했다. 그래. 요즘은 포기가 정말 빨라졌다. 그래. 생일이라니까…….
* * *
팔자에도 없는 김장을 하게 되었다. 일단 시작했으니 최대한 열심히 해서 할 만큼 해야지. 라엘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 재앙인 만큼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할 생각이었다. 라엘은 이제는 오래되어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기억을 끄집어내어 김장에 대해 생각나는 모든 것을 적어 내려갔다. 사각사각하는 펜 소리 너머로 레온의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등 뒤에서 자신을 포옹하며 어깨를 감싼 팔을 꼬집었다. 아프지도 않은지 체신머리없이 헤헤 웃는 소리가 뒤통수 쪽에서 들려왔다.
“뭐 하고 있어?”
“김치, 어떻게 만들었었는지 생각하고 있어요.”
“기억나?”
“옆에서 본 것 정도지만…….”
그래도 적으려고 마음먹으니 기억나는 것이 의외로 많았다. 일단 맛 같은 것은 잊어버리기도 어렵다. 만드는 방법은 엄마와 고모, 이모들의 심부름꾼으로 어깨너머로 본 것을 하나씩 적었다. 뭔가 조각모음이라도 하는 기분이다. 하드웨어가 좀 빨라지려나?
“김치는 직접 만들어 본 적이 없어?”
“김치볶음밥은 쉽지만 그건 난이도가 엄청나단 말이에요. 그런 건 보통 엄마가 보내줬죠.”
아……. 엄마 이야기하니까 엄마가 보고 싶다. 갑자기 생각난 엄마 생각에 서걱거리던 펜이 멈췄다. 스스로 이전의 가족을 포기하고 이곳에 머물기로 결정했지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라엘의 생각을 눈치챈 듯 어깨를 감싼 팔이 움찔거렸다. 레온이 지레 찔려 하는 것을 보고 라엘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유난히 생각이 둥둥 떠다닌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오래 생각하지는 않는 편이지만 김치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오늘은 정말 엄마가 해 준 김치가 먹고 싶었다. 그리고 이 원수 같은 사자 입에다가 오리지널 엄마 김치를 쑤셔 넣어 버리고 싶다.
그렇게 생각의 물꼬가 터지자 김치 맛이 머릿속으로 확 퍼지기 시작했다. 막 담은 김장 김치의 사각사각한 식감과 매콤하면서도 달큰한 양념 사이로 퍼지는 약간의 배추 맛…… 김치를 찢을 때 들리는 물기 젖은 채소의 소리와 그것을 둘둘 감아 수육과 함께 싸서 먹었던 김장의 기억이 떠오른다. 입에 침이 고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소금물에 절여지고 있을 정체 모를 채소들을 생각하자 다시 시무룩해졌다.
“하아.”
그래 그 정도는 고무대야에서 소금물에 푹 절은 배추를 옮겨야 했기에 알고 있다. 고추 비슷한 채소-랍시고 골라 놓긴 했다만-들은 이미 마법사들이 동원되어-맙소사!- 잘 말려져 있었다. 하지만 장담한다. 절대로 그 맛이 나올 리가 없다…….
“……미안. 내가 무리한 부탁을 했지?”
기가 죽은 듯 시무룩해진 레온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거 참, 이제 와서. 라엘은 그에게 타박을 주었다.
“알면서도 그랬어요?”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 줄은 몰랐지……. 그냥 그만두자.”
이렇게 처지는 목소리를 들으면 또 화도 못 내겠다. 하기야, 이 황제 폐하는 자기가 좋아할 것만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제가 느낄 경악 따위는 상상하지 못하는 위인이다. 딴에는 라엘이 먹던 음식을 한번 먹어 보고 싶은 욕심에 일을 벌인 것 같은데 사실 김치볶음밥을 만들기 위한 과정 중 김치라는 복병이 있다는 것을 이쪽의 현지인인 레온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물론 그가 그걸 꼭 먹겠다고 이런 일을 벌이지만 않았어도 아무 문제 없었겠지만 이제 와서 하나하나 따지자니 그것도 타이밍이 애매하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기가 막힌 쪽에 더 가깝기도 해서 라엘은 한숨을 내쉬며 레온의 팔을 쓰다듬었다.
“뭐…… 기왕 시작했으니 노력은 해 볼게요. 아마 엄청나게 맛없을 것 같으니까 원망하지나 말아요.”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도 있거든요?”
라엘이 정색하며 말하자 레온은 피식 웃었다. 어렵다고 하면서도 종이를 빼곡하게 채울 정도로 요리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사랑스럽다고 말하면 한 대 맞을 것 같다. 레온은 라엘의 뒤통수에 키스하며 말했다.
“고마워.”
“정말로 고마우면 다 먹고 나서 엎드려 절이라도 하시던가요.”
“그럴게.”
하여간 이런 말에는 참 쉽게 답하는 레온을 보면 왠지 두통이 일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것이긴 하지만 제국의 황제가 굴욕적인 처사를 너무 잘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휴. 나중에 정말 무릎이라도 꿇으려고 하면 말리면 되겠지, 하고 라엘은 그의 말을 대충 넘겼다. 제 앞의 레온은 무언가가 어긋나도 한참을 어긋난 인간이었기에 하나하나 진지하게 생각하면 피곤하다.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것이 상책이다. 괜히 말 한마디 잘못 대꾸했다가는 오늘 같은 일이 생긴다.
하지만 김치는 정말로 지금까지의 패턴의 바깥에 있는 예상 밖의 일이라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이 즈음 되니 오기가 생기기도 한다. 기왕 만드는 김에 제대로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일단 좀 쉬었다가 해.”
레온이 라엘의 팔을 잡아당기며 슬그머니 침대로 이끌었다. 평소라면 돼먹지 않은 수작질에 피식 웃을 타이밍이었지만 지금의 라엘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소금, 고춧가루, 배추, 또 뭐가 필요했지?
이런 생각으로. 레온이 라엘을 침대 위에 슬그머니 눕혔을 때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을 정도였다. 침대 위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제 수작질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라엘을 보고서야 레온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엘이 지나치게 김치에 집중하고 있다!
이, 이건 아냐……! 음식 따위에 라엘을 빼앗길 순 어, 없어! 레온은 당황하여 라엘의 위를 덮치고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기웃거렸다.
“라엘? 라에엘?”
“아, 맞아. 액젓이 들어갔던 것 같아요!”
“액젓?”
“그게 들어가야 감칠맛이 난다고 했으아악!”
“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던 라엘의 머리가 제 위에 올라타 있는 레온의 머리에 성대하게 부딪혔다. 눈앞에 별이 번쩍 튄다.
“억, 머리가! …… 레온, 괜찮아요?”
“난 괜찮, 라엘이야말로 괜찮아?”
“괜찮다니 다행이네요. 저도 괜찮아요!”
황당한 사고는 라엘이 저질렀다는 것만으로도 귀엽기만 하다. 레온이 그를 끌어안으려고 했지만, 그 순간 라엘은 침대 아래로 재빠르게 내려가 책상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빠져나간 라엘 때문에 레온이 그를 끌어안으려고 오므렸던 팔은 제 몸을 감싸고 앞으로 돌진한 몸은 침대 위로 털썩 떨어졌다. 레온은 황망하게 책상을 바라보았다. 라엘은 종이에다 무언가를 맹렬하게 적고 있었다.
“아, 맞다…….”
그제야 레온은 깨달았다. 라엘도 저 못지않게 승부에 대한 집착이 어마어마한 남자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그의 승부욕은 김치볶음밥에 대한 열의로 화하였다. 레온의 유혹 따위는 휴지통에 던져 버릴 만큼 말이다. 정말로 쓸데없는 열의였지만 레온은 위기감을 느꼈다.
“재료가 더 생각났네요!”
환하게 웃는 라엘을 보며 레온은 다급하게 말했다.
“아, 아냐!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어려운 부탁을 한 것 같아. 그만두는 것이…….”
“이 정도쯤 생각났으니 요리사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괘, 괜…….”
“꼭 맛있게 만들어 줄게요!”
라엘은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었다. 대화하다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에 혹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라엘이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일지 몰랐다. 제게 눈길 한 번도 주지 않으며 김치 레시피를 만들고 있는 라엘을 보며 레온은 전전긍긍 주변을 맴돌았다. 침실에 있는 테이블은 잠시 앉아 책을 읽거나 서류를 보는 정도로 쓰였기에 의자도 혼자 편하게 앉을 수 있는 크기였다. 사이에 끼어들 곳이 없어도 너무 없다!
레온이 은근슬쩍 라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역시 신경도 쓰지 않는다. 위기감을 느낀 레온은 조금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라엘.”
“왜요?”
“잠깐만 일어나 봐.”
레온의 말에 라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레온은 잽싸게 의자에 앉았다.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라엘이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 레온은 환하게 웃으며 제 허벅지를 손으로 탁탁 쳤다. 의도를 알아챈 라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인간 의자. 여기 앉자.”
“푸핫, 이게 뭐예요?”
“편하지?”
나이도 한참이나 많으면서 이런 식으로 애교를 부리면 넘어갈 수밖에 없다. 라엘은 들고 있던 종이를 놓고 레온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레온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눈을 감고 살짝 입술을 벌리자 기다란 손가락이 턱을 살짝 붙잡았고 따뜻하고 습한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덮쳐온다. 여린 점막을 건드리며 안쪽을 휘젓는 뜨거운 혀에 제 것을 얽으며 뜨겁게 새어 나오는 날숨을 만끽했다.
“으응…….”
라엘의 목 뒤와 귀를 쓰다듬고 만지작거리던 레온의 손이 그의 몸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목덜미를 스치듯 쓸어내린 손가락이 쇄골에 닿아 그것의 모양을 그리듯 천천히 움직였다.
“앗!”
레온의 손가락이 아래로 움직여 위쪽의 자극에 바짝 선 유두를 스쳐 지나갔다.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허리를 뒤틀려 했지만 레온의 다른 손은 라엘의 허리를 단단하게 붙들어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습하고 진득하게 이어지는 키스와 계속 이어지는 간질거리는 자극에 라엘은 몸이 달아 레온의 어깨와 등을 끌어안았다.
“으응…….”
입술이 마주하며 뭉개지는 신음 사이로 간간이 거친 숨소리가 섞여온다. 라엘이 저를 꽉 끌어안자 더는 가슴을 지분거릴 수 없어진 레온은 손을 셔츠 아래로 넣어 날씬한 등을 더듬었다. 관리가 잘된 몸의 윤곽을 따라 손이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움찔거린다. 어느 부분을 좋아하는지 알면서도 굳이 그 주변을 더듬는 것은 심술이다. 나 말고 레시피에 더 신경을 썼으니까.
“아, 거긴…….”
“좋아하잖아.”
아래로 내려가던 손이 바지 안으로 파고들어 뒤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몸을 섞은 것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예고되지 않은 관계에서는 역시 부끄러운지 라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랫입술을 꽉 물며 지분거리는 레온의 손길을 참아내던 라엘은 결국 그를 밀어내며 투덜거렸다.
“여기서 하게요?”
레온은 라엘 뒤의 작은 테이블과 앉아 있는 1인용 의자를 보았다. 이 자세로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테이블 위에 눕히거나 엎드리게 해서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라엘과 몸을 섞을 수 있다면 어디든 좋지 않을 곳이 있겠나? 그래도, 이런 건 라엘의 기분이 내킬 때 해 보아야 하는 시도였다. 레온은 눈치껏 답했다.
“침대로 가자.”
귓가에 속살거리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라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쓸데없이 목소리도 좋아서는. 하지만 순순히 침대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역시 사랑스럽다.
레온은 침대에 걸터앉으려는 라엘을 붙잡아 자신을 보게 하고 끌어안았다. 눈을 깜빡거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라엘의 눈에 입을 맞춘 레온은 천천히 아주 정중하게 그를 침대 위에 눕혔다.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알아서 누웠을 텐데. 라고 라엘은 생각했지만 이런 방식을 레온이 선호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의 손길에 몸을 내맡겼다.
“후우.”
뜨겁게 달아오른 레온의 숨결이 가슴께에 닿았다. 썩 여유가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레온은 그럼에도 단추를 하나하나 풀며 옷을 벗겼다. 단추를 풀어낼 때마다 살짝 살짝 스치는 손가락이 간질거린다. 레온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후 자신과 무엇을 하기 위한 준비인지 알 수 있어서 심장이 엄청나게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항상 좋은 향이 나.”
“똑같은 거 쓰면서.”
“그런데도 달라. 왜일까?”
왜긴 왜야, 당신이 나한테 콩깍지가 씌어도 아주 단단하게 씌었으니까 그렇지. 상의를 벗긴 레온이 조심스럽게 라엘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며 말하는 것이 간지럽기 그지없다. 레온은 아직도 라엘을 깨어질지도 모르는 몹시 귀중하고 아름다운 유리 공예품처럼 대한다. 그런 점 하나하나가 모두 간지럽다고 라엘은 생각했다.
“아, 읏!”
레온의 열기에 질식할 것 같은 위와 다르게 갑자기 아래가 썰렁해진다. 눈을 아래로 내리자 방금까지 입고 있던 바지가 속옷째로 벗겨져 침대 바깥으로 던져지는 것을 보았다. 거 참 정중한데도 빠른 손이다. 저 손에다 괴도 왼손님 이런 이름을 붙여 줘야 할 것 같다.
“거기, 흐읏. 응…….”
“마음에 들어?”
“……후, 으.”
라엘은 레온의 손길에 몸을 내맡긴 채로 그가 주는 감각을 모두 받아들였다. 레온은 제 손이 라엘의 매끄러운 피부를 천천히 덧그리듯 움직일 때마다 잔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몸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반쯤 단단해진 라엘의 성기를 본 레온이 침을 꿀꺽 삼켰다. 여유로운 척은 정말 여유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거지. 레온은 제 옷을 빠르게 벗어 던지고 침대 위에 자리 잡았다.
“으응?”
“뒤, 풀어야지.”
레온이 라엘의 몸을 옆으로 돌리고 그 뒤에 자리 잡았다. 의문 섞인 라엘의 질문을 받은 레온이 날개뼈에 키스하자 그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앗!”
레온의 손이 라엘의 성기를 조심스럽게 붙잡은 채로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레온의 손안에서 라엘의 성기는 빠르게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귀두 끝을 손가락으로 자극하고 기둥을 쓸어내리듯 흔드는 손에 라엘은 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허리를 휘며 신음을 흘렸다.
“흣, 아흑! 그, 너무……!”
타인의 손안에서 라엘의 성기는 쉽게 흥분하여 끄트머리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성기에 직접 닿는 자극에 라엘이 몸이 달아 허리가 흔들리며 자연스럽게 레온의 것에 엉덩이가 닿았다. 이미 단단하게 발기한 것이 엉덩이에 바로 닿자 라엘이 순간 움찔거리며 움직임을 멈췄지만 다시 앞에서 주어지는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허리를 휘었다. 레온은 라엘의 뒷목과 날개뼈에 키스하며 열기를 나누고자 했지만 잔뜩 흥분한 라엘에게는 그냥 여기도 저기도 다 미칠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응, 흣! 아흑!”
“라엘, 라엘…….”
“아, 아아.”
라엘의 이름을 부르며 레온은 쉴 새 없이 그의 몸에 입 맞췄다. 빈틈없이 모든 곳에 입술을 댈 것만 같던 레온은 라엘의 몸에서 힘이 빠지고 달아오른 신음이 쉴 새 없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고는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앗!”
“차가워?”
“응, 아……. 조금.”
아래쪽에 진득한 액체가 부어지는 것에 깜짝 놀란 라엘이 어깨를 움츠리자 레온이 그를 다독였다. 분명 미지근할 액체는 뜨겁게 달아오른 몸에는 차갑게만 느껴졌다. 라엘은 뒤를 돌아본 순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레온은 달래듯 라엘의 입술에 천천히 키스했다.
“흐읏!”
안쪽으로 레온의 손가락이 들어오자 라엘이 저도 모르게 허리를 당기며 약하게 신음했다. 레온은 탄력 있지만 아직은 좁은 곳을 천천히 휘저었다. 아래쪽을 풀어내는 손길도 손길이지만 온몸에 키스 마크라도 만들 것처럼 등 뒤에 꼼꼼하게 입술을 대는 입술의 감촉에 라엘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불에 닿은 것처럼 화끈하게 열이 오른다. 열이 올라 머릿속이 멍해진다. 아래쪽에 손가락이 늘어난 것 같기는 하지만 온몸에 열이 올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때 레온의 손이 라엘의 다리 한쪽을 번쩍 들어 제 팔꿈치 사이에 끼었다.
“흐익!”
“후……. 좋아. 으음.”
“하, 흐읏, 레온, 아!”
단단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레온의 성기가 엉덩이골에 문질러지기 시작했다. 크고 단단한 성기가 굴곡진 곳을 따라 움직이고 회음을 문지르고 비벼대자 신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안쪽을 늘리기 위해 부었던 향유가 축축하게 레온의 성기를 적시며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습하고 야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흣, 으읏!”
기다란 성기가 회음을 비비고 고환을 쿡쿡 찔러 대자 결국 견디지 못한 것은 라엘이었다. 라엘은 이어지는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제 가슴을 꽉 끌어안고 있는 레온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레온, 흐읏. 레온!”
“으응. 음.”
“못, 참겠어. 넣어 줘요…….”
애달픈 라엘의 목소리에 일순 레온의 움직임이 멈췄다. 등 뒤에서 숨을 고르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무어라고 다시 말하려던 찰나 몸이 앞으로 휙 돌아가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손을 짚어 몸을 세우려고 했지만 열기에 녹진하게 녹아내린 몸으로는 엉덩이를 치켜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레온은 흥분을 참으려는 듯 이를 꽉 깨물고 있었다. 자신이 제어를 잃고 날뛰어 혹시라도 라엘을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꾹 참고 있는 것이다.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심호흡하는 레온을 평소의 라엘이라면 열심히 놀려 댔겠지만, 지금은 그의 상황도 썩 좋지만은 않다. 라엘은 등 뒤로 손을 돌려 스스로 제 엉덩이를 벌려 그의 것을 넣어 달라고 온몸으로 졸랐다.
“큭!”
“흐앗!”
레온이 입술을 꽉 깨물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크고 뜨거운 성기가 안쪽으로 천천히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하으읏.”
“윽! 라엘, 조금만…….”
삽입의 옅은 고통에 저도 모르게 꽉 조여 오는 내벽의 움직임에 밀려오는 사정감을 레온은 입술을 꽉 깨물며 참아 냈다. 레온의 성기가 안쪽으로 천천히 밀고 들어오자 라엘의 엉덩이와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빠지기를 반복했다. 제 성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버거울 텐데도 삽입을 수월하게 하려는 몸짓에 레온은 숨을 들이켰다.
“흐앗!”
“큭!”
저도 모르게 힘을 줘 버렸다. 뿌리 끝까지 성기가 세차게 처박히는 감각에 화들짝 놀란 라엘의 몸이 튀어 올랐다. 깜짝 놀라 힘이 빠진 것인지 라엘은 옅게 신음하며 달뜬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의 숨소리에 따라 가슴이 펄떡거리는 것이 가련하면서도 야해 보여 레온은 침을 꿀꺽 삼켰다. 표정을 보자 아픔보다는 쾌감 쪽이 더 큰 것 같았다. 레온은 간신히 엉덩이만을 치켜든 라엘의 골반을 붙잡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아, 으흣! 읏, 앗.”
“라엘. 라엘, 아…….”
두꺼운 성기가 깊이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것을 반복하자 라엘은 가쁜 숨을 내쉬며 신음을 내뱉었다. 레온의 성기가 라엘의 안쪽을 탐할 때마다 내밀한 곳에서 젖은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앗, 흐응……!”
한참 라엘의 몸을 탐하던 레온은 잠시 움직임을 멈춘 뒤 그를 똑바로 뉘였다. 성기를 빼지도 않은 상태로 몸이 돌려진 라엘은 안쪽에 있는 것이 요동치는 듯한 감각에 허리를 튀며 안타까운 신음을 내뱉었다.
두꺼운 성기가 안쪽을 채웠다가 빠져나갈 때마다 라엘은 허리를 움찔거리며 달콤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레온의 움직임이 점점 조급해지자 라엘은 제 어깨 위를 단단하게 짚고 있는 레온의 팔을 쓰다듬다가 입술을 가져다 댔다. 곱게 휜 눈이 머리끝까지 열기를 확 치밀어 오르게 만든다.
“큭! 라엘, 라엘…….”
라엘의 깊은 곳에 닿을수록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쾌감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레온은 제가 주는 쾌락에 젖어 몽롱해진 라엘의 눈이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키스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읏! 레온, 앗! 흡!”
허리를 숙여 깊게 키스하자 자세가 버거운지 라엘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미약한 움직임은 곧 레온의 손에 붙잡혀 키스로 이어진다. 레온은 정신없이 라엘의 입 안을 탐하면서도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흐읍, 읍, 으흑!”
온몸에 버겁게 밀려오는 쾌감에 라엘은 정신없이 신음했지만 모두 레온의 입속으로 먹혀들어 갔다. 몸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은 열기가 느껴진다. 아랫배가 꽉 조이며 기묘한 느낌이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라엘의 절정이 머지않은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레온이 그가 느끼는 곳만을 성기로 콱콱 찌르기 시작했다.
“흡, 아흐읏!”
밀려드는 쾌감을 버티지 못한 라엘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안쪽을 자극했을 뿐 직접 만지지도 않았는데 조각처럼 매끈하고 보기 좋은 배에 희고 점성 있는 액체가 튀었다. 라엘의 사정과 동시에 꽉 조이며 요동치는 내벽의 움직임에 레온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크읏!”
“힉! 레온, 앗! 잠…… 방금 갔……!”
“라,엘…… 라엘.”
예민해진 안쪽을 들쑤시는 감각을 버티지 못하고 라엘은 레온에게 매달려 정신없이 신음했다. 레온은 꽉 조여 오는 안쪽에 세차게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라엘의 신음이 안타깝게 변할 때가 돼서야 레온도 라엘의 배에 사정했다. 그 순간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다시 입술을 포갰다.
만족스러운 잠자리 이후 레온은 배부른 사자처럼 천천히 라엘의 몸을 애무했다. 성적인 함의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이것은 그를 자극한다기보다는 여운을 즐기는 것에 더 가까웠다. 라엘은 겨우 숨을 고르고 나서는 쉴 새 없이 투덜거렸다.
“진짜, 후…… 나빴다.”
“미안……. 너무 좋아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닌데 굳이 그걸 다 받아 주는 것도 문제였지만 라엘은 여전히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있었다. 아주 달콤한 것이라도 되는 양 제 몸을 애무하는 레온을 밀어내고 라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어디 가?”
“아, 하던 거 마저 해야죠.”
“레시피?”
레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책상에 있는 종이를 가져와서 누워서라도 보려던 라엘은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응?”
침대에 바로 누운 라엘의 위를 덮친 레온이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라엘은 입가를 당겼다. 이거, 미인계인가? 레시피 만드는 것을 막으려는 움직임이 너무 훤하게 보여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라엘…….”
열기에 눈가가 불긋하게 물든 미남을 올려다보며 라엘은 그의 뒷목을 다시 끌어당겼다. 뭐, 오늘은 미인계에 넘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
* * *
뭔가 떠밀린 듯한 느낌으로 마지못해 시작한 김장이었지만, 일단 하기로 한 이상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레온을 집무실에다 던져 놓은 라엘은 펄펄 날아다니며 김장 진두지휘를 하기 시작했다. 김장하는 것에 진두지휘라는 단어가 왜 튀어나오느냐고 묻는다면 작금의 상황은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한다고 답할 수 있었다.
“소금물에서 배추를 건진다!”
“네!”
마치 군대를 방불케 하는 움직임이었다. 시종들은 소금물에 잘 절인 배추 비슷한 채소들을 척척 옮기기 시작했다. 본래 이름은 무척 우아하거나 친근하거나 어쨌든 괜찮은 이름이 각각 있는 채소들이었지만 라엘이 배추라고 부른 순간 이미 그것들은 배추가 되었다.
“물을 빼라!”
“네! 물을!”
라엘의 손짓을 따라 시종들이 척척 움직였다. 그들은 숨이 적당하게 죽은 배추를 들어 옮기고 정원 크기에 맞춰 어마어마한 크기로 만들어둔 거대 채반 비슷한 것에 배추를 척척 올리기 시작했다. 물을 제대로 빼야 하니 필요하다고 하자 배추를 절이는 동안 만들어진 것이었다.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배추들이 옮겨지는 것을 보며 라엘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춧가루 팀!”
“네!”
“지금부터 고추를 빻아 가루를 낸다!”
“네, 라엘 님!”
역시 라엘이 고추라 부른 순간 이름을 잃어버린 채소들을 시종들이 잘게 빻기 시작했다. 무려 마법으로 바싹 건조된 고추들을 빻기 위해 그들은 마스크까지 뒤집어쓰며 진지하게 고추 빻기에 임했다. 마르기 전에도 엄청나게 매운 향이 났었으니 고춧가루 양은 조절할 필요도 있겠다. 콩콩콩콩콩. 고추를 빻는 소리가 요란하자 라엘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재료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라엘은 제 옆에 기립해 있던 수석 요리사와 본격적으로 상의를 시작했다. 대략의 재료는 눈대중으로 보았다고 하지만 조합과 세세한 재료는 라엘이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비슷한 채소를 찾았더라도 맛이 같다고 보장할 수 없다. 재료 하나에 맛이 달라지는 것이 요리다. 게다가 김치라니. 제대로 된 요리를 해 본 적이 없는 라엘이 도전하기에는 처음부터 난이도가 어마무시하게 높다.
“일단 내가 아는 재료 중 저 둘이 가장 중요하다고 알고 있어. 고춧가루를 넣고 양념장을 만드는데 이것저것 들어가는 게 많았던 것으로 기억해.”
“그중 기억나는 재료가 더 있으십니까?”
“음…… 마늘이 들어가는 건 알고 있는데…….”
일단 마늘은 싱크로율이 높은 재료를 찾았으니 별문제 없을 것이다. 김장 시즌이 되면 엄마 옆에 붙잡혀서 미친 듯이 마늘을 다졌던 기억이 떠올랐으니 이건 확실하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풀……?”
“풀이라 하시면…….”
“음. 하얗고 끈적끈적한 것이었는데 뭘로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어. 먹을 수 있는 거였고…… 아! 달달한 과일도 갈아서 넣었어.”
옆에서 배를 훔쳐 먹다가 등짝 맞았던 기억이 있으니 이것도 확실하다. 몸으로 배우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하나? 순간 제 기억력에 회의가 느껴졌지만 요리를 직접 하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 기억하면 잘한 것이지. 라엘이 자기합리화를 하는 동안 수석 요리사도 대안을 찾은 듯 했다.
“꿀을 넣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꿀을?”
분명히 그건 넣은 적이 없다. 라엘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수석 요리사는 꿀을 대안으로 제시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라엘 님께서 각각 제대로 된 재료를 기억하여 만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끈적한 재료에 과일을 넣었다고 하니 달짝지근한 맛이 났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꿀에 과일을 넣고 절인 뒤 그 꿀을 사용하면 비슷한 맛이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쩐지 얘도 자포자기한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든다.
“나쁘지 않은데?”
딱 라엘이 자포자기한 만큼 말이다.
“더 생각나는 건 없으십니까?”
“액젓?”
액젓이면 젓갈 비슷한 거려나? 이름이 비슷하니까. 젓갈을 액체로 만들면 액젓인가?
“젓갈, 음. 해산물을 숙성시킨 것이 들어갔던 것 같아.”
“일단 비슷한 것을 넣어 보죠.”
수석 요리사가 보조에게 무어라고 말하자 그가 주방으로 빠르게 뛰어가더니 생선 몇 가지를 가지고 왔다. 숙성된 생선이었다. 일단 젓갈이 아니긴 하지만, 그것보다 음…… 이거 아무리 봐도 연어 비슷하게 생긴 것 같은데?
“이런 건 어떠십니까?”
아무리 포기했다 하더라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라엘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숙성도 됐고 해산물이다. 액젓이 아니고, 젓갈과도 무척 다른 음식인데 괜찮을까? 젓갈은 짠맛이 났으니 소금에 절여야 하나? 게다가 크기가 너무 크잖아.
고민하던 라엘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배추-비슷한 채소-가 소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다시 수석 요리사에게 고개를 돌린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금을 더 넣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저 사이에 넣으면 연어-비슷한 생선-의 크기가 대체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뭐, 괜찮겠네!
“그래. 그리고…….”
“그렇다면…….”
두 사람은 심혈을 기울여 대체할 재료를 유추했다.
다행히 대체할 재료는 한 달 동안 대륙을 들쑤시고 다닐 정도로 별난 것들은 아니었기에 주방과 수도의 가게를 뒤지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일단 빨리 구할 수 있는 것 중심으로 수석 요리사가 대안을 제시해 주었기에 가능한 속도였다.
“양념장을 만들어라!”
“네! 양념장을!”
“통에 다 쏟아부어!”
“쏟아부으라신다!”
두 사람이 열심히 의논하여 골라 온 재료들이 커다란 통에 한꺼번에 집어넣었다. 어마어마한 배추들을 모두 사용해야 하는 만큼 통도 엄청나게 컸기에 시종들은 그 옆에 사다리를 대고 재료를 옮겨서 넣어야 했다. 시종 하나가 숙성 연어를 담은 바구니를 가져가려던 시종의 손을 막았다. 재료를 저렇게 석는다면 저 안에 들어가는 순간 연어의 형태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사실 김장에는 필요한 재료도 아니지만-. 이건 나중에 따로 넣는 것이 좋겠다고 수석 요리사가 제안하여 라엘은 나중에 양념을 바를 때 그 사이에 연어를 끼워 넣고 김치를 익히기로 했다. 이거라도 하나 빠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이미 다행의 범주를 벗어난 안 다행의 양념장은 라엘의 처음이자 마지막 김장을 착실하게 파국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을 그때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냥 통 안에 부은 것들의 비주얼이 상상 이상으로 별로라는 것만 보였을 뿐이다.
라엘조차 모든 재료가 섞인 통 안을 들여다보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음. 진짜 별로다.
“자, 이제…….”
라엘의 시선이 한쪽에 곱게 빻아져 있는 고춧가루를 향했다. 뭐, 통 안에 있는 것이 비주얼은 별로지만 끈적거리고 달짝지근하고 뭐 이것저것 짠 것도 들어가고 마늘도 들어갔으니 괜찮겠지. 일단 사람이 식용으로 쓰는 재료들이니 먹고 뒈질 일은 없을 거라고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고춧가루를 부어라!”
“부으라신다!”
포대 안에 담겨 있는 고춧가루가 통 안으로 힘차게 투하되기 시작했다. 통이 근처에 있어서인지 고춧가루를 붓기 시작하자 라엘의 눈이 붉게 충혈되다가 눈물이 펑펑 솟아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라엘이 울잖아!”
라엘의 김장(?)을 지켜보던 레온이 소리를 빽 질렀다. 김장 현장에는 함께할 수 없었던 레온이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김장 장소를 자신의 집무실 바깥에 있는 정원으로 선택하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라엘이 집무실에나 짱박혀 있으라고 말했기에 얌전히 그곳에 있었지만, 오전부터 레온은 창문에 매달려 라엘의 늠름한 뒷모습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런 레온이 라엘의 눈물을 보았으니 그 이유가 무엇이 됐든 바깥으로 뛰쳐나가려는 것은 본능과도 같은 일이었다.
“안 됩니다!”
“놔라!”
레온은 제 허리며 다리며 팔을 붙잡는 이들을 뿌리치면서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성인을 몇이나 달고 걸어가는 것이 녹록할 리가 없다. 레온이 버럭 소리 질렀다.
“황명이다! 이거 놔아!”
“고정하시옵소서어어억!”
“라엘 님이 절대로 오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라엘이 울고 있잖아!”
본래도 인간의 스펙이 아닌 레온이었다. 게다가 라엘의 일이라면 그마저도 뛰어넘어 버리는 그를 신하들이 온전히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그들은 나중에 쓰려고 아껴 두었던 라엘의 전언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황명을 거부하다니 반역이냐아!”
“라엘 님께서 폐하가 정원에 나오면 각방 쓰자고 하셨습니다!”
뚝. 그 순간 레온의 움직임이 멈추고 몸에 힘이 빠졌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고 다시 창문으로 돌아갔다. 무서운 단어였다. 각방은. 미친 사자에게 목줄을 채울 만큼.
하지만 무시무시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황제를 얼마나 더 막아 줄지는 모를 일이었다.
고춧가루가 통으로 부어지는 순간 시작된 고통으로 라엘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매, 매워!”
“서, 섞으면 좀 나을지도 모릅니다. 가루가 날리지 않으니까요.”
“그래……. 조금만 참자.”
수석 요리사도, 정원에 모인 모든 시종과 요리사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거대한 막대기로 통을 젓는 기이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주변을 둘러본 라엘은 잠재워 두려 했던 레온에 대한 짜증이 슬슬 분노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왜! 하고많은 것 중에서! 김치볶음밥을! 먹고 싶다고!
그렇다고! 왜! 김치를!
왜! 나는!
나는! 왜! 김치를! 담고! 있는 거지!?
레온에 대한 분노와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고춧가루보다 더 활활 불타기 시작했다. 라엘의 분위기가 심상찮은 것을 느낀 것인지 그 분노를 감지한 것인지 시종들이 통을 휘젓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마치 믹서기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저들도 짜증 나겠지? 뭐 이딴 걸 다 만들고 있냐고! 하면서! 다, 알 것 같다. 라엘도 꼭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 세계의 첫 번째 김치가 탄생한다면 그 맛은 분명히 짜증 가득한 맛일 것이다.
고춧가루 양이 양이니만큼 역시 쉽사리 가루가 가라앉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도 눈물은 멎었다. 라엘은 손수건으로 눈 아래를 꾹꾹 누르며 통 속에 드디어 양념장이 만들어진 것을 보았다. 사다리를 올라가서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자 비주얼이 나름 익숙한 것이 나왔다. 음. 의외로 괜찮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양념장을 배추에 발라야 하는데……. 음…… 잘, 봐.”
양념장이 완성되자 배추 한 포기와 양념장이 곱게 접시에 담겨 대령 되었다. 라엘은 손을 씻고 배추와 양념장을 노려보았다. 이게 속부터 바르는 게 맞던가? 숨이 죽은 배추-비슷한 채소-를 비장하게 바라보던 라엘은 어설픈 손놀림으로 배추에 양념을 바르기 시작했다. 배춧잎을 들어 가운데부터 차근차근 양념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그 솜씨는 빈말로라도 썩 훌륭하다 할 수 없지만 곁에 있는 사람이 워낙 유능한 요리사들이다 보니 라엘이 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오. 프로네.”
요리사들이 라엘과 비교도 되지 않는 프로페셔널한 손놀림으로 배추에 양념장을 바르기 시작했다. 속도도 달랐지만 양념이 균일하게 발리는 것조차 달랐다. 대단하다. 배추 포기들이 하나씩 새빨간 양념장이 발리자 그것들이 척척 쌓이고 그 사이사이 숙성 연어가 끼워졌다. 이대로 괜찮은가 싶다가도 비주얼이 나름 김치같이 나왔으니 정말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들었다. 모두가 모여 양념장을 배추에 바르고 (아마도)김치를 통에 쌓는 것은 김장하는 모습, 그 자체였다. 아, 왜 눈물이 나고 그러지? 감동해서 그런가?
하지만 밀려오는 감동도 잠시, 라엘이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생겼다.
“아악!”
첫 번째 비명은 꽤 먼 곳에서 시작되었다. 라엘이 고개를 돌렸을 때는 그 옆에 있던 시종도 눈을 감싸며 옆으로 쓰러지고 있을 때였다. 그는 더 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그 비명이 모든 것의 시작을 알렸다.
정원 곳곳에서 신음과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소리의 높낮이도 추정할 수 있는 고통의 강도도 달랐지만 분명히 그것은 모두 고통을 참는 소리였다.
몸을 웅크리며 고통을 참아내는 사람. 무릎 꿇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 그리고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
뜯어진 배춧잎의 잔해가 널브러져 엉망진창인 정원 위에 이번에는 시종과 요리사가 구르기 시작했다.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리고 문득 라엘은 깨달았다. 자신의 눈에서 다시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어쩌면 감동의 눈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던 라엘은 점점 더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리고 그 순간,
“……!”
라엘의 몸에도 이상 신호가 왔다. 눈가가 화끈거리며 눈물이 살짝 맺혀 있던 눈에서 폭포수처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라엘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닦으려고 했지만 그것이 굉장히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는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손은 씻었지만 조금 전 양념할 때 맨손으로 했었다.
“으아아악!”
“라엘 님!”
“따가워!”
라엘이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인 채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라엘의 비명에 마치 막힌 둑이 터진 것처럼 고통을 참고 있던 사람들까지 비명 지르기 시작했다.
“죽을 것 같아!”
“아아악!”
“따가워!”
“엄마아!”
“살려 줘어-!”
조금 전까지 다소 시끄럽긴 했지만 평화롭게 김장하던 정원은 이 순간 그야말로 지옥의 불구덩이를 방불케 하였다. 각자 개성대로 소리 지르며 괴로움을 표현하는 아비규환을 가르며 들려오는 목소리에 라엘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펑펑 솟아오르는 이 순간 따끔거리는 공기를 가르며 들려오는 레온의 목소리는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이, 인간이! 집무실에 있으라니까!
“라엘!”
“아, 안 돼! 오지 마요!”
이미 늦었다. 레온은 라엘의 외침을 무시하고 그에게로 달려왔다. 레온은 재빠르게 라엘의 손에 장갑을 끼우고 그를 끌어안아 어마어마하게 매운 냄새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레온의 눈에서도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라엘이 레온의 팔을 꽉 잡으며 말했다.
“아, 안 돼……. 당신까지……. 지금이라도 빨리 가요!”
“내가 어떻게 널 두고 가.”
마주 보는-것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비장하게 눈물을 흘리며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의 뒤편으로 의사와 마법사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무척이나 침착한 난장판이었다.
* * *
상황이 정리된 것은 약 두 시간 뒤였다. 원치 않게 눈물바다가 만들어진 원인은 어렵지 않게 밝혀졌다.
“고추가 문제라고요?”
라엘이 기가 막힌다는 듯 되물었다. 라엘이 고추라고 말하는 순간 고추가 된 그 채소 중 한 가지의 문제였다. 약초로도 쓰인다는 그 채소는 굉장히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비아로는 생으로 있을 때도 매운 냄새를 풍기긴 하지만 말려서 가루를 낸 뒤 물에 섞으면 매운 성분이 공기 중으로 퍼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상황을 수습하는 것에는 연금술사의 도움도 필요했다. 그는 미처 가루로 빻아지지 못한 고추 한 조각을 보았고 모든 문제의 원인을 파악했다.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매우 괴롭습니다.”
요컨대 자연산 최루탄을 건드린 것이었다. 연금술사들이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마법사들은 공기를 정화시켰다. 의사들이 눈을 깨끗이 씻기고 중화제를 발라 주고서야 의도치 않게 무저갱의 고통을 맛본 사람들이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럼 또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중화제로 쓰이는 약초를 함께 넣어 보는 것으로 완화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거야?”
“네.”
“구하기 어려워?”
“아니요. 다른 치료제로도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황궁에도 충분히 비치되어 있을 겁니다.”
“그럼 그걸 다 가져와.”
라엘의 말에 레온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라엘?”
“왜요?”
“약초는 왜…….”
“저걸 넣어야 아까 같은 일이 안 일어난다잖아요.”
그러니까 라엘은 이 지경이 되어서도 김장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레온은 당황해서 그를 말리려 했지만 라엘의 의지는 굳건하여 말릴 수 없었다.
“그럼 얘들 다 데려가!”
라엘은 문제 파악이 되었으니 괜찮다고 말했지만 레온은 강력하게 의사와 마법사와 연금술사가 동행할 것을 주장했다. 확실히, 언제 어떤 문제가 다시 생길지 알 수 없었으므로 라엘도 결국 김장 대군에 그들이 끼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강력한 주장을 한 레온은 안전의 문제로 다시 집무실로 끌려갔다.
“라엘!!”
“……이렇게 된 이상 내가 꼭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줄게요!”
“기다릴게!”
눈물이 절로 나는-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안타까운 헤어짐이었다.
* * *
김장이 끝난 뒤 라엘은 레온에게 말했다.
“김치는 한 통만 남기고 다 버리죠.”
“평생이 걸리더라도 내가 다 먹을게.”
“절 홀아비로 만들 셈이에요?”
워낙 여러 재료가 섞여 있다 보니 맛도 제각각이었다. 라엘은 그중에서 문제의 약초가 들어가지 않은 가장 맵지 않은 것만 따로 고르도록 하고 정원에 파묻었다. 그래. 김치볶음밥은 익힌 김치로 만드는 게 맛있……지만 과연 이것이 본래 맛의 1%라도 따라갈 수 있을지는 솔직히 회의가 든다. 그래도 레온이 드물게 뭔가를 바란 것이라 해 주고 싶긴 했었는데 말이다.
“음.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회의를 해 봐야겠군.”
라엘을 홀아비로 만들 수는 없지. 라엘보다 자신이 먼저 죽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 뒤에 엄한 놈이 그를 유혹이라도 하면 귀신이 되어서도 쫓아다닐 자신이 있다. 뭐,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이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이지만. 그걸 위해 역시 김치는 처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다만 그 양이 어마어마한 데다가 양념에서 시작된 엄청난 화학반응은 그냥 가져다 버리기에는 부담스러운 감이 있었다.
“일단 강물에 양념을 씻고 나서 배추들은 묻어 버리면 되지 않을까요?”
어쨌든 썩어서 사라질 수 있는 음식이라는 장점이 있는 것이 김치다. 레온도 괜찮은 해결이라고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물이 오염될 테니 미리 물을 받아 두라고 해야겠군.”
“아, 그거 연구하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 엄청난-마치 최루탄 같은- 화학반응에 경악한 마법사와 연금술사가 연구용으로 사용하겠다고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샘플은 충분히 챙겼으니 걱정할 것 없어.”
“다행이네요.”
“그래, 다행이지.”
그렇게 김치소동은 마무리 지어졌다.
……마무리 지어진 듯했다. 적어도 그들 선에서는.
그저 상류에서 사흘 동안 김치 양념을 씻어 내는 동안-너무 매워서 도저히 하루에 다 씻을 수가 없었다- 하류 쪽에서는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다. 거기까지 양념이 희석되지 않을 줄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레온은 허겁지겁 신관과 마법사를 파견하여 정화의 의식과 마법을 펼쳐 수질을 복구시켜야 하는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 있었다.
* * *
정원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라엘이 후-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변에 시립해 있던 시종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큰일이네.”
그의 중얼거림에 큰일이 난 것은 시종들의 머릿속이었다. 그들의 머릿속이 미친 듯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안 돼! 설마 라엘 님이 또 울적해졌다거나 고향 생각이 났다거나 아니면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졌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겠지!?
“내가 고민이 있어.”
“어떤 고민이십니까, 라엘 님?”
라엘의 말에 시종장이 빠르게 답했다. 라엘의 기분 상태에 따라 레온의 상태가 달라지고 황제의 기분 상태에 따라 궁의 분위기가 모두 바뀐다. 궁에 흐르는 분위기에 맞춰 행동할 수밖에 없는 시종들로서는 라엘의 기분 상태가 언제나 핫이슈였다.
“폐하의 탄신일이 얼마나 남았지?”
“열아흐레가 남았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탄신제 준비로 성안의 사람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바깥의 축제야 관리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일주일 동안 성안에서 열리는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늘 인력이 부족했다. 성의 사람 대부분이 탄신제에 관련된 일을 하나씩 맡느라 정신없을 정도였다. 정말 기본적인 업무 이외에는 그 준비로 바쁠 정도니까. 하지만 라엘의 시중을 들 사람은 따로 빼놓고 탄신제 준비에도 차출하지 않았으니 그만큼 그들의 임무-라엘이 우울해하지 않도록 하기-는 훌륭하게 완료되어야 했다.
레온이 라엘의 고향 음식을 먹고 싶다는 말 한마디를 했다는 이유로 생화학 무기에 준하는 엄청난 요리가 탄생한 것도 벌써 보름이 되었다. 레온의 생일 선물을 위해 이런저런 요리를 배우는 동안-물론 레온이 준비한 김장 재료로 모두 무너졌지만-은 나름 의욕적으로 지내던 라엘은 김장 뒷수습이 완전히 끝나자 이전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고야 말았다. 그는 다시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것을 피하고자 어마어마한 요리의 고통을 참아 냈던 시종들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김치보다 라엘의 향수병이 더 무섭다!
“아직 선물을 준비 못 했는데…….”
아, 그거였나? 시종들은 내심 안심했다. 향수병이 아닌 황제의 생일 선물 준비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라면 정말 다행이다. 본래는 깜짝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미 김장을 거쳐 버린 라엘은 요리라면 아주 학을 떼며 배우고 있던 것을 모두 때려치웠다. 타당한 선택이라고 모두는 생각했다. 시종장은 한껏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답했다.
“무엇을 준비해 올릴까요?”
“아, 일단 도움이 좀 필요해.”
라엘의 말에 시종장의 눈에 의문이 차올랐다. 그러다 어떻게 이해를 한 것인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요전번에는 생화학 무기라는 결과가 만들어졌지만 어쨌거나 그것과 비슷한 것일 터다. 부부간의 특별한 이벤트……를 아직 라엘은 염두에 두는 것이다. 지난번에도 시작은 그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 준다는 단순한 이벤트였으니까.
“요리는 이제 된 것 같고. 폐하 취향의 선물을 구해야겠어.”
“그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싶어서 깜짝 선물을 준비하려 한 것이지만 이미 글러 먹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무언가를 제대로 준비하는 것도 애매하고 특별한 것을 시도하는 것은 지난번 김장처럼 엄청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라엘은 고민하고 있었다. 고작 생일 선물인데…… 아니, 생일 선물이라서 문제지! 지금까지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만큼 더욱!
“일단 폐하 취향 선물을…… 알려 줬으면 좋겠어.”
“아……. 폐하의 취향…… 말씀입니까?”
“그야 내가 물어보면 다 좋다고만 하니까 도움이 안…….”
말을 이어가던 라엘은 시종장의 표정이 애매한 것을 발견했다. 물론 시종장도 적당한 선물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한 것은 맞다. 하지만 라엘 하나만 있으면 세상만사가 행복한 그가 라엘이 주는 선물이 무엇인들 행복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이 새로운 문제를 만든다.
“설마, 폐하의 취향을…… 몰라?”
“제가 모른다기보다는 폐하께서는 워낙 가리시는 것도 없고 특별히 선호하는 것도 없으셨습니다만…….”
“정말? 관심 가지던 것도 없다고?”
시종장은 몹시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송구하오나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폐하께서 관심을 가지신 것은 라엘 니…ㅁ….”
“그만, 거기까지만.”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이쪽에도 워커홀릭이 하나 더 있었지, 참. 자신을 만나기 전의 레온은 무척 익숙한 느낌의 누군가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니까 다니엘만 미친 듯이 나랏일을 하는 줄 알았더니 레온도 라엘을 만나기 이전에는 삶이 제국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 인간 혹시 몰래 용병단 하나 만들어 둔 거 아닐까? 아니다. 황제급이라면 어디 도시 정도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림자 황……. 아니야. 상상을 하지 말자. 세계 종말이 앞당겨질 만한 엄청난 상상을 한 것 같아서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라엘과 시종장과 주변의 시종들까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보았지만 결국 괜찮은 소득이 없다. 뭘 받아도 좋아하는데……. 그냥 좋아하기만 해서는 라엘이 제대로 만족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요리로 준비하기에는 지난 김장의 상처가 너무 크고 깊다. 시종장이 점잖게 말했다.
“라엘 님께서 무엇을 하더라도 폐하께서는 좋아하실 겁니다.”
“그게 문제였잖아.”
“하지만 무엇이든 라엘 님의 노력이 담겨 있지 않습니까?”
김장 이전에는 섬세한 배려를 보여 주는 이벤트를 권했던 시종장이었지만 그도 다시 요리를 권할 자신은 없었다. 거 참, 인생 한 번 무미건조하게 살아왔다 싶어 라엘은 에잉, 하고 짜증을 내다가 포기해 버렸다.
“아, 몰라. 그냥 대충 폐하가 나한테 해 줬던 것을 해 주면 되겠지. 자기가 생각하기에 제일 좋은 걸 나한테 해 줬을 거 아니야?”
나름의 논리적인 분석으로 낼 수 있었던 결론이다. 제법 괜찮았는지 주변 사람들도 동의를 아끼지 않았다.
“현명하신 생각입니다. 그럼 무엇을 준비하면 될까요?”
“아, 그럼…….”
라엘은 생각나는 것들을 하나씩 읊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열심히 종이에 목록을 작성하던 시종장의 손이 어느 순간부터 멈춰 버렸다.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시종장과 그 뒤의 시종들을 보며 라엘도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조금…… 그렇지? 하지만 이 선물을 줄 때 폐하가 제일 즐거워 보여서…….”
“……확실히 그러셨지요.”
모두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라엘의 말을 반박할 사람도 없었다. 정말로 그 말 그대로였으니까. 라엘에게 그것을 선물할 때 레온의 표정은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었고, 그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과정도 누가 보아도 행복한 사람 그 자체였다.
마주 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라엘은 다시 필요한 물건을 읊기 시작했고 시종장은 그것을 적기 시작했다. 시종장의 손이 조금 떨리는 것을 모두가 보았지만 다들 같은 기분이었기에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 * *
탄신제 기간에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에는 늘 그렇듯 많은 손님이 방문했다. 결혼식을 치르고 첫 번째로 맞이하는 탄신제 때는 긴장하기도 했었지. 워낙 대륙급으로 유명해진 남자 황비를 직접 보고 싶은 사람들이 그만큼이나 많았고 레온은 내내 라엘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뭐, 그때도 그랬지만 탄신제 연회는 별일 없이 끝났다. 사실 라엘은 크게 신경 쓰는 부분은 아니었다.
누가 대놓고 뭐라고 해요?
지금 황제와 그가 가장 총애하는 배우자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대륙에서 극히 드물 것이다. 구구절절이 옳은 소리인지라 이후에는 라엘도 적당히 참석하고 싶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얼굴만 내미는 식으로 대응해 왔다.
이번에도 황궁을 방문한 손님을 위한 무도회가 열렸지만 레온과 라엘은 간단한 환영의 인사만 남긴 뒤 방으로 돌아왔다. 화려하고 무거운 옷을 벗어 내고 나란히 침대에 눕자 레온이 두 팔을 벌렸다. 나이도 더 많은 주제에 귀여운 짓을 한단 말이지? 라엘은 피식 웃으며 못 이기는 척 그의 품에 안겼다. 레온은 몹시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라엘의 등을 쓰다듬었다.
“정말 받고 싶은 선물은 없어요?”
따로 준비한 것은 있었지만 라엘은 몇 차례 레온에게 가지고 싶은 것이 있는지 확인했었다. 그때마다 레온은 그가 따로 준비할 것이 없다는 확신밖에 주지 못했다. 혹시나 해 다시 물었지만 레온은 답했다.
“네가 지금 내 곁에 있는 것이 기적이고 선물인데 뭐가 더 필요하겠어?”
“여전히 느끼한 소리를 잘해요.”
“네게만 하는 거야.”
“그래서 봐주는 거예요.”
키득거리며 레온의 품에 얼굴을 묻자 뺨과 닿은 가슴이 작게 달싹이며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 퍼진다. 미소에 감싸이는 듯한 느낌이라 퍽 기분이 좋다. 다소 느끼한 답이긴 했지만 너무나 고된 과정을 거쳐 얻게 된 것이 서로였기에 라엘도 레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서로를 품에 안고 웃을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서로에게는 선물이고 축복이었다.
“생일 축하해요, 레온.”
“오늘 받은 어떤 선물보다 네 축하의 말이 가장 기뻐. 고마워, 라엘.”
라엘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레온이 환하게 웃었다. 고개를 들자 레온과 눈이 마주쳤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아름다운 미소를 마주하자 뇌가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빈말이 아니라는 듯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얼굴도 몸도 끝장나게 잘생겼다. 남편 얼굴 하나는 정말로 잘 고른 것 같다. 사실 얼굴과 몸 말고도 잘나지 않은 구석은 없지만. 머리도 좋고 똑똑하고 성격도 이만하면 괜찮고 다리도 길고…….
“졸려?”
“아…….”
“잘 자.”
피곤했는지 레온의 장점을 세는 것이 마치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같은 느낌이 들었다. 라엘의 눈이 천천히 끔뻑거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아직 셀 것이 많은데 이건 좀 곤란한 것 같기도……? 노곤하게 하품하며 라엘은 남은 장점을 대충 퉁쳐서 생각하기로 했다. 나만 보는 미친놈이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두 눈을 끔뻑이는 라엘을 무척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레온은 그의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잠이 홀딱 다 깬다. 다시 생일 선물을 물어보면 “생일 선물은 너로 좋아.” 이딴 말을 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드는 표정이다. 하지만 너무 피곤해서 정말 이제는 더 버틸 수가 없다. 라엘은 결국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다.
레온은 잠든 라엘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며 자세를 편하게 잡아 주었다. 자신의 품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축하의 말을 건네는 것만큼 행복한 선물이 어디 있을까? 라엘은 선물을 주고 싶었던 것 같지만 역시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조심스럽게 잠든 라엘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던 레온이 작게 말했다.
“사랑해.”
“……나도요.”
잠든 줄 알았던 라엘이 퍼뜩 깨어 우물거리며 대답하더니 다시 레온의 품에 파고들어 곧 고른 숨을 내쉬었다. 잠꼬대가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숨 쉬는 듯 자연스럽게 사랑한다 말하고 그에 응해 주는 것 때문에 몸이 점점 강인해지는 기분까지 든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빠르게 뛰는 심장 때문에 가슴이 터졌거나 늑골이 금가거나 호흡 곤란으로 숨이 넘어가지 않았을까? 누군가가 들으면 닭살을 대패로 긁어낼 생각을 하며 레온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제 품에 안겨 머무르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 * *
“레온, 일어나 봐요.”
“……아. 라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입술부터 내미는 레온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라엘은 침대 밖으로 걸어 나왔다. 비몽사몽한 가운데에서도 그를 쫓아가려던 레온은 발목이 콱 잡히는 느낌에 정신이 확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설마, 설마 하며 발을 살짝 흔들자 ‘절그럭’하는 익숙하고도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잠이 홀딱 깼다. 레온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발목에 느껴지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지만 역시 잊지 못하는 감각과 그런데도 미소 짓고 있는 라엘의 얼굴에 괴리가 느껴졌다. 아직 잠이 덜 깼나?
“……라엘?”
“오랜만이죠?”
“이거 악몽이야……?”
“뭐라는 거야. 이불 걷고 확인해 봐요.”
솔직히 좀 무섭다. 두려움을 꾹 누르며 레온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냈다. 역시 족쇄가 채워져 있잖아! 울상을 지으며 라엘을 보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라에엘…….”
“좀 자세히 봐봐요.”
이게 악몽이 아니라면 대체 무언가 싶다만 라엘이 시키자 레온의 몸은 자연스럽게 그의 권유대로 움직였다. 발목을 감싸고 있는 은빛의 족쇄를 유심히 살핀 레온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음. 예전에 우리가 나눠 가졌던 사랑의 증표는 좀 멋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신경 좀 써 봤어요.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오묘한 기분이 들지만, 마음에 드는 편이라고 해야 하나?”
“흠. 미묘한 반응이지만 마음에 든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편일까요?”
넋이 나간 듯한 말투를 따라 하자 레온도 결국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솔직히 심장이 바닥을 굴러떨어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놀랐고 소름 끼쳤지만 지금 발목을 감싸는 족쇄는 라엘의 말대로 이번에는 정말 사랑의 증표였다.
이전에 사용했던 족쇄는 서로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기에 이미 처분하였지만 그 모양새는 여느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평범했던 지난번 족쇄와는 달리 이번에 채워진 족쇄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 어느 누가 족쇄에 장미와 사자의 문양을 새기고 정중앙에 이니셜을 넣을 생각을 하겠는가? 심지어 L♥R이라는 유치한 문구에 하트와 장미무늬는 붉게 칠까지 되어 있었다. 섬세한 모양새에 기분이 정말로 미묘하면서도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채워 둔 당사자도 웃음을 참지 못했기에 두 사람은 족쇄를 보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니셜은 우리 이름인가?”
“유치할수록 기쁨은 배가 된다고 배웠거든요. 어때요, 힘 좀 써 봤는데?”
“누구에게 자랑은 못 할 선물이네.”
“꼭꼭 감춰 두고 혼자만 보라고 만든 거예요.”
아무리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사는 라엘이라고 해도 제국의 황제와 황비가 변태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건 레온도 동감일 것이다. 그는 이제 미묘한 웃음을 집어치우고 이 상황을 즐기기 시작했다. 깜찍과 끔찍 사이를 오가는 이벤트는 정말로 신선했다.
레온은 침대 밖으로 걸어 나올 때 족쇄에 매달린 사슬이 챠르륵 소리를 내며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음, 다행이다. 확실히 예전에 라엘이 사랑의 증표라며 채웠을 때와는 달리 사슬은 무척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은빛은 아주 익숙한데?
“사슬은 재활용?”
“길이가 이만 한 미스릴 사슬을 어디서 구하겠어요? 만만치 않아서 창고에서 꺼내 왔죠.”
“그때 고생 좀 하긴 했지.”
“하하. 그때만큼 레온, 당신이 미친놈 같을 때가 없었거든요.”
“정말로 미쳤었거든, 너에게.”
“맙소사. 또 봉인 풀었다. 느끼함은 잘 봉인해 두랬죠?”
타박하는 말과는 다르게 라엘은 레온의 입술에 쪽 소리 나도록 키스한 뒤 문 쪽으로 움직였다. 레온이 따라오려고 했지만 라엘의 손짓에 그는 얌전히 침대로 돌아가 그 위에 걸터앉았다.
“기다려 봐요. 선물 그게 끝은 아니니까.”
“이게 기대되는지 무서운 건지 모르겠어.”
“심장을 다섯 배로 떨리게 해 보려고 기획에 힘 좀 썼지요.”
문밖으로 나갔던 라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들과 함께 돌아왔다. 라엘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때까지는.
“당신이 준비해 준 남국의 과일을 구해 와 봤어요. 취향껏 골라 보세요.”
커다란 바구니에 담긴 것은 어쩐지 익숙한 이국의 과일들이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똑같은 것으로 구하려다 보니 한 군데서 구한 것도 아니고 산지가 각각 다른 왕국이더라. 이런 참신하게 미친 사랑꾼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라엘은 직접 레온 앞에 과일바구니를 가져다주었고 레온은 결국 참지 못하고 큰 목소리로 웃어 버렸다.
“이게 뭐야?”
“우리 레온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죠. 이 중에서 하나 정도 취향에 맞는 과일이 없겠어요?”
“다 좋은데.”
“일단 먹고 이야기해 봅시다.”
예상 못 한 답은 아닌지라 이미 준비한 것이 있었다. 레온은 미리 한 조각씩 잘려져 있는 과일을 다 먹어야 했다.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과일을 하나 골랐지만 먹을 수는 없었다. 과일은 개수도 많았지만 종류도 무척 많아서 한입씩 먹었을 뿐인데도 배가 꽉 찰 정도였다.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이걸 디저트로 먹어야 해요.”
“좋지.”
물론 옆에서 보는 시종들은 참신한 고문법인가?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과일이었지만. 과일바구니 선물을 마친 라엘은 다음 시종을 불렀다.
“또 있어?”
“이제 시작인걸요. 자아. 선물로 들어온 비단 중에서 레온에게 어울릴 만한 것을 찾아서 옷을 지어 봤죠. 자, 입어 보시…… 음! 묶였으니 오늘은 상의만 입어 봅시다.”
무지막지하게 화려하게 장식된 상의는 아무리 보아도 평소에 입고 다니라고 만든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원래 한정품은 보관용이죠.”
참신한 헛소리였지만 레온은 이미 라엘이 손수 옷을 갈아 입혀 주는 것에서 모든 생각을 멈췄다. 라엘은 “음, 역시 잘생겼군!” 따위의 말을 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기시감이 드는데?”
“앞으로 더 많이 들걸요?”
그리 말한 라엘은 또다시 다음을 외쳤다.
“열심히 일하는 당신이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레온은 털이 곱고 흰 짐승을 얼결에 품에 안았다. 빽하고 우는 짐승을 저도 모르게 쓰다듬으며 레온은 자신의 선물을 받았을 때 라엘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하는 것을 의도치 않게 체험학습하게 되었다. 사실 잠에서 깨자마자 얼떨떨한 상황이 만들어진 거라 뭔가의 판단을 하기에는 어려웠지만.
기억력도 좋지. 이후로 라엘은 레온이 예전에 자신에게 해 줬던 그대로의 선물을 준비해서 그에게 안겨 줬다. 라엘의 입장에서는 아직은 자신이 다니엘이라고 알고 있을 때 미친 듯이 밀고 들어오던 레온이 가장 기뻐 보였기에 준비한 이벤트였다.
“먹여 줄 테니 골라 봐요.”
“이걸로.”
과일 때문에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라엘이 먹여 준다면 배쯤이야 백번이라도 터져도 괜찮다. 유명한 파티시에의 과자며 장갑이며 옷이며 기타 등등을 시종들이 순서대로 돌아가며 레온의 앞에 쌓아 두었다. 레온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이 기뻐서 자신에게 그렇게 해 준 것이 아니냐며 선물과 이벤트를 준비했다는 라엘이 그저 사랑스러울 뿐이다. 빈말이 아니라 사실 그에게는 무엇을 받아도 기뻤기에 레온은 환하게 웃었고……
거짓말처럼 라엘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니까 바깥 정원에서 가진 둘만의 연회를 말하던 그 시점이었다.
“라엘……?”
라엘의 이상을 빠르게 알아챈 레온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라엘은 손에 들고 있던 옷을 노려보며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발. 못 해 먹겠네.”
손에 들고 있는 옷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방금까지 하하호호 신나게 선물하고 깨를 볶으며 닭살을 유발하던 라엘의 돌변에 레온은 물론 뒤쪽에 시립해 있던 시종과 새로운 선물을 가져오던 시종들이 크게 움찔했다. 레온은 엄청나게 당황했다.
“라엘, 무슨…… 왜…….”
레온의 목소리에 라엘이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무척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그를 마주 보았다. 라엘이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했다.
“아……. 레온 당신 때문이 아니……. 아니, 아니지. 당신 때문이었네. 하하.”
당황하여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레온을 내려다보며 라엘은 다시 정신을 다잡았다. 하지만 역시…… 순식간에 닥쳐온 우울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라엘의 표정이 나아질 기세를 보이지 않자 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족쇄…….”
“……라엘.”
“채우고…… 좋았어요?”
등허리에 소름이 쫙 끼쳤다. 라엘이 스산하게 미소 지었다.
“이걸 보고, 하하. 쪼개네?”
“……라엘?”
“빌어 처먹을 일들이 생각나네요. 내가 미쳤지!”
“라엘, 잘못했어!”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사과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겠다. 레온은 라엘을 다급하게 부르며 미친 듯이 사과했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잘못은요, 무슨.”
“내가 다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요?”
“다! 모두 다!”
아마도 그것이다. 레온에게 예전에 자신이 선물 받았던 그것을 재현하다 보니 예전에 구금되어 있었던 그때가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다. 지금이야 잘되었다고 하지만 그때 라엘의 상태가 어땠던가. 요즘에도 그에 관한 악몽을 꾸고 일어나자마자 레온의 턱을 날려 버리는 일이 간혹 있었다. 그만큼 예민한 일이었다. 그때마다 레온이 할 수 있는 것은 무릎 꿇고 라엘에게 잘못했다고 비는 것이고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악화하였다. 근래에는 향수병을 의심하긴 했지만, 이미 라엘은 결혼 이후로 쉽게 감정 기복이 커지고는 했다. 결혼 전후로 겪을 수 있는 우울증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워낙 사랑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 스펙터클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엘 자신도 시간이 지나고 점차 상황이 안정되자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고, 생일 선물을 준비할 때는 그것을 완전히 까먹을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었다. 아니, 가볍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그저 3년 동안 꽁꽁 봉인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라엘의 안에 휘몰아치는 감정을 레온이 모두 알 수 있을 리는 없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그 일의 감정의 봉인이 풀렸다는 것을. 그것은 레온에게 최악의 형태로 돌아올 것이다.
라엘은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레온. 레온 잘못이 아닌 건 알아요. 그런데 기분이…….”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그때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됐어.”
레온은 미친 듯이 사과했지만,
“아니, 아니에요. 이미 지나간 과거를 들먹여서 무얼 하겠어요? 그냥 제 기분이 해결되지 못한 일 때문에 이런 것뿐이에요. 레온이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논리적으로 자가 진단을 하는 사람을 설득할 방법은 없다. 그리고 대개의 자가 진단에는 자가 처방이 따라오는 법이다. 라엘이 말했다.
“하지만 당분간 당신 얼굴을 볼 자신이 없네요. 당분간 바람 좀 쐬고 와야겠네요.”
“……라엘? 라엘? 라엘!”
청천벽력 같은 말에 레온이 당황했지만 라엘은 차갑게 등을 돌려 발코니 문을 열었다. 당황한 시종들이 무어라도 하려고 했지만 차갑다 못해 얼어붙을 것만 같은 라엘의 시선에 꿈쩍도 하지 못했다. 레온이 절규했다.
“안 돼! 가지 마!”
“때가 되면 돌아올게요. 안녕.”
발코니 난간에 다리를 척 올린 라엘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랑해요, 레온. 생일 축하해요.”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코니 아래로 뛰어내렸고 그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레온은 서둘러 그 뒤를 쫓으려 했지만 망할 놈의 미스릴 사슬이 거기까지는 닿지 않아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안쪽의 상황은 모르겠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몇몇 시종이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라엘을 붙잡기 위해 뒤를 쫓았지만 결국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평생을 잊지 못할 생일 선물을 받은 레온은 절규했다.
“라엘, 내가 잘못했어! 제발 돌아와! 뭐 하고 있어? 열쇠! 빨리 열쇠를 가져와!”
“여, 열쇠는 라엘 님이……!”
“맙소사!”
여전히 철저한 라엘은 본능적으로 족쇄의 열쇠를 들고 튀었다. 레온은 벽으로 달려가 장식되어 있던 칼을 집어 사슬을 내리쳤다. 장식용이라지만 두 사람의 방에 장식된 만큼 아름다운 명검이었고 라엘의 취향에 따라 날까지 잘 들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슬에 내리치자 이가 모조리 나갔다.
“젠장, 미스릴!”
급한 마음에 장식장 위의 금속 조각상으로 사슬을 내리쳤지만 조각상이 뭉그러져 금속 덩어리가 되는 결과만을 맞이했다. 레온은 정말로 의도치 않게 당시의 라엘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역지사지의 기회를 얻었다. 정말 끔찍했다.
설마, 이게 생일 선물인가? 라엘을 이해할 기회? 혼란스러운 머리와 마음을 다잡으며 레온은 뒤늦게나마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는 황제였고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최선의 해결책을 내야 하는 사람이니까.
“빨리!! 기사단장!! 빨리!! 열쇠공!!!!!”
그리고 실패했다.
자고로 업보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인생은 날로 먹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섬세하다.
* * *
레스토랑 리넷은 오랜만에 찾아온 단골손님을 반가이 맞이했다. 언제나 예약 손님이 꽉 차 있는 유명한 레스토랑이었고 탄신제 축제의 끝물이라 무척 바쁘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특별한 손님이 한 명 정도는 있었다. 그는 예약하지 않아도 언제든지 환영받는 손님이었다.
“오랜만에 오셨군요.”
“하하. 어쩌다 보니 오늘도 예약 없이 와 버렸네요. 자꾸 폐를 끼치게 되네요.”
“폐라뇨. 저희 직원 중에서 그리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손님께서는 정말로 특별하시지 않습니까? 늘 앉던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리넷에 올 때마다 언제나 앉는 창가의 자리에 안내받은 라엘은 해맑게 웃으며 매니저가 내미는 메뉴판을 펼치고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여기 있는 거 전부요.”
“오늘은 평소보다 양이 조금 더 많은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성인 예닐곱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양을 보며 ‘조금’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표준의 시각으로는 맞지 않았지만 평소에 5인분 정도는 우습게 혼자 먹어치우는 라엘이다 보니 매니저의 입장에서는 조금이 맞았다. 그리고 매니저의 ‘괜찮으십니까?’는 이걸 다 먹을 수 있냐는 뜻도 아니고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과 같았다. 거의 4년 동안 리넷에 출입하며 라엘은 매니저와도 상당히 친해졌고 그는 라엘의 성향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먹을 때는 주로 스트레스를 가득 장전하고 온 상황이 대부분이다 보니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매니저에게 라엘은 힘없이 웃어 보였다.
“집사람하고 싸웠어요. 그런데 제가 잘못했거든요.”
“아……. 무척 신경 쓰이는 일이죠. 오늘은 특별히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평소대로 해 주셔도 훌륭한걸요. 전 여기서 식사를 하면 기분 나쁜 것들이 다 사라지더라고요.”
라엘의 말에 매니저가 프로의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영광입니다. 곧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평소처럼 전채요리는 생략하고 식사를 바로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해 주세요.”
풀쪼가리를 먹을 기분은 아니다.
두두두두.
주문을 마치고 종업원이 돌아가려는 찰나에 창밖에서 땅이 울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수십의 말이 움직이는 소리에 손님이며 종업원이며 창가를 흘깃거렸다. 그들은 곧 기사들이 대로를 질주하는 것을 목격했다. 축제 끝물이라지만 사람이 많은 길이었기에 아주 빠르게 달리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이 불안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이게 또 무슨 일인지…….”
매니저의 표정도 영 좋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다. 4년 전 저렇게 질주하는 기사들을 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대륙전쟁은 딱히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않은 제국의 수도에도 썩 좋은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싱거울 정도로 빠르고 훌륭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전쟁이다. 그 단어가 주는 무게는 보통 사람이 감당하는 것이 무척 힘들다. 매니저의 걱정을 알아챈 라엘이 그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네?”
“음.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왜 갑자기 저러는지는 제가 알고 있거든요. 별일 아니에요.”
“손님께서 어떻게……?”
“인맥이 좀 있어요. 어디에 말하고 다닐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것은 장담할 수 있어요. 특히 전쟁은 안 나요.”
라엘의 확신 어린 말에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가 입고 있는 옷이며 걸친 물건이며 말투며 모두 보통의 신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그가 대체 어디의 누구인지 아직도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어떤 비밀스러운 사연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이 신비스러운 손님은 쉽게 무언가를 확언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더욱 믿음이 간다.
“참. 그리고 그곳에 며칠 묵을 방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해 주시겠어요?”
“언제나 가는 그곳 말입니까?”
“네. 일주일 정도 머물 것 같네요.”
라엘의 말에 매니저는 고민하다 말했다. 그도 역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보통 이렇게 부부 싸움 후에 잘못한 사람이 집을 나오는 것은 썩 좋지 않다.
“사모님과 싸우셨다면 바로 돌아가시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하…….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 사람도 잘못한 것이 있어서 제가 시위를 좀 해야 해요.”
“아아. 어렵군요, 결혼 생활은.”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다. 알아서 잘 해결하겠지. 무엇보다 라엘의 기분은 별로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살만해요. 나름 재미도 있고. 요즘엔 잘 지냈거든요.”
“그저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지요. 잘 부탁드릴게요.”
결혼을 해도 적절한 밀당은 필요하지. 매니저는 라엘의 말에 동의하며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기사단의 이동에 놀라긴 했지만 덕분에 이 신비스러운 손님과 오랜만에 대화를 길게 나눌 수 있는 소득이 있었다.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뽐내며 반짝거리는 손님의 주문을 주방에 넘기자 종업원들의 표정에 아쉬움이 가득하다. 잘생기고 매너 좋은 이 손님의 테이블을 담당하고 싶은 사람은 한둘이 아니니까. 아름다운 것은 모두가 함께 감상해야 한다지 않는가?
라엘은 기사 무리가 길 너머로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것을 보며 턱을 긁었다. 사실 황궁을 뛰쳐나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우울한 기분은 가시긴 했다. 하지만 이대로 들어가는 것도 조금 민망하지. 특히 생일 선물을 주다가 그랬으니까.
이참에 마음에 걸리던 것을 정리할 필요도 있겠지. 솔직히 당장 들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다 보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걸지도 모른다. 뭐, 적당히 휴가를 즐기고 돌아가는 것으로 자신과 의논을 마친 라엘은 두 번째 기사 무리가 대로를 이동할 때쯤 나온 스테이크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음, 역시 최고의 맛이야!
역시 고기 위주의 식단이 필요한 때가 이럴 때다. 부부 싸움을 하면 사람이 스트레스를 풀 비밀 장소가 한두 군데 정도는 있는 게 좋다. 아마 평생 여기는 말하지 않을 거 같다. 기분 전환으로 이곳에 온 것은 잘한 것 같다. 레스토랑 리넷도, 고기도 절대로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기분 나쁠 때는 고기 앞으로 가라는 말은 진리다.
라엘은 맛있는 고기를 열심히 먹으며 조금 뒤 황궁이 잘 보이는 경관 좋은 전용 방에서 기사들이 달려 나가는 광경을 지켜보는 자신을 상상하며 더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벌써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기분이다. 물론 로윈을 향해 달려가는 기사들과 아직도 미스릴 사슬을 풀지 못한 레온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 * *
짹짹. 새소리를 들으며 눈을 뜬 것이 얼마 만이지? 으레 기분 좋은 아침을 설명할 때 나오곤 하는 새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 소리. 바람에 나뭇잎이 저들끼리 부대끼며 파도 소리를 만들어 내는 가운데 눈을 뜨는 아침은 최고였다.
이불은 잘 빨고 삶아 말려 뽀송뽀송하고 햇빛 냄새가 난다. 라엘은 침대를 무척 힘겹게 빠져나왔다. 이불 밖은 위험하지만 원래 인생이란 도전의 연속이다.
“아으으. 잘 쉬었다.”
라엘이 가출(?)한 지 일주일. 황궁에서는 아직도 간헐적으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따뜻하고 맑은 공기를 한껏 마시자 몽롱하고 흐릿하던 머릿속이 선명해진다. 어쩌다 얻게 된 일주일의 휴가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해 줬다. 황궁 안에 있을 때는 시간이 있어도 차분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바깥에 나오자 조금 더 편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 맛있는 것을 먹고 편한 잠자리에 혼자 누워 편하게 쉬었던 것도 도움이 된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지난 3년 동안 황궁 밖으로 나온 적이 거의 없었다.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가끔 이런 식으로 산책하는 것이 전부였지. 외박은 하루를 넘긴 적이 없다. 밖으로 나오는 것은 대부분 레온과 함께였기에 혼자의 시간을 가진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의도치 않은 결과였지만 덕분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그저 죽 끓듯 한 변덕이라고 생각했던 감정 기복. 창문 너머의 황궁을 한참 바라보던 라엘은 곧 옷을 입고 짐을 챙겨 방문을 나섰다.
“편히 쉬셨습니까?”
“늘 그렇듯요.”
“오늘 돌아가시는군요.”
“덕분에 편히 쉬었네요.”
열쇠를 반납하자 종업원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충분히 쉬었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도 어렴풋이나마 결정하였으니 충분하다.
“참. 성문의 출입 심사가 강화됐다고 하더군요.”
“아니, 왜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흉악범을 찾는 듯한 느낌은 아니라고 합니다만……. 아무래도 검문이 강화되면 여행자는 불편하니까요. 손님은 수도에 거처가 따로 있지 않으니 나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음. 그렇지요. 미리 알게 돼서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여행자가 많이 드나드는 여관이라 그런지 확실히 정보가 빠르다. 라엘은 종업원과 인사한 뒤 여관 바깥으로 나왔다. 청량한 아침 공기에 온 몸이 구석구석 씻기는 느낌이 든다. 지금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이제 마무리를 해야지.”
중얼거린 라엘은 성문 방향을 보았다. 검문이 강화되었다고 했지? 누굴 찾는 것인지는 뻔하다. 그는 멀찍이 선명하게 보이는 황궁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레온은 손톱을 이로 씹으며 초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딱히 뭔가를 하기 위해 움직인다기보다는 진정되지 않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움직임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회의실 안에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불안을 주었다.
“아직도 소식이 없는가?”
“……로윈으로 가는 길을 샅샅이 뒤졌지만 발견되지 않으셨습니다.”
기사단장의 말에 레온의 심기가 무척 불편해졌다. 라엘이 갈 만한 곳은 아무리 생각해도 로윈뿐이다. 최근 향수병으로 의심된다는 진단까지 받았으니 더욱. 이전에도 그는 스트레스가 극도로 치달으면 간혹 로윈으로 쉬러 가기도 했다. 그때는 어디로 가고 언제까지 온다고 확실히 일정을 정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래도 차라리 기약 없는 로윈행이 훨씬 낫다.
당분간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라엘의 말을 레온은 곱씹었다. 다른 도시나 나라로 갔다면 찾기가 더욱 힘들다. 그가 돌아올 것을 믿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 불안은 별개의 문제다. 레온이 마지막으로 본 라엘의 모습은 자신에게 무척 화가 났고 감정 기복이 널뛰던 불안정한 모습이었다. 그가 어디선가 안전하게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자신의 불안이 잠재워지지 않을 것 같아 레온은 라엘을 찾기 위해 사람을 내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눈치를 한껏 보며 그 규모가 줄어든 상태다. 괜히 심하게 들쑤시고 다니면 라엘이 돌아오더라도 엄청나게 화를 낼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
“폐하.”
수색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라엘은 발견되지 않았다. 기동성이 절대 부족할 리 없을 것이지만 그는 감쪽같이 몸을 숨기는 것에 엄청난 재능이 있었고, 이번에도 그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종적을 감춘 것이다. 그의 현재 상태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레온에게는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였다.
“일단 기사를 조금만 더…… 보내도록 하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는 레온을 흘깃거리며 기혼자 몇몇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진실을 동시에 떠올렸다.
자고로 배우자가 ‘바람 좀 쐬고 온다.’라고 말하면 절대로 간섭하면 안 된다!
괜히 들쑤시고 다녔다가는 이후에 더 큰 화가 돌아오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프로 기혼자들은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레온에게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다. 먼 재앙보다는 가까운 재앙을 먼저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가 아닌가?
* * *
황궁의 서문을 지키는 문지기 병사는 조금 전부터 저 멀리에서 걸어오는 한 사람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주로 마차가 드나드는 서문은 그 용도 때문에 도로 폭이 무척 넓었고, 그래서 직접 걸어오는 사람보다는 마차나 말을 타고 오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이렇게 도보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고 그럴 때는 대부분 평민이 무언가를 하소연하기 위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의 옷은 누가 보아도 귀족이었다.
“실례합니다.”
“음?”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었다. 하기야 이쪽을 이용하는 사람이 대부분 귀족이니 귀족의 얼굴이 낯이 익을 만도 하긴 하지만……. 그런데 그저 그렇게 낯이 익다고 생각하기에는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느낌에 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대장님 계십니까?”
“아, 지금 자리를 비우시…….”
“헉!”
대장님의 친인척인가? 그래서 낯이 익었던 건가? 병사는 떠오를 듯 말 듯 한 기억을 뒤지며 대답했다. 그 순간 잠시 자리를 비웠던 선임 병사가 남자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입을 쩍 벌리고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는 선임을 보며 남자가 웃으며 입술에 손가락을 세웠다.
“아, 나 알겠어요?”
“네! 네! 어떻게 제가…….”
“그럼 들어가도 되겠죠?”
“당연하십니다! 어휴, 말 편히 하십시오! 뭐해? 어서 문 열어!”
“네, 넷!”
병사는 당황해서 문을 열었고 선임 병사는 남자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나? 그런 것치고는 어째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며 남자가 말했다.
“아. 저 들어온 건…… 당분간 비밀로 해 줬으면 좋겠네요. 별문제는 없을 거예요. 들키면 제가 알리지 말라고 했다고 해요.”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고마워요. 그럼 고생해요.”
뻣뻣하게 허리를 세우고 경례하는 선임 병사를 따라 병사도 덩달아 남자에게 경례했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문 너머로 사라졌다. 문을 닫으며 선임 병사는 죽다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병사는 선임에게 물었다.
“선배님, 혹시 저분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당연히 알지.”
“전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네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나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뿐이니까. 혹시 또 오신다면 날 부르거나 보내드리고 나한테 말하면 돼. 절대로 보고하지 말고.”
“뭐 하시는 분이시길래…….”
“쉿! 알 필요 없고, 더 알려고 해서도 안 돼.”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로 높으신 분들의 사정을 일개 범인이 알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저 저 남자에 관한 한은 그가 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일신의 보존에 더 낫다는 것만은 확실하니 그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무척 현명한 처세술을 가진 병사라고 할 수 있겠다.
다행히 자신을 알아본 병사가 있어 어렵지 않게 성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괜히 소란 떨고 싶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성으로 들어온 라엘은 자신의 궁 쪽 방향을 슬쩍 보고는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성으로 들어온 것은 기분 전환이 다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상황에서는 수도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아서 들어온 것뿐이니까.
아마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얼마 걷지 않아 라엘은 기사단 초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 타이밍 좋은 것 같네.”
연무장에 서 있는 군마들을 보며 라엘은 미소 지었다. 딱 좋을 때 도착한 것 같다. 그럼 이제 한 가지만 더 마련하면 되겠는데……. 주변을 살피던 라엘은 꼭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 같은 상황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누가 보아도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막내둥이 기사가 마침 앞을 지나갔다. 역시 운 하나는 타고난 것 같다. 그는 기사의 어깨를 붙잡았다.
“누구…… 헉?”
“자네에게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
“네, 네? 저, 그…….”
“자넨 오늘부터 휴가를 갈 수 있지.”
평소라면 기뻐 마지않았을 단어였지만 라엘의 얼굴을 알아본 기사는 차마 그 기쁨을 만끽할 수 없었다. 새하얗게 질린 기사의 얼굴을 보며 라엘은 생긋 웃어 보였다.
* * *
두두두두.
말을 탄 기사 무리가 엄청난 속도로 대로를 달려갔다. 축제의 끝물 즈음부터 간헐적으로 바깥으로 달려 나가는 기사들을 보는 주민들의 시선은 처음만큼 불안하지 않았다. 기사단의 정기 훈련 때문이라는 것이 뒤늦게나마 공지되었기에 이전과 같이 그들의 출전이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문의 검문검색이 강화된 것도 안전을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딱히 불편한 것도 아니다. 빠르게 성문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기사들을 보며 주민들은 참으로 든든하다고 생각하며 일상을 이어나갔다.
“커린스 대로를 따라 로윈으로 간다!”
분대장의 말은 거칠게 귓가를 가르는 바람에 쪼개어져 뒤쪽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간신히 바로 뒤에 있는 기사 몇에게만 들리는 것을 굳이 지금 말하는 것은 그저 확인일 뿐이다. 이미 목적지는 출발 전에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긴장이 느껴진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번 임무는 무려 황비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한 비밀 작전이었다. 라엘이 사라진 것은 황궁 내에서 입단속이 단단히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사단은 그의 수색 작전을 맡으며 그가 이미 일주일 전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사는 성별을 뛰어넘어 황제의 완벽한 짝으로 보이던 그 황비를 멀찌감치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사라졌다면 정말로 보통 일이 아니다. 그 역시도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혹시라도 어떤 문제에 휘말린 것이라면……?
“속도를 내자!”
“예!”
조급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기사들은 자신들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말을 달렸다. 어서 빨리 황비를 찾아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그들을 그리 만들었다. 그들은 앞만 보며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그래서였다. 진열의 가장 뒤에서 달려오던 막내둥이 신입 기사의 말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이탈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바람처럼 말을 달리던 기사들은 숲으로 진입하는 길에서 코너를 꺾는 순간 신입 기사를 완벽하게 놓쳐 버렸다. 그리고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흠. 됐나?”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자 풀숲 안쪽으로 사라졌던 말이 다시 길로 빠져나왔다. 조금 전 말을 타고 있던 기사단 제복을 갈아입은 라엘은 말에게 있는 군장도 모두 떼어 내고 커다란 봇짐처럼 만들어 뒤에 얹어놓았다.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누가 보아도 상인 같은 모습이었다. 평범한 상인이라기에는 말이 너무 훌륭했기에 은근히 명품을 둘러주었다. 이 정도면 벼락부자 된 젊은 상인 정도로 보이겠지.
“천천히 가자.”
라엘은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네 주인도 휴가를 갔으니 너도 휴가를 보내야지.”
기분 좋은 듯 말이 푸르릉 고개를 털었다. 꽤 좋은 여행길 동무가 될 것 같은데?
“맛있는 거 많이 먹으면서 재밌게 놀자.”
이미 앞서간 기사들을 빨리 따라잡을 필요도 없었으니 라엘은 고삐를 잡고 천천히 걸었다. 말의 발걸음도 그를 따라 경쾌하기만 하다.
* * *
신전은 로윈 수도에서 멀지 않은 작고 조용한 도시에 있었다. 도시에 있는 보통의 신전에 비교하면 작은 크기였지만 이 신전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도 드물었다.
출세와는 먼 곳이었지만 신관은 이곳이 퍽 마음에 들었다. 신전이란 늘 그러하지만 이곳은 특별히 다른 곳보다도 더욱 정숙하고 고요하고 모든 것이 정결하였다. 신관은 많지 않았지만 늘 이곳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다듬는 데에 부족하지 않은 인원이었다. 신관이라지만 실상 무덤지기와 다를 것이 없다. 로윈의 왕족의 무덤을 지키는 신관은 오늘도 신관 앞 작은 마당을 쓸며 영면에 든 왕족들의 평안을 기도하였다. 누군가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닌, 그 뒤를 지켜 줄 수 있다는 것은 제게는 큰 의미였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형제님.”
신관은 미소 지으며 오랜만의 손님을 맞이했다. 그는 한 손에는 말고삐를 잡고 한 손에는 흰 꽃다발을 가득 안은 채로 신전에 도착했다. 그는 왕가의 문양이 새겨진 펜던트를 내밀어 보여 주었다.
“뵙고 싶은 분이 계셔서 오게 되었네요.”
“묘지는 늘 산 자의 슬픔을 위해 기다리고 있지요. 고삐는 묘지기에게 맡겨주시지요.”
“감사합니다. 약속도 없이 찾아왔는데 괜찮을까요?”
“그리움도 약속 없이 찾아오는 법이니까요.”
왕족의 묘지라 하지만 상당히 소박하게 운영되는 곳이었다. 이전의 로윈은 작고 소박한 느낌마저 주는 작은 왕국이었다. 다니엘 왕자 때부터 시작된 변화는 지금의 로렌 왕으로 이어져 그가 왕이 된 이후에는 빠르게 부를 축적하고 발전해 나갔지만 오랫동안 이어진 지금의 분위기는 십몇 년 만에 바뀔 만한 것은 아니었다.
신관은 묘지 입구로 라엘을 안내한 뒤 말고삐를 잡고 마구간 쪽으로 걸어갔다. 말을 매어 놓더라도 신관은 바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한 번 왕의 무덤을 방문하였을 때도 그랬다. 다니엘이 혼자 오는 것을 꺼려 하여 로브를 뒤집어쓰고 그와 함께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신관은 자리를 비운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서야 문을 두드렸다. 신관은 이곳의 방문객이 충분히 죽은 자를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끼이익.
사람의 출입이 많지 않은 듯 무거운 문은 뻑뻑하게 열렸다. 소박한 왕국이었다지만 그래도 왕족의 무덤인지라 내부는 화려했다. 마법을 머물게 하여 은은하게 발밑을 비추는 조명을 의지하여 라엘은 안쪽을 천천히 걸었다. 이전에도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문에서 그다지 먼 곳은 아니었다.
“오랜만이에요.”
답이 돌아올 리는 없지. 오래전에 헤어진 제 주군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마저 그것을 훌쩍 넘어 말을 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높은 천장에 부딪혀 돌아오는 목소리는 특히나 그를 닮아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제 것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이 그의 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오직 제 미련 때문이다.
라엘은 금빛 문양이 섬세하게 수놓아진 흑갈색 관 위에 흰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다니엘이 생전에 꽃을 좋아했었나 하는 고민이 들었지만 그는 크게 취향을 가리는 것은 없었으니 괜찮을지도 모르지. 일단 무덤에 오면 꽃을 들고 오는 것은 정해진 규칙처럼 느껴졌고, 그것을 따르는 것은 이곳까지 오는 데에 상당히 용기를 주었다. 꽃을 샀으니 꼭 이것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돌리지 못했으니까.
“자주 오지 못해서 미안해요.”
라엘이 레온과 함께 제국으로 가는 것을 택한 뒤에야 다니엘의 장례가 치러졌다. 보는 눈이 많아 장례식에는 가지 못했지만 이후에는 로렌과 부단장과 함께 조용히 이곳을 찾았었다. 드디어 차가운 그곳에서 벗어나 그의 혈육과 영면에 든 다니엘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었더라? 확실한 것은 라엘은 그 뒤로 3년 동안 단 한 번도 이곳에 찾아온 적이 없었다.
“정 없다고 생각해요?”
생전의 다니엘을 쓰다듬듯 단단하지만 차갑지만은 않은 관을 쓸어내렸다. 후. 어쩐지 힘이 빠지는 느낌이다.
난 이곳에서 무얼 찾고 싶었을까?
일주일째 아침에 번뜩 든 생각을 따라 보름을 달려 이곳으로 왔다. 그러나 몇 번이나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되돌린 것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은 이곳에 도착했고 다시 다니엘의 앞에 섰다.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머문다.
“다니엘, 당신 곁에 있을 때 정말 힘들었어요. 알아요?”
그때는 정말 멱살을 잡아 버리고 싶었지. 사람을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일을 시키니 배겨 나는 사람이 없었다. 라엘과 부단장은 그중에서도 드물게 다니엘의 마음에 찬 이들이었고 그 탓에 더 죽도록 굴려졌다. 어쩌면 주워질 상대를 잘못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몇십 번이나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나 봐요. 가끔 당신이 보고 싶어.”
아니, 어쩌면 더 자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가 살아 있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다니엘의 결심을, 상황을 미리 알았다고 하더라도 늘 후회가 맴돈다. 만약에, 만약에라도, 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아직도 전 혼자 풀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많은 일이 있었고 미친 듯이 꼬여 버린 실타래를 풀기 위해 정신없이 내달려야 했다. 그 마지막에 선택한 것에는 후회 없다. 몇 번을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라엘은 레온을 선택할 것이니까. 그럼에도 가끔 눈을 뜨며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불안감이 몰려오거나 가슴이 꽉 막히며 무언가를 잊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그런 날에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휴식을 즐기다가도 그런 감각이 머물고는 한다. 그 순간은 자신이 제국의 황비 라엘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로윈의 다니엘이나 한국의 정운이라고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에서도 머물지 못하는 느낌. 그것이 지난 시간 동안 라엘을 계속해서 괴롭혀 왔다.
“당신이 답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곳에 와 버렸어.”
다니엘, 당신은 마치 신처럼 느껴졌어요. 처음에는 그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던 만큼.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이 배워야 하는 모든 것은 그의 삶의 모방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제게 정운을 지우라고 하지도 않았고 다니엘만으로, 라엘만으로 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을 자신으로 대해 주었다. 아마도 그래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이리라. 처음으로 생을 주었고 삶을 준 사람.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걸 모르겠어.”
어쩌면 당신을 잊어야 했을까? 로윈의 다니엘로 지냈던 기억을 모두 버리고 제국의 라엘, 레온의 라엘로 살아가야 했을까?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가슴이 꽉 막히고 내가 어디에 누구로 있는지 모르겠다는 불안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까? 내가 선택한 삶이 정말로 이제는 내 삶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문제일 뿐이다. 라엘은 한숨을 내쉬며 관을 쓰다듬었다. 그가 답을 내어 줄 수는 없다. 결국 답은 스스로 내야 한다.
“……난 당신에게 미안한가 봐요.”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이…… 어쩌면.
그때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익숙한, 그러나 오늘 이곳에서 만날 줄 몰랐던 사람이 있었다.
“형님?”
“로렌.”
로렌도 이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을 만난 것이 놀라웠는지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그의 시선이 라엘의 얼굴과 관을 번갈아 가며 움직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다. 너무나도 닮은 얼굴이니까. 혹시라도 다니엘이 관 밖으로 나온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것이겠지.
로렌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늦으셨네요.”
3년 동안 단 한 번도 이곳을 찾지 않은 자신을 책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라엘이 답을 하지 못하자 로렌은 말을 덧붙였다.
“황제 폐하의 사신이 왕궁에 머물고 있어요. 성 밖에는 기사단이 초소를 만들었고요.”
“아…….”
그제야 라엘은 로렌의 늦었다는 말이 제국에서 출발하고 로윈에 도착할 수 있는 예정일을 훨씬 넘겼다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라엘은 머쓱하게 웃었다. 뭐, 라엘이 한참 도주극을 벌일 때 있었던 다니엘의 측근들이 지금은 로렌의 곁에서 일하고 있으니 어떻게 뛰쳐나왔을지 정도는 알겠지. 로렌이 다니엘의 관을 슬쩍 보는 라엘에게 물었다.
“인사는 다 끝냈나요?”
“음. 아마도.”
“시간이 더 필요하면 잠시 나가 있을게요.”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온 것은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오는 것을 피했던 이 장소에 온다면 무언가가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다니엘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라엘의 표정을 마주한 로렌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제게 시간을 내어 주시겠어요?”
이상하다. 그가 훌쩍 커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젊은 왕자는 몇 년 만에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되었다. 라엘은 그의 손을 맞잡고 무덤을 빠져나왔다. 흰 꽃잎이 옷자락에서 나풀거리며 떨어진다. 바람에 떠밀려 무덤 안쪽으로 들어간 꽃잎을 멍하니 보던 라엘은, 문을 닫았다.
* * *
푸드덕.
창문 너머로 날려 보낸 전서구가 하늘 높이 날아가는 것을 보며 로렌이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누군가의 손을 빌려 보낼 소식이 아니었기에 비둘기는 부단장이 직접 날렸다. 비둘기를 날려 보낸 그는 자리로 돌아와 로렌의 찻잔에 차를 채워 냈다. 예쁜 색으로 따뜻한 김이 차오르는 차를 따라 내자마자 그 옆으로 잔 하나가 스윽 밀어 들어왔다. 역시 비어 있는 잔의 주인은 라엘이었다. 부단장이 고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라엘의 찻잔에도 황금색 액체가 찰랑거리게 되었다.
“시종 부리듯 그러지 마십쇼.”
“아니, 로렌한테는 그런 말 안 하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
“그야 전하는 이렇게 태어나서 살아오시지 않았습니까?”
“나도 이 생활한 지 오래됐거든? 요즘엔 조금 있으면 내 발로 걷지도 못하게 생겼어.”
“거참, 대단하십니다아!”
투덜거리면서도 부단장은 웨건에서 간식을 꺼내 접시에 채웠다. 식욕 왕성한 라엘은 벌써 간식 접시를 모두 비웠다. 어차피 셋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주변을 챙길 만한 사람은 그뿐이었기에 부단장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더 투덜거리지 않고 시중을 들었다. 시종 하나라도 이곳으로 들어오면 라엘의 얼굴을 보고 유령을 본 줄 알고 기절할 거니까.
“라엘 형님,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로렌이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잘 지내고 있었나? 잠시 의문이 들었다. 부단장도 라엘과 같은 생각을 한 듯 고개를 모로 기울었다.
“잘 지내셨다면 여기 올 일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만…….”
“음. 역시 그런 건가요? 무슨 일 있었어요, 형님?”
로렌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것에 라엘은 괜히 멋쩍어졌다. 사실 자신도 모르게 이곳으로 온 거라서 무슨 큰일이 있다고 말하기엔 좀 그렇다. 특히 가출 계기가 자신의 변덕 때문인지라 더욱.
“평범한 부부 싸움이야.”
라엘의 말에 로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부단장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그래. 얼마나 평범하면 제국의 기사단 한 개 대대가 로윈 수도 성곽 앞에 초소를 차리고 있나? 하루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점점 수가 늘어나는 기사를 보고 주민들이 기겁한 것을 적당한 이유를 대어 불안을 잠재우느라 고생했다. 부부 싸움 한 번 전쟁급으로 하시는 게 보통이군요? 빈정대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한 대 맞기나 할 것이라 부단장은 고개만 저었다. 로렌이 물었다.
“다난강의 재앙이 부부 싸움 때문이었어요!?”
“……아니, 그건 그 반대라고 해야 하나.”
넘치는 사랑이 재앙이 되어 강물로 흘러갔을 뿐이다. 시작은 레온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직접 만들어 주고 싶다는 나름 기특한 발상이었으니 그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깜짝 놀랐었거든요. 열흘 내에 일주일 동안 사용할 물을 저장하라고 방이 붙었대서 말이 많았죠.”
“그래?”
“황제 폐하가 그렇게 직접 명령을 하달하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으니까요.”
특히 다난강 주변에 있는 도시는 강에 인접한 만큼 수량이 풍부하고 물을 사용하는데 단 하나의 불편함이 없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그런 도시에만 방이 나붙었으니 사람들은 당황하면서도 서슬 퍼렇게 돌아다니는 병사들을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온 집의 그릇이란 그릇에 물을 꽉꽉 채워 놓았다. 그리고 열 하루째가 되는 날,
“강이 붉게 물들며 초목이 시들기 시작했다고.”
“……끄응.”
라엘은 차마 그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아니, 고춧가루 양념을 씻는 데 그 정도로 엄청나게 피해 막심할 줄 몰랐지. 그것은 성의 마법사와 연금술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수도보다 하류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꾸물꾸물 다가오는 붉은 물을 보며 경악했었다. 상류에서 흘러오는 붉은 물은 순식간에 강을 시뻘겋게 물들였고 강가에 인접한 풀과 수초가 죄다 말라죽기 시작했다. 용기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내기 위해 강에 갔다가 눈물을 철철 흘리며 도망쳐 나왔다. 그들은 마치 강이 지옥의 강이 된 것만 같다고 말했었다.
삼 일 밤낮 붉은 물이 흐르던 강물은 황제가 보낸 신관과 마법사들이 정화의 의식을 다시 삼 일 밤낮으로 펼치고 나서야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본래의 색을 되찾아 투명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고서야 사람들은 안심할 수 있었고, 열흘 전 황제의 이름으로 붙은 방을 기억했다.
“폐하께서 미리 이변을 알아채고 경고한 것이라며 신의 사자라며 칭송이 자자했지요.”
“…….”
“전 형님하고 싸워서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죠.”
“……싸운 거 말고는 정확해.”
레온이 신의 사자라면 그 신은 재앙의 신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재앙을 불러오는 신은 자신이 되고 말이다. 라엘은 멍하니 빈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부단장에게 눈짓했다. 그는 찡그린 표정을 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기왕 따라 주는 김에 따라 주는 게 그렇게 싫어? 차별하는 거야, 지금?”
“차별이 아니라 그냥 단장한테 따라 주기 싫은 거구요.”
“거참, 참으로 이해가 쏙쏙 되는 답입니다아.”
“그러니 닥치고 드십쇼.”
“오오냐.”
이리 말하면서도 챙겨 주긴 챙겨 준다. 사실 부단장은 며칠 고민하느라 얼굴에 근심 걱정을 달고 온 라엘이 유학을 갔다가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한 조카처럼 보여서 차마 더 구박을 못 하고 있을 뿐이었다. 며칠 고민이 많았던 탓인지 조금 살이 빠졌는데 그것이 눈에 바로 보인 것이다.
“로렌은, 잘 지내고 있어?”
“당연하지요. 폐하께서 로윈을 워낙 잘 챙겨 주셔야 말이죠. 매번 오는 항의 서한을 태우느라 성이 아주 뜨끈뜨끈합니다.”
“으음.”
“주지 말라는 게 아니라 난방비 걱정 없게 더 달라는 뜻이에요.”
평범의 살짝 아래를 맴돌던 작고 소박한 왕국이었던 로윈은 다니엘과 로렌이라는 왕자가 태어난 후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다니엘은 살아 있는 동안 로윈의 내부 구조를 거의 뜯어고쳤고 로렌은 왕이 되면서 그것을 보완하고 외교에 더욱 힘써 제국에서 많은 이득을 보았다. 라엘은 아무 이유 없이 퍼주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로렌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니엘은 마지막까지 그를 걱정했지만 로렌은 그의 생각보다 더 왕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로렌은 다니엘과는 다른 방식으로 로윈을 강하게 만들었다.
“형님이야말로, 다니엘 형님을 만나러 온 건 그때 이후 처음이죠?”
로렌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직도 당신 탓이라고 느껴요?”
훅 치고 들어오는 것은 다니엘이랑 쏙 빼닮았네.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모든 것을 잊고 새로 시작하겠다고 결심했다. 다니엘이 말한 대로 자신은 로윈을 지켰고 로윈의 왕좌를 로렌에게 무사히 건네주었다. 다니엘의 죽음은 사고라기보단 예정에 가까웠다. 그런 그의 운명이 레온과 좋지 않은 방향으로 엮였을 뿐이라고 다니엘은 그 과정에서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라엘은 자신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를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되지 않았던 것 같다. 분명히 행복한 일상이지만 그 한구석에 그림자처럼 드리운 무언가를 라엘은 지금까지 애써 외면해 왔다. 잊어 내면 사라질 것이라고 지금의 행복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흔적마저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대로 된 이름을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것의 이름을 깨달은 순간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행복한 일상 한구석에 늘 웅크리고 있던 것의 이름은 명확하다.
“죄책감이군요?”
로렌이 거침없이 말했다. 라엘은 부정하지도 못하고 그를 마주 보았다. 음, 역시. 다니엘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어.
“어쩔 수 없더라고.”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지금의 시간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려 한들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과거에 상처받았던 기억도 사라지지 않는다.
“난 왕자님이, 다니엘의 죽음을 지킨 사람이니까.”
그것이 문제였다. 사고처럼 떨어진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지지대가 되어 준 사람. 삶의 중심이 되어 준 사람이 제 눈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의 이면에 누가 관여되어 있는지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절망은…….
로렌이 말했다.
“살바도르 후작, 젠디야 후작, 와든 백작. 이가르 백작.”
“…….”
“다니엘 형님의 죽음은 그들 때문이에요. 알고 계시잖아요?”
“……하지만.”
그 뒤에 레온이 있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로윈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그들을 자극했고 분명 그의 촉발이 이후의 모든 일을 불러온 것이다. 하지만 로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폐하가 아니더라도 결국은 일어났을 일입니다.”
“날 위로하려고…….”
“위로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단호한 로렌의 표정에 라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지금까지 본 어떤 표정보다 확신에 찬 표정으로 라엘을 마주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선왕은, 아버지는 좋은 왕은 되지 못했어요. 좋은 사람이기는 했지만 왕은 평범한 좋은 사람과는 달라야 하니까요.”
“아아…….”
“그래서 다니엘 형님이 나선 것이고, 그것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이었어요. 그리고, 형님의 방심도 분명히 그곳에 있었고요.”
내부의 소요는 짐작했다. 그러나 다니엘이 간과한 것은 자신이 로윈에 가진 애정만큼 그들도 로윈에 애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다니엘의 일에 사사건건 참견하고 뒤로 꿍꿍이가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자신과 힘 싸움하거나 몰아내려 할망정 로윈 그 자체를 흔들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기가 당겨진 것인지 혹은 느려진 것인지 모르겠어요. 뭐,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확실한 건 폐하 이전에도 로윈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이미 안고 있었어요. 폐하는 불씨가 어디 있다고 알려 주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전 다니엘 형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그들이라고 생각하고요.”
로렌의 말에 라엘은 입술을 벌린 채로 채 다물지 못했다. 로렌이 이리도 확신하며 이 주제에 대해 말할 줄은 몰랐다. 라엘이 제게 눈을 떼지 못하자 로렌이 미소 지었다.
“어때요, 형님? 전 이렇게 생각하는데.”
“……대단해.”
로렌은 다니엘이, 라엘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다. 그저 강함을 내보일 필요가 없었기에 그것이 보이지 않았던 것뿐. 몇 년 동안 아직도 그 안에서 헤매는 라엘과 다르게 로렌은 이미 그곳을 빠져나왔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라엘은 어쩐지 긴장이 풀리는 기분에 툭 내뱉었다.
“……난 네가 날 욕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로윈으로 향하는 동안 막연히 생각해 왔던 고민이 그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단어가 문장이 되지 못했던 마음이었기에 스스로의 생각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라엘은 행복해진 자신을 비난해 줄 사람을, 그 비난이 정당한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군요.”
“응, 아마도.”
아, 신기하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이 로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 툭툭 튀어나온다. 저도 몰랐던 제 마음을 로렌은 너무나도 손쉽게 찾아내어 윤곽을 손질해 준다. 자신은 묻혀 있던 마음을 그저 제대로 바라보기만 하면 될 정도로.
“내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저도 모르게 늘 해 왔던 질문은 그것이었다. 너무나도 꼬여 버린 길이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사랑했더라면 지금처럼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자신이 해야 했던 일은 모두 마쳤다. 어찌 되었든 꼬여 있던 상황도 정리하여 나쁘지 않게 끝냈다. 하지만 역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주체가 가장 소중한 존재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관여하였다는 것을 자신은 분명 알고 있다. 실수였다는 것을 안다. 그가 그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도. 하지만 그가 만든 파문의 끝에서 일어난 일을 자신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조차. 검을 겨눈 이는 분명 달랐으니까. 그래, 이런 모호함이 모든 문제를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하게 만들었기에 지금까지 왔을지도 모르겠다.
방은 정적에 휩싸였다. 라엘은 손끝으로 잔을 건드렸다. 익숙한 잔이다. 이 방도 익숙하니까. 로렌은 다니엘의 집무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고, 이 찻잔은 다니엘이 제일 좋아하던 것이다. 라엘을 위해 준비한 다과는 다니엘이 가장 좋아하던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입맛은 대부분 다니엘의 것에 맞춰져 있으니까. 그것이 마치 제게 말하는 것 같다.
넌 잊어서는 안 돼.
라고. 라엘의 생활은 모든 것이 다니엘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왕자처럼 걷는 법은 다니엘이 알려 주었다. 자신의 글씨체는 다니엘의 것과 꼭 같다. 음식의 취향은 대부분 다니엘의 것과 다르지 않았고 물건을 고를 때의 기준조차 다니엘에게서 배웠다. 목소리도, 거울을 보며 바라보는 얼굴마저도. 온몸이, 세상이 자신은 다니엘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니엘을 잊어요, 라엘.”
로렌의 목소리에 라엘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럴 리 없겠지만 로렌은 꼭 자신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라엘은 놀라 차마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니엘이 가장 사랑한 가족에게서 그를 잊으라는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로렌은 곁에 서 있는 부단장과 눈을 마주친 뒤 다시 라엘과 시선을 맞췄다.
“저도 참 오래 생각했어요.”
다니엘의 죽음은 그를 사랑했던 많은 사람에게 상흔을 남겼다. 그의 죽음의 형태가 비극적이었기에 더욱. 그것을 견뎌 내는 과정은 라엘 뿐만 아니라 부단장에게도 있어야 했다. 그가 아직까지 로렌의 곁에 머무는 이유는 제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이 로렌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다니엘 형님은,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고 말이에요.”
로렌은 찻잔의 손잡이를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다. 다니엘의 잔을 가져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죽음의 순간에 외롭지는 않았을까.”
“……로렌.”
“그 차가운 통로 안에서. 혹 죽음 이후가 있다면, 관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는 말이 사실이면 어떡하지? 그렇다면 그곳에서 죽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우리를 기다려야 했을 텐데…….”
“…….”
“하지만 이건 결국 모두 제 생각이고 상상일 뿐이에요.”
로렌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잠시 후 다시 로렌의 입술이 열렸다.
“그래서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어요. 전 죽어 가는 순간 형님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평소의 형님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을지는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부단장의 손을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뭔가 삼자대면하는 것 같은 자리가 되었다.
“형님이 남겨 준 것 덕분에 알 수 있었어요. 아마 그는 죽음의 순간 로윈과 저를 가장 걱정했을 거라고요.”
라엘과 부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언제나 늘 가족을, 나라를 사랑해 왔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해 왔다. 라엘은 마지막 순간에 다니엘에게서 로윈과 로렌의 안전을 부탁받았다.
“그래서 당신들이 있어 줬잖아요. 다니엘이 가장 믿는 사람이니까.”
로렌이 말했다.
“전 적어도 다니엘 형님이 자신의 죽음 뒤 소중한 것들을 지킬 방법이 없어서 슬퍼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당신들이 있었으니까. 당신이 날 지켜 줄 거니까.”
로렌의 손이 라엘의 손을 감쌌다. 그는 무척 따스한 눈빛으로 라엘을 마주했다.
“당신은 나를 지켰고 로윈을 지켰어요. 그것으로 이미 충분해.”
“아…….”
눈앞에 보이는 로렌의 얼굴이 흐려진다. 흐려졌다가 선명해졌다가 다시 흐려지고 선명해지는 것을 반복한다. 잠시 뒤 부단장이 손수건을 건넬 때에야 라엘은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갇혀 있던 눈물이 출구를 찾아 끝없이 솟구쳐 올라 아래로 떨어진다.
“미안……. 로렌…… 왕자님……. 난 다니엘을…….”
지키지 못했다. 그렇게도 빛나는 사람을. 자신의 태양을 지키지 못하고 그것이 스러져 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했지만 그의 죽음은 망막에 새겨져 사라지지 않는다. 레온을 받아들이고 그의 곁에 머물면서도 여전히 한구석에 남아 있는 응어리가 있었다. 사실 레온의 일은 어쨌든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제 곁에 있는 것이 누구였더라도 감정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없는데 감히 내가 행복할 수 있어?
생각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심장에 박혔다. 숨을 쉬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물든다. 아아. 깨달았다. 처음부터 용서하지 못했던 대상은 레온도, 그 귀족들도 아니었다. 라엘, 자신이었다.
“괜찮아요. 라엘 형님.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요.”
처음으로 용서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사랑했던 가족의 입을 통해. 그리고 그것이 미안했다. 로렌은 다니엘의 가족이니까. 그 가족에게 이런 슬픔을 다시 꺼내어 들쑤시게 만든 것 같아서. 그러나 로렌은 그마저도 눈치챈 것처럼 자신을 보았다. 너무나도 신기하게도. 그의 눈을 보자 눈물이 서서히 멎기 시작했다.
“분명 그 순간 다니엘 형님이 지키려고 했던 것은 로윈이고 저였죠.”
로렌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팔을 벌렸다.
“보아요. 전 살아남아 로윈의 왕이 되었고 로윈은 형님이 바란 미래처럼 힘을 키워 가고 있어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로렌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 형님의 병에 대해서 들었어요. 라엘 형님도 알고 있죠?”
“……후에.”
“형님의 죽음은…… 병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죽어 버렸을 운명이기 때문에 죽은 것이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 걸 알죠? 많은 죽음의 형태 중 다니엘 형님의 죽음은 제게 충분한 준비도 애도도 갖출 수 없도록 했던 것이라 슬펐어요. 슬펐지요.”
로렌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죽은 다니엘 형님이 제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건 라엘 형님, 당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해요.”
라엘은 로렌의 눈을 마주 보았다. 다니엘의 눈을 꼭 닮은 그의 눈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본다.
“전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을 알아요. 그것을 제가 알아주기로 했어요. 그것은 형님의 유산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하는 모든 것이 그의 생각과 같은 것은 아니에요. 전 그를 알아주었을 뿐이지 그의 삶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제게 말을 거는 것은 다니엘이 아니다. 로렌이다.
“전 제 삶을 살고 있어요. 다니엘의 동생 로렌이 아니라 전 로렌이니까요. 로윈의 왕 로렌. 그게 제가 이름 지은 저예요.”
로렌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제 그림자가 아니에요, 라엘.”
울컥.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림자는 본체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어. 처음부터 당신도 사람이었어요. 당신의 존재는 다니엘의 파생이 아니라 그 자체예요.”
로렌은, 그는 자신이 다니엘의 어떤 존재로서 존재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참으로 신기했다.
“다니엘 형님의 죽음은 슬프지만, 그는 이미 죽었어요. 라엘, 벗어나요. 난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다니엘이 죽었다는 말은 늘 그렇게 슬펐는데……. 어째서 로렌이 이 순간 말하는 다니엘의 죽음은 이리도 당연한 것처럼 느껴질까? 그리 받아들여질까?
“당신의 삶을 살아요.”
자신이 바라던 것은, 정말로 바라던 것은 누군가에게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는 것이었다. 정말로, 이제는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라엘 형님, 난 정말로 당신을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로렌…….”
“핏줄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다니엘 형님과 당신이 다르지 않아요.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켜 주었던 형이 둘이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줄 알아요?”
로렌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잘생기고 멋있고 현명하고 강하고, 존재 자체가 태양처럼 빛나는 형님이 또 있을 줄 몰랐어. 지금은 몰랐던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죽을 것 같아.”
눈이 약간 맛이 간 것 같은데? 라엘은 깜짝 놀라 부단장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이거, 진심이야? 부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증 브라더 콤플렉스입니다. 아, 맞아. 그랬지……. 다니엘의 뒤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따라다니고 존경합니다라는 포스를 뿜었던 로렌을 순간 잊어버렸다. 그때 로렌의 표정이 어마어마하게 구겨졌다.
“뭐, 제국의 황비가 된 것은 상상도 못 한 일이긴 했지만요. 어차피 사랑이라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거고…….”
“미안…….”
다니엘의 죽음에 관여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이 가장 괴로웠다. 그가 어느 정도로 관여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가 그것에 사과하고 어떻게든 보상하고 싶어 로윈에 최대한의 혜택을 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바란 것이 아니라 그것은 레온의 사죄이고 다이엘에 대한 애도였다. 그렇기에 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라엘의 표정을 본 로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었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아, 그거 아니에요. 그건 다니엘 형님이랑은 상관없고.”
“……어?”
“폐하한테는 형님이 너무 아까워서…… 짜증 나서 그래.”
그러니까 그것처럼 보이는데. 이 도둑고양이!
로렌이 투덜거렸다. 음. 이건 확실히 알겠다. 진심이다. 한 톨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심인 것이다. 그 생각이 투명하게 다 보인다. 출신국 크기가 조금 차이 날 뿐이지 우리 형님들은 잘생기고 머리도 좋고 못 하는 것이 없고 세상에 둘도 없이, 아니 둘은 있던 잘난 사람인데! 감히! 어디서 굴러먹은 개뼈따귀 같은 황제가 나타나서 채 가?! 라는 느낌이었다.
“흐음.”
“로, 로렌?”
“아니, 뭐. 생각해 보니 어쩔 수 없긴 하네. 더 나은 조건을 찾기는 좀 어려울 것 같으니…… 그나마 다른 사람보다는 조금 낫지.”
제국의 황제를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으로 여기는 것은 분명 로렌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로렌이 정말정말정말 진심으로 라엘이 레온에게는 엄청나게 아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분명히 알겠다. 로렌은 정말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 잘난 형을 이렇게 뺏긴 게 너무 억울해서 미칠 것 같지만.”
이거 진심이다.
“그 위자료로 이것저것 적당히 챙기고 있으니 걱정 마요. 물론 이걸로 충분하다는 건 아니지만 뭐, 내 나라에는 도움이 되니까 내가 좀 참지, 뭐.”
“으하하!”
“푸흡!”
결국 두 사람은 웃어 버렸다. 엄청나게 진지하게 로렌의 이야기를 듣던 라엘과 부단장은 이상한 방향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 같은데 뭐가 이상한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형을 끔찍하게 좋아하는 동생이 투덜거리는 그 모습으로 돌아온 로렌이 말했다.
“오래오래 행복해요. 얄미워 죽겠는데 아무도 못 괴롭힐 황제 폐하를 꼬박꼬박 괴롭혀 줄 사람은 라엘 형님밖에 없어.”
“알았어. 꼭 그렇게 할게.”
“그러니까 전서구 한 마리만 더 보내죠.”
갑자기 종이를 내미는 로렌을 보며 라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서구 한 마리 더 보내자니? 라엘은 조금 전 부단장이 창밖으로 전서구를 날렸던 것을 기억했다. 설마 자신과 관련 있는 거였나? 라엘의 의문은 로렌이 시원하게 풀어 줬다.
“라엘 형님이 왔는데 폐하한테 숨길 깜냥은 못 되잖아요, 제가.”
“열흘 전부터 성문 앞 초소에 황제 폐하가 와 계시거든요.”
부단장의 말에 라엘은 멍하니 그들을 보았다.
“거기서 계속 있던 거야?”
“네. 제가 어떻게 황제 폐하께 오라 가라 할 수 있겠어요?”
오라 가라 못해서 성 밖에 열흘을 세워 둔 건가? 그 생각을 한 로렌이나 그걸 말리지도 않은 부단장이나 똑같다. 음. 역시 다니엘이 가장 신뢰한 사람과 그 동생답다.
“뭐, 소식 정도는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지, 뭐.”
“좀 더 놀고 간다고 보내요.”
여기까지 왔는데 저랑 놀고 갈 거죠? 로렌의 반짝거리는 눈을 보며 라엘은 웃었다. 어쩜 이렇게 천진난만한 어린 동생 같은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 로렌도 이미 스물이 한참 넘은 청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렸을 때부터 봐 와서인지 도무지 어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라엘은 로렌이 건네준 종이에 그가 말한 대로 좀 더 쉬어 간다고 적다가 펜을 떼었다. 그리고 로렌에게 물었다. 공식적인 것이 아닌 분명 사적인 메시지가 있을 텐데?
“레온이 뭐라던?”
“내가 다 잘못했다고 전해 달라던데요?”
“그래?”
그렇다면 그것에 답을 해 줘야지. 라엘은 새로운 종이에 한 문장을 썼다. 그것을 본 로렌은 깔깔대며 웃으며 부단장에게 넘겼다. 부단장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잉크를 잘 말려 비둘기 다리에 매달린 통에 편지를 넣어 창밖으로 날려 보냈다.
이 메시지를 받은 레온의 표정이……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이래저래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건만 하늘은 참으로 맑고 푸르다. 황제도 저 하늘을 보고 있겠지. ……가엾은 사람. 그 순간 부단장은 무려 제국의 황제에게 대단한 형제에게 걸려든 희생자로서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부단장은 마음으로만 레온을 응원했다. 우리 존재…… 파이팅!
* * *
“라엘 님께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막사 안으로 거의 굴러 들어오다시피 한 부관에게 레온은 허겁지겁 달려가 그의 손에 들린 편지를 낚아챘다. 라엘은 로윈에 오지 않았다는 답을 들었음에도 레온은 지난 열흘 동안 86통의 ‘내가 잘못했어! 제발 돌아와!’라는 편지를 전서구로 보냈고 그때마다 로렌은 ‘형님 없습니다’, ‘안 왔다니까요?’, ‘안 왔다고!’라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그리고 조금 전 드디어 라엘이 도착했다는 로렌의 편지를 읽고 87통째의 편지를 쓰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도착한 라엘의 편지는 신이 보낸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레온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편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뭘 잘못했는지는 알아요?
레온의 몸이 굳었다. 머리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라엘이 기분 나빠진 상황을 생각하고 무엇 때문에 화가 났을지 머리는 맹렬하게 고민했다. 단 하나 문제라면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대체 뭐인지 모르겠다는 것!
“도움이…… 필요하다!”
드디어 황비의 답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환하게 웃으며 막사로 들어온 신하들이-아싸! 집에 간다!- 절박한 레온의 표정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표정이 라엘의 편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 내용을 물어보았다.
“……뭘 잘못했는지는 아느냐는데?”
“…….”
막사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아, 이거 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잘못 대답하면 정말로 큰일 나는 질문이라는 것은 아주 확실히 안다. 막사 안의 모든 사람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답을 내기 어려운 질문이다.
다음 날 레온은 엄청난 두께의 편지를 라엘에게 보냈다. 논문을 방불케 하는 두께였기에 전서구를 이용할 수는 없었고, 대신 사람을 보냈다. 그는 세 시간 뒤 라엘의 답장을 가지고 왔다. 한 장이었다. 라엘이 그 자리에서 레온의 편지를 모두 읽고 보낸 답이었다. 레온은 –여러 의미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갈무리하며 편지를 펼쳤다.
―당신, 이런 것도 했어요?
레온의 표정이 무척 슬프게 변했다. 라엘의 답신을 보지 못한 신하들이었지만 그의 표정만을 보고도 어렵지 않게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완전히 망했다!
* * *
라엘은 보름 동안 성에서 로렌과 노닥거렸다. 가끔 바깥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지만 성 밖 초소에 있는 레온은 라엘이 밖에 나왔는지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하기야 알았다 하더라도 소풍 가는 라엘의 앞에 무릎 꿇고 비느라 가는 길을 방해만 했을 테니 부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 가 볼게.”
“너무 아쉬워요.”
“다음에 또 놀러 올게.”
“그땐 혼자 와요.”
“알았어.”
애틋한 형제의 헤어짐을 보며 부단장은 라엘이 머무르는 동안 수백 번을 미친 듯이 오가던 전서구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온의 반성문은 이제 문학이라고 불러도 될 지경이었다.
“바래다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들렀다 갈 곳이 있거든.”
“그래요. 그럼 배웅은 하지 않을게요. 잘 가요, 형님.”
“커, 윽! 단장, 잘 가십쇼.”
저도 모르게 라엘의 뒤를 따라가려는 부단장의 뒷덜미를 붙잡으며 로렌이 손을 흔들었다. 부단장도 얼결에 같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라엘은 그들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라엘은 성 바깥이 아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긴 복도를 따라 깊은 곳으로 걸어가자 인적이 드물어져 더는 모자를 깊이 써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아직도 익숙한 길을 따라 걸어가던 라엘은 곧 자신이 찾던 장소에 도착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장식되어 있을 뿐 특징 없는 장식품이 늘어져 있는 장소였다. 라엘은 그중 하나의 장식품을 조작하여 비밀통로 문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야광구를 꺼내 어두운 복도를 비추었다. 빛에 의지하며 복잡한 길을 기억 속에 남은 흔적을 따라 걸어갔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길이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길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나서야 라엘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니엘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벽에 남은 이름을 쓰다듬으며 라엘은 말했다.
“제가 너무 늦었군요.”
여전히 선명하게 남은 기억이다. 생명이 빠져나가던 새하얀 얼굴. 금빛과 은빛으로 장식된 옷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제 그의 시체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고 그의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날의 기억만은 이곳에 여전히 머물고 있었다.
“인사하려고 왔어요.”
라엘은 이전에 다니엘이 누워 있던 자리에 꽃 한 송이를 내려놓았다. 로윈에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그의 관에 흰 꽃다발을 올렸지만, 이곳도 한 송이의 꽃 정도는 허락될 공간이 아닌가?
충동적으로 황궁을 빠져나온 것이지만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로윈으로 온 것인지, 왜 다이엘의 마지막 흔적을 좇은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벽에 새겨진 이름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당신을 잊지는 않을 거예요.”
로렌은 다니엘을 잊고 행복해지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말을 하는 로렌마저도 다니엘을 잊지 못하지 않은가? 지금 이 자리에 없다 하여 그가 살아온 삶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듯이 그는 여전히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다만 이제 그를 그날의 이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젠 당신을 생각해도 괴롭지 않을 내가 되려고 해요.”
라엘은 단검으로 벽에 새겨진 글씨를 하나씩 지우기 시작했다. 벽에 새긴 것은 다니엘의 이름이었지만 그것에 담은 것은 제 마음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먼 훗날 누군가가 그를 발견하여 돌려보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고, 그가 부탁한 것을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맹세를 담았다.
“당신은 날 대역으로 만들었지만, 그래도 당신의 삶을 대신 살라고 말하지 않았었죠.”
한때는 그의 삶을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지만 사실은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벽에 새겨진 글자가 희미해진다.
“마지막에 내 삶을 살아가라고 말한 것은 당신이었는데, 내가 잊어버렸어요.”
그는 자신에게 부탁은 했다. 소중한 것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그 순간에는 그것이 가장 걱정되었으니까. 하지만 이후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니엘의 몫이 아니었기에. 그의 삶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알았기에.
눈물은 더 흐르지 않았다. 글자를 하나하나 지워 가며 라엘은 사라지는 글자마저도 눈에 담았다. 이제는 이곳에서 떠나야 하는 이름이니까.
“그러니까…….”
로윈에 온 것은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벽에 새긴 그 흔적은, 제 마음에 새겼던 결심이었으니까. 놓아 버릴 때를 놓쳐 버리고 너무 오랫동안 새겨진 그 이름을 이제는 편하게 놓아줄 때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젠 안녕, 다니엘.”
벽에 새긴 이름을 지운 라엘은 뒤돌아 드디어 통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두 사람의 재회는 로윈 성문이 아닌 황궁에서 이뤄졌다.
“라엘!”
라엘을 보자마자 레온은 그의 앞으로 미친 듯한 속도로 달려가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치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는 듯한 그 자세에 라엘은 웃어 버렸다.
“다녀왔어요, 레온?”
“화, 화 안 났어?”
“제가 언제 화가 났다고.”
쌍욕을 내뱉으며 발코니에서 뛰어내려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 나갔던 라엘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레온은 그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에 눈에 띄게 안심했다. 먼저 황궁에 돌아와 있던 라엘은 반갑게 레온을 맞이하며 그를 끌어안아 주었다. 로윈의 성문 앞에서 자신이 잘못한 일에 대한 논문을 써야 했던 레온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다행이다!
로렌은 라엘이 비밀통로로 먼저 돌아간 뒤에도 일주일 후에야 레온에게 그가 돌아갔다는 것을 통보했다. 일주일 동안 편지에 어떤 반응도 없는 라엘 때문에 마음 졸이던 레온은 미친 듯한 속도로 제국으로 돌아갔다. 돌아가자마자 무릎부터 꿇으라는 로렌의 조언에 레온은 감사 서신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황제를 바닥에 무릎 꿇게 하는 사람은 라엘 형님밖에 없을 거야.”
“무릎 꿇으라고 권하는 건 전하밖에 없을 겁니다.”
“역시 형님은 완벽해!”
라는 대화가 오간 것을 레온이 알 리가 없다. 형님 뽕에 오른 로렌이 그것을 굳이 레온에게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의 심각한 브라더 콤플렉스를 사방에 알리기에는 부단장은 지극히 상식인이었으니까.
“그냥 바람 좀 쐬고 오겠다니까 힘들게 왜 따라오고 그래요.”
“혼자 갔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럴 리 없다니까.”
“난 늘 라엘이 걱정돼.”
라엘의 손바닥에 뺨을 비비며 레온이 말했다. 물론 그 말에는 라엘이 훌륭한 검사며 탈출 수완도 뛰어나고 용병으로 산 깜냥도 있어서 어디서 위험해지기는커녕 남을 위험하게 하거나 등쳐 먹을 가능성을 완전히 생각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의 눈에 대체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 것인지 라엘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래도 시간을 내어 로윈에 다녀온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복잡했던 머리가 정리된 기분이었다. 지금껏 피해 왔던 문제를 이제야 드디어 마주할 수 있었으니까.
“이젠 걱정 안 시킬게요.”
레온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라엘이 말했다.
“저도 잘 다녀왔어요, 레온.”
레온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답했다.
“어서 와, 라엘.”
이후에도 많은 일은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선택한 것에는 후회하지는 말아야지. 바닥에 무릎을 꿇었던 레온을 일으켜 허리를 감아 안으며 라엘이 말했다.
“김치볶음밥 만들어 줄게요.”
“기대할게.”
이쯤 되면 김치가 익기도 익었겠지. 이렇게 큰 소동을 벌였으니 레온이 원하는 것 하나 정도는 해 줘도 좋겠지.
어쩐지 김치볶음밥을 만드는 것이 너무 멀리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뭐, 상관없겠지.
* * *
이러나저러나 김치는 기어코 완성됐다. 지난 김장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김치통을 여는 라엘을 보았다. 라엘은 김치통을 열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잘됐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다양한 재료로 만들었던 김치 중 사람이 먹을 수 있을 만한 것만 남기고 그것들을 숙성시키라고 집을 나가기 전에 라엘은 말했었다. 김치볶음밥은 익은 김치로 만드는 것이 최고니까-물론 김치가 좀 익으면 끔찍한 맛이 좀 완화되지 않을까 하는 노림수도 있었다-. 그리고 가출을 끝내고 돌아오니 뜻밖에 정말 김치다운 김치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재료로 이 정도로 멀쩡한 김치가 나오다니. 역시 인생은 신비롭다.
통 안에 다소곳이 들어 있는 김치는 거의 감동 수준이었다. 심지어 뚜껑을 열었는데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김장이라는 이름의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딛고 모험을 마친 기분이 들었다. 엄마가 김장할 때 좀 더 많이 도왔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일순 스쳐 갔다. 김치는 그만큼 맛있진 않겠지만 어쩐지 뿌듯하다. 라엘이 감동에 물든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고생했어.”
눈시울이 절로 붉어진다. 이번은 빌어먹을 양념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진심으로 감동했을 뿐이다. 이런 어마어마하고도 쓸데없는 짓에 동원된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울컥 솟아올랐다. 지금 라엘은 누가 툭 건드리면 눈물을 줄줄 흘릴 그런 상태였다. 세상에…… 김치볶음밥 때문에…… 이렇게까지……! 왈칵! 가슴까지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괜찮습니다.”
그리 답하는 수석 요리사의 목소리도 물기에 젖어 있었다. 그는 온몸으로 ‘폐하와 라엘 님의 금슬을 위해서라면 이 한-여러-몸 정도 희생되는 것은 별일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시 감동이 왈칵 치솟아 올랐다.
“이런…… 멋진 녀석들……!”
이 순간 정원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다. 김장이 끝났어!
김치볶음밥을 만드는 일은 앞의 어마어마한 과정에 비하면 시시할 정도로 빠르게 끝났다. 이미 김장의 공포를 충분하다 못해 과도하게 겪은 요리사들은 라엘이 괜찮다고 말하는데도 곁을 지켰다. 황비인 데다 남자인 라엘이 직접 요리하는 것이 불안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부엌은 정원만큼 넓지 않아서 모든 사람이 들어오지는 못했다. 수석 요리사와 보조 두 명, 그리고 수석 마법사와 황의와 수석 연금술사가 자리를 지키며 김치볶음밥의 조리 과정을 지켜보기로 했다. 쌀과 비슷한 곡식은 이미 진작 알고 있었기에 밥 준비는 어렵지 않았다. 앞의 엄청난 재료 조달을 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어쩌면 그 난리를 피우지 않아도 잘 찾아보면 황성 안에 재료가 다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곧 지워 버렸다. 밥의 식감은 조금 다르긴 했지만 어차피 볶을 것이고 이제 와서 완벽성을 추구하기에는 라엘은 너무 지쳤다.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증오스러운 김치 한 포기를 도마 위에 올린 뒤 적당한 크기로 썰었다. 서걱서걱 썰리는 느낌은 완전히 푹 익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제법 익은 김치다운 감촉이 남았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김치를 볶기 시작했다. 적당한 색으로 김치가 변하자 미리 썰어 놓은 베이컨을 투척했다. ‘맛없으면 베이컨 맛으로라도 먹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듬뿍 넣었다. 고추장을 만든다고 또 난리를 칠 수는 없었기에 김치 국물을 조금 넣어 적당히 색을 맞췄다. 사람은 적당히 합의를 보며 살아야 한다.
밥을 넣고 볶아 주자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기 시작한다. 충분히 색이 들고 볶아지긴 했지만 역시 고민된다. 결국 라엘은 설탕을 가져오게 해서 김치볶음밥에 뿌렸다. 김치의 신맛은 확실히 설탕이 잡아 주겠지만…… 제발 매운맛을 잠재워 줬으면 하는 헛된 바람을 실어 꿀을 조금 넣었다. 원래 넣을 필요가 없는 재료지만 뭐 어떤가. 이미 김치에도 들어갔는데.
주걱으로 잘 저어 만든 김치볶음밥은 한쪽으로 치워 두고 새로운 팬을 올려 계란프라이를 해냈다. 반숙이 좋을까?
“이게 그 ‘김치볶음밥’입니까?”
“음, 아마도…… 일단은? 김치 쪽에서 문제가 많은 것 같지만…… 일단 내가 만들려던 건 그거 맞긴 해. 생긴 건…… 비슷하네.”
“그렇군요.”
이야기를 나누며 김치볶음밥을 두 그릇으로 나누고 반숙으로 익은 계란프라이를 올려 주자 제법 그럴듯한 김치볶음밥이 만들어졌다. 고소한 향이 나는 식용 기름을 위에 뿌리고 파슬리 비슷한 가루를 계란위에 뿌리자 비주얼도 제법이었다. 주변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오오- 훌륭합니다! 이런 음식은 처음 봤습니다!”
그야 무슨 테러라도 당한 것 같은 요리를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겠지.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만 라엘은 용병단에서 지낼 때는 밥을 대충 볶아 이런저런 야채와 함께 넣은 것을 먹은 적 있었기에 별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서민 음식이 고급 재료로 만들어진 지옥의 붉은색이 되었을 뿐이 아닌가.
“나도 이렇게 이걸 만들지는 몰랐지. 자, 끝났어.”
“끝입니까?”
“어.”
김장의 충격을 기억하며 많은 사람이 긴장하며 대기한 것치고는 허무하게 김치볶음밥은 완성되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하며 라엘은 손을 씻고 주방을 나섰다. 사실 김치가 뜨거운 팬에 올려지자마자 폭발했다고 해도 라엘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라엘이 부엌을 나서자 그 뒤에서 요리사들이 부산스럽게 함께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김치볶음밥이 조금 식긴 하겠지만 차라리 식은 편이 매운맛도 덜할 거고 영 맛이 없으면 다른 음식을 먹으면 되니 그편이 훨씬 낫다. 식당으로 가자 기대 반, 걱정 반의 표정으로 레온이 식탁 앞에 미리 앉아 있었다. 그는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라엘을 보고 놀랐다.
“벌써 끝났어?”
“응. 다 만들었어요.”
“어디 다친 데는 없지?”
누가 보면 어디서 몬스터라도 잡아 온 줄 알겠다.
“간단한 음식이라니까요. 그냥 김치를 만들 때가 문제였지.”
“후……. 하지만 그렇게 무시무시한 음식인 줄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시작하지 않았을 거야.”
“……무시무시한 음식은 아닌데.”
하지만 김장 과정이 평범하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라엘의 목소리 끄트머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인정하자. 그건 보통의 망금술사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 그때도 설명을 들었겠지만 이후에 다른 원인을 발견했다고 해.”
아마 그 고추 중 하나겠지. 말려서 가루 낸 뒤 물에 섞어서 그 난리가 났다고 했었다.
“원래 물과 섞여도 문제가 일어나는데 그중에서 비슷한 효과가 있는 약초가 또 있었다고 하는군.”
“……재앙이었네요.”
“마법사와 연금술사들은 신난 것 같던데? 그걸 기반으로 연구를 진행해서 신무기를 만들기로 했어.”
“……그것참 다행이네요. 그런데 설마 라엘탄 같은 이름을 붙이는 건 아니겠죠?”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까?”
“절대로 사양합니다.”
자신이 만든 음식이 생화학 무기 수준이라고 하는 것이 영 찝찝하다.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요리사들이 음식을 하나둘 날라 식탁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보자 슬슬 배가 고파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마어마한 스파이가 각각 하나씩, 두 개가 끼어 있었다.
“이거야?”
“……네.”
엄청나게 아름답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보니 순간 부끄러워졌다. 이 음식 사이에 다 식어 빠진 김치볶음밥이라니.
“굉장히 맛있어 보여!”
그게? 레온의 접시를 본 라엘도 깜짝 놀랐다. 아니, 진짜 맛있어 보이잖아? 이미 식었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김치볶음밥 위에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잠깐, 이거 마법사 짓이로구나! 이놈의 제국은 엄청난 인재들을 엄청나게 쓸데없는 데에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의 가장 쓸데없는 이용을 보이는 것은 또 나지…….
그래도 음식은 확실히 괜찮았다. 간단하게 밥과 계란을 올려 둔 기억과는 다르게 그 주변에는 무척 먹음직스러운 플레이팅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라엘이 만들어 둔 김치볶음밥의 원형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마치 다른 음식처럼 보일 정도로! 역시 황궁 요리사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에요!”
해맑게 웃는 레온을 보자 그 엄청난 뻘짓들이 오로지 헛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되었다. 그 난장판을 지나쳐 오긴 했지만 내 님이 좋다는데 그럼 쓸데 있는 일이지!
라엘은 흐뭇한 표정으로 김치볶음밥을 먹는 레온을 보았다. 평소 먹던 것보다는 매울 텐데도 그는 밥을 후후 불어 가며 잘 먹고 있었고 한 입 먹을 때마다 맛있다고 칭찬을 했다. 그 정도로 엄청난 맛은 아닐 테지만 기분은 좋았다.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직접 만든 요리를 선물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꼬르륵. 음, 그래도 신체의 허기는 별개다. 하루 종일 시달린 배가 드디어 자신이 허기졌다는 것을 알려 왔다. 라엘도 자신의 몫으로 준비한 김치볶음밥의 뚜껑을 열고-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났다. 마법 한 번 끝내준다- 웃으며 제 앞의 김치볶음밥을 한 입 삼켰다.
“푸학!”
“라엘 님!”
라엘의 입에서 밥알이 세차게 분사됐다. 옆에 기립해 있던 시종이 깜짝 놀라 아래에 그릇을 대 주자마자 라엘은 그 위에 머금었던 밥을 죄다 뱉어 냈다. 그리고 아직도 열심히 김치볶음밥을 먹고 있는 레온의 스푼을 뺏었…… 아니, 뺏으려고 했다. 레온이 재빨리 손을 피해 스푼을 지켜 내지 않았다면 말이다. 게다가 레온은 그 밥을 한 입 머금기까지 했다. 이런, 미친!
“뭘 먹고 있는 거예요, 지금!”
“……라에……ㄹ…이… 만들…어 준…요리…….”
“혀가 마비될 정도야!?”
더듬더듬 말을 잇는 레온의 혀는 뜨거워서 말을 잘 못 한다기보다는 혀가 굳은 것처럼 보았다. 어쩐지 중간부터 말도 없이 조용히 퍼먹는다 싶더니 그의 양쪽 귀와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이제야 발견했다. 어떻게 저 지경에서 얼굴이 멀쩡할 수 있어? 알아채고 나서 보자 그가 온몸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것과 스푼을 쥐고 있는 손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미친 거 아냐!?”
이렇게 매운 걸 왜 저렇게 퍼먹고 있는 거야! 이제 보니 레온 앞의 접시는 이미 반이나 비어 있었다. 라엘은 결국 접시째로 음식을 치워 버렸다.
“그만 먹으라고!”
“……아… 안, 돼… 라엘이…… 처, 처음 만들……어…… 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싶지 않으면 당장 그 스푼 버려!”
그 순간 레온이 휘청거렸고 타이밍 좋게 시종이 그를 부축했다. 다른 한 명은 그의 손에서 스푼을 잽싸게 빼앗아 라엘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물을 가져와, 물! 이러다 폐하가 돌아가시겠어!”
김치볶음밥을 먹다가 황제가 죽어 버렸다. 생각만 해도 어이없고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웃어넘길 일은 아니었다. 지금 라엘의 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닌가? 레온은 땀을 줄줄 흘리며 휘청이고 있었고 그것을 보는 라엘은 그가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안 돼! 적어도 김치볶음밥이 사인이 되게 하지는 말아 줘!”
라엘은 비명처럼 의사와 마법사를 외쳤다!
정말 다행히도 레온은 살아났다. 하마터면 제국의 황제가 황비가 만들어 준 김치볶음밥을 먹고 사망했다고 역사에 기록될 뻔했다. 대낮의 난리도, 김치볶음밥을 먹고 레온의 목숨이 오락가락했던 것은 너무 쪽팔리니 제발 기록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미안해요.”
“뭐가?”
“내가 미리 먹어 보고 확인했어야 했는데.”
물론 훌륭한 망금술사는 자신이 만든 음식의 간 따위는 요리 중간에 보지 않는 법이다. 오로지 감과 느낌만으로 음식을 해 왔던 라엘은 맛이 있으나 없으나 대충 먹는 것에 큰 거부감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 버릇이 엄청난 일을 불러일으켰다.
“아냐, 정말로 맛있었어. 음식이 조금 뜨거웠을 뿐이야.”
해독약을 마시고 신관을 불러 정화 의식까지 치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주제에 말은 다정하다.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레온의 얼굴은 하루 만에 완전히 반쪽이 되어 있었으니까. 안쓰러운 마음에 손으로 아직도 뜨거운 뺨을 쓰다듬자 서늘한 손이 마음에 들었는지 레온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라엘은 속상함을 감추지 못했다.
“바보처럼 왜 그렇게 참고 먹었어요?”
“네가 자주 먹었다던 음식을 나도 먹어 보고 싶었어.”
나도 당신을 알고 싶었으니까. 다정한 말이었지만 라엘은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로 그런 맛 아니니까 기억에서 지워 버려요.”
“……응.”
조금 전에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장난이 아니었다고. 사실 생각해 보면 재료인 김치에서 생화학 무기가 만들어져 나오게 생겼는데 그 부산물인 김치볶음밥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개중에서 먹을 만한 것을 골랐다는 것은 먹고 딱 죽지 않을 정도인 것을 골랐다는 말과 동의어였던 것 같다. 자신의 요리 때문에 잘생긴 얼굴이 아주 핼쑥해지고 희게 질렸다. 안쓰럽고 미안해서 입을 맞추자 레온이 미소 지었다.
“다음에도 만들어 줘.”
그의 말에 기가 막혀 라엘은 웃어 버렸다. 포기를 모른다.
“다음엔 정말로 죽을지도 몰라요.”
“그럴 리 없다니까? 라엘이 만들어 준 것은 뭐라도 맛있을 거야.”
테러급 김치볶음밥도 반 이상을 먹었으니 뭔들 맛이 없을까? 아무리 가리는 음식이 없다 하더라도 사람이 먹을 음식에서 가리지 말아야지. 라엘은 진지하게 다시 요리를 시작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라엘은 이 정도로 음식 솜씨가 나쁘지는 않았고 그냥저냥 평범한 자취생이었다. 그저 이번에는 알 수 없는 의욕이 앞서 결과가 처참해졌을 뿐이다. 정확한 계량법과 조리법이 정해져 있는 요리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요리 배워서 다음에 해 줄게요. 맛없으면 무리해서 먹지 말고요.”
“무리한 거 아니야.”
우기기도 잘 우기지. 하지만 그런 모습이 싫지만은 않다. 이제 슬슬 기운이 도는지 레온이 자리에 앉자 라엘은 자연스럽게 허벅지 위에 앉아 그 품에 안겼다. 잘생긴 얼굴에 뽀뽀를 퍼붓자 핏기가 빠져 서늘했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바로 보인다.
문득 괜찮은 생각이 난 라엘은 레온의 가슴을 밀었다. 그는 별다른 저항도 없이 라엘이 미는 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 정도면 기력도 제법 돌아온 것 같은데. 괜찮을 것 같다. 킥킥 웃으며 라엘이 말했다.
“사죄의 의미로 이번에는 정말로 맛있는 것을 먹여 드릴까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무리하지 마. 라엘도 먹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고 황의가 말했잖아.”
“무서운 음식인 건 인정하네?”
“무섭지만 맛있는 음식이지.”
“고집도. 그래서, 안 먹을 거예요?”
라엘의 질문에 레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난리를 겪고 나서도 그의 답은 하나였다.
“메뉴가 뭔데?”
자신이 주는 것이라면 눈앞에서 음식에 독약을 부어 넣어도 먹을 것이 분명하다. 라엘은 허리를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이며 말했다.
“라엘이라고 말이에요.”
“오.”
“황제만을 위한 특별식인데…… 어때요?”
“배부를 때까지 먹어도 되는 건가?”
“오늘만요.”
“훌륭한 식사 시간이 되겠는데?”
레온은 조금 전까지 환자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글거리는 손놀림으로 라엘의 허리를 더듬었다. 레온의 손을 내버려 둔 채 라엘은 상의를 벗어 침대 아래로 던졌다. 플레이팅은 보기 좋지만 식사에 꼭 필요한 건 아니지. 라엘이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자 레온이 그를 끌어안았다. 아마도 식사는 밤새 계속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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